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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61권
39. 수희회향품(隨喜迴向品)을 풀이함
【경】 그때 미륵보살마하살이 혜명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마하살은 수희(隨喜)하는 복덕을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니, 얻을 것이 없기[無所得] 때문입니다.
설령 성문이나 벽지불의 복덕이나 온갖 중생의 복덕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선정으로 닦고 따라 기뻐한다[隨喜] 해도,
이 보살마하살이 수희하는 복덕을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그 복덕이야말로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더할 것이 없어서 견줄 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 및 온갖 중생들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선정을 닦고 따라 기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조복하기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자기 자신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니,
이른바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거니와,
보살이 수희하는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이 공덕을 가지고 온갖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서이고 온갖 중생을 청정케 하기 위해서이며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때 혜명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시방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 세계 가운데에서 멸도(滅度)하신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을 염(念)합니다.
이 부처님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에 이르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시어 이에 법이 다하도록 그 중간에 심어 놓은 모든 선근(善根)으로서,
6바라밀과 상응하는 것과 모든 성문인의 선근, 혹은 보시한 복덕과 계율을 지킨 복덕과 선정을 닦은 복덕 및 모든 유학인(有學人)의 무루선근과 무학인(無學人)의 무루선근과,
모든 부처님의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일체지(一切智)와 대자대비(大慈大悲)와,
그 밖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불법 및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과,
이 법 가운데에서 배워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는 것과 보살마하살의 지위에 드는 것과,
그 밖의 모든 중생들이 심어 놓은 선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선근을 모두 한데 합쳐 수희하는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니,
이것은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더할 것이 없어서 견줄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따라 기뻐한 뒤에는 이 따라 기뻐하는 복덕을 가져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선남자로서 보살승(菩薩乘)을 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나는 이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을 내어 일[事]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만일 선남자가 모양을 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염한 대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선남자가 보살승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마음이 바로 일[事]을 반연하는 것이니,
만일 선남자가 모양을 취한다면 염한 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만일 모든 반연[緣]과 모든 일[事]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보살승을 행하는 선남자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선근과 처음 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다하기까지, 그리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모든 선근과 유학ㆍ무학의 선근을 모두 한데 합친 수희의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데서 모양을 취한다 해도,
그것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 보살은 뒤바뀐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하다[常]고 여기는 것은 생각[想]이 뒤바뀌고 마음[心]이 뒤바뀌고 소견[見]이 뒤바뀐 것입니다.
청정하지 않은[不淨] 것을 청정하다[淨]고 여기고 괴로운[苦] 것을 즐겁다[樂]고 여기며 나 없는[無我] 것을 나[我]라고 여기는 것은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것입니다.
만일 그 연과 같고 그 일과 같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고, 회향하는 마음도 그와 같을 것이며,
단바라밀(檀波羅蜜)과 시라(尸羅)ㆍ찬제(羼提)ㆍ비리야(毘梨耶)ㆍ선(禪)ㆍ반야(般若) 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반연이고 어떤 것이 일[事]이며,
어떤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어떤 것이 선근이며,
어떤 것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겠습니까?”
【논】 해석한다.
앞의 7품(品)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하여 반야를 설하게 하셨고,
중간에 제석이 많은 질문을 했기에 공덕이 되는 많은 일을 설명하셨으며,
여기에서는 미륵이 부처님의 본의(本意)에 따라 도리어 수보리에게 따라 기뻐하는 법에 의지하게 하려고 반야바라밀을 널리 설명하셨다.
또 제석은 앞에서 반야에 공양하는 데는 꽃과 향과 음악과 번기ㆍ일산 등의 공양 거리로도 얻는 복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몹시 좋아하면서,
“이런 공양 거리는 우리들만이 마련할 수 있으며 출가한 사람들에게는 없다.”라고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미륵은 그들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심정을 억누르기 위하여 짐짓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보살은 다만 마음으로만 따라 기뻐해도 성문과 벽지불과 온갖 중생들의 보시 등과 모든 무루의 공덕보다도 더 뛰어나거늘 하물며 꽃과 향을 경권(經卷) 등에 공양하는 것이랴.”라고 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수희하는 복덕’이라 함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짓지 않고 모든 공덕을 짓는 것이다. 다만 마음의 방편만으로 다른 이가 닦는 복덕을 보고 따라 기뻐하면서,
“온갖 중생 가운데서 복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이는 가장 뛰어나다.
만일 복덕을 여의는 사람은 축생들과 같아서 세 가지 일을 행하게 된다.”라고 한다.
세 가지 일이란 음욕과 먹고 마시는 일과 싸우는 것이다.
복덕을 닦고 도를 행한 사람은 온갖 중생들이 다 같이 존중하고 사랑하고 공경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더울 때에 맑고 시원한 보름달을 우러러보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고,
또한 마치 대회(大會)에 모이라고 할 적에 음악과 좋은 음식을 고루 장만하여 먹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함께 기꺼이 나아가지 않음이 없듯이,
복을 닦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다.
복덕에는 두 가지 즐거운 인연이 있으니,
그것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다.
출세간이라 함은,
모든 무루의 법에는 비록 복의 과보는 없다 하더라도 능히 복덕을 내기 때문에 복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루와 무루를 통틀어 복덕이라 한다.
또 복덕은 보살마하살의 근본이어서 소원을 만족시키는 것이므로 온갖 성인들이 찬탄한 것이나 지혜 없는 사람은 헐뜯나니,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할 것이요 지혜 없는 사람은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 복덕의 인연 때문에 사람의 왕도 되고 전륜성왕ㆍ천왕ㆍ아라한ㆍ벽지불과 모든 불세존이 되는 것이니,
대자대비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자재롭고 걸림 없는 것이 모두 복덕 가운데서 생긴다.
이와 같은 갖가지 복덕으로 바른 소견[正見]을 얻기 때문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나는 온갖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데,
중생도 자신들이 복덕을 행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또 온갖 중생들이 선행을 하면 그는 나와 비슷한 이요, 그는 나의 벗이기 때문에 따라 기뻐하게 된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성문ㆍ벽지불 그리고 복을 짓는 중생들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 복덕 가운데서 수희하는 복덕을 낳는 것이니, 이 때문에 따라 기뻐한다고 하였다.
이 수희하는 복덕을 가지고 온갖 중생들과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
‘온갖 중생들과 함께한다.’ 함은,
이 복덕을 온갖 중생들에게 줄 수는 없지만 과보는 줄 수가 있다는 뜻이다.
보살은 이미 복덕의 과보로 의복과 음식 등 세간의 쾌락과 기구를 얻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며,
보살은 복덕이 청정한 몸과 입으로써 남들에게 신용을 받아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10선도(善道)와 4선(禪) 등을 얻게 하면서 다음 세상의 이익을 지어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처님이 되어 복덕의 과보를 얻어서 몸에는 32상(相)과 80종의 수형호(隨形好)와 한량없는 광명이 생기게 되므로 보는 이들이 싫증내지 않으니, 한량없이 청정한 범음(梵音)은 부드럽고 온화하다.
무애해탈(無礙解脫) 등의 모든 부처님 법을 세 가지 일에서 나타내 보이고 한량없는 아승기 중생들을 제도하며,
열반하신 뒤에는 몸을 부순 사리(舍利)를 사람들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며 오랜 뒤에는 모두 도를 얻게 한다.
이 과보를 온갖 중생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결과 가운데서 원인을 설명하기 때문에
“복덕을 중생과 함께한다.”라고 한 것이다.
만일 복덕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쌓은 복덕을 모조리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지은 착한 법의 바탕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으므로 지금에는 곧장 두려움이 없고 고뇌가 없는 것으로써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함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수희하는 복덕이라 한다.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과 온갖 중생들의 세 가지 복덕을 비교하는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맨 위이며 첫째가고 가장 미묘하며 보다 더할 것이 없어 견줄 데가 없다.’고 하는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뛰어난 인연을 말하는데,
이 2승의 복덕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조복하기 위해서이고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자기 자신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계율을 지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조복하는 것이고,
선정을 닦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며,
지혜는 바로 자기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다.
또 자기 자신을 조복한다는 것은 바른 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고,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이며,
자기 자신을 제도한다는 것은 바른 소견[正見]과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방편[正方便]이다.
또 보시한 인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조복하고,
계율을 지킨 인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하며,
선정을 닦은 인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다.
‘선정을 닦는다.’ 함은 바로 무루의 법과 가까운 인연이니,
무루라 함은 이른바 37품(品)과 3해탈문(解脫門) 등이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이것과는 관련이 멀기 때문에 해석하지 않는다.
보살의 수희하는 복덕은 비록 애쓰고 수고함은 없다 하더라도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다.
【문】 실제로는 온갖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하는가?
【답】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공덕의 힘으로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니,
다만 중생과 서로 어울리는 인연만 없을 따름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불은 항상 태우는 힘이 있지만,
다만 섶을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에 태울 수 없을 뿐이요,
가까이하면 태우는 것과 같다.
그때 수보리는 필경공(畢竟空)의 지혜로써 미륵보살에게 묻기를,
“모든 부처님을 염하고 복덕을 따라 기뻐하면서 최상의 도에 회향한다 할 때,
바로 그 염하는 것은 과거의 일인데 그 일이 염한대로 될 수 있는가?”라고 한다.
미륵은 두 가지 인연으로써 “될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곧 첫째는 과거의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계셨던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멸도해 계시지 않으며,
보살은 숙명지(宿命智)가 없기도 하고 혹은 있더라도 미칠 수가 없으며 다만 들은 것을 기억하여 분별할 뿐이기 때문에 염한대로 되지 않는다.
둘째는 모든 부처님과 그 공덕은 삼계(三界)를 벗어나고 3세를 뛰어나 쓸모없는 이론이나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마치 열반의 모양과 같고 필경공이어서 청정하다.
따라 기뻐하는 이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제자들의 선근과 공덕을 분별하되 이 회향하는 마음과 위없는 도는 실체가 아니라 하기 때문에 “될 수 없다.”라고 한다.
수보리는 “만일 그런 일이 없는데도 이 보살이 기억하고 분별한다면 뒤바뀜에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이 필경공이어서 청정한 모양이라면 기억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고 모든 과거 부처님의 공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분별도 없고 다른 것도 없거늘 어떻게 따라 기뻐할 수 있는가?”라고 따졌다.
이것은 간략하게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요, 자세한 것은 경전의 말씀과 같으니, 이른바 수보리가 미륵에게 한 질문이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과거 아승기 세계에 계셨던 멸도하신 모든 부처님을 기억한다.”라 함은,
이 보살은 수희하는 복덕을 일으키려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바로 복덕의 주인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염하고 경전의 말씀을 들으며 과거의 부처님의 명호가 있기 때문에 이 명호로 인하여 온갖 과거의 모든 부처님을 널리 염하게 된다.
‘처음 발심해서부터’라 함은,
처음 발심할 때에 원을 세우되,
“나는 온갖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라고 하나니,
이 마음은 세 가지 선근 즉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도 않은 선근과 상응하고 모든 착한 법과 선근에 상응하면서 일으키는 몸ㆍ마음ㆍ입의 업(業)이 이 법과 화합하는 것이므로 복덕이라고 한다.
