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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지적 팽창: 직관]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2-1903)
-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편집, PUF, 2016, pp. 69-85(P. 395).
사람들은 대상의 일반성을 경험 속에서 얻는다. 이 일반성을 소리와 글자에 의해 기호로 드러나며, 분류하고 그룹을 만들어, 상식의 차원에서 말과 단어를 형성한다. 기호의 일반성에서 영속성과 부동성을 보면서, 추상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들은 개념과 상징(수학적 기호)으로 나타난다. 그 개념과 상징은 분류차원을 넘어서, 양식 또는 인식에서 척도의 가치를 지닌다. 이런 과정은 삶에서 편리와 유용, 그리고 행동에서 기준 또는 법칙화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따라가야 할 다른 방식이 있다. 진정한 인식, 지속의 인식은 지적 팽창과 지적 공감이라 부를 수 있는 직관을 통해서이다. (55LMC)
수학사에서 수의 형성(la formation)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일반적인 수, 나아가 추상적인 수 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인류의 지성의 발달이 경험적 대상의 수에서 일반화의 수로, 그리고 추상의 수체계로 나아가면서 완전수(10)를 삼각수로 보았고, 피타고라스 후기쯤에서야 수를 기표화하고, 그것을 기의화하는 작업에서 2는 여성, 3은 남성, 5는 결혼이라 할 것이다. 이 기의화는 수학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화 방식에서 푸꼬 말로 장치의 결합이고, 들뢰즈 표현으로 단편 또는 절편들의 배치이다.보탠다면 중국의 태극이 음양 그리고 사상으로 기표화에서 기의화로 향하면서 사상을 방향이든 체질이든 색깔이든 겹쳐보았을 것인데, 다른 하나는 5행과 겹쳐서 기의화하는 방향으로 해석학적이고 비의적 방향과 결합할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원(arche, raison)에 대한 서술이 피타고라스학파의 조각글들 속에서 찾기보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공화국)의 선분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선분의 비유와 비슷한 구슬의 비유가 벩송의 시론(DI)의 2장 셋째 문단에서 쓰여 있다. 생각하는 방향과 방식은 유사한데, 각 시대는 자기의 앞 시대와 영향 속에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수는 흩어져 있었던 구슬의 배치에 있을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다가 기하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했을 것인데, 그 학파에서 2의 제곱근이 문제가 되어, 이를 발설하는 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대상을 수로 대응시키는 수의 체계(산술학)가 성립하려는 시기에, 토지 위에서 그려지는 선분[사각형의 대각선]과 원호[콤파스의 원의 부분]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고대에 200여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며, 이로서 산술학과 기학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일반적으로 그림자와 사물의 비유와 비례해서 마찬가지로 수학의 도형과 이데아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이는 지성의 사고에 비추어서 추상의 성립을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플로티노스는 지성 사고를 연속성으로 재구성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누스, 로고스, 영혼, 사물의 각 지위에서, 일자의 누스가 중심에서 부분화 또는 개별화를 거쳐서 원주로 퍼져 나가는 과정과 유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플로티노스처럼 연속성이 퍼지면서 약화되는 또는 점점 희박화 되는 관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과정처럼 사물화, 일반화, 추상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개념 또는 관념이 성립하는 과정으로서 훨씬 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것이다. (54UKA)
[주역의 계사와 효사는 기호들로부터 기의화 된 것을 쓴 글로 표현한 것이리라. 자연과 생성은 사라지고 기호들에 의미를 대리하는 기표마다 다양한 학문{지리에서 동서남북(중), 신체의 간심비폐신, 도덕론의 인의예지(신), 물리학의 지수화풍, 천문학의 화수목금토, 음성학에서 4성체계}에 유비적 또는 동등적 가치를 부여하는 글쓰기 전승을 하였을 것이다. 동양은 4상과 5행의 불일치 또는 불합리를 어떤 사건과 상황에서 조절 또는 화합하려 애썼다고 할 수 있다. 그 분석과 추론이 사물의 실재성에서 찾기보다, 드러난 현상에 대한 견해와 해석으로 나아가면서, 사색과 체계의 복잡하고 어려운 경지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55LMC)]
