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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네 가지 시적 정식에 관하여, 칸트철학을 요약할 수 있을까.
(Ch 5. Sur quatre formules poétiques qui pourraient résumer la philosophie kantienne)
- Philosophie, n°9, hiver, 1986.
Gilles Deleuze, dans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40-49.(P.191)
-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칸트는 경건파 크리스트교인으로서 충실하게 살면서, 3비판서를 통해서, 상층에서 신에게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법률(또는 도덕률)을 정해 둔다. 그는 착하게 살기 위해 현상에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시간 속의 삶을 펼친다. 현실에서 그 삶에는 부조화 또는 불일치가 많다. 그럼에도 펼쳐진 시간 속에서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극한에서 목적론을 성취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조화를 이룬 삶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삶이 상층에서와 다른 삶이라는 측면에서, 임의적 자유를 누리는 삶이라 한다. 물자체에서 출발하지 않아서 근원적 자유를 구출해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적론을 넘어서는 천재성의 발휘는 자유이다. 마치 예술에서 창조, 물체에서 기계의 발명, 이론에서 학문적 창안이 자유이듯이, - 천재성의 발휘가 특히 시와 음악과 같은 예술적인 측면과 연관이 많다고 여긴다면, 들뢰즈는 니체를 스피노자의 제자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들뢰즈의 이 논문을 읽으면 니체야 말로 ‘자유로운 놀이’를 하며 천재성을 발휘한 칸트의 수제자인 셈이다. - 이 논문을 찬찬히 읽으면, 들뢰즈가 니체에서 전복이라는 의미를 심층의 권는으로부터 찾은 데 비해, 그는 칸트 속에서도 상층과 현실 사이에서 전복을 찾아내어 전개하였다. 이런 방식은 니체가 행한 전복보다, 들뢰즈가 행한 칸트 자체를 읽으면서 문학적 전복을 이렇게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진진하다. (54VKDE)
시간, 즉 공간 위의 이동으로 생각하는 것, 수직선 위의 점들의 계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에 따른 것이라고 벩송이 자세히 설명한 것은 강의록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에서 이다. 그리고 벩송은 자신의 저술 창조적 진화(1907)에서는 천상의 움직임을 재는(mesurer) 것과 지상에서 움직임을 세는(compter) 것 사이에 차이를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 강의록에는 두 철학자 사이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가 이 강의록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시간을 셀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 시간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차이와 반복(1969)에서 반복의 시간의 두 종류로서 동일성 반복의 나열과 이질성 반복의 확장 사이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대의 동질성의 반복의 차이를 드러내는 4가지 계기를 제시하고, 각각에 연관된 문학에 적용함으로써, 아주 다르게 시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관점들을 제공한다. 시간을 다루는 데는 양면성이 있다. 순수 사변적으로 그리고 행동(실천적으로. 하나는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를 거쳐 칸트로 설정하였고, 다른 하나에서는 햄릿, 랭보, 카프카를 제시한다. 그럼에도 칸트에서 미학적(파토스) 종합이 있고, 여기에서 의식의 내면은 이중화(dédoublement)이다. 칸트 속에서도 무의식이 실재하고 있는 셈이다.
고대로부터 시간은 영원이라는 관점과 결합하여, 거기에 종속되거나 모방하는 정도의 시간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여기서는 우선 갈릴레이를 등장시키지 않고 셰익스피어를 등장시킨다. 시간을 지나가게 하는 문쩌귀(지도리)가 떨어져나가, 이제는 하나하나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구 쏟아져 나가며 또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나간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기가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것이다. 계몽기의 칸트에게서는 순수이성 비판(1781 ; 2nde éd. 1787)의 공간에 대한 실재성을 수직선처럼 생각하고, 시간은 감성에 속하기에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은 자율적 형식 또는 자치적 형식이라 보았으며, 즉 하늘에서보다 인간에게 달려있다(의존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전복에 해당한다.