그리고 처음 발심해서부터 6바라밀을 행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10지(地)를 얻으며 나아가 도량(道場)에 앉기까지 이 가운데서 보살은 자기 자신이 복덕을 닦고 화합하여 불도를 얻는 것이다.
나아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고 멸도한 뒤에 남겨진 사리와 법은 모두가 부처님 자신의 공덕과 화합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대승의 사람으로 인하여 6바라밀과 상응하는 복덕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응한다.” 함은 6바라밀을 제외한 그 밖의 보살이 행하게 되는 법이 모두가 6바라밀 가운데 섭입되기 때문에 6바라밀과 상응하여 화합한다고 말한다.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는 등의 복덕을 심는다.
이 성문이나 벽지불의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가 다한 무학(無學)이며,
둘째는 도를 얻었으나 번뇌는 아직 다하지 못한 유학(有學)이다.
이 두 사람의 모든 복덕 가운데서는 선근(善根)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선근만을 말한다.
위에서 ‘2승을 구하는 사람’이라 함은 범부와 성인을 통틀어서 말하고,
여기에서의 유학과 무학은 순전한 성인이다.
‘상호(相好)’는 무기(無記)의 색법(色法)으로서 선의 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부처님을 말할 뿐이다.
5무학중(無學衆)과 대자대비와 불법에 대한 뜻은 초품(初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과 이 법을 배워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함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남기신 법 가운데서 도를 얻기 때문에 거듭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중생들이 심은 모든 선근’이라 함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남기신 법에서 하늘과 사람 내지는 축생이 심는 갖가지 복덕의 인연에 이르기까지이다.
이 위의 4단(段)의 복덕은 수행하는 이가 마음에 두루 반연하고 기억하여 따라 기뻐하면서 부처님 도를 구하기 위한 회향이므로 위없는 수희(隨喜)라 하며 맨 위라서 같을 데가 없는 것이라 한다.
【문】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가 어째서 직접 자신이 공덕을 짓지 않고 마음으로 따라 기뻐하는가?
【답】 모든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다른 이가 부지런히 공덕을 지으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나니, 그 복덕은 자신이 짓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
또 이 수희하는 복덕은 곧 그것이 실제의 복덕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과거의 부처님을 염하면 바로 그것이 염불삼매(念佛三昧)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 6념(念) 가운데는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승(念僧)ㆍ염계(念戒)ㆍ염사(念捨)ㆍ염천(念天)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계율을 행함으로 선정에 들어가고 필경의 지혜를 일으켜 화합하기 때문에 바른 수희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수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 실법(實法)을 행하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회향한다.’ 함은 곧 수희하는 마음이다.
‘반연[緣]’이라 함은 수희하는 마음이 반연할 대상[所緣]이니, 이른바 온갖 부처님과 온갖 중생들이 짓는 바의 공덕이다.
‘일[事]’이라는 것이 그 반연할 대상의 근본이라면,
‘복덕’은 연(緣)으로서 공덕이 머무르는 처소이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중생과 아울러 토지ㆍ산림ㆍ정사(精舍)ㆍ머무르는 처소 등을 모두 일이라 한다.
“염한 대로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미륵은 대답하기를,
“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러자 수보리는 미륵에게,
“만일 모든 일과 모든 반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뒤바뀜이란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이다.
이는 세 가지로 분별되는데, 이 뒤바뀜을 비유하자면,
부처님이 없는데도 기억하며 부처님을 염하는 격이요,
마치 무상한 것인데도 항상하다고 염하는 격이요,
청정하지 않은 것인데도 청정하다고 염하는 것이다.
【문】 소견[見]은 모든 뒤바뀜의 근본이다. 처음 도를 얻은 사람이 생각[想]과 마음[心]의 뒤바뀜을 일으키면서도 소견의 뒤바뀜이 없는 것은 견제도(見諦道)에서 끊었기 때문인가?
【답】 이 뒤바뀜은 생기는 때가 다르고 끊는 때도 다르다.
생기는 때는 생각의 전도가 먼저 있고 다음에는 마음의 전도가 있으며, 마지막에는 견해의 전도가 생긴다.
끊는 때는 먼저 견해의 전도부터 끊는 것이니, 견제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諦所斷]이기 때문이다.
뒤바뀜의 체성은 모두 소견의 모양이므로 견제도에서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뒤바뀐다.’ 함은,
유학의 사람은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하여 기억을 잊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모양[淨相]을 취해서 번뇌[結使]를 일으키고 도리어 바른 기억을 얻어도 즉시 소멸한다.
마치 경 중의 비유에서,
“물방울이 몹시 달구어진 철판 위에 떨어지면 바로 그 순간에 소멸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과 같다.
조그마한 착오가 있기 때문에 가정하여 뒤바뀐다고 한 것이요, 실제로 뒤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범부에는 세 가지의 뒤바뀜을 말하고 유학의 사람에는 두 가지의 뒤바뀜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모든 반연과 모든 일이 실로 필경공(畢竟空)인 것처럼 염(念)도 공하고 보리도 공하며, 수희하는 마음도 공하고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도 또한 공한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이 한 모양[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無相] 것이라면,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이 반연이고 어떤 것이 일이며, 어떤 것이 마음으로 최상의 도에 회향하는 것이겠는가?
【경】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오랫동안 6바라밀을 행하고 모든 부처님께 많은 공양을 하였으며, 선근을 심었고 선지식(善知識)을 따랐으며, 자상공(自相空)의 법을 잘 배웠다면,
그는 이 모든 보살의 이런 반연[緣]과 이런 일[事]과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선근을 수희하는 복덕에 모양[相]을 취하지 않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게 됩니다.
둘이 아닌 법[不二法]으로써 하면서도 둘이 아닌 법도 아니고,
모양이 아니면서도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니면서도 얻을 수 없는 법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이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합니다.
만일 모든 보살로서 6바라밀을 오래도록 행하지 않았고 모든 부처님께 많이 공양하지 않았으며, 선근을 심지도 않았고 선지식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자상공의 법을 잘 배우지도 않은 이라면,
이러한 보살은 이 모든 대상과 일과 모든 부처님의 선근을 수희하는 복덕에 갖은 심상(心相)을 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게 되니, 이것을 회향이라고 부르지는 못합니다.
수보리여,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의 이치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이치, 이른바 내공(內空)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까지를 새로이 배우는 보살들에게는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보살은 그가 지닌 조그마한 믿음의 즐거움과 공경과 청정한 마음 등을 모두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비발치(阿鞞跋致) 보살마하살 앞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혹은 어떤 이가 선지식의 수호를 받고 오래도록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모든 선근을 심었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의 이치 내지는 일체종지의 이치인 이른바 내공에서 무법유법공까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 법을 들어도 마음이 침몰하지 않으며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겁내지도 않습니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수희하는 복덕을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나니,
이른바 보살은 마음으로써 수희하는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다하여 없어지고 변하여 떠나며, 이 반연과 이 일과 이 모든 선근도 또한 다하여 없어지고 변하여 떠납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떤 것이 수희하는 마음이고 어떤 것이 모든 반연이며, 어떤 것이 모든 일이고 어떤 것이 모든 선근이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수희회향하겠습니까?
두 마음은 함께 하지 않으며, 이 심성도 또한 회향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보살은 어떤 수희심으로 아뇩다라삼먁보리에 회향하겠습니까?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알면,
이 반야바라밀에는 어떠한 법도 없고 나아가 단바라밀에도 어떠한 법이 없으며,
물질[色]에도 어떠한 법이 없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어떠한 법이 없습니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수희하는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며, 이
와 같이 회향할 수 있으면 이것을 바로 수희하는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논】 해석한다.
미륵은 생각하기를,
‘모든 법은 매우 깊어서 수희하는 마음도 미묘하다. 이른바 모든 법 모양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수희하는 마음으로 최상의 도에 회향하는 이런 일이야말로 매우 어렵다.
범부의 사람들은 마음이 거칠어서 이런 법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미륵은 말하기를,
“만일 수행하는 이로서 오랜 동안 6바라밀을 닦은 이라면 모든 공덕이 깊고 두껍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다.
이른바 능히 믿고 능히 행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고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공덕을 쌓았고 번뇌[結使]가 꺾이고 줄어들어 그 마음이 부드러우니, 이것이 바로 전생의 인연이다.
금생에는 좋은 스승과 좋은 동학(同學)을 얻고 또한 스스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공을 배우는 교묘한 방편 때문에 이런 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은 비록 모양이 없다 하더라도 수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최상의 도에 회향할 수 있다.
비유하면 쇠가 비록 단단하기는 하나 이글거리는 화로에 넣으면 부드러워져서 뜻대로 어떤 그릇이라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살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오래도록 6바라밀을 행하고 선지식의 수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과거 모든 부처님의 모든 반연과 모든 일과 모든 선근 가운데서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수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모양이 없는 것으로써 최상의 도에 회향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모양이 없다.’ 함은,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니며, 나아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등이니, 위와 어긋난다면 이것을 바로 회향할 수 없다고 한다.
미륵은 수보리가 공에 대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을 수희하는 이와 같은 이치는, 새로 배우는 보살 앞에서는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복덕과 선근이 조금밖에 없는 이라면 이 필경공의 법을 듣고 곧 공에 집착하면서,
‘만일 온갖 법이 필경공이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복덕을 짓겠느냐’고 하면서,
곧 전업(前業)을 망실한다.
이 때문에 새로 발심한 보살에게는 먼저 모양을 취하면서 수희하는 일을 가르치고, 점차로 방편의 힘을 얻으면 그제야 모양이 없는 수희를 행하게 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 새의 날개가 아직 완전히 나지 못했으면 억지로 높이 날게 할 수는 없고 깃털이 온전히 다 난 뒤에야 멀리 날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아비발치 보살은 법위(法位)에 들어가고 법인(法忍)을 얻어 능히 믿고 능히 행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는 설명할 수 있으며,
또 오래도록 6바라밀을 행하고 선지식을 따랐으며 안의 복덕과 바깥 인연의 힘이 서로 돕는 이면 아비발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능히 믿고 능히 행하게 된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이것을 들으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기뻐져서 믿고 받아들이니,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이가 좋은 음식을 얻은 것과 같다.
또한 몹시 더울 적에 시원함을 만난 것 같고 아주 추울 때에 따뜻함을 얻는 것과 같아서, 그의 마음이 좋아지고 기뻐지는 것이다.
이 두 보살도 그와 같아서 이 모양이 없는 지혜를 얻으면,
‘나는 이 지혜로 인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거늘 하물며 놀라거나 두려워함이 있겠는가?
두려움은 바로 나의 이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런 법 안에는 모든 법의 모양조차도 오히려 공하거늘 하물며 나가 있으면서 결정코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겠으며, 온갖 법이 모양 없음을 듣고서 놀라거나 두려워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수희한다는 의미 가운데 체성에 관하여 설명해 마쳤다.
뒤에는 다시 갖가지 다양한 문(門)으로 수희의 양상[事]을 해석하겠다.