1, 2, 3, 그리고 만물이라는 추론은 경험적이고 실재적이다. 태극(1), 음양(2), 4상(4), 8괘(8)는 기호적이고 논리적이다. 이에 비해 1(한 몸), 2(두 팔), 5(손가락, 발가락), 10(양손가락)도 경험적이고 자연적으로 보인다. 유용성이란 측면을 보건데, 전자의 자연수 배열이나, 후자의 기호 배열보다, 셋째에서 제도와 체계의 적용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의 그림자에 의해 12진법은 왜 수에 있어서 달리 등장했을까? 전체가 1이고 나눔은 둘인데, 3등분과 6등분, 12등분은 왜 필요했을까? 하늘의 운행이 영속적이고 매번 같은 계절에 같은 자리에 떠오르는 별의 불변성을 인간의 삶에 투사하여 영속성과 불변성을 기원하여 불멸성을 욕망했기 때문일까? 나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삶에서 토기의 제작은 둥근 토기이지 정방형의 토기가 아닐 것이다. 이 둥근 원과 네모난 사각형의 차이가 기호화에서 동일체계와 동일 사유의 원리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어떤 새로운 성찰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름 하여 천문과 지리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며, 기후와 풍토라는 문제가 두 체계 사이에서 지성의 발달에 의해 생긴 파생의 문제일 뿐일 것이다. (55LMD)
*** 내용중에서
§04. 1902년 12월 26일 회기(Séance) 69-85 [내부로부터 인식: 지적 팽창]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만일 사람들이 개념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사변적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개념, 즉 단순하고 추상적인 일반 관념은 보다 겸손하고(humble) 보다 하찮은(modeste) 기원들을[경험적 기원들을] 갖는다고 알렸다. (69)
모든 것은 모든 것과 닮아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구별된다.지각된 사물이 어떤 것이든 간에, 사람들이 일반성의 계열을 올라갈수록 사물들 사이에 닮음을 발견할 것이고, 사람들이 종별화의 계열이라고 부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물들 사이에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69) [두 종류의 차이, 닮음의 차이 대 이질적 차이 – 들뢰즈의 박사학위 논문(차이와 반복)의 주제이다. ]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조합, 추상화, 일반화가 사물에서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종별화에서, 특히 인격에서] 공통(commun)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그것을 찾는 것은 더 이상 일어날 일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악순한(un cercle vicieux) 속에 있을 것이다. (69) [3강, 61, 62, 두 가지 악순환을 말했다.]
한편 개념, 즉 일반 관념의 형성 가능하지 않다. 앞서서 기계적 조작이 없었다면 .. 다른 한편 이 기계적 조작은 이미지의 자연[본성]으로 나올 수 없다. .. 선천적으로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70)
[[일반화에 대한 문제제기: 일반화는 개념으로부터 사물(자연)을 자르고 재는 문제이다.]]
[첫째, 일반화의 이유: 신체의 행위는 제한된 방식, 한정된 수로 되어 있다. .. 이것이 신체의 일반화이다.]
지각작용이 근접작용(des rapprochements)을 행할 수도 조작할 수도 없고, 그리고 개념의 골격을 형성할 수 없는 데, 행동은 그것을 할 수 있다. (70) [지각작용이 할 수 없는 것을 행동은 할 수 있다. 지각작용은 기억과 연관있고 내재적 의식에 연관있다.]
운동하는 메카니즘들(ces mécanisme moteurs)[감관 기관들]은 숫적으로 제한되고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지각된 자극작용들의 비결정적인 수 때문에, 가능한 반작용[행동]들의 결정되고 제한된(한정된) 수만이 있다. 따라서 그룹들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미래], 그리고 차이들이 깊이 또는 가볍게 그 차이 자체로 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나 살아있는 존재의 이런저런 반작용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에는] 차이들이 지워져야 할 것이다. (70-71) [다수의 감각작용이 신체운동에서는 하나의 방향으로 나오듯이, 의식에서 다양한 지각작용이 하나의 지각으로 표상되기에 이를 것이다.]
