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스피커 '유모차 대 유아차' 논쟁이 보여주는 어떤 현실 sbs프리미엄 2023.11.23 by 조윤하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한 말입니다. 대중의 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유아차 vs 유아차, 때 아닌 논쟁
유모차(乳母車)가 맞는 건지, 유아차(乳兒車)가 맞는 건지 온라인상에서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 논쟁은 2주 전,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서 시작됐습니다.
배우 박보영이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조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고 하는데도, 제가 밀면 안 봐요”라고 말했고, 진행자 유재석은 “유모차를 밀면?”이라고 물었습니다. 함께 있던 개그맨 조세호는 “중심이 유모차로 되니까”라고 말했죠. 세 사람 모두 ‘유모차’라고 말했는데, 영상 자막엔 ‘유아차’라고 표기됐습니다.
여기서부터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출연진은 유모차로 말했는데, 왜 유아차로 표기됐냐는 겁니다. 몇몇 네티즌은 ‘음성과 자막이 일치하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또, ‘표준어인 유모차를 굳이 유아차로 바꾼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런 불만과 의문이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번졌습니다. (물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두 단어 모두 표준어더라도 유아차가 권장된다면, 권장어를 쓰는 게 맞다’는 겁니다.)
커뮤니티를 통해 번진 논란은 ‘제작진 중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작진 중에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꿨다는 주장입니다. 이후 좌표 찍기와 사상검증이 시작됐습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해당 영상에 ‘싫어요’를 누르며 공격했고, ‘유아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공격받아도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낙인이 이어졌습니다. ‘유모차 vs 유아차’ 논란이 여성혐오로 확산된 겁니다.
유아차, 유모차 모두 표준어... 권장은 ‘유아차’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국립국어원이 인정하는 표준어입니다. 다만, 국립국어원은 ‘유모차’를 ‘유아차’ 또는 ‘아기차’로 순화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유모차는 젖 유(乳)에 어미 모(母), 수레 차(車)로 이뤄져 있습니다. ‘젖 먹는 아이를 태우고 엄마가 끌고 다니는 차’라는 뜻입니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단어라 너무 익숙해졌지만,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엄마가 끄는 차’라는 말이 부모의 역할을 한정짓고, 더 나아가 성 고정관념을 공고히 한다는 겁니다. 또, 양육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아빠를 배제해 부모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 지난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성평등 언어 사전’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바꿔 사용하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는 유아차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말이죠. 처음엔 조금 생소했지만, 이때부터 ‘유아차’란 단어가 꽤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등 장르를 불문하고 ‘유아차’ 단어는 자주 사용됐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불거진 유튜브 영상이 나오기 전, 〈유퀴즈〉, 〈라디오스타〉 등 예능에서도 유모차를 곧잘 유아차로 순화해왔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어떤 심오한(?) 의도를 갖고 한 일이 아니라, 더 다듬어진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국립국어원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표준어라고 인정한 걸 두고, 일부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또 ‘국립국어원에도 페미가 있다’, ‘국립국어원이 사상에 점령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국립국어원 사이트를 찾아가 직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다 같이 찾아가 게시판에 혐오가 가득한 게시글을 도배한 겁니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현주소’
사실 5년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순화를 권고한 단어는 유모차 말고도 더 있습니다.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저출산은 저출생으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미혼은 비혼으로, 미숙아는 조산아로 바꿔 표현하면 좋다고 말이죠. 차별적인 요소를 줄이고, 성평등에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를 유아차나 아기차로 다듬어 표현하자는 움직임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초에 부딪히는 걸 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해 보입니다. 물론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린 문제는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이 세 단어 모두를 표준어로 인정한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는 별 것 아닌 ‘유모차 vs 유아차’ 논쟁에 기자가 기름을 붓는다고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아주 사소한 논쟁은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육아는 부모 공동의 몫이고, 남녀 모두 각각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돼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는 더딥니다. 다듬어진 말이 있는데도 ‘유모차’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소하기 그지없는 논쟁은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아를 여성의 업무로 한정하고, 남성의 참여를 알게 모르게 배제하고 있는 거죠.
법으로 바꾸나?… “첫 발 뗐지만 갈 길 멀어”
국회에서는 유모차를 유아차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첫 발을 뗐습니다. 지난 9월 민주당 최혜영의원 등 12명은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어린아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란 뜻의 유아차가 본래의 의미와 더 맞닿아있는 만큼,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꾸자는 겁니다. 작은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법적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 의식을 총체적으로 바꿔나가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성에게 뭔가를 더 주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정부 부처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에는 여성가족부에서 젠더 인식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비중이 많이 줄었다는 겁니다. 신 교수는 “인식이 바뀌면서 담론이 바뀌고, 그로 인해 의식이 바뀔 때 법이 실효성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거죠. 지난해 합계출생률은 0.78명으로, 1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올해 출생률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점점 줄어드는 건 사람들의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은 단어로 인해서 ‘성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by 조윤하 |
첫댓글 바뀌는 말들 정말 의미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