또 보살은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이 마음으로 최상의 도에 회향하되 이 마음은 생각마다 다해 사라지고 변해 없어져서 머무르지 않는다.
이 모든 반연과 일, 즉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선근과 모든 부처님의 모든 반연과 일은 오래전에 이미 사라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수희하는 마음까지도 사라지니, 이미 사라진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기를,
“이 마음으로 회향하되, 이 마음은 곧 다하여 없어진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세에 들어가고, 모든 법의 실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마음과 이 반연과 이 일과 이 선근 등에 분별함이 없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이것을 바른 회향이라 한다.
또 일시에 두 개의 마음은 화합하지 않으므로 수희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보리의 마음이 없다.
온갖 마음의 모양은 공하므로 모양을 취하여 회향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이 공하여 일정한 법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니,
마치 반야바라밀이 그러한 것처럼 온갖 법 내지는 최상의 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에 법애(法愛)를 끊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서 공에 대하여 다툼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바른 회향이라 한다.
【경】 그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새로 발심한 보살이 이런 일을 들으면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수보리여, 어떻게 새로 뜻을 낸 보살은 모든 선근을 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수희하는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만일 새로 발심한 보살이라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들이지 않나니,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요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단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합니다.
내공을 많이 믿고 이해하며, 나아가 무법유법공도 많이 믿고 이해하며,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을 많이 믿고 이해하면서 항상 선지식을 따르며, 이 선지식은 그에게 6바라밀의 뜻을 해설하여 열어 보이고 분별하며 이와 같이 가르쳐 항상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보살의 법위(法位)를 얻기에 이르기까지 끝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습니다.
나아가 단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을 여의지 않도록 하며 또한 악마의 일도 가르쳐 주니, 갖가지 악마의 일을 들은 뒤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또한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보살의 법위를 얻기까지 그 사이에 선근을 심으며, 이 선근 때문에 보살의 집에 태어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끝내 이 선근을 여의지 않습니다.
또 새로 뜻을 낸 보살마하살은 과거 시방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 세계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이 생사의 길을 끊고 모든 쓸모없는 이론의 길을 끊어서,
무거운 짐을 모두 버리고 취락(聚落)의 가시나무를 없애 모든 유결(有結)을 끊고 바른 지혜로 해탈하였으며,
그리고 제자들이 지은 공덕으로서 그 가운데 큰 성바지인 찰리(刹利)ㆍ바라문(婆羅門)과 거사(居士)의 대가와 그리고 사천왕천 내지는 정거천(淨居天)이 심은 선근의 이 모두를 한데 합쳐 헤아려서는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높은 것이 없어 견줄 데 없는 수희하는 마음으로써 수희하며,
수희하고 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만 합니다.”
그때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일 새로 발심한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의 모든 선근을 염(念)하면서 수희하는 공덕이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높은 것이 없어 견줄 데 없으며,
수희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한다면,
어떻게 보살은 생각[想]의 뒤바뀜과 마음[心]의 뒤바뀜과 소견[見]의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과 승가를 염한다면 이 가운데서 부처님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고 승가라는 생각도 내지 않고 선근이라는 생각도 없이 이런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며, 이런 마음에 대해서도 또한 심상(心想)을 내지 않습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회향하면 생각이 뒤바뀌거나 마음이 뒤바뀌거나 소견이 뒤바뀌는 일이 없습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과 승가의 선근을 염하며 모양을 취하고 모양을 취한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보살의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과 승가의 모든 선근을 염하면 이 마음은 염하는 순간 곧 다해 없어짐[盡滅]을 알게 됩니다.
만일 다해 없어지는 그런 법이라면 회향할 수도 없으니, 작용하는 회향의 마음도 또한 다해 없어지는 모양이며, 회향할 처소나 법도 또한 그러한 모양입니다.
만일 이러한 모양으로 회향한다면 이것을 바른 회향[正迴向]이라 부르니, 삿된 회향이 아닙니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합니다.
또 보살마하살이 과거 모든 부처님의 선근 및 제자들의 선근과 이 가운데에서 범부들이 법을 듣고 심은 선근,
혹은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 및 마후라가 등이 법을 듣고 심은 선근,
혹은 큰 성바지인 찰리와 바라문 그리고 거사의 큰 집안과 사천왕천 내지는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 등이 법을 듣고 심은 선근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 등 이 온갖 복덕을 한데 합쳐 헤아리건대,
수희의 공덕이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위가 없어 견줄 데가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이 모든 법은 다해 없어져서 회향할 처소나 법이 자성공(自性空)인 줄 알면서 이렇게 회향할 수 있다면,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참된 회향이라고 합니다.
또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하면 회향하는 어떠한 법도 없음을 알게 되나니,
왜냐하면 온갖 법은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하면 이것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바르게 회향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을 행하면 생각의 뒤바뀜과 마음의 뒤바뀜과 소견의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이 회향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모든 선근을 보리에 회향하는 마음의 처소조차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위없는 회향이라 합니다.
【논】
【문】 “새로 발심한 보살이 이 일을 들으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이런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이미 묻고 대답했거늘 지금 또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 위에서 미륵이 비록 수보리에게 말했다 하더라도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설하지 말아야 하고 아비발치와 오랫동안 수행한 이에게만 말해야 된다고 했나니,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들으면 믿고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바르게 회향하는 인연을 말하면서도 오히려 공한 법을 말했으므로 제석은 의심하기를,
“이 대중 안에는 새로 뜻을 낸 이들이 있거늘 어떻게 다시 말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수보리는 이 미륵의 설명을 완성시키고 또 새로 발심한 보살들로 하여금 바르게 회향할 수 있게 하려고 제석에게 대답하기를,
“만일 새로 뜻을 낸 보살이 비록 오랫동안 6바라밀을 행하지 못했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근기가 예리하고 선지식을 만난 이라면 이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르게 회향할 수 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석에게 말하기를,
“새로 뜻을 낸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이 반야를 받아들이지 않음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요, 필경 공이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은 얻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단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다.”라고 한다.
‘내공을 많이 믿고 이해한다.’ 함은,
항상 내공삼매(內空三昧)를 닦아 즐기고 관(觀)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고 이해하는 것이며, 나아가 18불공법을 믿고 이해하는 것도 그와 같다.
‘선지식’의 모양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는 다만 6바라밀을 따른다는 이치를 설명했을 뿐이다.
이 이치를 들은 뒤에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나아가 보살의 법위에 들게 되나니,
어떤 이는 오랫동안 수행하여 보살의 법위에 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새로 발심하면서 보살의 법위에 들기도 한다.
또 이 새로 발심한 보살에게 선지식이 악마의 일을 말해 주면 악마의 일을 듣고 나서도 더하지 않고 덜하지도 않나니, 그것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닦고 익히기 때문이다.
만일 악마가 파괴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공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란 파괴할 것이 없는 것인데 만일 없는 것을 있다고 보탠다면[增益] 그것은 마치 허깨비나 꿈같은 일이거늘 무슨 보탤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언제나 보살의 집에 태어나며 세상마다 선근을 여의지 않고 최상의 도에 이르는 것이니,
새로 뜻을 낸 이런 보살은 이러한 인연을 얻게 되므로 오래전에 뜻을 낸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또 수희하고 회향한다 함은, 이른바 새로 발심한 보살로서는 과거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 안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길[道]을 끊은 이이니,
생사의 길을 끊고 무여열반에 들었고 모든 쓸모없는 이론이 끊어졌기 때문에,
“모든 쓸모없는 이론을 없앴다.”라고 한다.
공공(空空) 등의 삼매로써 8성도분의 길을 버렸기 때문에,
“길이 다한다[道盡]”고 한다.
5중(衆)은 고뇌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거운 짐이다. 5중에서 두 가지 버릴 것[捨]이 있으니,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에서 5중의 인연인 모든 번뇌를 버려야 하고,
둘째는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5중의 결과를 버려야 한다.
온갖 속인의 집이 있는 곳을 취락이라 한다.
출가한 사람은 이 속인들의 집을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속인의 집에는 5욕의 가시가 있다.
음식을 위하여 나쁜 가시가 있는 과일 숲에 들어와서 과일을 취하기 때문에 가시에 찔리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가시를 밟으면 그 가시들이 부러지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께서는 선정과 지혜의 신을 신고 5욕의 가시를 부러지게 하므로 5하분결[下五分結]을 없앴다 하고, 유(有)의 분결이 다하면 5상분결[上分五結]을 끊었다고 한다.
모든 법의 실상인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상응하는 지혜로 온갖 번뇌와 습기를 끊기 때문에,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모두가 과거 모든 부처님을 찬탄한 것이다.
‘제자들이 짓는 공덕’이라 함은,
부처님의 제자에는 세 가지가 있어서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이며, 찰리의 큰 성바지 내지는 정거천은 이 가운데서 선근을 심는 이들이다.
이들은 네 가지 복전(福田)이니, 이로 인하여 복덕을 심는 처소요 이 복덕을 한데 합쳐 헤아리면서 가장 으뜸가고 견줄 데 없는 수희하는 마음으로 최상의 도에 회향하는 것이다.
이 회향하는 마음은 바른 것이요 삿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금 미륵이 수보리에게 묻기를,
“만일 새로 뜻을 낸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최상의 도에 회향한다면 어떻게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그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제자에 대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과 제자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모든 선근 가운데서도 선근이란 생각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온갖 모든 법은 화합으로부터 생기니,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을 바로 부처님이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등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이 회향하는 마음도 또한 회향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는다.
위와 반대라면 곧 뒤바뀜에 떨어질 것이다.
또 보살이 이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선근을 염하면 이 마음이 다할 때에 곧 다하는 줄을 알 것이다.
그런데 다하는 마음으로는 회향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변하고 상실하고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또한 무상(無常)한 문에 들어가 법성(法性) 가운데에 이르는데 법성 가운데서는
“이것은 마음이다.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이다. 이것은 제자이다. 이것은 선근이다. 이것은 최상의 도이다.”라고 분별함이 없나니, 회
향하는 마음과 회향하는 곳이 다하는 모양도 또한 그와 같다.
처음 마음[初心]의 이것은 과거 모든 부처님 등을 기억하면서 수희하는 공덕이요,
나중 마음[後心]의 이것은 바로 회향하는 마음이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이것을 바른 회향이라 한다.
【문】 처음 마음과 나중 마음은 바로 나고 없어지는 모양이어서 무상할 수 있거니와, 회향할 처소의 법인 이 최상의 도는 미래 세상에 있거늘 어떻게 “다해 없어진다.” 하는가?
【답】 그대는 내가 먼저 대답한 것을 듣지 못했구나.
무상한 문에 들어가 법성 안에 이르면 이 가운데서는,
“다하여 이것은 무상하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법의 실상이 다한다.”라고 말할 뿐이다.
먼저도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3세를 벗어나고 삼계를 뛰어나서 받아들이는 모양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회향할 수 있으면 이것을 바르게 회향한다고 한다.
또 바른 회향도 아니고 삿된 회향도 아니다.
이른바 보살은 과거 모든 부처님의 선근 등에서 보다 위가 없어 견줄 데 없는 것에 이르기까지를 최상의 도에 회향한다 함이니,
만일 보살이 이 일은 모두 다해 없어짐을 안다면 회향하는 처소의 법도 자성이 공한 줄을 아나니, 없어짐을 알고 공을 아는 것이 바로 참된 회향이다.
