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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유사상을 가진 정부 관리였고 어머니는 학력이 높았으며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았다. 삼촌이 러시아 해군 장교였고 큰형도 해군 관리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향이 컸다. 12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고 그는 이곳에서 해군학교에 들어갔다. 15세 때 테오도레 카닐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카닐레는 직업적인 피아니스트로 그에게 작곡 기초도 가르쳐주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1844년 3월 18일 러시아의 티흐빈에서 은최한 육순의 노인과 후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차남이었고, 니콜라이가 태어났을때 형의 나이는 22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그의 음악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나봅니다. 두 살도 채 안된 아이가 멜로디를 분간하고 세살때는 북을 박자에 맞춰 북을 두드리고 들은 곡을 외워서 피아노로 치는 신동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꿈은 어렸을때부터 해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이 많은 형이 해군이었는데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열 두살에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것처럼 뛰어난 생도가 되었죠. 그곳에서도 음악수업을 받기는 하였으나 선생이 무성의해서 별로 진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 오면 가족과 오페라를 감상하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지냈답니다. 베토벤, 멘델스존, 글린카 의 음악에 푹 빠져 그들 곡을 연주하는 곳에 쫒아다니느라 주머니가 비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악기의 특징이나 음색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글린카의 <황제에게 바친 목숨>간주곡을 편곡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이년 동안은 형 밑에서 배를 타고 다니다가 사관학교로 돌아와서 카뉴라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선생님과 림스키는 취향이 비슷하여 공부하는것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카뉴는 림스키를 발라키레프 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요, 발레키레프는 림스키를 음악의 길로 강력히 끌어들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뉴에 의해 무소르크스키와 퀴도 만났고, 이들과 음악에 대한 갖가지 대화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이 좁아졌다고 발라키레프를 탓하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의 교향곡 작곡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작곡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번번히 중단되었고 1862년 학교를 졸업한 림스키는 장교후보생으로 쾌속범선 알라즈호에 배치받아 2년간 원양 항해에 나섰습니다. 직업이 군인인지라 새로 사귄친구들과 헤어지는것은 아쉬웠지만 별수없엇죠. 첫 기항지는 영국이었는데요, 배는 삭구를 바꾸느라 넉 달을 그레이브젠느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때 런던 구경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그러면서 한가롭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음악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늘어지고 있는 작업을 어서 진척시키자는 발라키레프의 독려편지를 받고 림스키는 결국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배에 피아노가 없었던 덕분에 작곡 기간중 그곳 토박이들이 그레이브젠느 술집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연주를 듣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죠.
알마즈호는 폴란드의 반란자들의 총기 밀수입을 근절하기 위해 영국에서 발트해로 나섰다가 크론슈타트로 돌아왔습니다. 1863년 영국과의 전쟁이 임박한 듯 보이자 알마즈호는 상선 나포를 위해 뉴욕으로 급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함대는 평화로운 바다에서 노니는 동안 림스키코르사코브는 체사피크폭포와 나이아가라 폭포를 유람했습니다. 뱃사람들에게는 술과 여자와 노래가 그칠날이 없었죠.
이국적인 지중해 항해를 끝낸 뒤에 1865영 배는 크론슈타트로 귀항했습니다. 페테부르크에 돌아왔을때 , 림스키는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군인이지만 가끔 음악감상이나 연주를즐기는 딜라탕트로 변해있었다. 예술을 향한 정열도 깡그리 식어버렸다. 아무런 회한도 없었다" 그러나 무료 음악학교를 활발히 키워나가던 발라키레프와 다시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어요. 그리고 발라키레프의 지도로 완성된 림스키의 <교향곡 e♭단조>는 무료 음악학교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딱딱한 제복을 걸쳤지만 앳되어 보이는 림스키에게 엄청난 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이 조그만 영광을 얻고나서, 림스키는 글린카의 누이인 류드밀라 샤스타코바를 소개받아 그녀의 집에 자주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부대근부는 하루 몇 시간밖에 안되었기에 그는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죠. 이때 발라키레프가 카프카스 여행에서 채집한 멜로디들은 동방음악에 대한 림스키의 관심을 일깨웠씁니다.