[둘째 일반화: 도구의 사용에 비추어서, 동물에서 일반화, 신체의 일반화. - 도구적 사고.]
금박검전기(un électroscope à feuille d’or)라는 도구의 예를 들어보자. (71) [전기는 흐르는데, 그 반응으로 일정한 양이 있어야만, 금박지가 열림일 뿐이다. 측정은 일반화이이다.] [온도의 자동조절 장치도 일반화의 예이다]
[다른 예로] 신체기관의 장치, 즉 운동기제(ces mécanisme moteurs)이 동일한 방식으로 반작용한다. [팔을 뒤로 꺾을 수 없고, 안으로 굽는다.] .. 이리하여 일반화의 초기에 개념형성의 초기에, 살아있는 존재에 의해 기계적 채택(l‘adoptation machinale)이 있다. (71)
[또 다른 예로] 인간에게 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다. ... [우선 동물을 먼저 설명한다.] 동물 중에서 사냥개에서, 먹이감 앞에서 멈춘다. 먹이감(gibier)이란 개념을 갖는가? 개는 자기 개념을 활용한다. .. 다른 여러 자극들과 다른 여러 지각작용들에 앞에서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다른 한편 유사한 것을 느꼈을 때 기계적 태도를 취한다. ..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72)
인간은 여러 다른 행동과 지각작용을 취할 때, 실재적 관념과 잠재적 관념을 구별하여 반성할 수 있다. .. 인간은 개념을 보다 높은 영역 안으로 올릴 수 있다. 인간은 게다가 말을 하는 존재이며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개념을 단어(un mot)에 의해 지칭한다(designer). 인간은 단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말을 건다. 특히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이에 비해 동물은 체험된 개념의 제한된 수만을 갖는다. .. 인간은, 이러한 점이 인간에게 모든 산업화의 비밀인데, 자연이 기계적으로 생산하기를 시작했던 것을 모방할 줄 안다. 인간은 자연의 작품 속에 뛰어든다(plonger). .. 인간은 개념적 사유의 영역을 무한정하게 넓히기게 이른다. (72) [산업화의 비밀이란 도구적 인간이 단어를 사물에 대입시키는 지성의 발달로 나간다.]
[셋째 일반화: 측정 단위의 표시, 즉 개념화.]
개념이 아무리 인위적이라고 하더라도, 개념은 항상 그 기원의 표시를 보존하고 있다. 개념은 행동에서 그의 기원을 갖는다. 모든 개념은 다소 실천적 사명을 갖는다. 모든 개념은 상대적 관점에서, 우리에 의해서 실재성에게 제기된 질문이다. .. 개념은 목록표(rubrique)이다. (73) [올바른 질문의 제기는 철학의 문제거리를 해소한다(PM, 2장).]
만일 우리가 한 개념은 마치 다양체(다수성)의 개념처럼 또는 통일성의 개념처럼 다룬다면, 이런 개념들이 행동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수성(une multilicité)이 있는가? 자연에서 수가 있는가? 수란, 그것은 우리가 세기(헤아리기)위해 실행했던 행동들의 어떤 수이다. 개는 자기 앞에 세 개 사과와 세 채의 집이 있으면, 개는 거기서부터 3의이란 [추상적 수의] 닮음을 추출할 수 없다. (73)
다수성[다양체]이란 개념은, 행동과 상대적인 개념보다 앞서서 세부적으로 그 개념을 제시하는 것을 쉬울 것이며, 따라서 행동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73) [이 짧은 한 문단에 주가 달려있다.]