만일 과거의 법이 무상하면 무상하기 때문에 자성이 공한 법 중에 회향할 수도 없고,
만일 과거의 법이 공하면 공하기 때문에 자성이 공한 법 중에 회향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은 지혜로써 회향하면 이것을 곧 바르게 회향한다고 한다.
또 만일 보살이
“온갖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므로 자력으로 상주(常住)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법상(法相)이 동요하지 않거늘 하물며 짓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짓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는 회향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라고 알면,
이것을 곧 바르게 회향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비록 반야바라밀 등 모든 착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역시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나니,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 또한 보살마하살이 일으킨 복덕이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를 여읜 줄을 안다면,
반야바라밀도 상(相)을 여읜 것이고 나아가 단바라밀도 상을 여읜 것이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도 상을 여읜 것이며,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도 상을 여읜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수희하는 마음으로 일으키는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살마하살이 수희하는 복덕은 수희하는 복덕의 자성을 여읜 줄을 알면,
역시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님의 성품을 여의고 모든 선근도 선근의 성품을 여의며,
보리의 마음도 보리의 마음의 성품을 여의고 회향하는 것도 회향하는 성품을 여의며,
보살도 보살의 성품을 여의고 반야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의 성품을 여의며,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도 단바라밀의 성품을 여의고,
나아가 18불공법은 18불공법의 성품을 여읜 줄 아는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여읜 모양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니,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수희하는 복덕을 낸다고 합니다.
또 보살마하살이 과거에 멸도하신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선근을 회향하려 한다면 이와 같이 회향해야 합니다.
또한 생각하기를,
‘마치 모든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모양과 같이 모든 선근의 모양도 그와 같고 멸도한 법의 모양도 그와 같으며, 내가 마음으로 회향하는 이 마음의 모양도 그와 같다.’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부처님의 선근의 모양을 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이것은 회향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선근은 모양이 있는 인연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인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모양을 취한다면 그것은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데에 떨어집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선근과 모든 마음에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이것을 일컬어 모든 선근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데에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때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수 있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이런 일 때문에도 보살마하살이 배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만일 이 복덕이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든 부처님도 얻을 수 없고, 모든 선근도 얻을 수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생각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의 몸은 모두가 소멸했고 모든 선근도 소멸했다.
내가 이제 모양을 취하여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선근과 모든 마음을 분별하고 이 취상(取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양을 취하는 것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과거의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여 분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고자 하면 얻는 것이 있지 않아야 하고 모양을 취하지 않아야 되나니, 이와 같이 해서 회향하는 것입니다.
만일 얻는 것이 있고 모양을 취하여 회향한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큰 이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향은 독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에 독이 섞인 것과 같으니,
비록 좋은 빛깔과 좋은 향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탐을 낸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독이 섞여 있으므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먹으면서 기뻐하고 그 좋은 빛깔과 향기가 맛있다고 탐을 내어 먹으려고 하지만,
그 밥이 소화될 때는 죽거나 죽는 것과 다름이 없는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이 자세히 살펴 받아들이지도 않고 자세히 살펴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며, 자세히 살펴 외우거나 읽지도 않고 그 안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에게 가르치기를
‘그대 선남자는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무여열반에 드시고 그 법이 다하도록 그 중간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실 때에 지으신 모든 선근과,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을 행하실 적에 지으신 모든 선근과,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을 닦고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을 닦으실 때에 지으신 모든 선근과,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지으신 모든 선근 및,
모든 부처님의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일체종지ㆍ착오가 없는 법ㆍ항상 버리는 행[常捨行]으로 지으신 모든 선근과,
모든 제자들이 이 가운데서 심어 놓은 모든 선근 및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장차 벽지불이 되어 짓는 모든 선근과,
이 가운데서 모든 하늘ㆍ용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이 지은 모든 선근이 있으니,
이 모든 복덕을 헤아리고 한데 합쳐 수희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십시오.’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회향은 모양을 취함으로써 법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독이 섞인 음식과 같습니다.
법을 얻는 자에게 결코 바른 회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얻는 것은 독이 섞인 것이어서 모양이 있고 움직임이 있고 쓸모없는 이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법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부처님의 도를 구하면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곧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법이 다하기까지이고,
모든 제자들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지은 선근 내지는 일체종지를 닦기까지이니,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어떻게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바르게 회향하는가?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와 선여인으로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고자 한다면 그는 모든 복덕을 다음과 같이 회향해야만 합니다. 곧
“마치 모든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지혜로 이 모든 선근의 모양과 이 모든 선근의 성품을 아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이 수희하겠다.
마치 모든 부처님이 아는 것과 같이 나도 그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겠다.”라고 해야 하니,
보살의 도를 구하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이렇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은 것이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이며 부처님 법의 말씀 그대로이니,
이 보살마하살의 회향에는 독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논】 해석한다.
‘일으키는 복덕이 5중(衆)을 여읜다.’ 함은 앞에서는 다만 과거의 일을 말했을 뿐이요, 여기서는 자신이 직접 수희하는 복덕을 말한 것이다.
만일 이런 복덕 가운데에 5중과 12입(入)과 18계(界)가 없는 줄 알면,
비록 반야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또한 공하여 모양을 여읜 줄을 아는 것이니,
이런 복덕을 바르게 회향한다고 한다.
또 만일 보살이 수희하는 복덕 가운데서 수희하는 복덕의 성품이 스스로 여읜 것을 알면,
모든 부처님과 선근 및 모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는 마음과 회향하는 마음과 보살의 반야바라밀 등의 모든 행하는 법은 자성이 공한 것을 아나니,
이것을 바른 회향이라 한다.
‘수희하는 복덕’이라 함은 온갖 복덕의 모양을 통틀어 말하는 것[摠說]이며, 선근을 수희하고 복덕을 일으키는 것은 각각의 모양[別相]에 대한 설명이다.
보살이 자신의 연(緣)으로 구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라 한다.
이 보살이 수희하는 마음의 공덕의 과보로 다만 최상의 도를 구할 뿐이니,
이것을 회향하는 마음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5중 가운데서 임시로 이름을 붙여 보살이라 하며,
반야바라밀 등의 모든 법은 앞에서 설명한 뜻과 같다.
앞에서도 복덕 가운데서 5중을 여읜다고 설명했고,
여기서도 복덕은 복덕의 자상이 공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또 보살은 과거 부처님의 인연으로 생긴 복덕을 염하면서 이와 같이 회향해야 한다.
마치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무여열반에 드신 것이 모양도 없고 쓸모없는 이론도 없어 그 성품이 항상 적멸인 것처럼,
이 복덕과 회향하는 마음도 그와 같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는 것을 바로 바른 회향이라 하며,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 한다.
또 만일 보살이 과거 모든 부처님의 공덕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고 분별하면서 회향하면 이것은 회향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양이 있다 하면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것이요, 모양이 없다 해도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쪽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과거의 부처님께서는 모양의 범주[數] 안에 떨어지지도 않고 모양이 없는 범주 안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이와 같이 모양이란 범주를 취한다 하면 이것은 회향이라 하지 못하며, 곧 뒤바뀜에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
위와 반대이면 뒤바뀜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어렵기 때문에 미륵이 거듭 물은 것이니, 이른바
“온갖 법에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서 다시 회향할 수 있는가?”라고 한 것이다.
수보리는 이에 대하여 결정적인 답을 할 수 없었으니,
그 때문에 미륵에게 말하기를,
“이런 일 때문에도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울 적에 방편의 힘을 구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 복덕은 반야바라밀을 여의고는 회향할 수 없다.’ 함은, 온갖 법 가운데서 하나의 법만이 진실이어서 속이지 않으니,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그것이다.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따르면서 속이지 않는 도(道)를 행해야 비로소 얻을 수가 있다.
‘속이지 않는 도[不誑道]’라 함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니, 그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여의고는 이 복덕을 회향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어서 복덕을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을 여의거나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거나 간에 회향할 수는 없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모든 과거의 부처님과 제자의 몸과 모든 선근과 복덕은 모두 소멸했는데 내가 이제 모양을 취하여 분별한다면,
즉,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다, 이것이 바로 제자이다, 이것이 바로 선근이다, 이것이 바로 수희하는 복덕이라고 하면서 모양을 취하여 회향한다면, 나는 나는 옳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실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과보를 받은 뒤에는 오랫동안 다해야 하므로 신속히 부처님 도에 이르지 못하나니, 그것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은 곧 큰 잘못이니, 즉 과거의 부처님께서는 공하여 없는데도 나는 생각하고 분별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독이 섞인 음식과 같다.
음식은 바로 수희하는 복덕이요 독은 바로 모양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견(愛見) 등의 모든 번뇌가 생긴다는 것이다.
‘좋은 빛깔[好色]’이라 함은, 복덕의 인연으로 사람의 왕이나 전륜왕 또는 천왕(天王)이 되어서 복과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좋은 향기[好香]’라 함은, 좋은 명예와 부귀와 세력을 얻는 것을 말하니, 범부와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다 함께 탐내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라 함은 새로 발심한 이로서 모양을 취하여 마음에 집착하고 있는 보살이다.
‘먹으면서 기뻐한다[食之歡喜]’는 것은 부귀와 쾌락과 복덕의 인연 때문에 천상과 인간에서 이 부귀와 쾌락을 누린다는 것이다.
‘밥이 소화되려 할 때에 죽거나 죽는 것과 다름이 없는 고통을 받는다.’ 함은, 이 부귀와 쾌락은 덧없는 것과 같아서 파괴되어 떠날 때에 근심하면서 마침내는 죽는 것이요, 그리고 죽을 만큼의 모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또 ‘죽거나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함은, 저절로 목숨을 잃게 되면 '죽는 것'이라 하고 집착하던 물건을 상실하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죽거나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괴로움이 많기 때문에 지혜의 생명을 잃으므로 죽는다 하고, 착한 도를 행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 경에서 수보리 자신이 말하되,
“이 지혜 없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 받지 않고 그 이치를 취하지도 않으면서 언어에만 집착할 뿐이다.”라고 한다.
‘자세히 살펴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함은 법답게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자세히 살펴 읽거나 외우지 않는다.’ 함은 글귀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잘못하기도 하고 받아들이되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함은 경의 뜻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가 적은 스승은 제자를 교화하되,
“선남자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일으킨 마음[初發意]에서부터 이와 같은 회향으로 마친다.”라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비방한 것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법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되면 바른 회향이라고 한다.
또 바르게 회향하는 보살은 생각하되,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모든 선근의 상(相)을 아시므로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들 가운데서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며, 부처님이 아시는 모든 선근 그것은 반드시 실상이다.
마치 부처님이 아시는 것처럼 나도 이와 같은 선근의 모양으로써 회향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땅에 활을 쏘면 땅에 맞지 않을 때가 없고 그 밖의 물건에 쏘면 혹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이 아시는 수희는 마치 활을 땅에 쏘면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만일 그 밖의 도(道)로써 수희하면 마치 그 밖의 물건을 쏠 적에 혹 맞기도 하고 혹 맞지 않기도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된다.
