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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의 집약체, 강화도 예로부터 강화도는 선사시대에 일찍이 발전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으로 진출하고 문화를 받아들인 길목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외침에 항쟁하며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수도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 조선궁궐이 있었고,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근대 사회의 시작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강화는 다양한 역사 경험이 누적된 땅으로, 우리 민족사의 고비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충실히 한 곳이다. 때문에 강화도에는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 국토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영광과 수난을 함께 겪어 오면서 그 역사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낸 갖가지 문화유산이 전해 오고 있다. 강화도는 섬의 특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으면서 도 토질이 비옥하고 생산물이 풍부하여 육지와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가 하면 1000년 동안 수도의 길목 구실을 한 곳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지방의 생산물과 외국의 문화 및 물자가 이곳을 통과하였다. 강화도의 문화유산 중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강화의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며, 해인사의 고려대장경판은 강화에서 기획되고 제작·보관되었던, 역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정족산 사고(史庫)에서 온전히 보관되어 오늘에 전하는『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강화도읍기를 전후하여 창제되었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남쪽에서는 유일하게 단군과 관련된 유적인 참성단이 있어 민족의 성지로 불리고 있고, 고려시기 한때 수도로서의 경험도 있는 곳이다. 일정한 지역으로 강화도만큼 민족이 겪어 온 삶을 비춰주는 거울로서 중요한 사연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강화도의 역사를 ‘한국 역사의 집약체’라고 말하기도 하니, 섬 전체가 온통 역사 교실이고 유적 박물관인 셈이다.
선사시대부터 살기 좋은 곳,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강화읍에서 서쪽으로 5㎞ 쯤 가면 부근리라는 마을에 도착하는데, 이곳에 학교시절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사적 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고인돌)가 있다. 청동기시대에 세워졌으니 그 자리를 지킨 지가 3000년 가까이 되었다. 한반도 남쪽에서 이 고인돌만큼 크고 당당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드물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로 잘 알려져 있다. 무게가 수십 톤이나 되는 덮개돌을 두 개의 고임돌이 그처럼 오랜 세월동안 지탱해 온 힘은 선사시대 조상들의 과학 정신에서 나온 것 같아 신비로울 뿐이다. 강화도에는 이 고인돌을 비롯하여 150여 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어 있는데, 마침내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성지,마니산 참성단 강화도가 개국(開國)의 성역, 민족의 시원지로 불리는 데에는 마니산에 참성단이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 남단에 우뚝 솟은 마니산의 정상에 돌로 쌓은 커다란 제단인 참성단은 우리나라의 국조(國祖)로 받들어지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참성단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는 밤에 별에 지내는 도교식 제사인 초재(醮齋)를 지냈다고 한다. 수 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참성단 초재가 올바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또 마니산은 사람에 따라서는 엄청난 기(氣)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니, 강화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명소이다.
고려수도의 경험, 고려궁지 강화대교를 건너 자동차로 5분이면 성(城)으로 둘러싸인 강화읍에 닿는다. 강화읍은 고려시대 이래로 무수히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엔 한때 수도로서 궁궐이 있었고, 조선에 와서는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예비 궁궐이 세워지는 영광이 있었는가 하면, 궁궐이 함락되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고려궁지는 강화읍의 중심이 되는 송악산 기슭에 있다. 13세기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자리했던 39년 동안의 궁궐터이다. 고종임금과 최씨무인 집권자들이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 대항하며 버텨냈던 곳이다. 사실 개경의 궁궐 뿐 아니라 관청, 사원도 거의 다 강화도로 이사를 왔고, 국왕을 비롯한 개경 대부분의 주민이 강화도로 옮겨와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거처도 도처에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궁이 있던 자리엔 행궁과 외규장각, 그리고 강화유수부의 행정관서 등이 세워졌다. 왕실의 도서관이었던 외규장각의 책과 자료들은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고려궁지 남쪽에는 강화도령 철종임금이 즉위하기 전 19살 까지 살던 집인 용흥궁이 있고, 용흥궁 뒤에는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한옥으로 되어 있어 전통시대의 종교시설인 절과 흡사하지만, 내부는 서양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강화도는 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들어오는 디딤돌 역할도 충실히 한 곳이다.