가장 높은 형식 하에서, 개념은 행동에 지배적인 것으로 어떤 것을 표현한다. 가장 높은 형식 하에서도 개념을 실재성에 제기된 문제를 항상 포함하고 있고, 이에 대한 실재성은 예, 아뇨, 라고만 대답할 수 있다. .. 이러한 것이 개념의 표시(le marque)이다. 개념은 한 판단의 가능한 속성이다. 판단은 긍정 또는 부정일 것이고, 중간은 없다. 긍정과 부정은 이런 이유자체에서 근본적으로 순수인식의 것이라기보다 행동의 범주들이다. (73)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사물자체를 다룰 때, 사물 자체들이 ‘예’ 또는 ‘아뇨’로 참여하지 않는 것은, 또한 사물자체가 이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 드물기 때문이다. 다. 그러나 행동은 이 혼합들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다. 선택해야만 한다. 그 선택은 무엇보다 행동의 범주이다. 긍정과 부정은 행동에 상대적이다. (73-74)
이런 견해와 귀결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이다. .. 결과적으로 개념에 대한 인식은 불연속적 인식이다. 따라서 그 인식은 실재성의 연속성을 정확하게 하는데 결코 이르지 못한다. .. 개념에 의해 인식하는 것,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관념들을 가지고 도래하는 것이고, 실재성에게 그 틀들[범주들] 중의 어느 틀에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74)
[개념적 인식에서 다른 두 체계; 개념으로부터 사물로(분석), 사물에서 개념으로(직관)]
만일 실재성이 그 틀들(des cadres)의 어떤 것 속에 들어가 못한다면, 만일 그것이 새로운 대상이라면, 그 대상은 어떠한 것 속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새로운 철학자는 확실하게 다른 틀을 사용할 것이다. .. [다른 틀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동일한 사물에 다른 두 관점, 즉 두 체계를 가질 것이다. (74) [지성의 경향(체계)와 직관의 경향(체계)]
간단히, 결론적으로 철학에서 반대되는 학설들 반대되는 체계들이 반대되는 관점들로 있다. .. 밖으로부터 다룬 관점들이 있고, 안에서 보여진 실재성은, 즉 안으로부터 파악된 실재성은 다른 것이다. (75)
만일 개념들을 가지고 철학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기에 이를 것인가? 우리는 철학적 인식으로부터 개념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그러나 ... 우리는 다른 절차를 시도해야 한다. 개념적 사고보다 상위인 절차를 시도해야 한다. (75)
그 절차는 어떤 것인가? 내가 불렀던 이름이 있고, 이미 이런 표현을, 즉 “지적 공감(sympathie intellectuelle)”, 직관(intuition)을 사용했다. (75)
당신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가? 존재들과 사물들이 보기보다 서로 서로 훨씬 덜 외재적이라는 것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75)
사물들과 존재들의 상호 외재성은 적어도 인위적인 인격성의 어떤 겉보기[현상]이며, 삶에 필연적인 어떤 것의 겉보기 일 뿐이다. 왜냐하면 존재들의 이기주의처럼, 삶은 분리작용을 요구하나, 그러나 그것은 삶의 필연성이지 사유의 필연성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이기주의를 아마도 초월할(transcender) 수 있는데, 습관적 생각의 노력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노력을 행하는 조건에서 그렇다. 습관적 사고는 개념들로부터 사물들로 가는데 있다.(75-76) [사물들, 즉 실재성으로부터 그림자, 사물, 추론, 이데아로 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더 좋은 길, 다른 길로 가는 것, .... 우리가 말하는 그 절차는 극히 힘든 노력을 요구한다. 나는 그것을 지적 팽창(la dilatation intellectuelle)의 노력이라 부를 것이다. (76)
이런 사유 방식은 앞선 방식(기호, 일반화, 개념화, 추상화)과는 반대 방향이다. 우리는 개념들로부터 사물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로부터 개념으로 갈 간다. 우리가 사물들 속에 즉시 스스로 위치하기를 시도하자. (76) [좀더, 아페이론 속에 위치하자]
만일 내가 연속성 속에 있다면, 내가 일종의 공감에 의해 연속성에 재위치 한다면 가는 길 전체에서, 나는 연속성에 다룬 개념들을 만난다. ..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돋을새김의 대상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 (76)
다른 방식에서는 .. 직관의 도움이 필요하다. .. 즉 습관적이고 정상적인 사고에서는 개념의 측면으로부터 이다. 다른 측면의 길이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철학적 반성도 특히 가능한 형이상학적 성찰도 없다. (77)
이 해에 다루어야 할 것, 그것은 시간즉 지속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이론들을 검토할 것이다. (77). [또 다른 이론은 플로티노스의 것이겠지요.]