1866년 비보르크 근교 테르바요키에 있는 형 소유의 별장에서 림스키는 무소르크스키가 들려준 노브고로트 상인의 전설을 음악으로 묘사한 <사드코>라는 작푼에 착수했습니다. 1868년 여름 림스키와 무소르크스키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가을에는 하낭에 기거하면서 각각 오페라 <프로코프의 소녀> 와 <보리스 고두노프>에 매달렸습니다. 방을 함께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사람의 기량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습니다.
1868년초 작곡가 다르고미슈스키가 새로운 주례모임의 장소로 동료 음악가들에게 자기 집을 개방했습니다. 림스키는 여기서 알렉산드라와 나데주다 푸르골트 자매를 만났는데 몇년뒤 이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상트 페테르부ㅡ크 음악원을 새로 맡은 아잔테프스키는 림스키에게 작곡과 기악, 관현악반을 지도하는 교수직을 제의합니다. 모두 과히 신통치 않은 분야들이었습니다. 림스키는 아마추어였기 때문입니다. 아잔체프스키는 림스키가 특유의 열정으로 활기를 몰고 오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제의한 것이지만 림스키는 음악이론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합찬곡 한 번 제대호 못 만들어보고 대위법도 전혀 몰랐으며 화음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지휘도 , 관현악단을 지휘하는것은난생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지는 들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노력을 많이 했기때문입니다. 그 결과 얼마 안가서, 그는 러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능한 작곡 선생이 되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죠. 그리고 그는 수년간 군악대와 무료음악학교를 번갈아 맡으면서 자신의 음악적 실력을 꾸준히 쌓아갔습니다. 친구들이 비웃고, 쓴 웃음을 지어보여도 꾿꾿하게 자기를 갈고 닦았습니다.
림스키는 운좋게도 두 가지 일, 즉 민요연구와 글린카의 작품 편집을 하면서 새 활로를 모색하게 됩니다. 1877년 필리포프와 공동으로 <러시아 민요 백년선>을 펴내면서 본의 아니게 사이가 멀어졌던 무소르크스키에게 다시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해에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진실성이 조금 의심스러운 <<나의 음악인생에 관한 연대기>>지필에 착수하지만 그것은 12년이나 걸렸습니다. 공식업무와 개인레슨 말고도 그는 무료음악학교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빴기 때문이죠.
알렉산드로 3세가 등극하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국 음악대 감독관 바흐메테의 장기집권도 끝이 났고, 필리포프는 여전히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서 발라키레프를 고위직에 발탁하고 림스키를 그 밑에 앉혔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식구를 거느린 가장에게 연봉 2.300루블은 무시못할 액수였겠죠. 더구나 크라베가 물러나면서 해군 군악대 감독관 직책도 잃은 상태였습니다.
교유관계도 흔들렸습니다. 보로딘과 스타수프만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집을 자주 찾았으나 새로운 활동의 중심지는 벨라예프의 집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전문 음악인들이 모임을 이끌었고 그들은 새벽 한시에 웃통을 벗고 식당에서 만찬을 열기 일수였다고 합니다.
1887년 보로딘이 미완의 <이고르공>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봄 림스키는 글라주노프와 함께 이 곡의 마무리와 관현악 편곡에 착수했습니다. 여기서 창작욕을 얻은 림스키는 여름에 넬라이호반에서 유명한 <스페인 카프리치오>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의 첫 리허설은 관현악단의 갈채로 자주 끊길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이 작품과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의 부활절>, <세헤라자데>가 완성됩니다. 불과 마흔네살의 나이에 불멸의 대작을 세 편이나 써낸 것입니다.
