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방법 중 하나로 확산했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다른 곳에 전해지는 과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령 누군가가 무엇이가를 발명해 사용한다고 해보자.
장래의 사용자, 즉 당신이라면 그 누군가가 이미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만들어내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당신이 쓸 비슷한 것을 어떻게 설계하겠는가?
발명의 확산은 극과 극의 형태를 띤다.
한쪽 끝에는 '청사진 복제(blueprint copuing)가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의 자세한 청사진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수정하는 방법을 뜻한다.
반대편 끝에는 '아이디어 전파(idea diffusion)가 있다.
기본 개념만을 받아들이고 세부 사항은 다시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리킨다.
당신도 뭔가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자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궁극적으로 찾아낸 구체적인 해결책은
첫 발명가의 그것과 유사할 수도 있고, 그렇 않을 수도 있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러시아가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청사진 복제와 아이디어 전파 중
어느 것이 더 큰 몫을 했는지에 대해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원자폭탄 제조는 미국이 이미 만들어낸 원자폭탄의 청사진을
스파이가 훔쳐내 러시아에 전달한 게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서 보인 위력을 목격한 스탈린이 그 유용성을 확신했고,
그때부터 러시아 과학자들이 미국 원자폭탄의 세부 내용을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황급히 원자폭탄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일까?
바퀴와 피라미드, 화약의 개뱔 과정에 대해서도 유사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청사진 복제와 아이디어 전파가
문자 체계의 확산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문자가 없는 언어를 위한 문자 체계를 설계할 때
청사진 복제 방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맞춤식으로 만든 문자 체계는 대체로 기존의 음소문자를 약간 조정하는 형태를 띠지만,
음절문자로 설계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예컨대 선교사 언어학자들은 로마자를 기본으로 삼아,
누기니와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이 사용하는 수백여 개의 언어를 분자화하고 있다.
튀르키예가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려고 1928년에 채택한 문자 체계는
정부에서 고용한 언어학자들이 로마자를 조정해 만든 것이엇다.
또한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의 많은 부족 언어를 표기할 문자를 만들기 위해 고용한
언어학자들이 고안해낸 키릴 문자의 문자 체계는 알파벳을 수정해 만든 것이었다.
드물긴 해도 먼 과거에 개인이 청사진 복제를 통해 문자 체계를 고안해낸 사례가 있었다.
예컨대 오늘날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는
9세기에 슬라브어 사용권에 파견된 그리스인 선교사 성(聖) 키릴이
그리스문자와 히브리문자를 적절히 뒤섞어 만든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다.
(영어가 속한) 게르만어계의 언어로 쓰인 최초의 문헌은 울필라스 주교가 창안한 고딕 문자로 쓰인 것이다.
울필리하스 주교는 기원후 4세기에 현재의 불가리아로 파견되어 서고트족과 함께 살았던선 교사이다.
성 키릴이 고안한 문자 체계와 마찬가지로,
울필라스의 문자 체계도 기존의 여러 언어에서 차용한 문자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 20개는 그리스문자, 약 5개는 로마문자, 그리고 2개는 룬문자에서 차용하지 않았다면
울필라스가 직접 만들어낸 것으로 이루어진 문자 체계였다.
하지만 과거에 쓰인 유명한 문자는 누가 만들어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도 과거에 새롭게 나타난 문자 체계를 예전부터 존재하던 문자 체계와 비교하고,
문자 형태를 통해 기존의 어떤 문자 체계를 표본으로 삼았는지 추론해내는 건 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리스 미케네 문명 시대의 음절 문자인 선형문자 B가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에서 사용하던 음절 문자인 선형문자 A를
기원전 1400년경에 받아들여 수정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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