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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2월 8일(제06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사무엘상 13:8-15
제목 : 예배실패가 만드는 인생실패
거룩한 주일, 거룩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올라온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를 나누려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운 사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B.C 1050년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 시대가 시작되는 당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세움 받아 쓰임 받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에 놓고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과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출전하기로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기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께 버림받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사울 왕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제사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자면, 제사는 번제·소제·속죄제·속건제·화목제 등 다섯 가지로, 이스라엘의 예배와 믿음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주요 제사인 번제는 동물의 전제를 불에 태워 완전히 소멸하는 가장 일반적인 제사입니다. 소제는 곡물이나 기름 등 작은 헌물을 드리는 제사로, 동물의 희생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기원하고 예배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속죄제는 사람이나 공동체의 죄를 속죄하고 자비와 은혜를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후에 속죄해야 하는 제사입니다.
제사장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담당한 거룩한 직분으로서, 백성을 위해 짐승의 피를 흘려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 사함을 받도록 했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하루(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물 규정에 보면 제물로 바칠 짐승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되며 흠이 있는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사 시대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제사는 예수님에 대한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제 제사가 예배로 바뀌게 됩니다.
이 예배는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으로, 종교마다 명칭과 형식이 다르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 경외와 존경을 표하는 행위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 경외와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전례적으로 성경과 관련된 본문, 특히 시편과 관련된 기도와 찬송으로 특징화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크게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예배의 일반적인 순서는 입례송, 묵상, 예배의 부름, 성시교독, 송영, 신앙고백 등으로 진행됩니다. 불교에서는 예불, 원불교에서는 법회, 천주교에서는 미사, 정교회에서는 성찬예배 등으로 불립니다.
예배는 보통 기독교의 주일예배를 칭하는 말로 쓰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려고 행하는 응답 의례의 성격을 가집니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 경외와 존경을 표하는 행위로, 성경 본문과 시편 찬송을중심으로 기도·찬송·말씀·성찬을 통해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약성경의 ‘예배’(프로스쿠네오)는 하나님과 왕에게 ‘경배하는 것’을 뜻하며,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초대 교부들은 예배의 중심을 성찬에 두었고, 가톨릭은 미사를 예배에서 중요시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말씀과 성찬을 균형 있게 드리는 전통이 있으며, 루터교회와 장로교 전통에서 성만찬을 강조했습니다.
예배는 묵상·기도·탐구와 함께 찬송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합니다. 기독교 예배는 말씀과 설교가 중심이며, 입례송·묵상·예배의 부름·성시교독·송영·신앙고백·찬송·대표기도 등으로 진행됩니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거룩한 사건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며 선교에 동참하게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늘 은혜를 나누려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운 사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은 B.C 1050년-1010년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첫째 왕으로 세움 받아 쓰임 받았다는 사실은 육적으로 보면 엄청난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결과적으로 사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위에 오른 지 이년 만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사울 왕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릴 준비를 다 해 놓고 백성들과 함께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사울 왕이 세워지기 전에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곧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는 곧 유대인의 왕이요, 선지자요,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블레셋 군대를 앞에 두고 사무엘 선지자가 칠일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과 백성들이 칠일 동안 기다렸으나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도 사무엘 선지자가 오지 않자 백성들은 떠나가고, 다급해진 사울 왕은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직접 드렸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있었던 제사 사건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또한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드림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훗날 다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패한 왕으로 기록되었습니다(삼상 31장).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40년을 쓰임 받았으나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실패한 인생이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제사사건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실패한 인생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배실패가 만드는 인생실패”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믿음성공은 외모만으로는 안 된다
인생의 승리자와 실패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실패와 승리의 기준을 ‘권력, 명예, 재산, 직위’ 등을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이냐 실패한 사람이냐를 정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일까요?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권력이나 물질적 성취와 상관없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요한계시록 3:12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즉 ‘나는 승리하는 자를 내 하나님의 성전 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는 다시는 그 성전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생 승리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물질에 매여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이고 죽어도 죽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삶은 어영부영 살다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삶의 진실을 안다면 잠시라도 허비할 시간이 없고 무척 절박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실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울은 탁월하고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1-2절을 보면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사울을 소개하면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다고 기록할 정도로 사울의 준수함을 강조합니다. 사울이 ‘준수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얼굴만 잘 생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주가 많고 슬기로우며 풍채 곧 외모 역시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울의 키가 얼마나 큰지 당시 이스라엘의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클 정도로 풍채가 좋고 준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당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으려고 온 땅을 두루 다닐 정도의 효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현대적으로 설명하자면, 좋은 가문과 학벌에 외모와 재능까지 갖추었는데 겸손과 순종과 효심까지 있어서 육적으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왕이 된 후 사울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쫓아다니는데 모든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불순종하여 버림받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왕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핍박 받던 다윗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전무후무한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서로 비교되고, 또한 배치되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40년 동안을 다스렸습니다.