지속과 시간은 일종의 개념적 표상에 따라 굴절되어 있다. .. 시간을 가장 외적인 형식 하에 파악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 속에 완성된 운동의 형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시간을 이렇게 표상하는 것, 그것은 운동을 통일성처럼 생각하는 조건에서 등속운동(le mouvement uniforme)이다. (77) [등속(균일) 운동이란 모든 운동은 동일하게 수량화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즉 무한히 자를 수 있고, 측정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간을 이렇게 외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특수화되어 있는 많은 부분들에게 시간을 상징적으로[표식법으로]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의 관념, 개념적 표현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77) [그래도 물리적 대상의 운동을 통일과학이라 할 수 있다. 생명체의 생장과 진화는 하나의 시간개념이 아니다.]
[운동을 파악하는 방식: 첫째: 안에서 절대적, 둘째: 밖에서 상대적]
공간 속에서 이런 운동을 보는 또는 그리는 방식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방식으로.. 팔을 들어 올리는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운동에 대해 내재적이고 불가분의 지각작용을 갖는다. (78)
다른 하나[둘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적 표상[재현]이기 때문이다. .. 이 가설은 시작에서 조금 놀랍게 나타난다. 그러나 운동체를 단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쳐다볼 뿐이다[외적으로]. 운동체는 공간에서 위치들을 차지한다. 그것은 정해진 점들 a, b, c, d를 지나간다. 이것은 a, b, c, d라는 점들로된 연속이다. 이것이 이차적 허구(la second fiction)이다. 이 계속은 개념들로 분명하게 번역가능하다. (78)
실재성으로 보아, 시간은 둘째 표상 속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또는 만일 시간이 거기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은연중에 그리고 암묵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 위치는 멈춤(arrêt, 정지)이고 당신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무한히 짧은 멈춤이라 하고 싶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멈춤이다.(79)
당신들은 움직이지 않는 a, b, c, d라는 일련의 점들을 갖는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서 당신들은 결코 운동을 그리고 시간을 만들지 못한다. (79)
당신들이 보기에 a에서 b로, b에서c로 이행이 있다. 그러나 운동의 다른 조건에 되돌아가면서 만이 이런 이행을 다리 표상할 수 있다. 즉 내적인 조건에서는 운동은 불가분의 작동(l’acte indivisé)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팔을 들어 올릴 때, 당신들은 그것에 대한 내적 감정을 갖는다. 내가 이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운동체는 a와 b 사이에 위치한 모든 점들을 a1, a11, a111로 이행하는 조작(l’opération)이다. (79)
당신들이 이렇게 추론할 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운동체가 a1로 있는 한 그것은 부동(immobile 정지)이다. .. 당신들이 이런 관점에 머무는 한, 당신들은 운동도 지속도 갖지 못한다. (79-80)
따라서 지속이 실재적으로 운동처럼 생각되고 지각되면, 지속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80)
지속은 마치 우리 의식 상태들의 연속과 같다. 왜냐하면 지속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주 깊은 바탕에서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0) [여기서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깊은 바탕의 탐구는 기억의 탐구(MM)이다.]