【경】 또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선근을 이와 같이 회향해야 합니다.
마치 물질[色]이 욕계(欲界)에 매이지 않고 색계(色界)에도 매이지 않으며 무색계(無色界)에도 매이지 않는 것처럼,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라 하지 못하고 미래라 하지 못하며 현재라고도 하지 못합니다.
마치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욕계에 매이지 않고 색계에도 매이지 않으며 무색계에도 매이지 않으며,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ㆍ미래ㆍ현재라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12입과 18계도 그와 같습니다.
마치 반야바라밀이 욕계에 매이지 않고 색계에도 매이지 않으며 무색계에도 매이지 않고,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으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마치 4념처가 욕계에 매이지 않고 색계에도 매이지 않으며 무색계에도 매이지 않고,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또한 8성도분도 그와 같으며,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18불공법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마치 여(如)ㆍ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실제(實際)ㆍ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과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일체종지ㆍ착오가 없는 법 및 항상 버리는 행[常捨行]이 욕계에 매이지 않고 색계에도 매이지 않고 무색계에도 매이지 않으며,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회향과 회향할 처소에 대하여 행하는 이가 매이지 않는 것도 모두 그와 같습니다.
이 모든 부처님도 매이지 않고 모든 선근도 매이지 않으며 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의 선근도 또한 매이지 않나니,
매이지 않는 법이라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도 하지 못합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물질이 삼계에 매이지 않고 매이지 않는 법임을 알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 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법이 과거나 미래나 현재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모양을 취[取相]하거나 얻을 것이 있는 법[有所得法]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질은 생김이 없기[無生] 때문입니다.
만일 법에 생김이 없으면 법은 없는 것이니, 법이 없는 가운데서는 회향할 수가 없습니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과 4념처 내지는 착오 없는 법과 항상 버리는 행도 삼계에 매이지 않습니다.
매이지 않는 법은 또한 과거나 미래나 현재가 아니요, 만일 과거나 미래나 현재가 아니라면 모양을 취하거나 얻을 것이 있는 법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생김이 없기 때문이니,
만일 법에 생김이 없으면 법이 없는 것이니 법이 없는 가운데서는 회향할 수 없습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하면 독이 섞인 것이 아닙니다.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모양을 취하여 법을 얻고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은 바로 삿된 회향[邪迴向]이라 합니다.
만일 삿되게 회향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삿된 회향으로는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없고,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착오 없는 법과 항상 버리는 행도 두루 갖출 수 없으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는 것도 두루 갖출 수 없습니다.
만일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할 수도 없고, 중생을 성취시킬 수도 없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회향에는 독이 섞였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모든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 곧 참된 회향이니,
나도 또한 이런 법의 모양으로써 회향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을 바른 회향이라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칭찬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대가 한 일은 불사(佛事)를 지은 것이며, 모든 보살들에게 회향의 법을 말해 준 것이니라.
그것은 모양이 없고 얻는 것도 없으며 벗어나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법의 성품도 없어서 자기 모양이 공하고 항상 자기 성품이 공하여 법성(法性)이요, 여(如)요, 실제(實際)와 같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모두가 10선도(善道)와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5신통(神通)을 행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중생들은 얻는 복이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저 모든 선근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이만은 못하나니, 그가 가장 높고 제일이며 가장 묘하고 보다 뛰어나서 비교할 이가 없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모두가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과 벽지불을 얻었을 때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수명이 다하도록 그들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선남자나 선여인은 이 인연으로 복덕을 얻는 것이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나 선여인 역시 저 모든 선근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이보다는 못하나니, 그가 가장 높고 제일이며 가장 묘하고 보다 뛰어나서 비교할 이가 없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을 적에 시방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 안의 낱낱 중생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그 보살들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고 공양하며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인연으로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라도 비유하거나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복덕이 형상이 있다 하면 시방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수의 세계로도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대가 말한 바와 같으니라.
그렇지만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 역시 저 모든 선근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이만은 못하나니, 그가 가장 높고 제일이며 가장 묘하고 보다 뛰어나서 비교할 이가 없느니라.
이 집착이 없는 회향의 공덕은 앞의 공덕에 비교하면 백 배, 천 배, 백천억 배 더 많으며, 나아가 산수(算數)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모양을 취하는 얻을 것이 있는 법으로써 10선도ㆍ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ㆍ5신통을 행하고 모양을 취하는 얻을 것이 있는 법으로써 수다원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의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하되 나아가 모양을 취하며 보살에게 공양하기 때문이니라.”
그때 사천왕천과 2만의 천자(天子)들이 함께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한 뒤에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의 가장 큰 회향은 방편의 힘으로써 하기 때문이고,
얻을 것이 없고 모양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이며,
깨달음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에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회향은 두 가지 법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석제환인도 수없는 삼십삼천(三十三天)과 그 밖의 천자들과 함께 꽃과 영락과 도향(擣香)ㆍ택향(澤香)ㆍ하늘옷ㆍ번기ㆍ일산ㆍ북ㆍ하늘의 음악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의 가장 큰 회향은 방편의 힘으로써 하기 때문이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써 하기 때문이며,
모양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이요,
깨달음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에,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회향은 두 가지 법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야마천왕(須夜摩天王)도 천 명의 천자와 함께 왔으며, 산도솔타(刪兜率陀)ㆍ화락(化樂)ㆍ타화자재(他化自在)의 모든 천왕들도 저마다 천 명의 천자들과 함께 와서 부처님께 공양한 뒤에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의 가장 큰 회향은 방편의 힘으로써 하기 때문이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써 하기 때문이며,
모양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이요,
깨달음이 없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에,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오니,
이와 같은 회향은 두 가지의 법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모든 범천왕(梵天王)이 무수한 백천억 나유타의 하늘들과 함께 부처님께로 와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큰 소리로 말씀드렸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보호를 받고 방편의 힘으로써 하기에 앞에서 든 선남자ㆍ선여인들로서 모양을 취하고 얻을 것이 있는 그런 이들보다 더욱 뛰어납니다.”
광음천(光音天) 내지는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도 무수한 백천억 나유타의 하늘들과 함께 부처님께로 와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큰 소리로 말씀드렸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보호를 받고 방편의 힘으로써 하기에 앞에서 든 선남자ㆍ선여인들로서 모양을 취하고 얻을 것이 있는 그런 이들보다 더욱 뛰어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천왕천 내지는 아가니타의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을 적에 온갖 보살들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및 성문과 벽지불의 모든 선근과,
처음 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머무르기까지 그 중간에 심어놓은 모든 선근과,
아울러 그 밖의 온갖 중생들의 모든 선근인,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일심(一心)ㆍ지혜(智慧)와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과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 등 이와 같은 그 밖의 한량없는 부처님 법을 염하고 이 모두를 한데 합쳐 수희하고,
수희한 뒤에는 모양을 취하거나 얻을 것이 있는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하자.
다시 다른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및 성문ㆍ벽지불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머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지은 모든 선근과,
아울러 그 밖의 온갖 중생들의 모든 선근인,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와 단바라밀 내지는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법을 염하면서 이 모두를 한데 합쳐 헤아리되,
얻을 것이 없음으로 하고 둘이 없는 법으로써 하며,
모양 없는 법으로써 하고 집착하지 않는 법으로 하며,
깨달음이 없는 법으로 한다면,
이것이 바로 가장 높은 수희요 첫째가고 가장 묘하고 더 이상 없어 같을 이 없는 수희이니,
수희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이 선남자나 선여인의 공덕이야말로 앞의 선남자와 선여인의 공덕보다 백 배, 천 배, 백천억 배나 더 뛰어나며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모든 선근을 한데 합쳐 헤아려 수희하고 회향하면 가장 높고 제일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뛰어나서 비교될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그 수희가 가장 높고 나아가 같을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기억하지도 않고 기억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얻지도 않고 얻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생각하기를,
‘이 모든 법 가운데서도 또한 어떤 법도 나거나 없어지거나 더럽거나 깨끗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아서,
마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의 모양이 여(如)한 모양이요 법성ㆍ법주ㆍ법위인 것처럼,
나도 이와 같이 수희하리라’고 하고,
수희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이와 같은 회향이 가장 높고 제일가며 가장 묘하고 뛰어나서 비교될 이가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 수희하는 법은 그 밖의 수희에 비교하면 백 배, 천 배, 백천억 배나 더 뛰어나며,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또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나 선여인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성문이나 벽지불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머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지은 모든 선근과, 보시 내지는 지혜와 단바라밀 내지는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법과 그 밖의 온갖 중생들이 지은 모든 선근에 이르기까지 수희하려 한다면,
마땅히 수희하면서 생각하기를,
‘보시는 해탈과 같고[等], 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도 해탈과 같으며,
물질은 해탈과 같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해탈과 같으며,
내공도 해탈과 같고 나아가 무법유법공도 해탈과 같으며,
4념처도 해탈과 같고 나아가 8성도분도 해탈과 같으며,
부처님의 10력도 해탈과 같고 나아가 일체종지도 해탈과 같으며,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 등도 해탈과 같으며,
수희하는 것도 해탈과 같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도 해탈과 같으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해탈과 같고 모든 부처님의 회향도 해탈과 같으며,
모든 부처님도 해탈과 같고 모든 부처님의 멸도도 해탈과 같으며,
모든 부처님의 제자인 성문과 벽지불도 해탈과 같고 모든 부처님 제자들의 멸도도 해탈과 같으며,
모든 부처님 법의 모양도 해탈과 같고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 모양도 해탈과 같으며,
온갖 법 모양도 해탈과 같으며, 나의 이 모든 선근의 모양으로써 수희의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도 해탈과 같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모든 보살마하살이 수희하는 공덕으로서 가장 높고 제일가며 가장 묘하고 뛰어나서 비할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이처럼 수희의 공덕을 성취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히 얻을 것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시방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부처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그의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이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하고 온갖 필요한 의복ㆍ음식ㆍ의약ㆍ침구 등을 공양하면서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이 모든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도 밤낮으로 정성껏 닦으면서 꽃과 향 내지는 번기와 일산과 음악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되 모양을 취하고 얻을 것이 있는 것으로 하며,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되 모양을 취하고 얻을 것이 있는 것으로써 한다고 하자.
다시 다른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뜻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서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모양을 취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써 하고, 방편의 힘으로써 하면서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하면,
이 복덕이야말로 가장 높고 제일가며 가장 묘하고 보다 뛰어나서 비할 바가 없나니,
앞의 복덕에 견주면 백 배, 천 배, 백천억 배나 더 뛰어나며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방편의 힘으로써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되 모양을 취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는 법으로써 해야만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은 ‘물질[色]에서 항상 버리는 행[常捨行]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은 삼계(三界)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3세(世)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과 제자와 아울러 모든 공덕과 수희하는 마음과 회향하는 곳과 회향하는 법과 회향하는 이도 또한 그와 같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이것을 바른 회향이라 한다.