1890년은 재앙의 시기였습니다 . 가족들이 모두 디프테리아에 전염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작곡가 데뷔 25주년 기념행사가 발라키레프와의 어이없는 말다툼 때문에 엉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막내가 죽고 가족들은 스위스에서 지냈습니다. 결국 1892년 림스키는 심각한 심신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철학서와 미학서를 닥치는대로 읽으면서 자기를 짓누르는 모호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음악은 제쳐두고 오직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이석저것 닥치는대로 써갈기기만 했다죠. 그는 머리에서 이상한 압박을 느끼면서 갖가지 망상에 줄곧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에게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1893년 여섯째 아들이 병에 죽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나락에 또하나의 부음이 날아들었습니다. 1893년 차이코프스키가 서거한 것입니다. 림스키는 그해 가을의 러시아교향악 연주회로 차이코프스키에게 바쳤습니다. 이 공연을 끝내고 다시 오데사까지 가서 또 다른 추모 연주회를 지휘했습니다. 돌아올 때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지만 창조에 필요한 영감은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1897년 그는 다시 부지런히 작업에 매달려 그의 역작중 하나인 <사드코>를 끝냈습니다. 40여곡의 노래, 칸타타 한곡과 2중주 두곡이 잇따라 발표되었으나 국민음악의 흐름과는 멀어진, 그의 표현대로 자유분방한 음악이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은 그의 애국심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최악의 소식들은 러시아 전역에 혁명의 열기를 부채질해댔고 1905년 1월 페테르 부르크는 사실상 혁명의 소용돌이속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에 무관심했던 음악원학생들마저 원장의 억압적인 운영을 공박하고 나섰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3월에는 경찰이 음악원을 둘러싼 채 금방이라도 밀고 들어올 기세였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원장의 퇴임을 요구하는 연명장에 이름을 올리고 해고당했습니다. 당국은 음악원을 패쇄시켰습니다. 그러나 유감의 뜻과 함게 러시아 음악협회 명예회원에서 물러나겠다는 서한을 공표하면서, 림프키코르사코프는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학생들의 연주가 정치집회로 바뀌면서 상황은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연주회를 중단시킨 경찰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전작품을 금지곡에 포함시켰습니다. 몇달 뒤 금지조치가 풀리자 그의 곡은 불멸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림스키는 회고록 집필에 매달립니다. 음악원이 문을 닫는 동안, 그는 개인 레슨을 하거나 공연을 가져 극빈노동자 가정을 도왔습니다. 음악원이 문을 열어 1906년 림스키도 복귀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당국과 또다른 충돌을 빚고 음악원을 뛰쳐나왔습니다. 그해 여름 가족과 가르다호반에서 지내면서 자서전 집필을 끝냅니다.
젊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사제관게는 깊은 정으로 발전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에게 림스키는 아버지같은 존재였습니다.
1907년 림스키는 디아길레프가 파리에서 꾸민 러시아 음악연주회를 지휘하고 거기서 드뷔시, 스크랴빈, 슈트라우스의 "새롭고 불가해한" 음악을 접한후 러시아로 돌아와 류벤스크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여름을 보냅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황금닭>의 악보 출판을 놓고 관계당국과 끝없는 분쟁 때문에 이미 63세가 된 그는 몹시 지쳤습니다.
1908년 3월 생일날 그는 가슴을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꼈고 4월에는 협심증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또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6월 12일 새벽, 그는 사나운 천둥소리에 발작을 일으키면서 운명했습니다.
학생과 대중들은 그를 이상화하고 숭배했지만 림스키코르사코브는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아는 절제력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들은 기교가 뛰어나고 색채감이 풍부한 음이 특징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환상세계를 모태로 삼아 작곡된 <<셰헤라자데>>는 변화 무쌍한 음과 환상적인 선율들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그는 "오페라는 궁극적으로 음악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의 작품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보이는 극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약한 대신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선율과 러시아 고유의 화성을 살려 아기자기하고 동화와 같은 환상세계를 보여줍니다. 림스키는 오페라라는 장르에 애착을 느끼고 있어 15편에 이르는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중 유명한 것은 <눈 아가씨> <살탄황제 이야기> <불사신 카시체이> <보이지 않는 거리 키테슈의 전설> <황금닭> 등이 있습니다.
1 러시아 부활제
연 주 : DR Symphony Orchestra
지 휘 : Dmitri Kitajenko
2. Capriccio espagnol
연 주 : Denmarks Radio SymfoniOrkestret - (DRSO)
지 휘 : Rafael Frühbeck de Burgos (스페인 1933~2014)
4. 세라자드
연 주 : Gimnazija Kranj Symphony Orchestra (슬로베니아)
지 휘 : Nejc Bečan
5.Russian Easter Festival Overture, Op.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