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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수필작가 / 김애자
1944년 충북 중원 출생
월간 『수필문학』(1991)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충북수필문학회, 충북여성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수상 : 월간수필문학상(1997), 충북수필문학상(1998), 신곡문학상 본상(2003)
수필집 『달의 序曲』(교음사 1996), 『숨은 촉』(선우미디어 2003), 『미완의 집』(선우미디어 2004)
│대표 작품│
숨은 촉 외 4편
아침부터 굴착기가 들어와 다리 밑에 쌓인 흙을 퍼 올리고 있다. 70년대 초에 새마을 사업으로 놓였던 다리를 헐어내고 다시 놓은 다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열 푼짜리 굿판에 떡값이 일곱 푼 격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사라지고, 철근을 촘촘히 박아 가며 새로운 공법으로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먼저 고쳐 놓기 위해 벌인 공사가 시공한 지 한 달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지난 여름 장마는 끔찍한 재난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리퍼붓는 물벼락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 평의 농지와 수십 채의 가옥이 토사에 묻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처럼 폐허로 변해 버린 수마의 상처는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오지마을인 이곳은 몇 군데의 산사태가 난 것과, 범람하는 물살로 약간의 농지만 유실되었다.
하지만 언제 또 물벼락이 떨어질지 몰라서 마을 사람들은 마른번개만 쳐도 어마지두에 겁을 먹었다. 만일의 사태로 양달말과 음달말을 잇는 다리로 골짜기에서 불어난 물이 넘치기만 하면, 다리 아래에 있는 전답은 속수무책 흔적도 없이 쓸어 버리고 말 터였다. 마을회관이나 그 다리는 새마을 사업이란 요란한 변죽의 울림으로 세운 것이어서 허울만 멀쩡했지 부실하기는 흥부네 집 울타리만도 못했다.
해서 이번 참에 변죽만 요란했던 구시대의 유물을 헐어내야 한다고 각단지게 맘먹고 나선 이가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남편이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먼저 고치려면 관의 눈치나 보며 부지하세월 묵새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문턱이 닳도록 쫓아다닌 다닌 끝에 수해복구 사업으로 특별예산을 받아냈다.
먼저 굴착기가 들어와 낡은 다리를 시원스럽게 깨부수고, 개울바닥을 파헤쳐 물배를 잡아 주었다. 곧바로 다리를 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가판을 짜고 철근을 자르고 엮던 날은 첫추위가 대단했다. 수은주의 눈금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쳤으니 목덜미를 타고 들어오는 한기가 슬골까지 파고들었다. 명색이 이장댁이다 보니 망치질 소리와 철근을 자르는 금속성의 파열음을 귓등으로 흘려 버릴 수가 없었다. 라면과 커피를 끓여 놓고 집으로 불러들였다. 식탁 앞에 앉은 인부들의 언 손과 마른 입술을 보자 문득 가칠장이들 모습이 떠올랐다.
오래 전, 덕주사에서 대웅전을 짓고 있을 때였다. 단청 올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높은 작업대 위에서 대들보며 서까래며 공포를 걸레로 문지르고 부레풀을 칠하던 가칠장이들 입술도 허옇게 소금쩍이 앉았고 손은 오리발이었다. 오리발처럼 발갛게 언 손에 부레와 정분[白土]을 들고 낮은 곳은 쪼그리고, 높은 곳은 까치발로 매달려 가면서 어느 한 모서리도 빼놓을세라 요리조리 살펴 가며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네들의 엽렵한 손길이 거쳐가야만 나무가 마르면서 벌어진 틈과 옹이가 감추어지고, 채색이 곱게 먹는다. 금어들이 붓을 들고 기둥에 머리초를 올리거나, 천장에 비선문 당초문 연화문을 환하게 피워 놓는 것도 초장에 가칠장이들이 나뭇결을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숨은 촉’의 의미를 되뇌었던 것은, 곱은 손으로 가칠을 하고 있는 대웅전 어딘가에 분명 촉이 끼워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목조건물에는 못을 쓰지 않고 일일이 홈을 파고 끼워 맞추는 대신, 간혹 모서리를 돌리거나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머리 한 부분에 이에짬이 생기게 되면 그 짬에 맞게 촉을 깎아지른다. 겉에선 잘 보이지 않으나 건물의 균형을 잡아 주는 데는 없어선 안 될 절대의 가치를 지닌 쐐기다.
남대문 보수공사 때의 일화다. 건물을 해체하려고 모였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연했다. 일을 맡은 대목은 종일토록 건물을 살피며 돌다가, 마침내 ‘여기’라고 가리킨 곳은 ‘촉’을 끼운 곳이었다. 그 곳을 시점으로 목재를 하나씩 들어내면서 일련의 번호를 매겨 나갔다. 보수공사를 끝낼 때에도 그 자리에 다시 촉을 질러 두었다.
목공의 귀재는 새를 깎아 하늘에 띄운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 새를 통해 하늘과의 통신을, 어떤 이는 접신(接神)을 꿈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부서진 다리를 놓기 위해 가판을 짜는 도편수들이거나, 단청을 올리기 위해 정분을 바르고 문지르는 가칠장이다. 서까래 같고 대들보 같은 사람들의 위세에 가려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숨은 촉’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슬골까지 파고드는 냉기 속에서 철근을 자르고 엮을 것이며 가판을 짜서 다리막을 세우겠는가.