그때 보살은 생각하기를,
‘만일 물질이 삼계에서 벗어나고 3세에 속하지 않는다면 모양을 취하거나 얻을 것이 있는 것으로써 회향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물질이 삼계에서 벗어난다면 곧 그것은 물질의 실상(實相)이어서 처음에도 나중에도 그 나는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한다.
마치 파생품(破生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날 것이 없는 법이라면 그것은 있을 것도 없다.
그런데 있을 것이 없이 회향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있을 것이 없는 보리의 마음에 회향하겠는가?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 항상 버리는 행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다.
이것을 독이 섞이지 않은 회향이라 하니, 이른바 모양이 없고 얻는 것이 없는 회향이라 한다.
‘독이 섞였다.’ 함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지 않는 것이어서 6바라밀 등을 두루 갖출 수도 없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마치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아시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마음을 내고 그와 같이 생각을 하며,
그와 같이 관찰하고 그와 같이 회향하며,
그 공덕으로 곧장 최상의 도에 이르는 것이니,
나도 그와 같이 수희하면서 회향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런 보살은 반드시 진실한 수희와 회향을 얻어 헛되지 않으리니,
앞에서 설명한 인연과 같으며,
여기서는 간략하게 모든 회향품을 설명한 것이다.
보살이 부처님께 예배하는 데는 세 가지 품이 있다.
첫째는 회과품(悔過品)이요,
둘째는 수희회향품(隨喜迴向品)이며,
셋째는 권청제불품(勸請諸佛品)이다.
더 널리 말하자면 한량없고 끝이 없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대는 불사(佛事)를 지었도다.’라고 함은,
부처님께서는 처음 발심하실 적에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하셨거니와,
수보리는 그가 아라한이면서도 부처님의 설법을 도와 보살의 도를 열어 주고 있으므로,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회향할 법을 말씀하셨다.
‘모양이 없음[無相]으로써’라고 함은,
모양이 없는 지혜로써 한데 합쳐 회향하는 것이니, 복덕의 모양은 위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한 것이다.
모양이 없다는 데의 모양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임시로 붙인 이름의 모양[假名相]과,
법의 모양[法相]과,
모양이 없는 모양[無相相]이다.
임시로 붙인 이름의 모양이라 함은,
‘수레’라는 것과 같고 ‘집’이라는 것과 같으며, ‘숲’이라는 것과 같고 ‘군사’라는 것과 같으며, ‘중생’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이 화합한 가운데에 다시 이름이라는 것이 있다.
무명(無明)의 힘 때문에 임시로 붙인 이름이란 모양을 취하면서 모든 번뇌와 업을 일으킨다.
법의 모양이라 함은,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 등이다.
모든 법은 육안(肉眼)으로 보기 때문에 있거니와, 혜안(慧眼)으로 관찰하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법도 또한 허망한 거짓말이므로 법의 모양을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모양을 여의면 나머지는 모양이 없는 모양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모양이 없는 모양을 취하여 그것을 좇고 모양을 취하여 도리어 번뇌[結使]를 내고 있나니, 이 때문에 모양이 없는 모양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곧 이 세 가지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한다.
만일 모양이 없다면 이 가운데서는 얻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벗어날 것이 없다.
만일 법에 얻을 것도 없고 벗어날 것도 없다면 곧 그것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으며,
만일 법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면 이것은 법의 성품이 없는 것이다.
또 법에 성품이 없다면 곧 그것은 제 모양이 공하고 법의 제 모양이 공하다면 곧 그 법에는 항상 자성이 공하며,
만일 법에 항상 자성이 공하면 곧 법성(法性)과 여(如)와 실제(實際)와 같다.
이와 같은 법으로써 화합하여 수희하는 복덕으로 회향하기 때문에 찬탄하기를,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하신다.
다시 “훌륭하다.”라고 하는 인연이 있나니,
이른바 수희하는 복덕으로는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 큰 과보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큰 이익인가?
이른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10선(善) 내지는 5통(通)을 행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문】 욕계 안에서 두 곳의 하늘과 범천왕(梵天王)은 무엇 때문에 많은 하늘들과 함께 오고 그 밖에 네 곳의 하늘은 무엇 때문에 함께 오는 이들이 적은가?
【답】 이 두 하늘은 땅을 의지하여 있고 부처님과 가깝기 때문이요,
또 5욕도 그 위의 하늘들과는 같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와 고행하실 때와 악마를 항복 받으실 때와 도를 얻으실 때와 법륜을 굴리실 때에 언제나 와서 부처님께 공양했나니, 이 때문에 오는 이들이 많다.
그 밖에 네 곳의 하늘은 궁전이 허공 안에 있어서 땅에 속하지도 않고 5욕이 미묘하여 물들거나 집착함이 깊기 때문에 많이 오지 못한다.
또 도솔천은 비록 근기가 예리하고 법을 좋아하기는 하나 그 천상에서는 항상 보처보살(補處菩薩)이 있어서 법을 설하고 있으므로 오지 않는다.
그리고 범천(梵天)은 욕망을 멀리 여의었다 하더라도 법을 좋아하는 정(情)이 깊고 부처님을 법왕(法王)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많이 온 것이다.
또 범천왕은 색계(色界)의 주인으로서 부처님께 처음 법륜 굴리기를 청했었고 그 때문에도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함께 왔다.
그 밖에 색계의 하늘들은 모두 다 범천이라 한다.
【문】 앞에서 갖가지 인연으로 바른 회향[正迴向]을 설명했다.
바른 회향 그것이 바로 가장 으뜸가는 것이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또 묻는가?
【답】 위에서는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른바 3세와 시방의 온갖 법은 결정코 마음이 이 법 가운데서 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 등이 없다는 것을 알며,
온갖 법을 얻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얻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 가운데 들어가서 생각하기를,
“마치 모든 법의 실상에서와 같이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수희하는 복덕을 회향하면 모든 법을 분별하지도 않고 법의 성품을 파괴하지도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을 가장 으뜸가는 회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과보가 항상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문】 6바라밀 등의 모든 법은 색상(色相)이거나 무색상(無色相) 등으로 각기 모양이 다르며 해탈에도 유위(有爲)해탈과 무위(無爲)해탈 두 가지가 있거늘 어떻게 모두 “해탈과 같다.”라고 말하는가?
【답】 나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범부의 사람은 육안으로써 6식(識)이 뒤바뀌어 관찰하기 때문에 다르다고 보거니와,
만일 혜안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면 모두가 허망한 것이어서 오직 열반만이 진실할 뿐이다.
이 유위의 해탈은 무위에도 속하며 무위를 따르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마치 실제로 도를 얻은 이만을 도인(道人)이라 하지만 지금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도 의복과 법칙이 도를 얻은 이를 따르기 때문에 역시 도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무여열반(無餘涅槃)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항상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양이며,
심식(心識)의 관(觀)이 소멸하고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닌 등의 모양인 것과 같다.
아무 모양도 없는 것이므로 혜안으로 온갖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이 모양과 같나니,
이것을 바로 6바라밀 등은
“해탈과 같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법 가운데서는
“해탈은 존귀한 것이요, 최고의 지혜를 지닌 이는 해탈을 귀히 여긴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분별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면서 얻을 것이 있는 법으로써 갖가지로 선근을 쌓고 모을 적에,
다른 어떤 사람이 얻을 것이 없는 법으로써 마음만으로 수희하고 다른 이의 공덕을 염하며 최상의 도에 회향한다 하면,
이 사람의 복에 비하면 앞 사람은 백천만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먼저의 복덕에는 한량이 있고 지금의 복덕에는 한량이 없으며,
먼저의 복덕에는 다함이 있고 지금의 복덕에는 다함이 없으며,
먼저의 복덕에는 독이 섞여 있고 지금의 복덕에는 독이 없으며,
먼저의 복덕은 생사를 따르고 지금의 복덕은 열반을 따르며,
먼저의 복덕은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물러나게 되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복덕은 결정코 부처님이 빨리 될 수 있으니,
이러한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사람 중에서 범부는 세간의 욕락을 구하고 성문이나 벽지불은 열반의 쾌락을 구하며,
만일 보살마하살이면 모두가 부처님에 대한 즐거움을 구하기에 이와 같이 수희하고 복덕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하나니, 이 품(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대지도론 제62권
40. 조명품(照明品)을 풀이함
【경】 그때 혜명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을 비추니,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반야바라밀에 예배해야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어둠을 없애니, 온갖 번뇌와 모든 소견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온갖 조도법(助道法)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조용하고 편안하니, 온갖 두려움과 고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광명을 주니, 5안(眼)이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삿된 도에 떨어진 중생에게 길을 보여 주고 인도하니,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바로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니, 온갖 번뇌와 습기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어머니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제 모양이 공[自相空]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었으니,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구제하는 이가 없는 이에게 구호자가 되니, 온갖 값진 보배를 베풀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힘을 두루 갖추었으니,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3전(轉) 12행(行)의 법륜을 굴리니, 모든 법은 유전하지도 않고 환멸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성(法性)을 보여 주니,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공양해야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존께 공양하듯 해야 하느니라. 반야바라밀에 예배하는 것도 세존께 예배하듯 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세존은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않고 반야바라밀은 세존과 다르지 않아서 세존이 곧 반야바라밀이요, 반야바라밀이 곧 세존이기 때문이니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벽지불과 아라한ㆍ아나함ㆍ사다함ㆍ수다원을 출생시키고,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10선도(善道)와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과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을 출생시키며,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출생시키느니라.”
그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은 생각하기를,
‘무슨 인연 때문에 사리불은 이런 일을 물을까’ 하며 사리불에게 말했다.
“무슨 인연 때문에 그런 일을 물으십니까?”
사리불이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교시가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수호를 받고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의 힘 때문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처음 발심해서부터 법주의 지위[法住位]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지은 선근(善根)을 모두 다 한데 모아 따라 기뻐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을 묻는 것입니다.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은 단(檀)바라밀이나 시라(尸羅)ㆍ찬제(羼提)ㆍ비리야(毘梨耶)ㆍ선(禪) 바라밀보다 뛰어나니,
마치 소경이 백 명ㆍ천 명 혹은 십만 명이 있어도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없으면 길을 찾아가거나 성(城)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시가여, 다섯 가지 바라밀도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마치 소경이 인도하는 이가 없어서 길을 찾아갈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교시가여, 만일 다섯 가지 바라밀이 반야바라밀에 인도된다면 이때의 다섯 가지 바라밀은 눈[眼]이 있다고 하나니, 반야바라밀의 도움과 인도로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신 말씀과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을 돕고 인도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사리불이여, 만일 단바라밀이 없으면 다섯 가지 바라밀도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며,
만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이 없으면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바라밀만을 찬탄하는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교시가여. 단바라밀이 없으면 다섯 가지 바라밀도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으며,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이 없으면 다섯 가지 바라밀도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에만 머물러야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시가여,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고 첫째가며 가장 묘하고 뛰어나며 견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내어야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물질[色]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도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며,
단바라밀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고 나아가 선바라밀도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나야 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물질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며, 나아가 온갖 모든 법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나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은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얻지도 않고 잃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온갖 모든 법은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얻지도 않고 잃지도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와 같이 나는 반야바라밀은 어떠한 법과 합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합할 데가 없느니라. 그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에 합하지 않는다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지 않은 법과도 합하지 않고 착한 법과도 합하지 않으며,
세간의 법과도 합하지 않고 출세간의 법과도 합하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법과도 합하지 않고 무루(無漏)의 법과도 합하지 않으며,
죄가 있는 법[有罪法]과도 합하지 않고 죄가 없는 법[無罪法]과도 합하지 않으며,
유위(有爲)의 법과도 합하지 않고 무위(無爲)의 법과도 합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을 얻지 않음으로써 생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에 대하여 합할 데가 없느니라.”
