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 추천합니다.
안데르센의 '눈의여왕'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데, 겨울이 다가오면 떠오를 정도로 여운이 깊은 영화예요.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라 찾아서 보기 쉽지 않지만,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지, 어렸을 적의 상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폐쇄적이고 괴롭게 만드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어렸을 적 어머니의 끔찍한 학대로 온몸에 유리조각이 박혀 상처투성이가 된 마리(여주인공)는 마음을 닫고,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킵니다.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마주치지 않게_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남주인공)은 세계로부터 단절된 채, 그에 대한 분노로 난폭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자신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상처내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소통의 방법입니다.
그런 루벤에게 루벤의 어머니가 새롭게 고용한 책 읽어주는 여자 마리가 찾아옵니다.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는 루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그녀를 밀어내려 하지만, 의연한 마리는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마리에게 호기심을 느낀 루벤이 여전히 난폭한 행동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 때, 오히려 그녀는 완력으로 루벤을 제압합니다.
마리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루벤. 그러나 마리는 다시 그를 찾아옵니다, 이전에 고용됐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리는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건 곧 세계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루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검은 장막이 둘러쳐진 자신의 세계 그 너머에 있는 것_
소통의 방식이 잘못됐을 뿐 아마도 루벤은 자신이 단절됐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로부터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특별하게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해주는 마리에게 루벤은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루벤은 마리를 만나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떼고 땅을 밟으며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듯이_
눈의여왕의 카이같았던 루벤은 어느날 게르다처럼 자신에게 다가온 마리를 통해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을 조금씩 녹여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그 사람만의 고유한 느낌, 사물과 사람과 자연의 보이지 않는 이면, 본질을 사랑하게 되는 루벤. 심미안을 가지게 된 루벤에게 세계는 더이상 닫힌 것이 아닙니다.
마리에게도 심장에 깊이 박힌 얼음조각같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당한 끔찍한 폭언과 학대가 바로 그것_
마리는 그 후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도 깊이 숨어버립니다. 루벤의 방에 들어가서도 그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거울에 장막을 치는 것일만큼요.
루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자신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강하게 방어하며 그에게 맞서는 마리_ 그러나 루벤은 오히려 마리의 그런 모습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가 거부할수록 더 그녀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눈 뜨게 된 루벤이 가장 궁금했던 건 마리였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 그녀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으니까요. 향기와 촉감으로 사물과 자연에 다가가고 있던 그였으므로, 사랑하는 마리를 만지고 싶고 그녀의 향기를 맡고 싶은 건 루벤에겐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에게 박힌 얼음은 너무도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어서, 마리는 루벤의 사랑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흉터로 매끄럽지 못한 피부, 울퉁불퉁한 손과 얼굴_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온전히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과연 루벤이 진실하게 받아들여줄까_ 마리는 망설이고 망설입니다.
상처투성이인 마리의 얼굴을 만지고도 상상한 것 이상으로 너무 아름답다고 말하는 루벤, 마리는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루벤의 손을 잡습니다.
카이처럼 홀로 외로웠던 루벤에게 마리가 게르다처럼 다가왔듯, 세계로부터 거부당했던 상처때문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또다른 카이같았던 마리에게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루벤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영화는 루벤의 개안수술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루벤이 곧 시력회복을 위해 수술받게 된단 걸 알게 된 마리는 루벤을 사랑하기 이전보다 더 깊은 상실과 절망을 느낍니다. 마리는 더 이상 내면의 세계가 아닌 보이는 것 그대로를 보게 될 루벤이 두렵습니다. 루벤이 보게될 아름다움이 외면의 눈으로 자신을 흉측한듯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같아져 버릴까봐_ 그런 루벤을 마리는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결국 마리는 루벤에게 편지와 마지막 키스를 남기고 떠나버립니다. 루벤의 어떠한 모습도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여줬던 마리. 그러나 루벤이 비로소 온전히 두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할 때 그녀는 도망칩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루벤에게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봐_ 또다시 상처받게 될까봐 두러워서_
개안 수술 후 루벤은 앞을 보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보이기 전의 세계를 다시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루벤은 여전히 내면의 눈으로 주변을 보려 하지만, 정작 가장 보고 싶었던 마리는 곁에 없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집 "눈의 여왕"을 찾으러 간 도서관에서 다시 마리를 만나게 되는 루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 흠칫 놀라지만, 그녀의 향기를 맡고 루벤은 단번에 그녀가 마리임을 직감합니다.
루벤_ "내겐 당신 뿐인데, 왜 내 말을 믿지않는 거죠?"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믿지 않는 마리는 보이게 된 루벤의 눈 또한 믿지 못하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수술 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루벤은 마리의 편지를 읽게 되는데, 영화의 마지막 결말이 좀 많이 충격적이에요. (결말은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내 사랑 루벤
이 편지를 읽을 쯤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보고 있겠지.
허나 가장 아름다운 건 네 손끝으로 본 세상일 거야.
내 사랑, 나를 기억해줘.
네 손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너로 인해 난 놀라운 사랑을 봤어.
가장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은 보이지 않아. 영원함도 그렇고.
마리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감상은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경어체로 조금 수정해서 올려요.
첫댓글 앗 저도 이 영화 재밋게 봣어요 이따금씩 생각나는 영화에요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네 루벤이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려고 하는데도 자기 안의 상처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리의 마음이 너무 아프게 느껴지는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