둘째로 데카르트가 실체의 이원성을 제시하면서, 자아를 존재(현존)로 또한 사유하는 사물(대상)로 이중화하였는데, 이는 자아가 영원에서 벗어나 세속화와 탈종교화를 드러낸다. 나아가 칸트는 시간의 해방을 작업하여, - 실체로서 자아는 영원을 전복하는 것이 될 수 없고 자아의 자치와 자유를 실행한다는 점에서 해방이며, 이 해방은 신 또는 절대자로부터 이며 절대자보다 상위가 될 수 없기에 전복일 수 없다 - 시간의 탈종교화를 완수했다고 들뢰즈는 본다. 해석하자면, 칸트의 오류추론에서는 사유(영혼)의 인식하는 능력은 한계에 머물고, 이에 대한 직관(또는 이성)은 통일성을 인정하고자 하지만, 영혼불멸로서 영혼의 실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식의 주체와 대상으로서 이중화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양면성으로 통일된 결말을 이루지 못한다. 칸트의 탈종교화는 방황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황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스콜라적인(néo-scolastique) 요청이 필요하다. 그 요청의 꼭대기에 원리 대신에 법(또는 법칙)을 올려놓는다. - 원리로부터 자아의 해방이 또 사회(또는 국가, 제국)에 의해 법의 지배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원리대신에 법에 구원을 청하는 제2스콜라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은 신의 명령과 달리 구원이 없다. 피상적 방면과 무제한 유예라는 발상을 카프카가 하게 될 것이다.
삶(현존)에서는 순수이성 비판의 한계를 넘어, 실천이성비판(1788)의 온선의 대리자로서 법이 필요하다. 이 법은 당연히 라는 신의 원리(법) 이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법률들이다. 들뢰즈는 칸트가 이 법을 순수하고 빈 단일성으로 올려놓아서, 고대의 온선(Bien)의 우선성을 법의 우월성(절대성)으로 전복해 놓았다고 본다. 그 절대선은 텅 비어 있고,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카프카가 제시했듯이, 관료제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법률적 평결에 의해 겉보기 방면(l'acquittement apparent)으로 살거나, 또는 무제한 유예(l'atermoiement illimité)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제도에 예속된 삶이다. 넷째로서 이탈, 탈주, 파생, 전쟁기계(또는 노마드)는 다른 삶을 추구할 것인데, 들뢰즈는 달리 사는 삶의 예로서 예술을 든다. 따라서 칸트의 판단 능력의 비판(1790)으로 넘어갈 것이다.
여기서 판단(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오성 또는 속좁은 이성의 작업으로도, 그리고 실천의 영역에서 방면과 유예의 삶도, 진솔한 탈주의 길을 열어주지 못한다. 더불어 예술적 능력으로서 에스테틱은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처럼 수용체인 것과 달리, 능동적 능력으로서 미래의 추구와 맞물려 방향을 잡을 것이다. 이 새로운 두 비판적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복은 최종심급이 미래(다음세상, 다음인간)에 있다. 또한 활동과 작업의 능력은 로고스가 아니라 파토스에 있다. 현실과 현존에서 불일치와 부조화를 통일성(융화)을 이루는 조화가 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통일성인 단위로서 인격은 시간의 근원(la source)이다. 이로서 들뢰즈는 칸트에서 새로운 예술적 창안의 인격성(정체성)을 플로티노스와 벩송처럼 근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이런 점에서, 인격의 나아갈 방향으로 자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본 피히테보다, 예술적 창조로서 자아의 완수(완전이 아니다)로 나아가는 놀이를 하는 다음인간을 말한 이는 니체이며, 니체는 시인이며 음악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체의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La Naissance de la tragédie à partir de l’esprit de la musique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의 긴 제목을 다시 보아야 할 것이며, 들뢰즈는 니체의 비극 탐구에서, 플라톤의 아에스테틱(파토스)에서 수동성보다 능동성을 보았다고 보는 것이다.
시간의 선을 따라 사는 인격성(자아)는 자신의 실을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시간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 삶이 시이며, 음악이며, 발명이며, 창안이며, 창조인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어렵고 또한 그런 사람이 드물기에, 벩송이 말하는 신비가,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 드물다. 그럼에도 누구나 감성(파토스)의 능동성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노력과 선택에 따라 보살이 될 수 있는 길을 무한하게 넓게 열어 놓았다. 햄릿의 싯구(지도리가 빠진 문)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에서 현자들은 그렇게 말하고 살아왔고, 또한 현재도 그렇게 살고, 아제에도 아제인간들이 그렇게 살 것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54VKF)
# §05. 네 가지 시적 정식에 관하여, 칸트철학을 요약할 수 있을까. 40-49.
(Ch 5. Sur quatre formules poétiques qui pourraient résumer la philosophie kantienne, 1986) 40-49
“시간은 자기 경첩 밖에 있으며…”
셰익스피어, 햄릿, I, 5.