그때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또한 살바야(薩婆若)에도 합하지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반야바라밀은 살바야에 합하지도 않으며 또한 얻지도 못하느니라.”
석제환인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 살바야에도 합하지 않고 또한 얻지도 못한다 함은 무슨 뜻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이름과도 같지 않고 모양과도 같지 않으며, 일으키고 짓는 법이 합한 것과도 같지 않느니라.”
석제환인이 여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합하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가령 취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끊지도 않는다면, 이렇게 합하면 역시 합하는 것이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교시가야,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과 합하면서도 또한 합한 것이 없느니라.”
그때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전에 없던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이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얻어지지도 않고 잃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온갖 법과 합하기도 하고 합하지 않기도 한다.’고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버리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는 것에는 다시 인연이 있나니,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이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없고 텅 비었으며 견고하지도 않다.’고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버리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여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어느 법을 믿게 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물질을 믿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믿지 않으며,
눈[眼] 내지는 뜻[意]을 믿지 않고,
빛깔[色] 내지는 법(法)도 믿지 않으며,
눈의 경계[眼界] 내지는 의식의 경계[意識界]도 믿지 않고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도 믿지 않느니라.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도 믿지 않고,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도 믿지 않으며,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도 믿지 않고,
수다원(須陀洹)의 과위와 사다함(斯陀含)의 과위와 아라한(阿羅漢)의 과위와 벽지불(辟支佛)의 도(道)도 믿지 않으며,
보살의 도도 믿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도 믿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믿을 때에 물질에서 일체종지까지를 믿지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물질을 믿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일체종지를 믿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을 믿을 때에는 물질을 믿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믿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위에서 부처님께서 미륵과 수보리와 석제환인 등과 같이 수희(隨喜)하는 이치를 말씀하실 때에 사리불은 잠자코 있으면서 이 반야바라밀을 수희하는 이치가 매우 깊고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중생에게 큰 이익이 된다 함을 들었다.
그리고는 비록 번뇌가 다하여 고요히 사라졌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능히 따라 기뻐하면서[隨喜] 모든 쓸모없는 이론을 끊고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부처님 도에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반야바라밀입니다.”라고 한 것이요,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말하고 모든 법의 실상 가운데서는 쓸모없는 이론과 혼탁한 때[垢]가 없기 때문에
“마침내 청정하다.”라고 한다.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에 온갖 다섯 가지 법장(法藏)을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른바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와 무위(無爲)와 불가설(不可說)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이 온갖 법을 비출 수 있음은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반야바라밀은 보살을 수호하고 모든 고뇌를 구제하며 소원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범천왕(梵天王)이 삼천대천세계를 수호하는 까닭에 중생들이 모두 예배하는 것과 같다.
삼계(三界) 가운데에서 3독(毒)의 진창에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에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온갖 애욕[愛] 등 108번뇌와 아견(我見) 등 62종의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명의 어두움을 파괴한다.”라고 한다.
모든 법 가운데서 지혜가 가장 으뜸가고, 온갖 지혜 가운데서는 반야바라밀이 최상이니, 지혜로써 근본을 삼아 4념처 등 37품(品)을 분별하나니, 이 때문에 “
온갖 조도법(助道法)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라고 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모든 두려움과 고뇌를 끊기 때문에
“조용하고 편안하다.”라고 하고,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5안(眼)을 포섭하기 때문에
“광명을 준다.”라고 하며,
있다는 치우침[有邊]과 없다는 치우침[無邊]의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에
“바른 길[正道]을 지시한다.”라고 한다.
보살은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물러 온갖 번뇌를 끊고 미세한 습기도 남는 것이 없게 하면서 장애 없는 해탈을 얻기 때문에
“일체종지”라고 한다.
또 온갖 법의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의 온갖 종류의 지혜를 아는 인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한다.
시방과 3세(世)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내기 때문에
‘모든 보살의 어머니’라 하고,
온갖 법 가운데는 저마다 제 모양이 공하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한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은 모든 소견의 근본이요,
모든 소견은 모든 번뇌[結使]의 근본이며,
모든 번뇌는 온갖 나고 죽고 하는 가운데에서 괴로움의 근본이니, 이 때문에
“나고 죽음을 멀리 여읜다.”라고 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3보(寶) 등 모든 착한 법의 보배를 믿게 하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즐거움을 얻고 중생으로 하여금 두 가지 즐거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구제함이 없는 이에게 구호자가 된다.”라고 한다.
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파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필경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온전히 갖추어진 바라밀”이라 한다.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나고 죽는 가운데 유전하지도 않고, 환멸하여 열반에 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나지 않기 때문에 유전하지도 않으며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환멸하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3전(轉) 12행(行)의 법륜을 굴린다.”라고 한다.
3전 12행의 법륜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온갖 법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나니,
있다[有]는 것과 없다[無]는 것이다.
이 반야 가운데에는 있다는 것도 취하지 않아야 하고 없다는 것도 취하지 않아야 하며,
이 있다 없다는 것을 여의는 것이 바로 모든 법의 성품[法性]이니, 이 때문에
“모든 법의 성품을 보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인연으로 반야를 찬탄하는 것이니, 뒤에서도 널리 설명할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이라,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아직 익어지지 못했으면서 그 정해진 모양으로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곧 젠체하는 마음[慢心]을 내나니,
이 때문에 사리불이
“어떻게 공양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요,
부처님께서는
“부처님께 공양하듯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오랜 옛적부터 중생의 모양[衆生相]에 깊이 집착하면서 존귀한 법에 대한 마음[情]은 천박하나니, 이 때문에
“세존께 공양하듯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이는 부처님과 반야는 똑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관찰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로 닦고 쌓은 것은 곧 변하여 일체지(一切智)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성현들을 출생시키며, 10선도(善道) 등 세간과 출세간의 법 내지는 일체종지를 출생시킨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때에 “제석천왕이 생각했다.”라고 함은,
제석은 속으로
“사리불은 번뇌가 다하고 욕심을 여읜 사람인데도 마치 법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반야를 찬탄한다.”라고 했고,
지금 사리불은 자신이 직접 그 인연을 말하면서,
“보살은 반야에 보호받기 때문에 방편의 힘으로써 따라 기뻐하고 그 복덕을 회향하며 그러면서도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깨뜨리지 않는다.”라고 하며,
이런 일이 희유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존경하는 것이요, 그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떻게 공양해야 합니까?”라고 한 것이다.
다시 교시가는
“반야바라밀은 자체가 지닌 세력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보다 수승하다.”라고 함에 관해 묻는다.
【문】 다섯 가지 바라밀은 마땅히 다섯 소경으로써 비유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십만의 소경에 비유하는가?
【답】 여기서는 그 세력을 말하는 것이요,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는다.
또 만일 다섯 사람만을 인도한다고 하면 귀히 여기는 데에 좀 부족하므로 십만 명이라 말한 것이다.
또 바라밀다는 역시 많나니, 마치 현겁삼매(賢劫三昧)에는 8만 4천 가지 바라밀이 있으며 더 널리 말하면 한량이 없다.
【문】 단(檀)바라밀에도 역시 눈[眼]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와 복이 있다고 믿으면서 삿된 소견 등의 무명(無明)을 깨뜨리기 때문에 보시하는 것이다.
그렇거늘 무엇 때문에 눈이 없다는 데에 비유하는가?
【답】 보시에서의 지혜는 객(客)으로 오는 것이요, 바로 그 자체[正體]는 아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4대(大)가 항상 화합하여 서로가 여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반야바라밀의 화합도 역시 그와 같다.
“길을 찾아가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길[道]이란 보살 10지(地)의 도요, 성(城)이란 일체종지 등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또 길이란 8성도분(聖道分)이요, 성이라 함은 열반이다.
마치 소경이 비록 손과 발에 힘은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뜻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고, 눈 있는 사람의 지시와 인도가 있어야 그가 뜻한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다섯 가지 바라밀에도 비록 저마다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반야의 지시와 인도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2승(乘)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위없는 도[無上道]이겠는가?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인도를 얻기 때문에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부처님 도에 이르게 된다.
제석이 묻기를,
“그대는 스스로 말하기를,
‘모든 바라밀이 화합하여 서로가 돕고 있는 것이 마치 4대(大)가 서로 여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도 다섯 가지의 법을 필요로 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 때문에 다섯 가지 법은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에 대답하기를,
“비록 여섯 가지 일이 화합하여 서로가 돕는다 하더라도 다만 반야바라밀의 세력이 가장 크기 때문에 다섯 가지 법은 그로 인하여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비유하건대 마치 합하고[合] 흩어지는[散] 것에서 여러 가지 약에는 저마다 지닌 힘이 있다 하더라도 돌의 세력이 가장 크기 때문에 석산(石散)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과 같고,
또 마치 많은 군사들이 적을 무찌를 적에 비록 저마다 지닌 힘이 있다 하더라도 주장(主將)의 힘이 가장 크기 때문에 주(主)라는 이름이 붙는 것과 같다.
사리불은 이미 ‘반야에 공양하는 일’을 물었으며 이번에는
“수행하는 이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내는가?”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만일 수행하는 이가 ‘물질 등 모든 법은 나지 않는 모양’이라 함을 관찰하면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리불은 다시 묻기를,
“물질 등이 나지 않는 것을 관찰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이 난다 함은 무슨 뜻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시되,
“물질 등은 인(因)과 연(緣)으로 화합하여 일어난다.
수행하는 이는 물질이 허망한 것인 줄 알고 일어나지 않게 하며,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나지 않고,
나지 않기 때문에 얻어지지 않으며,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리지도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때 사리불이 묻는 뜻은
“반야는 나는 것이 없으므로 반연하는 곳[緣處]이나 수행하는 이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반야는 어떤 법과 합하게 되고 마침내는 어느 곳에 돌아가서 머무르며 어떠한 과보를 얻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다.
대답하시되,
“반야바라밀은 없는[無生] 모양이기 때문에 합하는 것도 없다.
만일 반야바라밀이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것 등의 어떤 법에 합한다 하면 그것은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한다.
이제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범주[數] 안에 든다.”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제석은 이미 반야바라밀이 온갖 법과 합하지 않는 줄 알고 있거늘 무엇 때문에 유독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지 않는 것을 묻는가?
【답】 제석은 이 반야를 귀중히 여기고 깊이 집착하면서 살바야에 대한 욕망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에
“살바야에까지도 합하지 않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되,
“반야바라밀은 살바야와도 역시 합하지 않느니라.” 하셨으니,
온갖 법은 필경 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단멸(斷滅)의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반야바라밀과 합한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범부들이 모양을 취하고 이름에 집착하면서 유위(有爲)의 법을 일으켜 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합한다는 것이다.