[의식 상태에서 두 가지: 첫째: 병치(계속), 둘째: 지속(연속)]
그러면 그때[깊이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우리는 심리학적 연속을 발견한다. 여기서 이 상태들을 표상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방식] 당신들은 하나의 상태, 둘째 상태, 셋째 상태를, a, b, c 등등의 상태들을 표상할 수 있다. 이 상태들은 병치되어 계속된다. ../ 그래요, 이것은 개념으로 표현된 지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하지 않는 지속이다.
[둘째 방식] 실재적으로 지속에 관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앞선 것과 뒤따르는 것의 침투(une pénétration)를 필요로 하며, 연속성을 필요로 하고, 기억(la mémoire)을 필요로 한다. (80)
그것이 진실로 심리학적 상태이면, 과거의 어떤 것이 현재의 어떤 것 속에 존속할 것이다(subsister), 만일 현재 순간이 뒤따르는 순간에 아직 있지 않다면, 그러면 그 상태는 끝나고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것이다.끝나고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의식, 그것은 무의식(l’inconscience)으로부터 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의 앞선 부분들이 차후의 부분들 속에, 즉 다음 부분들 속에 이어짐(prolongement, 연장, 延長)이 있다. (80-81)
개념적 표상은 더 이상 지속이 아니며, 흐름(l’écoulement)이 아니다. 흐름은 그 내부에 자리를 차지할 때만 파악된다. .. 구별된 다수성(다양체)도 개념적 표상도 더 이상 없다. (81)
우리는 항상 이런 딜레마앞에 있다. 즉 한편, 표상은 그러한 자연(본성)으로 자신은 개념을 회피한다. 그러면 그때에 표상은 직관적이고, 표상은 움직이는 것의 흐름 속에 스스로 자리 차지하는데 있다. 그 표상은 개념적이 아니다. .. 다른 한편사람들은 실재적으로 개념적 표상을 다룬다. 그러나 지속은 회피한다. 만일 사람들이 지속을 파악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표상의 첫째 양식을 재통합[재적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첫째 표상을 유지하고서, 그 첫째 표상을 둘째 표상에 도입한다. (81)
이런 시간은 본질상으로 상징적으로[수학적 기호로] 표현될 수 없다. (81)... 이런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초기에 제기되었다. .. 다음 5강의에서 다룰 것이다. (82)
*
[누군가 지난 강의에서 두 개의 쪽지로 반대 견해를 보냈다. 이에 대한 시간 할애]
그러나 나는 의도를 가지고, 이 강의 수강자 둘이 나에게 보낸 두 가지 반대에 응답하기 위해 잠시(몇 분을) 할애할 것이다. 이 반대는 게다가 부수적(incident) 질문에도 관계있다. (82)
우리는 다음해 또는 적어도 그 다음해에 생명의 이론 문제에 관하여 여러 해 걸쳐서 시작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관점에서 생각할 것이며, 생물학적 여러 다른 이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철학적 관념들의 관점에서 생각할 것이다. (82) [“창조적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표현 같다.]