경첩들(les gonds)은 문이 그 주변을 회전하는 축이다. 경첩(le gond, Cardo, 지도리)은 정확하게 기수의 점들에게 시간이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키며, 이 점들을 통해서 시간이 측정하는 주기적 운동들이 통과한다. 시간이 자기 지도리 속에 남아있는 한, 시간은 외연적 운동에 종속된다. 시간은 그 운동의 척도이며, 간격이자 수(nombre)이다. (40)
운동들의 위계질서가 전체로서 있을 것이고, 이는 영원한 것(l’Eternel)으로 운동들의 접근에 따라서, 그리고 운동들의 필연성, 완전성, 일관성, 회전, 복합적 나선들, 축들, 특별한 문들에 따라서, 운동들에 상응하는 시간의 수들(les nimbres du Temps)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해방되려는 시간의 경향이 있고, 그때 시간이 측정하는 운동 그 자체는 점점 더 이탈적(aberrant)이고 파생적(dérivé)이며, 기상학적이고 지표적인 물질적 우연들로 표시 될 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운동의 모험들에 의존하는 낮은 것을 향한 경향성이다.따라서 시간은 자신의 본래적 그리고(et)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 (40-41)
지도리를 벗어난 시간, 경첩들을 벗어난 문은 칸트의 첫째 중요한 전복을 의미한다. 즉 시간에 종속되는 것이 운동이다.시간은 자신이 측정한 운동에 더 이상 연관이 없고, 운동은 운동을 조건지우는 시간에 연관이 있다. (41)
시간은 신에 의해 곡선으로 되기를 그만 두는데, [이전에는 고대철학에서는] 신이 시간을 운동에 의존하게 하였다. [또한] 시간은 기수(基數)이기를 그만두고 서수(序數)가 되며, 텅빈 시간의 질서가 된다. 그 시간 속에는 운동에 의존하는 기원적인 것도 파생적인 것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원도 나선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실(fil), 하나의 순수 직선이다. 단순하고 냉혹하며 무서울 만큼 더욱 불가사의한 실이다. - “ 하나의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로, 분할할 수 없고 끝없는 미로”횔더린은 더 이상 운(韻, rimer)에 맞지 않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서 외디푸스가 완만한 죽음으로 이어진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41)
햄릿은 행동하기 위하여 진실로 시간을 필요로 했던 첫째 영웅이다. 반면에 앞선 영웅은 본래적 운동(아이스퀼로스)이나, 비정상적 행동(소포클레스)의 결과로 시간을 받아들인다.순수이성 비판은 북쪽의 왕자인 햄릿의 책이다. 칸트는 전복의 범위 전체를 파악하게 허락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있다: 시간은 기원적인 천구의 운동으로부터 나온 우주적 시간이 더 이상 아니고, 파생된 기상학적 운동의 시골의 시간도 아니다. (41-42)
시간을 규정하는 것은 계속이 아니다. .. 영속, 계속, 동시성은 시간의 양태들 또는 연관들(지속, 계열, 집합)이다. 그것들은 시간의 섬광들(les éclats, 파편들)이다.(42)
시간은 변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의 형식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의 형식, 변화와 운동의 불변 형식인 것이다. 이러한 자율적(자치적) 형식은 깊은 불가사의를 지칭하는 것 같다. 이 자치적 형식은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정의를 요청한다. (42)
“‘나(Je)’가 다른 ‘나’이지.…”