【문】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답】 온갖 모양은 거짓이기 때문에 모양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온갖 법 가운데는 무상(無常) 등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또 나라는 마음이 세간에 속박되고 그것을 집착하며 모두가 동요하는 모양이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고, 갖가지 괴로움을 내게 되며 뒤에는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온갖 세간은 뒤바뀐 것이요, 뒤바뀐 과보는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 같고 꿈과 같다. 그것은 소멸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다.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법에 집착하지도 않고 높은 체하는 마음도 내지 않는다.
필경공(畢竟空)에 들고, 착한 모양[善相] 가운데서 깊이 대비(大悲)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니, 보살은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합해져야 한다.
제석이 기뻐하면서 찬탄하기를,
“희유한 일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이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는 것은 나지도 않고 얻어지지도 않고 잃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보살을 성취시켜 부처에 이르도록 해 줍니다.”라고 하였다.
수보리가 말하기를,
“만일 보살이 얻을 것이 있는 것으로써 이와 같이 온갖 지혜 등과 온갖 법은 합한다,
합하지 않는다고 분별하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잃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그러하느니라. 다시 인연이 있나니, 보살이 만일 네가 하는 말, 즉 온갖 법은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다는 것으로서 이 공한 모양을 취하여,
‘반야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견고하지도 않다.’ 하면,
이것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잃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수보리가 반야바라밀은 얻을 수 없는 모양임을 알았기 때문에 묻기를,
“만일 반야바라밀을 믿는다면 어떤 법을 믿는 것인지요?”라고 한 것이니,
반야바라밀은 공하여 또한 얻을 수 없거늘 결정된 마음으로 어떤 법을 믿을 것이냐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물질 등의 온갖 법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 등의 온갖 법은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신다.
【경】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마하바라밀(摩訶波羅蜜)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무슨 인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을 마하바라밀이라 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눈[眼] 내지는 뜻[意]과, 빛깔[色] 내지는 법(法)과 안식의 경계[眼識界] 내지는 의식의 경계[意識界]를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습니다.
단(檀)바라밀 내지는 선(禪)바라밀도 크게 하지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도 크게 하지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4념처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크게 하지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법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모든 부처님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을 합하게 하지도 않고 물질을 흩어지게 하지도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합하게 하지도 않고 흩어지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합하게 하지도 않고 흩어지게 하지도 않으며,
물질을 한량없게 하지도 않고 한량없는 것이 아니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한량없게 하지도 않고 또한 한량없는 것이 아니게 하지도 않습니다.
물질을 넓게 하지도 않고 좁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넓게 하지도 않고 좁게 하지도 않으며,
물질을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물질을 힘이 없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힘이 없게 하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인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을 마하바라밀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새로 뜻을 낸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고 선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며,
비리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고 찬제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며,
시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고 단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으며,
물질을 합하게 하지도 않고 흩어지게 하지도 않으며,
물질을 한량없게 하지도 않고 한량없는 것이 아니게 하지도 않으며,
물질을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힘이 없게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힘이 없게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와 같이 안다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물질을 크고 작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크고 작게 하는 것이며,
물질을 힘이 있고 힘이 없게 하는 것이요,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힘이 있고 힘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얻을 것이 있음[有所得]을 쓰기 때문에 큰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을 크게 하기도 하고 물질을 작게 하기도 하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을 힘이 있게 하기도 하고 힘이 없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있는 모양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은 나지 않기[不生]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나지 않아야 하고,
물질은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도 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나지 않아야 합니다.
중생은 성품이 없기[無性]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성품이 없어야 하고 물질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성품이 없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성품이 없어야 합니다.
중생은 법이 아니기[非法]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법이 아니어야 하고,
물질은 법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법이 아니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법이 아니어야 합니다.
중생은 공(空)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공해야 하고,
물질은 공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공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공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공해야 합니다.
중생은 여의기[離]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여의어야 하고,
물질은 여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여의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여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여의어야 합니다.
중생은 있는 것이 없기[無有]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있는 것이 없어야 하고,
물질은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있는 것이 없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중생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가사의하여야 하고,
물질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가사의하여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불가사의하여야 합니다.
중생은 없어지지 않기[不滅]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없어지지 않고,
물질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없어지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없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중생은 알 수 없기[不可知]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알 수 없어야 하고,
물질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알 수 없어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알 수 없어야 합니다.
중생의 힘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아야 하고,
물질의 힘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부처님의 힘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을 마하바라밀이라 합니다.”
【논】 해석한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이 풀리어 반야바라밀을 찬탄하면서,
“이 반야를 마하바라밀이라 합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되받아 물으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 때문에 큰[大] 바라밀이라 하느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물질 등의 모든 법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범부의 마음은 모든 법 가운데서 뜻에 따라 크게 하고 작게 하기도 한다.
마치 사람이 다급할 때에는 그 마음이 줄어들어 작아지거니와, 안온하고 넉넉하고 즐거울 적에는 마음이 너그럽고 커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8배사(背捨) 가운데서 마음을 따르므로 바깥 물질[外色]이 혹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범부가 눈으로 물질[色]을 보는 가운데서 물질 아닌 일도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마치 업(業)을 가리키고 양(量)을 가리키고 수(數)를 가리키고 하나다[一] 다르다[異] 하는 등의 법을 가리키면서 합쳐서 물질이라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물질을 크게 한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눈으로 물질을 볼 때 볼 수 있는 것을 물질이라 하고 볼 수 없는 것은 물질이라 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친 물질[麤色]은 거짓이어서 진실한 물질이 아니며 다만 아주 작은 티끌은 항상 있기 때문에 이것이 진실한 물질일 뿐이다.”라고 한다.
작은 티끌이 화합했을 적에 임시로 이름을 붙여 물질이라 하나니,
이것을 “물질을 작게 한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범부는 물질을 혹 크게 하기도 하고 작게 하기도 하면서 생각과 분별을 따르는 까닭에 모든 법의 성품을 깨뜨리거니와,
반야바라밀은 물질의 성품에 따라 여실히 관찰하면서 크게 하거나 작게 하지를 않는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함은,
반야바라밀은 작은 물질이 화합한 것을 두고 물질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으니,
다만 임시의 이름이 있을 뿐이요, 일정한 모양의 물질이 없기에 합한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없거니와,
물질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어서, 처소마다 물질이 있지 않음이 없고, 시간마다 물질이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한량이 없는 것이다.
물질은 바로 짓는 법이거니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작은 티끌이 합한 까닭에 거친 물질이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거친 물질이 흩어지는 까닭에 작은 티끌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이 때문에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일어나는 법에는 많고 적음을 분별하고 헤아리는 일이 있기에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한량없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예컨대 범부는 텅 비었기 때문에
“한량없다.”라고 말하고
꽉 찼기 때문에
“한량이 있다.”라고 말하거니와
반야바라밀은 텅 빈 것과 꽉 찬 것을 다 멀리 여의기 때문에
“한량 있는 것도 아니고 한량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범부는 마음에 따라 기억하여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하여 넓게 되기도 하고 좁게 되기도 하거니와,
반야바라밀은 진실한 법 모양을 관찰하여 마음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넓게 되는 것도 아니고 좁게 되는 것도 아니다.
범부는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긴다 함을 모르기 때문에
“물질에 힘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니,
마치 여러 개의 실로 줄을 만들었을 적에 그것을 모르는 이는 그 줄에 힘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고,
또 담이 무너져 사람을 죽이면
“그 담에 힘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각각 나누어 본다면 그 각각에는 힘이란 없다.
반야바라밀은 화합한 모양임을 아는지라 어느 한 법도 힘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힘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또 큰 인연이 있다.
만일 보살이 6바라밀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물질 등의 모든 법을 크게 하지도 않고 작게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단지 반야바라밀만을 행하면 마음이 산란하고 조화되지 않아 많은 의심과 삿된 소견이 나는 것이므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잃게 되거니와,
만일 다섯 가지 바라밀과 화합하여 행하면 조화되고 어긋나지 않아서 모든 일을 다 성취할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8성도분(聖道分)에서 정견(正見)은 그것이 도(道)이지만,
만일 일곱 가지 일들의 도움이 없으면 일이 이룩될 수 없으며 또한 정견이랄 수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착한 법은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화합하여 같이 생기는 것이요 어느 한 법도 제 혼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없다.”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화합했을 때에 저마다 힘이 있으며, 다만 그 힘에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
만일 보살이 다섯 가지 바라밀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 등의 모든 법이 크다 작다 하고 분별하면,
이 사람은 곧 얻을 것이 있음[有所得]을 쓰는 데에 떨어지고,
‘있다.’ 하는 치우침[有邊]에 떨어지는 것이다.
만일 물질 등의 모든 법에 크다 작다 하는 분별이 없고 다섯 가지 바라밀을 여의면서 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는 등의 공한 모양에 집착한다면,
먼저 것은 모든 법의 크고 작음을 분별하면서 얻을 것이 있는 것이라 허물이 되고,
이번에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 등의 공한 모양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이것도 역시 허물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에 대하여 수보리는 그 인연을 말하면서,
“얻을 것이 있는 모양이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요, 얻을 것이 없는 모양[無所得相]이며, 마침내 청정한 모양[畢竟淸淨相]이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있는 모양’이라 함은 모든 쓸모없는 이론을 내면서,
“온갖 법은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하며 다투는 것이요,
‘얻을 것이 없는 모양’이란 나[我]와 중생(衆生) 같은 것을 시방에서 두루 찾고 구해도 얻을 수 없고 다만 임시의 이름만이 있을 뿐이며 실로 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은 나지 않기에 반야바라밀도 중생의 모양과 같아서 나라는 뒤바뀜을 깨뜨리기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마치 물질 등과 같이 모든 법의 나는 모양은 얻을 수 없기에 나지 않는 것이다.
두 가지 법이 온갖 법을 다 포함하니, 중생이나 법의 이 두 가지 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어서 다만 임시의 이름이 있을 뿐이요 일정한 성품은 없다.
만일 법에 일정한 성품이 없다면 이 법은 곧 나는 것이 없고 이 두 법은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또한 나는 것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중생과 법에 성품이 없고[無性] 아무것도 없고[無所有] 공(空)하고 여의고[離]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없어지지 않고[不滅] 알 수 없다[不可知]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의 힘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성취되지 않는다.’ 함은, 앞에서
“온갖 법은 인연을 따라 화합하여 생기므로 저마다 제 힘[自力]이 없으며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에 저마다 제 힘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설명했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제 힘이 없고 제 힘이 없기 때문에 또한 모든 법의 필경공(畢竟空)과 동일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중생과 법의 힘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문】 앞에서 “물질 등의 모든 법은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힘이 없게 하지도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다시
“중생과 물질 등의 모든 법의 힘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하는가?
【답】 위에서 “반야로 모든 법을 관찰하면 힘이 있게 하지도 않고 힘이 없게 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듣는 이가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로 이런 관(觀)을 지으면 곧 큰 힘이 있겠구나.”라고 할 것이므로,
이 가운데서
“중생과 물질 등의 힘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도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 때문에 마하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