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율법을 통해 선을 알지만
본성적 악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
(찬송 5장)
2023-2-13, 월
맥락과 의미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는 한 가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바로 그 믿음으로 의인은 생명을 누린다.” (롬 1:17)
1)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1-3장)
2)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해 주십니다. (3-4장)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5-6장)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7장은 특별히 ‘율법을 알면 율법이 가르치는 선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답은 ‘아니다’ 입니다. 내가 율법을 안다고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율법은 내가 죄인인 것과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폭로합니다. 율법은 원래 좋은 것인데 오히려 나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의지하여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님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음(1-6절)
2. 율법은 죄를 선명히 드러내는 선한 것(7-13절)
3. 내 안에 율법의 요구를 거스르는 죄의 성향이 있음(14-24절)
4. 그리스도와 성령님만 의지하여 육신을 죽이고 선한 열매를 맺음(25절)
1.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님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음(1-6절)
1절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법 아는 자들은 율법을 아는 유대인 성도입니다. 2-4절은 하나의 비유로 말합니다. 한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고 합시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그 남편에 매이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됩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정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원래 죄를 남편처럼 모시는 여자와 같았습니다. 죄를 주인으로 모시는 노예였습니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욕심이 우리 안에 계속 일했습니다. 사망을 위해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죄를 짓고 그 결과 죽음과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여기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연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죄악된 나를 함께 죽여버리셨습니다. 죄악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옛 율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주인 노릇 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으로 섬깁니다. 의문(의식적인 문구, 즉 율법의 자구)으로, 율법의 형식적인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없다면 율법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알고 의지적으로 행하려고 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2. 율법은 죄를 선명히 드러내는 선한 것(7-13절)
그러면 “율법이 죄인가?”(7절)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은 ‘나’에게 죄를 깨닫게 합니다. 9-25절의 ‘나’는 바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율법은 안경과 같습니다. 책상에 때가 끼어 있어도, 눈이 나쁜 사람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안경을 끼면 자세히 보입니다. 안경 때문에 때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율법이라는 안경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배웁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때가 잘 나타납니다.
문제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사람도 죄를 이길 힘은 없다는 것입니다.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우고, 탐심이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탐을 내고 있습니다. 안경 때문에 책상 위의 먼지를 잘 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먼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탐심이 움직이는 것이 더 잘 보입니다. 그렇다고 탐심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9절은 말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는 내가 죄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죄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율법)을 배울수록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선악의 기준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래도 선하다”는 생각을 없앱니다.
결국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율법을 배우면서 나의 죄가 무엇인가를 더 자세히 배웁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더 커집니다. 자신이 죄와 죽음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2절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죄를 죄로 드러낼 뿐입니다.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살인한 자는 죽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자는 죽으리라”.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의 죽음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13절)
3. 내 안에 율법의 요구를 거스르는 죄의 성향이 있음(14-24절)
14절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나는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제 죄가 무엇인지 압니다. 선이 무엇인지 압니다. 죄를 짓게 되면 죽는다는 것도 압니다. 문제는 육신(나의 자연적 본성)이 여전히 죄에 깊이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율법이 말하는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지식적으로 압니다. 그것을 행하려는 소원이 있습니다. 문제는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또 하고 싶어하는 그것을 내가 하지 못합니다(17절). 결국 내 안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악을 행합니다.
18절에서 고백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만 실제 선을 행함이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그렇다면 내 속에서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죄입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
속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22절), 내 지체 중에 다른 법, 곧 육체의 법이 있습니다(23절). 육체의 법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넘어뜨리고 악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나는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향해서 자꾸 떠밀려 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본성의 죄의 의지가, 선을 행하려는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4. 그리스도와 성령님만 의지하여 육신을 죽이고 선한 열매를 맺음(25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행하는 나의 육신을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내 속의 악을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습니다. 실제로 악이 내 안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행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의지를 붙잡아서 선을 행하게 합니다. 전에는 육신의 법이 내 선한 의지를 눌렀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성령님이 내 안에 선한 의지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할 때, 육신의 법은 점점 죽어갑니다. 내가 육신을 계속해서 죽여가도록 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영적 세계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8장에서 더욱 자세히 말할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어떻게 하면 죄에서 벗어나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7장이 그것을 말합니다.
첫째, 나의 죄인됨을 압시다. 나의 죄를 구체적으로 깨달아 갑시다.
둘째, 내게 선을 행하려는 생각과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압시다. 나에게는 결코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셋째, 그러나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벌을 받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보혈 공로를 힘입어 감사합시다. 성령님을 의지해서 계속 거룩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점점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깨닫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혹시 나에게 잘 고쳐지지 않는 죄나 반복적으로 범하는 죄가 있습니까?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자포자기하지 말고 선을 행할 힘을 주시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벗어나다”(카타-아-에르게오, 2,6절)와 “역사하다”/“이루다” (카타-에르가조마이, 8,13,15,18,20절)
“벗어나다”(카타-아-에르게오)와 “역사하다”/“이루다”(카타-에르가조마이)는 반대말입니다. 벗어나다는 아니다(아)라는 말이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6절). 성령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혼인한 여성이,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그에 대한 매임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2절).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은 우리 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각종 탐심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8절). 결국 죽음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됐습니다(13절). 나의 행하는 것(15절)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율법은 선하다는 것을 아는 내 안에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17절). 내 안에 거하는 죄가 행합니다. 선을 원하는 것은 내 안에 있지만, 선을 행하는 능력은 내 안에 없습니다(18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할 때,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행하는 것입니다(20절).
죄악이 내 안에서 일하는 운명에서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그 죄악에서 벗어났습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로마서의 다른 곳에서 “폐한다”, “멸한다”는 표현으로 네 번 더 나옵니다.
유대인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믿음직스러움, 신실함)을 폐하지 않습니다(3:3).
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3:31).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런데 만약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은 폐하여졌습니다(4:10).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6:6)
“역사하다”/“이루다”는 말은 로마서의 다른 곳에 다섯 번 더 나옵니다.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면서 죄를 짓게 될 때,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즉 동성애를 합니다(1:28).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란과 곤고를 내리십니다(2:9). 하나님의 율법은 진노를 이룹니다(4: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에게는 환난이 인내를 이룹니다(5: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에게 역사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율법을 폐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게 세웁니다. 그리스도는 죄악 된 우리의 본성만 멸하셨습니다. 전에 우리 안에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안에서 인내를 이루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사역의 열매를 맺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