사울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고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고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정반대의 길로 갔습니다. 훗날 사울 왕의 가문은 멸망한 반면에, 다윗 왕의 왕권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받았고, 그 후손으로 메시아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울 왕을 버리기로 작정한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으로 보내 그 아들들 중에서 새 왕이 될 사람을 선택할 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사울 왕의 처음 모습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한 자인 반면에, 다윗의 처음 모습은 이새의 여덟 번째 막내아들로서 작은 소년이었으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삼상 16:12).
결국 사울의 준수함이 육적인 준수함이라면 다윗이 아름다운 것은 영적 믿음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거인 골리앗이 1:1로 싸우자고 외칠 때 두려워한 반면에,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듯이(롬 5:14)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도 다 예수님의 모형이며, 다윗 역시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결국 다윗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모습의 모형입니다.
다윗보다 먼저 왕이 된 준수한 자 사울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왕 노릇하고, 주인 노릇하던 구약교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예수님과 사탄의 영적 싸움의 모형이며, 다윗의 승리는 예수님의 승리의 모형입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 이사야 53:2-3절을 보면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고 하였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에게서 육적인 준수함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되 섬기는 자 곧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빌 2:7). 작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작고 멸시받던 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사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외모나 풍채도 흠모할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 준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준수한 자들이 멸시 당하던 땅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을 공생애 구원사역기간 삼년 반 동안 항상 따라다니며 시험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핍박했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결국 준수하고 큰 사울 왕이 작은 자 다윗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던 것은 바로 헤롯 왕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의 모형입니다. 동시에 육적으로 준수한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핍박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 이후 일천년 후에 베냐민 지파에서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사울이란 청년입니다. 사울 왕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울이 등장하여 예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9:1-2절을 보면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울이 훗날 육적인 모든 준수한 것들을 다 버린 후에는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음 모습도 사울 왕처럼 준수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요,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 아래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 3:5-6). 거기에다가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당시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그 육적 준수함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쓰임 받은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의 순교 사건의 증인을 자처한 자가 바로 사울입니다(행 7:58). 그 이름도 우연이 아닙니다. 사울 왕의 준수함은 육적 준수함으로서 예수님과 복음에 대항하고 반대하는 사탄 세력과 세상의 모든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명과 사람 등 세상 모든 것을 대표하였습니다.
사울 왕의 이 준수함은 오늘날 교회와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를 세우고 직분자를 세우되 육적으로 준수한 자들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은 목회자를 청빙할 때 학벌을 중시합니다. 세상 인문지식과 과학지식이 뛰어나서 설교도 잘하고, 목회도 잘하며, 교회나 물질 경영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육적인 준수함이라면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육적 준수함으로 여기고 자랑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려야 합니다(빌 3:8).
성경이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은 사실 모든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항상 두 종류를 구분하고 비교합니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육과 영, 진리와 비 진리, 참 종과 거짓 종, 참 교회와 거짓 교회, 성령과 거짓 영 등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 싸움의 모형이요 보이지 않는 두 종류 믿음의 흐름입니다.