랭보 「1871년 5월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1871년 5월 15일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시간에 대한 고대의 다른 개념작업이 있는데, 이는 마치 사유의 양태처럼 또는 영혼의 강도적 운동과 같아서, 일종의 정신적이고 수도사적인 시간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시간의 환속화(la sécularisation), 즉 탈종교화(la laïcisation, 세속화) 한다. “나는 생각한다(le je pense)”는 순간적인 규정화의 한 작동(un acte)이며, 이 작동은 비규정적 현존(나는 있다, je suis))을 함축하고 또한 그것을 사유하는 실체(나는 생각하는 사물이다, je suis une chose qui pense)의 현존처럼 규정한다. .. 그런데 칸트의 요청은 다음 것과는 다른 출구를 내놓지 못한다: 즉 비결정적인 현존이 규정 가능한 것은 오직 시간 속에서, 시간의 형식 하에 있다고 한다. (42-43)
따라서 규정가능성의 형식으로서 시간은 영혼의 강도적 운동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순간에서 의식의 정도에 대한 강도적인 생산작업은 시간에 의존한다. 칸트는 시간에 대해 둘째 해방을 작업하였으며, 시간의 탈종교화(세속화)를 완수 한다. (43)
자아(Moi)는 시간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은 수동적 자아이며, 오히려 시간 속에서 변화를 체험하는 수용적(réceptif) 자아이다. .. 나의 현존은 능동적이 자발적인 존재의 현존처럼 결코 규정될 수 없다. 그러나 수동적 자아의 현존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수동적 존재는 나(Je)로서 - 규정작업의 자발성으로서 - 대리(재현)되고 나를 감화시키는 온타자처럼(“내밀한 의미의 역설”) 규정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외디푸스는 순수하게 수동적 태도에 의해 정의되고, 그러나 그 수동적 태도에 죽음 후에까지 이어지는 능동성이 연관되어 있다.하물며, 햄릿은 자신이 수동적인 현존처럼 나타날 때 마다 현저하게 칸트적인 성격을 알리는데, 그 수동적 현존이, 배우이든 잠자는 사람이든, 순수이성에 도전하는 위험한 힘을 자기에 줄 수 있는 온타자처럼 자기 사유의 활동성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것이 베케트(Beckett, 1906-1989)의 머피(Murphy)의 메타불리(métaboulie)이다. 햄릿은 회의주의 또는 의심의 인간이 아니라, 비판주의의 인간이다. (43)
간단히 주체의 광기[근대적 지성 인간의 광기]는 나사(경첩, 지도리) 풀린 시간에 해당한다. 이는 시간 속에서 나(Je)와 자아(Moi)의 이중적 우회(un détournement)와 같은 것이다. 이 이중적 우회는 서로서로 연관을 맺고, 서로서로를 바느질하듯이 꾸맨다. 그것은 시간의 실이다. (44) [심층에서 자아의 이중화의 발현에는 여러 속성들과 더불어 두 가지 속성과 같은 방식인데, 이 두 속성을 꾸매는(수렴하는) 자아가 현존의 자아이다.]
어떤 방식으로 보면 칸트는 랭보보다 더 멀리 나간다. .. 칸트에 있어서 ‘나(주어)’ 개념이라기보다 모든 개념을 동반하는 표상[재현]이다. 자아는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계속적 상태의 연속적 변주(變奏)에 연관하는 것처럼, 순간에서 자신의 정도들에 대해 무한한 변조(變調)에 연관하는 것처럼, 모든 대상들이 연관하는 자아이다. 대상-개념 연관은 칸트에게 남아있으나, 나-자아에 의해 이중화된 체 있다. 나-자아는 주조(un moulage, 鑄造)가 더 이상 아니고, 변조(變調)를 구성한다. (44) [고대철학은 개념이 거푸집에서 형성되는 것과 같은 데 비해, 바로크(계몽기) 이래로 화음의 역할로 개념의 미세 차이는 변조와 닮았다.]
