“혼자보기 미안해서” 조금씩 문 연 청와대 전면개방까지 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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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살림집으로 쓰던 관저.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안충기, 52×76㎝, 종이에 먹펜, 2022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문재인…. 집무실을 청와대 밖으로 옮기려던 역대 대통령들이다. 하지만 모두 거둬들였다. 막상 실행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대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민주화가 진전되며 청와대는 조금씩 개방 폭을 넓혔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는 청와대가 아닌 경무대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 경내 일부를 개방해 1955년 6만여 명이 방문했다. 1957년에는 벚꽃 구경을 하던 임신부가 경내에서 아기를 낳았다. 대통령은 경무대의 첫 글자를 따서 김경숙(金景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는 그때 일을 기억에 담아뒀다. 수소문 끝에 세무공무원이 된 경숙 씨를 30년 만에 다시 만났다. 1988년이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8월에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했다. 12월 30일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다음 해 4월 15일 대통령은 경내로 봄나들이 온 시민들을 만났다. 당시 <경향신문>에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가 이렇다.
“허허! 요즈음은 내 집이 한결 사람 사는 맛이 나는구료.”
십사일 평민대통령 해위(海葦) 선생은 골덴복에 스틱을 짚은 채 청와대를 찾아든 상춘객들과 환담을 하고 있다. 지난날 줄지어 질서정연(?)히 경무대를 구경하던 긴장된 시민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환해진 얼굴로 마음껏 대통령 관저 일대를 구경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백악산 아래 자리 잡은 청와대 전경. 그림에서는 아래쪽 경복궁 담장을 걷어내고 신무문만 남겨놨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이처럼 툭 터서 광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안충기, 76×52㎝, 종이에 먹펜, 2022년
관저를 ‘내 집’이라고 한 표현이 재미있다. 한 달 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으로서 윤보선의 봄날은 짧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초에는 어린이들을 만나 공책과 연필을 나눠주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1967년 4월 22일에는 4만 3000여 명이 방문했다. 대부분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했다. 놀란 청와대는 문을 걸어 잠갔다.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피살됐다. 그 뒤 청와대 주변 도로를 전면 차단하고 인왕산과 북악산도 출입을 금지했다. 청와대는 서울 한복판의 섬이 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12·12쿠데타 뒤 극도로 혼란한 정국에서 경내를 개방할 여유도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말 효자동과 팔판동 일대 통행을 일부 허용했다. 하지만 1983년 10월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 일대는 다시 전면통제로 돌아갔다. 1984년 경내 첫 전통 한옥인 상춘재를 짓고도 준공식조차 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 중 하나가 청와대 개방이다. 취임한 뒤 1988년 3월 1일 충북 음성에서 온 나환자 300여 명 등 959명을 영빈관에서 만났다. 1990년에 관저를, 1991년에는 본관을 새로 지었다. 야권에서도 발목을 잡지 않았다. 새 본관 준공식에는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도 참석했다. 일제강점기부터 62년간 써온 구 본관은 임무를 마감했다.
1993년 2월 25일 정오, 김영삼정부 첫날 청와대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사라졌다. 낮에는 승용차와 관광버스도 검문 없이 다니게 됐다. 인근의 효자로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팔판길은 24시간 내내 화물차를 빼고 모든 차의 통행을 허용했다. 청와대 앞길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기는 1·21사태 뒤 처음이었다. 인왕산도 이때 열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며 단체만 가능하던 관람을 개인과 외국인에게까지 허용했다. 이 해에 관람객이 20만 명을 넘었다. 2001년 11월에는 칠궁도 열었다.
경내에서 나이 가장 많이 먹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녹지원 일대. 경내 천연기념물 나무 6그루 중 5그루가 그림 안에 있다. (안충기, 52×76㎝, 종이에 먹펜, 2022년
2002년 충청권 행정수도 공약을 내세워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서울을 뜨려 했다. 하지만 2004년 헌법재판소는 이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청와대 인근 개방은 속도가 붙었다. 본관과 녹지원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됐다. 2004년 10월 19일에는 경복궁 경회루도 개방했다. 2층에서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로 이때까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2006년 9월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열었다. 다음 해 4월에는 숙정문 쪽 한양도성길을 열었다. 청와대 주변 등산로 개방은 처음이었다. 개방을 하며 노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분수대 앞에 있는 효자동 사랑방을 관광홍보관인 청와대 사랑채로 확대 개편했다. 청와대 앞길을 다니는 시내버스 노선도 처음 생겼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중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간 이뤄진 경내 개방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다음 달인 6월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열었다. 이때부터 검문 없이 밤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2020년 11월 1일에는 북악산 북측 등산로를, 퇴임 직전에는 청와대 바로 뒤인 남측 면까지 열었다. 54년 만에 백악산은 어느 길이나 막힘없이 다니게 됐다. 경내 핵심시설 외에는 모두 개방한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2022년 5월 10일 청와대 문이 활짝 열렸다. 1939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가 들어선 뒤 83년 만이었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처음 만나는 청와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