고려대장경의 조성 강화도에서의 왕성했던 자주정신과 문화의식은 고려대장경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은 그 규모가 방대할 뿐 아니라 세계의 어느 대장경보다도 정확하게 만들어져 세계 불교문화유산 중에 단연 으뜸가는 보배이다. 이 대장경판은 당시 고려의 불교문화가 세계적 수준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인사(符仁寺)에 있던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하여 소실되자,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간행에 착수하였고, 16년에 걸친 국가적 대역사 끝에 1251년 9월 완성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 긴 세월과 무수한 인력 재력을 들여 이 거대한 대장경 조성 사업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이 대장경의 조성 사업은 대몽항쟁 전쟁 중에 왕성한 민족의식과 문화의식, 그리고 일반 민중의 불교 신앙심에 힘입어 완수될 수 있었다. 몽고의 침입에 대처함에 있어서 대내적인 결속을 민족의식 속에서 찾고, 특히 우리는 대장경을 조성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문화적 긍지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대몽고 항쟁의 지표를 명백히 할 수 있었다. 또한 대장경의 조성이 성공적으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려 불교의 높은 수준과 그 전통적 저력 때문이었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148년 동안 강화도 판당에 보관되다가 조선 초 1398년에 왜구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여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해인사로 옮겼다.
강화학파의 열린 정신 강화읍에서 남쪽으로 찬우물고개를 지나 외포리 방향으로 12㎞쯤 가면 왼쪽으로 인산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를 지나자마자 좌회전하여 하우고개를 넘으면 정제두(鄭齊斗) 선생이 살던 양도면 하곡 마을이 나온다. 정제두 선생이 강화도 하곡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1709년의 일이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숙종 때로, 그는 정권유지를 위해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정치상황과 경직된 학문 풍토를 비판하며 선산(先山)이 있는 강화도에 들어와 살았다. 그는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버리고, 우리의 시각에서 현실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되 열린 학문자세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대학자였다. 정제두 선생이 강화도로 들어오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학맥은 200여 년 동안 이어져 이른바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1732년(영조8) 강화도로 정제두 선생을 찾아가 ‘실심실리(實心實理)’를 배웠다. 몇 해 후에 온가족을 이끌고 아예 강화도로 들어가 살면서 더욱 깊은 공부를 하고자 갑곶나루에 이르렀을 때 선생의 부음을 들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제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을 지어 양명학에 바탕한 객관적 역사관을 수립했고, 이면백의『 해동돈사』, 이건창의『 당의통략』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사기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후 자결하는 절의정신을 보였고, 영재 이건창(李建昌)은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인이었다. 근대 민족주의 학자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이건창의 친척 난곡 이건방(李建芳)의 제자이다. 이처럼 경학과 문학, 역사,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강화학파의 선두에 하곡 정제두 선생이 있다.
섬 전체가 역사교실이자 유적박물관 강화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아득한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 국토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우리나라가 겪어온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고려산 서북쪽을 지나다보면 3000년 전 진지한 자세로 고인돌을 세우던 선사시대 조상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고려궁지에 서면 700여 년 전 대제국 몽골에 맞서 싸우려고 북산 아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던 고려인의 비장한 음성도 들을 수 있다. 고려의 온 국민이 정성을 모아 완성한 팔만대장경 경판을 대장경판당에 봉안하고 모두 함께 감격하던 그날의 분위기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간과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강화학파 정제두, 이건창의 열린 생각을 들을 수 있고, 140여 년 전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가고 궁궐들을 불 태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 주민들의 안타까운 한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 며칠 동안만 피난하면 곧 돌아갈 줄 알았던 50년 실향민의 망향가도 들을 수 있는 곳이 이곳 강화도이다. 강화도만큼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비춰 주는 거울로서의 애틋한 사연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지역이 우리 땅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캡션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대장경. 국보 제32호로,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ㆍ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의 초상(위, 보물 제1486호)과 그의 필체가 돋보이는 <행서화기>(아래, 보물 제1677호). 42세 되는 1746년(영조 22) 여름에 쓴것으로 왕희지 행서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이광사 특유의 개성적 필치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의 중년 행서를 대표할 만하다. 강화성당. 사적 제424호로,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지만,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글. 김형우(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 사진. 문화재청 |
첫댓글 =\\\=화이팅..!
고려산님도..
화이팅~! ^^
태평스러울 때보다 위기에서 더욱 빛났던 강화의 역사적 사실에
늦게나마 관심을 가져보는 것 저 자신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한편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강화에 대하여 애뜻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님의 글을 전해주신 환한빛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