우리는 칸트에서 마치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을 듣는 것처럼, 곧바로 변주곡은 바그너(Wagner, 1813-1883)를 연속한다. (44)
만일 ‘나’가 우리의 현존을 마치 시간 속에서 변하는 수동적 자아의 현존처럼 규정한다면, 시간은 형식적 관계이며 방법인데, 이 형식적 관계에 따라 정신은 스스로 감화되고 또는 방법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 내적으로 감화 받는다. (44)
우리를 내부에 있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 시간에 내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그리고 시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를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간에 의해 항상 분리된 자격으로 우리가 있다. 우리의 단일성[통일성]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 자신을 잘라내고, 우리를 이중화한다(dédoubler). 이 이중화(dédoublement)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끝이 없지만, 현기증, 즉 시간을 구성하는 왕복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무제한의 공간을 구성하는 미끄러짐, 떠다님과 같다. (45)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감성론이 시간의 이중성을 햄릿에서처럼 열려있는데, 그 속에 들어가는 주체(나와 자아)가 한번은 수동적(대상)으로 한번으로 능동적(행위자)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초나 결과를 알 수 있으면 규정할 수 있을 것인데, 시간과 공간을 오성으로서 규정할 수 있는 상태 또는 대상(개념)이 아닌 측면이 드러났다. 칸트에게서 나갈 길은 삶에서 행위를 위한 요청이 있다. (54VKA).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률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형벌인가!…
왜냐하면 법률들의 성격은 법률들의 내용에 관한 비밀을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카프카(Kafka, 1883-1924), 중국 장벽(1944출간) (45)
그렇게 많이 그법(laloi)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률들(des lois)은 서로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 따라서 법률들은 인식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이런 저런 경우에서 온선의 모방작용과 같다. (45)
반대로 실천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1788)에서 칸트는 법과 온선의 연관을 전복(le renversement)하게 했고, 법을 순수하고 빈 단일성(l’unicité)으로까지 끌어올렸다. .. [칸트에게서] 법[법칙 또는 자연법]은 마치 제1원리처럼 내면성도 내용물도 없다.왜냐하면 모든 내용물은 법을 온선에까지 다시 데려다 줄 것이고, 그 법은 온선의 모방작용일 것이다. (45-46)
따라서 법은 마치 보편성이라는 새로운 형식처럼 정의된다. 법은, 의지가 선하기 위해 어떤대상을 추구해야만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가 어떤 형식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고, 우리에게 단지 ‘해야만 해!’를 말한다. 즉 그 무엇(대상의) 선을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면 순수 정언명법의 대상들을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법은 인식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법속에서는 인식되어야 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법은 이론적 또는 사변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실천적규정작용의 대상이다. (46) [칸트에게서 법(자연권)은 도덕적으로 구체적 행동을 추구하기보다, 법을 플라톤적인 형상론으로 올려놓고 명령으로 말할 뿐이다.]
그 법은 자신의 판정(sa sentence)과 구별되지 않으며, 또 판정은 적용이나 집행과도 구별되지 않은다. 만일 그 법이 첫째[우선]이라면, 그 법은 “고소”, “변호(défense)”, “평결”을 구별한 어떠한 수단도 없다. ... 의무로 행하라(Agir par devoir)… 법은 다른 어떤 것도 쓰지 않았다. 프로이트(Freud, 1856-1939)는, 만일 의무가 이런 의미에서 이익들과 성향들의 포기를 가정한다면, 법은 우리의 포기가 깊은 만큼이나 더 강력하고 엄격하게 행사할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따라서 법은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 보다 더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법은 가장 성스러운 것[자]들을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법은 우리를 결코 [무죄] 방면하지 않는다. (46)
시간은 카프카의 소송에서 대안과 다른 법적인 대안을 우리에게 남겨놓지 않는다: 겉치레 방면(l'acquittement apparent), 또는 무제한 유예(l'atermoiement illimité). (47)
“모든 감관[방향]들의 규제풀림으로 미지[세상]에 도달하는 것‥…
모든 감관[방향]들의 길고도 거대하고도 사려깊은 규제풀림”
- 랭보, 같은 책.