[첫째 질문에 대한 응답:
반대는 이와 같다. 당신들은, 생명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우리에 의해 지각된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시각적으로 우리에게 지각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말하기를 거기에 모든 상징적 통찰(une vision)이 있고 심지어 이중적으로 상징적 통찰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눈은 생명의 기호이며, 생명의 상징이고 그 자체로 상징인 조직화된 신체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징에 의한 상징이 즉 이차적인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82) [눈이 기호이고, 또한 눈에 의해 지각되어 받아들여진 기호가 있다. 눈은 영혼의 기호이고 사물의 기호는 눈의 기호이다. MM을 읽으면 지각 작용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그 중에 하나는 외부와 연관 없는 기억 속에서 지각작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 내부 지각작용이 벩송 영혼론이다. (55LMD)]
외적 지각작용, 신체들의 지각작용은 기호들만을, 즉 순수하게 상징적 실재성만을 파악하고 싸안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 이 강의에서 전개되고 또는 잠재적 견해인지를 묻는다. (82)
내가 되돌이켜 보면, 나는 앞선 강의에서 정확하게 이와 반대를 말했다. 나는 지각작용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상징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 지각작용이 실재성의 기호들일 뿐이라고 헬름홀쯔(Helmholtz, 1821-1894)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선언했었다. (83)
그러면 어느 때 기호가 있는가? 기호가 있었기 위해서 필요충분조건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기호가 필연적으로 고정자(fixateur)라고 말했었다. 특별화하고 상징화하는 것은 고정하는 것이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83)
그런데 사물들의 무매개적 지각이 있다. 우리는 사물 전체를 즉시 지각한다. [이때에] 우리는 부분들에서 전체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부분으로간다. ... (83) [여기서 사물은 의식, 즉 기억이며 영혼을 의미한다. 기억은 전체에서 부분이 표면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에 대한 지각작용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전체로부터 떼어낸 어떤 것의, 즉 전체의 조각일 뿐인 것의 지각작용을 갖는다. 게다가 우리는 실재성은 움직이고 있고, 본질적으로 운동이라고 말했다. (83)
지각하다는 고정하다이며, 움직이지 않게 하다이다. 그것은 행동의 필요들에서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게 한다. .. 전체가 운동일 때, .. 이러한 이유들에서 우리의 지각작용은 상징적이고, 우리의 눈도 지각작용의 기관인 한에서, 말하자면 행동의 기관인 한에서, 상징적으로 생명적 필연성을 준비하고 표상하며, 상징주의(ce symbolisme)를 생겨나게 하다. 따라서 지각된 모든 신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상징적으로 지각된다. (83) [MM에서 이런 상징을 이마쥬라고 불렀다. 우주는 이마쥬의 총체이다. 신체도 이마쥬이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나의 신체를 직관한다. .. 따라서 이마쥬 전체를 기억을 통해서 직관하기에 부분을 직관한다.]
만일 그것이 생명체이지 어떤 물체가 아니라면,그 상징주의는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그 물체는 전체의 고정되고 분리된 부분만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어떤 불가사의한 작업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작업[기억]의 비밀을 철학자가 찾아야 하고, 그러나 우리는 불가사의한 작업 중의 외적인 것[감각기관]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 이러한 모든 것[유기체의 기능기제]은 단순한 열쇠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기능을 미리 느끼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맞힌다. 이러한 것은 복합물로부터 나온다. 이 복합물[신체]은 단순한 것과 동등한 복합물이다[신체의 행동은 단순하다]. 정의상으로 그것은 기호이다. (84)
이다. (84)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차적 상징주의, 이중의 상징주의(un double symbolisme)가 있다고 말할 권리를 갖는다. (84) [현대는 삼중 중첩적 상징주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에서 신체로 도구화, 그리고 신체의 연장으로서 도구화(포크레인), 이런 도구화의 의한 도구화(전자현미경, 전파망원경)이 있다. 그럼에도 의식에서 지각작용에 의한 기억의 적분은 여전히 확장적이고 푸풀어간다.] [이중의 상징주의는 나중에(11강)에서 이중전개(dédoublement, 분화)로 설명할 것이다. (55LMI)
[둘째 질문에 대한 응답]
둘째 질문에 관하여, 다윈주의가 중요하다. 우리는 다윈이론에 대해 이미 지나가면서 말했었다. .. 다윈 이론에서 생존 경쟁에서 장점으로 표현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미세변이들이 계속 있다] (84)
사람들은 내가 “우연(hasard)”란 단어에 대해 발언했다고 나에게 말한다.내가 우연이란 단어를 발언했는지 상기하지 못하다. 우선 아자르란 없다. 즉 아자르에 기인한 변이는 없다. 사람들이 만일 원인의 부재를 우연으로 듣는다면 – [우리는] 우발적 변이(une variation accidentelle)라고 말하자. (84)
보다 심각한 것이 있다. 다윈은 가장 경미한 변모들이 깊은 변모들로부터 또는 어느정도 존재 자체의 생명적 변모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했으리라. 그런데 그가 그것을 인정했는지를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84)
종의 기원(L'Origine des espèces, 1859)의 처음 몇 쪽에서 몇 가지 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예들은 한 개별성과 다른 개별성들 사이에 상관관계들로서 고전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는 개별성과 살아있는 존재 전체사이에, 개별성과 생명의 불가분적 내적 원리사이에, 개별성과 내가 생명적 노력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85)
그[다윈]의 유전(l’hérédité)의 설명에서 기계론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거기에는 본질적으로 기계적인 가설이 있다. .. 이 가설에 따르면, 개별성들은 생명성 자체에, 즉 유기체의 생명성의 전체성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85) - [우연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고, 벩송이 EC에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할 것이다. - 원자론자의 조합에 의한 생성도 우연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다.]
