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
귓가 울리는 끙끙거림의 환청
낮선 타향에서 배고픈 기차가
밥 찾아 덜컹덜컹 새벽길을 가고
밤새 빗방울 나뭇잎을 두드리지만
마땅히 가야 할 곳도 없는 나는
눅눅한 여관에 앉아
잘 익은 무화과 몇 개를 따
주린 배를 채운 적이 있었다
늙은 무화과나무 밑
배고픈 쥐 한 마리 비를 맞으며
떨어진 무화과 열매를 먹고 있을 때
옆방에서 남자 잡아먹는 불여우 소리가
빗방울에 묻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라지는데
나는 무화과나무가 있는 낡은 여관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적이 있었다.
독
옛날 헛간에
오래된 독이 하나 있다
쌀독이거나 물독이었거나
금이 가 철사로 얼기설기 엮은 독
오늘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지만
독을 빚은 누군가의 마음을 본다
처음 옛집에 왔을 때
갓 시집 온 종부처럼 수줍어
반질반질 웃음 감추려 해도 서방님께 들키던
궁둥이 큰 독
오래 되어 낡고 늙었어도
금간 마음 철사줄로 묶였어도
증조할머니나 할머니처럼 아들 쑥쑥 낳을 것 같은
여전히 궁둥이가 큰 독
오늘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홀로 깊은 생각에 빠진 속이 깊은 독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난한 날의 연가
골목길 한참 올라가야 하는 사글세방
라면을 사면 연탄 살 돈이 없고
연탄 사면 배 골아야 하는 자취생
쥐보다 더 배고픈 나는
밤새 쌀 한 톨 없는
곳간과 부엌을 오가는 쥐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
칠성시장에서,
수저 한 벌, 양은 냄비 한 개,
책상과 의자를 사오던 그날
리어카 끌며 창창한 미래를 생각했다
까만눈동자 반짝거리던 친구들과
깡소주 마시면서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유행가 부르며 휘청 거리다 올려다 본 하늘
별빛 쏟아져 내리던 가난한 그때
밤하늘의 별처럼 꿈도 많았다.
개실마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154번지
수백 년 흐트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끄덕없는 고택의 기둥들
유림의 커다란 저수지
청백리 점필재 할아버지
조선이라는 평야를 적시며
내게로 흘러왔다
그 옛날 점필재 할아버지처럼
대청마루에 누우면
반질반질 마루판에 어리는 정신
여적지 살아있는데
눈 오는 날이면
마당앞 당산나무들
고택과 어울려 세한도 풍경이 되었다.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동생은 세상에서 겨우
백 일을 살다가 갔지요
세상 더 먹은 나는 살아남아
철딱서니 없이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녔지요
어미는 꽃 피는 봄날,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우리 어머니
손놀림, 그렇게도 빨랐다더니
좋은 솜씨 칭찬도 자자했다더니
흰 명주 옷 입고
하느적 하느적 나비되어 날아가 버렸지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눈에 밟히는 어린 새끼들 남기고
그 새벽 어둠에 말려 가버렸지요.
잉어
삼십 년 전 성당 못 벤치에 앉아
사료로 잉어를 유혹한 적 있었네
그때 나는 잉어였네
온 몸에 붉은 불을 켠 적신호였네
이 물살 저 물살 펄쩍펄쩍
흐린 물을 일으켰네
세상이 불근하여
뜨거운 몸 식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얼음 불구덕을 찾아 다니기 위해
깡소주로 푸른 하늘 향해 나팔을 불다가
내가 지은 유치장에서 밤을 새곤 했네
푸른 하늘 연못으로 보이는 가을날
성당에서 뛰쳐나온,
아직도 살아서 꼬리치는
성질머리 죽지 않은 잉어 한 마리를 보네.
남평문씨 할머니
남평문씨 골품댁 할머니
열여덟에, 선산김씨 문중에 출가하여
일찍 길 떠난 지아비 기다리며
먹빛 기왓장 아래 무거운 그늘 하나 드리우다가
쓸쓸하게 길 떠났는데,
사대부가의 빈 집 앞마당에 들어서면
구석구석 먼지로 내려앉은 한숨 소리들
돌아오지 못할 것들에게,
되받을 수 없는 것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 옛날 남평문씨 할머니의
부치지 못한 서간문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린 시절 화장실에서 뒤 닦을 때
무엇인가 근쩍끈적하고 질척한 것들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었는데
스멀스멀 내 몸을 타고 머릿속을 스며들었는데
그것들이 이제사 나를 슬프게 한다
백 년 세월의 비에 젖은 그 집에서
옛날처럼 아무도 모르게 수선화꽃 피었다가 지는 봄날
오랜 고요의 깊이에 한쪽 서까래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손
오늘, 새벽강을 깨운다
아침 전깃줄을 흔들며
까마귀 울음소리도 깨운다
터벅터벅 관절을 깨우고
샛별과 일터를 깨운다
푸른날의 청춘도 깨우고
시간당 4,500원의 노임의 노예근성도 깨운다
기름기 빠진 까칠한 손을 깨우고
저녁 미꾸라지 튀김을 집던 기억도 깨운다
그래, 세상은 온통 멍투성이
마셔 버리자,
그 생각을 깨우다가
밤하늘 푸른 빛의 혁명처럼 허공을 깨우다가
도시의 골목에서 어쩔 수 없는 울음을 삼킨다.
칼에 찔리다
마음이 아플 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처에 아파할 때
칼날을 바라 보았다
칼날 위로 무지개가 뻗히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칼을 빼어들고
마음의 통점에 찌르자
심장을 뚫고
눈 깜빡할 사이
말뚝처럼 박힌 칼
근육이 칼을 물고 파르르 떨자
모든 통점이 사라진다
칼 아래 산과 강이 눕혀지고
세상이 고요하다.
돌탑
언젠가는 아무데서나 뒹굴었으리
모가나서 강물에 흘러내리기도 했으리
누군가의 돌팔매가 되어 피를 흘리기도 했으리
험한 세상 건너라고
징금다리로 강을 건너기도 했으리라
칼 같은 마음 무디기 위해
오래 강을 흘렀으리라
그러나 오늘 다시 긴장을 놓지 않고
한 단 한 단
서로의 어깨를 딛고
등을 짚고 일어선다
누가 건들면 쉽게 쓰러질 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만,
한 생애가
와르르 무너진다 해도
둥글고 부드러운 이마가 견고하다.
김청수(金淸秀) 시인 약력
1966년 경북 고령 출생.
2005년 시집『개실마을에 눈이 오면』으로 작품활동 시작.
2014년『시와 사람』신인상 수상.
시집『차 한 잔 하실래요』, 『생의 무게를 저울로 달까』,『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출간.
<함시> 동인.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
머물다 갑니다...
축하드립니다.
반갑게 잘 읽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 축하 드립니다!
칼에 찔리고... 통점이 사라지고...산과 강이 눕혀지고 세상이 고요....찡한 아픔입니다!
이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