오히려 모든 능력들의 규제풀린(déréglé) 채 실행되고 있음. 그것은 판단 능력 비판 속에서 어떤 칸트의 깊은 낭만적 제4정식(quatrième formule d’un Kant)이었으리라. 다른 두 비판서[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서 주관적인 여러 능력들은 서로서로 연관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연관들은 엄격히 규제되어 있다. ... 수 많은 능력들이 있다: 외적 감관, 내적 감관, 상상, 오성, 이성, 각각은 잘 한정[정의] 되어있다. 그러나 순수이성 비판(1781, 재판 1787)에서 지배하는 것은 오성이었는데, 왜냐하면 오성은 상상작요의 종합을 매개로 해서 내적 감관을 규제했고 또한 오성이 이성에게 할당한 역할에 이성을 복종했기 때문이다. 실천이성비판(1788)에서는 이성이 근본이었는데, 왜냐하면 법칙의 보편성의 순수 형식을 구성했던 것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위대한 작가들도 새롭게 되기에는 드문 나이에 이르러(1790년, 예순여섯), 예외적인 시도로 자신을 끌어갈 문제에 부딪힌다: 만일 능력들이 가변적인 연관들 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 능력들은 자유로운 그리고 규칙[규제]없은 연관들을 이룰 수 있다. 그 자유롭고 규제없는 연관들에서 각각의 능력은 저마다 끝까지 나아가며, 그럼에도 다른 능력들과 어떤(quelconque) 조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이것이 낭만주의의 토대로서 판단 능력의 비판(1790)일 것이다. (47-48)
이것은 순수이성 비판(1781, 재판 1787)의 감성론이 더 이상 아니며, .. 이것은 미와 숭고의 감성[능동적이고 창조적 감성]이다. .. 이것은 실천이성비판(1788)의 감화(Affect)가 더 이상 아니며, ... 이것은 파토스(Pathos)[정열과 열망]이다. .. 이것은 ‘나’가 자아의 규정가능성에 결합하는 규정작용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들을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모든 능력들/온영혼(les faculté, Ame)의 비규정적 단위(l’unité)[통일성]이다. (48) [이 단락에서 들뢰즈는 칸트의 3비판서의 진행이 인격의 영혼으로 향하고, 그 방향이 자유와 자치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해석상, 칸트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영혼의 해명 또는 해석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벩송이 보았듯이, 네오스콜라적 의미가 내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이유에서, 판단 능력의 비판(1790) 속에 있는 문제, 그것은 몇몇 현상들이 어떻게 미(le Beau)를 정의할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이 현상들이 시간의 내적 감관에게는 자율적인 보충 차원을 부여하고, 상상작용에게는 자유로운 반성의 능력을 부여하고, 오성에게는 무한한 개념적 잠재력을 부여하는가에 있다. (48)
이 여러 능력들[les facultés]은 자신들로부터 가장 번 거리에 까지 포용한다. [이 포용의 과정에서는 통합을 위한 투쟁관계가 있다.] 이것은 상상작용과 이성 사이에 또한 상상작용과 오성, 상상작용과 내적 감관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며, 투쟁의 여분 이야기(에피소드)들은 숭고(le Sublime)의 두 형식이며, 그러고 나서 천재성(le Génie)이다. [이것은] 주체 속에 열려진 심연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폭풍이다. (49) [칸트도 아페이론의 권능과 힘을 폭풍처럼 생각했을 것이라는 들뢰즈의 생각은 내재성의 권능이 괴물같지만 위대한 창발의 능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두 비판서에서 지배적이고 또는 근본적인 능력은 다른 능력들이 그 능력에게 가장 가까운 조화로운 것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극한들에서 실행에서 이 여러 능력들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조화로운 것을 상호적으로 주고받는다. 비록 이 능력들이 본질적으로 불협화의 일지들을 형성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불협화로부터 해방, 불협화의 일치, 그것은 판단 능력의 비판(1790)의 위대한 발견이며, 칸트의 마지막 전복이다. 재통합하는 분리는 순수이성 비판(1781, 재판 1787)에서 칸트의 첫 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서야 일치를 이루는 불협화를 발견한다. 모든 능력들의 규제풀린 실행은 미래 철학을 정의할 것이다. 이는 마치 랭보에게서 모든 감관들의 규제풀림이 미래의 시를 정의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칸트와 연관하여 분명하게 임의적이지만, 칸트가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남긴 것과 연관하여 볼 때는 임의적이 아닌, 4가지 정식을 제안한다. 드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는 탁월한 원문, 즉 「칸트의 만년의 날들(Les Derniers Jours d'Emmanuel Kant)」이 모든 것을 말했지만, 단지 칸트주의의 4가지 시적 정식들 속에서 이것들[사물들]의 발전[전개]을 발견하는 사물들의 이면을 말했다. 이것은 칸트의 셰익스피어적인 측면인데 햄릿처럼 시작하여 리어왕으로서 끝난다. 후기 칸트주의는 리어왕의 딸들이 될 것이다. (49) (9:03, 54VKD)
# 인명록
525 아이스퀼로스(Eschyle, Αἰσχύλος, 전525-456) 아티카지방의 엘류시우스 출생 시실리에서 사망. 그리스 비극시인.