창세기는 믿음의 사람들의 가정에서 자녀들 곧 형제를 비교하고 구분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등을 비교하고, 그들이 서로 장자권자가 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으며, 정반대의 인생길로 갔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구분되고 분리될 것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6:1-2절을 보면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2:11절은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고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육적 아름다움이라면, 사라의 아리따움은 영적 아름다움입니다. 오늘날도 육적 준수함이 있고 영적 준수함이 있으며, 육적 아름다움이 있고 영적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자들의 공통점은 다 육적으로 준수한 자들이었습니다. 형 가인이 아벨보다 장자요 준수했습니다. 니므롯이 당대에 첫 용사요 용감한 사냥꾼으로 준수했습니다. 니므롯이 그 시대에 준수한 영웅이었으나 그 힘으로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형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먼저 났고, 크고 준수한 자였습니다. 형 에서가 몸이 붉고, 전신에 털이 많아 매력 있고, 익숙한 사냥꾼으로 준수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생 야곱과의 장자권 싸움에서 패한 결과 구원 없는 자가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의 원수인 에돔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먼저 왕이 된 사울은 큰 자요, 나중에 왕이 된 다윗은 작은 자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핍박하고, 작은 자가 큰 자를 이기는 것이 곧 믿음의 사람들의 장자권 싸움의 역사입니다(창 25:23, 갈 4:29). 장자권 싸움에서 이긴 자들의 공통점은 육적으로는 작고, 연약하며, 볼품없는 사람들입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가 장자권자가 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였고,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막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장자권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족보)을 위해 쓰임 받을 만한 영적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두 종류 여인(아내)들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 사라와 하갈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여인들은 서로 장자권자(상속자)를 낳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신랑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종류 교회 곧 참 교회와 거짓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랑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두 종류 신부 곧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뉘고, 분리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여인들이 다 아름다웠다고 기록합니다. 사라가 아리따웠고(창 12:11), 리브가가 심히 아리따웠으며(창 24:16), 라헬이 곱고 아리따웠습니다(창 29:17). 그 외 에스더, 술람미 여인 등 믿음의 여인들의 공통점은 다 아름다운 미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육적인 외모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직 하나님 믿음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믿음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신약시대 예수님의 신부된 참 교회의 영적 아름다움을 비유하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육적 준수함이나 육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울의 준수함과 다윗의 아름다움이 다름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울의 준수함은 육적 준수함이요 육적 신앙의 모형이라면, 다윗의 아름다움은 영적 믿음의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사도들과 초대교인들은 그 시대에 준수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문벌도 없고, 재능도 없고, 오히려 천대받고 멸시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죽기까지 잘 감당함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의 준수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다윗과 같은 믿음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사람을 외모나, 학벌이나, 가문이나, 물질이나, 인간의 지식으로 차별하거나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아름다움만을 보십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의 육적인 준수함과 아름다움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적 준수함과 아름다움은 백년도 못가서 쇠하고 썩게 되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아름다움은 천국까지 가는 영원한 아름다움입니다.
사울의 준수함은 가인과 니므롯과 이스마엘과 에서의 육적 준수함의 맥이라면, 다윗의 아름다움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뒤를 잇는 영적 아름다움의 맥입니다. 사울의 준수함은 초림 때 타락한 구약교회의 육적 크고 화려한 모습의 모형이라면, 다윗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영화로우심의 모형입니다.
또한 먼저 왕이 된 사울의 준수함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의 모형이라면, 나중에 왕이 된 다윗의 아름다움은 나중 된 자 곧 이방인 구원의 모형으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마 19:30). 그것은 또한 개인의 믿음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사울의 육적 준수함은 종말시대 큰 음녀의 육적 신앙의 모형입니다. 요한계시록 17:1-4절에 보면 “...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큰 음녀는 곧 마지막 때에 신랑 예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교회와 믿음을 상징합니다. 음녀가 임금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화려한 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단장하여 육적으로는 준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일지라도 그 영적 모습은 벌거벗었고, 신랑 예수님을 배반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1절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고 하였습니다. 해를 옷 입은 한 여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키며, 마지막 때에 신랑 예수님을 맞이할 신부 단장한 참 교회의 모형입니다. 비유요 상징이지만 해(빛)로 옷을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모습은 신랑 예수님이 보실 때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사울의 준수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육적 준수함을 자랑하지 말고, 영의 사람 곧 내 안의 새 사람의 영적 아름다움을 가꾸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나 직분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육적으로 준수하고, 크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 믿음의 열매로 단장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육적 준수함을 자랑하느라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하고, 육적 지식을 쌓느라 정작 구원을 얻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쌓을 시간이 없는 어리석은 믿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육적 준수함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다윗 같은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육적 아름다움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단장하여 신랑 예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믿음의 신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배실패는 믿음성공이 안 된다
본문 8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이 약속한 시간에 다 되어 가는데도 사무엘 선지자가 길갈에 도착하지 않자 전쟁에 나왔던 백성들이 흩어집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사울 왕이 한 일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면 되는데 아니다 싶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본문 8-9절을 보겠습니다.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2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본문의 내용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지 2년 만에 블레셋과의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앞 단락 5절을 보면 블레셋의 군사들은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 이요, 군사는 해변의 모래알 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사울 왕이 세워짐으로 첫 왕정국가가 시작되었고,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하여 백성 중에서 3천 명을 뽑아서 군사를 세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과거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도 블레셋이 쳐들어 왔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어지럽혔고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것을 기념하여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로 세운 돌이 바로 에벤에셀의 돌입니다(삼상 7:7-12).