다윈의 이론은 기계론적 본성의 이론이다. 거기에서 차이들은 서로서로 보태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불가분적 원리 안에서 내밀하게 상호 침투되는 것이 아니다. (85) [2강에서 간단하게 기표화와 노력이란 개념으로 다윈과 코프를 예로 끌어냈다. 여기서 다윈을 이론적으로 기계론이라고 한다.]
다윈 이론은 그리스 기계론 철학자들의 몇몇 이론들과 가깝다. .. 그 유사점은 형이상학의 철학적 관점에서 있다. (85) [벩송은 EC를 쓰기 전에 이때 이미 다윈의 기계론적 가설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 앵글로 색슨 철학은 고대철학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기에 네오스콜라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4UKA)]
(10:12, 55LME) (10:16, 55L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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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기베르드/질베르(William Gilbert, William Gylberde, 1544-1603) 영국 의사, 과학자. 물체의 자성(磁性)을 연구했으며, 자성, 자성 물체, 지구 인력(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 (Du magnétisme et des corps magnétiques, et du Grand Aimant Terre, 1600)을 썼다. 이 책은 항해가이며 발명가인 노르만(Nobert Norman, 16세기)의 새로운 인력(The Newe Attractive (1581)에서 지남철을 소개한 것에 영향을 입었다. 질베르는 전기가 충전되어 있음을 알리는 « Versorium(탐전기) »를 발명했다.
1700 신부 놀레(Jean Antoine Nollet, l’abbé Nollet, 1700-1770)는 1747년에 이것을 딱총나무덩이검진기(électroscope à boules de sureau)가 불렀고, 그리고 1750년에 금박검진기(premier électroscope à feuilles d'or)라 불렸다. 그리고 프랑스 물리학자 꿀롱(Charles-Augustin Coulomb, 1736-1806)이 1785년에 전하량을 계산할 것이다.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 영국 신학자, 분파 성직자, 자연철학자. 화학자. 그는 전기성의 역사(Histoire de l'électricité, 1767)에서 질베르를 전기학의 아버지라고 했다.
1801 뮐러(Johannes Peter Müller, 1801-1858) 독일 의사, 생리학자. 어류학자, 비교해부학자. 시각에 대한 비교 생리학(Zur vergleichenden Physiologie des Gesichtssinns, 1826)은 헬름홀쯔에게 영향을 준다.
1809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 영국 박물학자 고생물학자. 종들의 기원(L'Origine des espèces, 1859)
1821 헬름홀쯔(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 독일(프러시아) 생리학자, 물리학자. 소리, 색깔, 열역학에 대한 지각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생리학적 시각론(Optique physiologique, 1867)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같은 논리주의자에 속한다.
1952 크레띠앙(Jean-Louis Chrétien, 1952-2019), ENS 일등 입학자(1971). 교수자격도 1등(1974). 그의 어머니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시인, 카톨릭 신학자. 넓은 환희(La Joie spacieuse: essai sur la dilatation, 2007)
(54UKA) (11:04, 55LME) (11:16 55L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