495 소포클레스(Sophocle, Σοφοκλῆς, 전495-406) 아테네 부근 콜론 출생, 같은 곳에서 사망, 그리스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3대 비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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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국 극작가. 시인, 배우. 햄릿(Hamlet /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 La Tragique histoire d'Hamlet, prince de Danemark 1603, 리어왕(King Lear; Le Roi Lear 1606). .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러시아 철학자. 비판철학 및 선험적 관념론« idéalisme transcendantal ») 선구자. 순수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재판본, 1787). 실천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1788). 판단 능력의 비판(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1790)
1770 횔더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 시인, 고전 낭만주의 시기의 철학자. «Remarques sur Œdipe et sur Antigone» (1804)
1770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작곡가, 피아니스트
1785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 영국 작가. 문학 비평가. Confessions d'un mangeur d'opium anglais (1821). tr.fr. Les Derniers Jours d'Emmanuel Kant, (이 논문은 우선 1827년에 Blackwood's Magazine에 실렸고, 1854년에 Selections Grave and Gay 재수록되었다. )
1813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 작곡가, 극장 감독관, 작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1844 니체(Friedricha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철학자. 문화비평가, 작곡가, 시인, 문헌학자.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La Naissance de la tragédie à partir de l’esprit de la musique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
1844 드므니(Paul Demeny, 1844-1918) 프랑스 시인, 랭보와 위고의 친구.
1848 이장바르(Georges Izambard, 1848–1931) 프랑스 수사학 교수. 랭보의 친구./est un professeur de rhétorique, qui devint l'ami d'Arthur Rimbaud, son élève à Charleville.
1854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서른일곱) 프랑스 시인.
Les lettres à Izambard et Demeny pendant la Commune (mai 1871) - « Car Je est un autre. Si le cuivre s'éveille clairon, il n'y a rien de sa faute. »: (extrait de la lettre à Paul Demeny (dite lettre du Voyant), 15 mai 1871)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신경학자. 정신분석 창설자.『문명속의 불만/문화에서의 불안』(Das Uehagen in der Kultur),1930
1866 체스토프(Léon Issaakovitch Chestov, 1866-1938) 러시아 변호사, 작가, 철학자. 러시아 키에프 태생, 파리에서 몰하다. 까뮈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 아테네와 예루살렘(Athènes et Jérusalem, essai de philosophie religieuse, 유작 1951. 선집(Pages choisies (Anthologie), Paris, Éd. Gallimard, 1931, traduction Boris de Schloezer. / 함정에 빠진 인간: 푸시킨, 톨스토이, 체홉(L'Homme pris au piège. Pouchkine, Tolstoï, Tchekhov)(1966 유고집), traduction Sylvie Luneau et Boris de Schloezer, Paris, Union générale d'éditions, coll. « 10/18 », 1966 ;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마흔하나) 오스트리아-헝거리 작가. 소설가. La Muraille de Chine, 1944 출간(neuf textes, Paris, Seghers, traduction Jean Carrive).
1899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 아르헨티나 작가. 픽션(Fictions, 1944) 「죽음과 나침판」
1906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태생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소설 머피(Murphy, 1938)
1907 보프레(Jean Beaufret, 1907-1982) 프랑스 철학자. 하이데거와 우정을 가진 독일 사상 연구자.
1957 알리에(Éric Alliez, 1957-) 프랑스 철학자. 1977년에 가타리와 더불어 공부하면서 1984년에 가타리와 더불어 자본주의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들뢰즈 지도하에 박사(년도 미상). 여러나라 대학교수를 거쳐서, 2011년 파리 8대학 교수로 선출. / 중요한 시대들 1 (Les Temps capitaux, Tome 1, Récits de la conquête du temps 1991)(서문을 들뢰즈가 썼다.) 중요한 시대들 2 (Les Temps capitaux, Tome 2, La Capitale[중심지] du temps, 1999). - (dir.)Gilles Deleuze. Une vie philosophiqu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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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의 목차
1. 미학상 판단력비판
1.1. 미학상 판단 분석론
미의 분석론
취미판단의 제일 양식 - “성격”
취미판단의 제이 양식 - “분량”
취미판단의 제삼 양식 - 목적의 “관계”
취미판단의 제사 양식 - 대상 “양태”
숭고 분석론
수학상 숭고에 관하여
역학상 숭고에 관하여
1.2. 미 판단론의 변증론
2. 목적론상 판단력비판
2.1. 목적론상 판단력의 분석론
2.2. 목적론상 판단력의 변증론
[칸트는 판단능력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놀이(« libre jeu »)를 통하여 미적 만족에 이르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11:02, 54VK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