그런데 이번에 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온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과 철천지원수지간입니다. 사사 시대에 삼손이 블레셋과 싸웠고, 사무엘 선지자도 블레셋과 싸웠으며, 사울 왕과 다윗 왕도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그 블레셋은 바로 신약시대 사탄 세력의 대표적인 모형이요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적 전쟁은 오늘날 영적 전쟁의 모형입니다. 준수한 자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다윗은 승리합니다. 결국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또한 왕이 된 후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의 모형입니다.
사울 왕은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형이며, 또한 사탄 세력이요 모형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박해하는 것은 초림 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것의 모형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이레 동안을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은 일단 제사 드릴 준비를 다 해 놓고 이레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레 되는 날에도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백성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급해진 사울 왕은 자기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사울 왕이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 드리기를 마친 바로 그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왔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에게 “...내가...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2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13 ...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14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나이다”(13-14절)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으로 갔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이 드려야 할 번제를 자기가 드렸습니다. 본문에서 사무엘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사무엘이 드려야 할 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의 모형입니다. 성경에서 아벨을 시작으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드린 제사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사의 모형입니다.
결국 사울 왕이 드린 번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드리지 않은 가인의 제사요,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이며, 나아가 오늘날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방법으로 드리는 자기 예배의 모형이요, 자기 믿음의 모형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철저히 순종하여 제사를 드린 반면에 가인을 비롯하여 사울 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대로 제사를 드리다가 멸망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서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고, 열심히 성전 제사를 드렸음에도 멸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느라 정작 그 율법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셨건만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과 안식일과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내쫓고, 종들이 주인 노릇한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 예배, 설교, 기도, 찬송, 헌금, 직분, 헌신 등 우리의 믿음생활의 모든 것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울 왕의 제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싫어하십니다. 제사를 드리고도 버림받게 된 사울 왕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 믿음과 자기 열심과 자기 방법으로 행한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그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예수님만을 믿는 오직 예수님 믿음으로 새 예배, 새 설교, 새 기도, 새 찬송, 새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사울 왕처럼 제사에 실패하여 버림받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을까요?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들을 보면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뜻, 명령)대로 믿고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예수님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또한 예수님의 모형이요 예표로서의 위대한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실낙원 후 인류역사의 첫 번째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입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후에 첫 번째 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사건이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모리아산 제사 사건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 첫 번째 사건이 제사 사건인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희생 제사를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신약시대 오직 예수님을 통한 영과 진리의 참 예배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3: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신약교회를 세우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천국 가서 영원토록 할 일도 결국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사울 왕처럼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대로, 자기 예배를 드리다가 믿음의 실패자가 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처럼 오직 성경대로, 오직 예수님을 통한 영과 진리의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쟁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기란 1%도 어렵다고 합니다. 100명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한 사람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생활은 어떨까요? 믿음생활에서도 성공하기가 어려울까요? 어렵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 믿음생활에서는 실패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생활에 성공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사 시대를 끝내고 왕정 시대가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첫 왕으로 출발한 사울 왕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울 왕이 왜 실패했을까요? 사울 왕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재능도 많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에 놓고 사무엘 선지자와 일주일 전에 ‘길갈’에 모여서 번제와 화목 제사를 드리고 출정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오지 않자 불안하여 제사장이 아닌 자기가 제사를 드려버렸습니다. 제사를 마치고 나자 정해진 시간에 사무엘 선지자가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좋지 않았을까요?
믿음의 승리는 외모만으로, 세상 것으로만은 안 됩니다. 제사의 실패, 예배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를 가져옵니다. 예배의 성공자들이 되어 인생을 승리로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