올해에는, 제 위세만 믿고 경우 없이 거들먹거리는 잘난 인사들이 물러나고, 추위에 애쓴다고 인사를 건네도 소이부답(笑而不答)인 이네들이 제대로 대접 좀 받으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02년 12월)
어머니의 강
강가에 차를 대고 입적(入寂)하신 듯이 잠든 어머니 얼굴을 들여다본다. 세수 92세가 되고부터 염주도 놓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삶의 숱한 편린들이 삭제되어 버린 이후, 그분은 그저 먹고 자는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무위로 움직일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뇌 세포가 거반 손상된 어머니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老軀)도 운신하기가 귀찮고 힘겨워 하고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닫혀 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건너 이 봄날, 강가에 나오시었다.
노모께 한 번은 이 강을 보여 주고 싶었다. 강은 그분에게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공간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끝내 모르쇠 하면 돌아가신 후에 회한이 될까 싶어서다. 때문에 강을 기억할 것이란 기대는 아예 거두고, 단지 촛농에 다붙은 심지 같은 눈동자에 저 푸른 물빛을 담아 드리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목욕을 시키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미장원에 가 머리도 손질하였다. 그렇게 떠나온 길이건만 어머니는 여전히 견고한 정적 속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강과 로맨스를 시작한 것은, 강마을로 시집오고 나서였다. 평산신씨 가문에서 열여섯 나이에 출가하여 대면한 강은 어린 새댁에게 낭만과 동경의 시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장마 때면 물이 불어나 목계나루에 배가 며칠씩 묶여 있을 양이면, 뱃사람들과 보부상들이 몰려와 떠들썩하였고, 기녀들이 치는 설장고가 강물을 타고 꿈결인 양 아득하였다.
목계는 일찍부터 물물교환의 메카였다. 한양과 영월로 뗏목이 오고 가는 중심지답게 강심이 깊었고, 강폭 또한 넓었다. 그러므로 내륙에서 나오는 곡물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 주로 이곳에서 거래되어 강원, 충청, 경상, 경기도로 풀려 나갔다. 이로 하여 나루 특유의 민속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하였다.
그 중, 정월 초아흐렛날에 지내는 뱃제사와, 줄다리기 행사는 대단했다.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처음엔 아기줄로 시작하여 차차 승벽이 커지면 편장(偏長)을 세우고, 용줄을 드리는데 이 때, 용머리는 칠 척이나 되었고, 몸체는 백 척이 넘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줄을 백사장으로 옮길 때 수줄 편장은 꿩의 장목에 푸른 기를 달고 풍물패를 앞세웠으며, 암줄 편장은 노란 띠에 공작모를 쓰고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며 경계선에 이르렀다. 그런 후에 비녀목을 지르곤 동편과 서편에서 모인 동민들이 보름 이상 줄다리기를 벌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 축제였을 터였다.
이렇게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행사기간에는 어린 새댁에게도 문밖출입을 허용하였다. 귀 밑에 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열일곱 각시와, 여드름이 함빡 돋아난 열아홉 신랑이 가만가만 대문을 열고 나와선, 강둑 저만치에 앉아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다간 돌아오곤 했단다. 앳된 청춘남녀가 강 언덕에서 밤 깊도록 밀월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사랑의 클라이맥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곤 태곳적 압록강 가에서 버들아씨 유화가 해모수와 정을 나누던 모습도 그러했을 것이란 상상도 해 본다. 진실로 사랑이란 단어는 맑고 따뜻하고 미학적이다.
하지만 강은 한 여인에게 따뜻하고 미학적인 추억만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지아비를 머나먼 타국으로 떼어 보내는 별리의 아픔이 그 강가에서 연출되었다. 야속한 일이었다. 강물이 얼고 풀리기를 수십 차례나 거듭하였으나 번번이 기다림을 배반하였으므로, 허망함, 괴로움, 곤고함, 서러움 등이 갈피 없이 뒤섞인 삶을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외롭고 쓸쓸한 여정의 끝, 존재와 부재의 간극에까지 이른 것이다.
어머니의 나약한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 본다. 부스스 깨어나셨으나 수면위로 내리꽂히는 빛의 굴절이 눈부신가, 미간에 잡힌 주름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다 가라앉는다.
“어머니, 강이에요.” 그러나 노모에게는 강물도 부질없다. 무릎 위에 놓인 사탕봉지로 손이 갈 뿐이다. 사탕 한 알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당신에게, 이제 저 강은 헛것이다. 아니 강만이 아니다. 곁에 있는 딸도 헛것이요, 자신조차도 헛것일진대, 세상살이 중 헛것 아닌 것이 어디에 있다고 사위스럽게 눈을 뜨시려 하시겠는가.
(2002년 봄)
미완(未完)의 집
산촌에서 살면 말벗이 그립다. 거실을 화랑으로 꾸민 것은 말벗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서다. 빈 벽이 없어 다소 협소해 보이기는 해도, 소장품 태반이 작가들에게 직접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혈점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선선히 내준 것도 고맙고, 작품에서 슬몃 풍겨 나오는 개개인의 개성과 체취와 온기, 내지는 비장미(悲壯美)를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된다.
특히 작품에서 느끼는 비장미란 예(藝)를 이루기 위해 사제처럼 살아온 그들의 삶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제단 앞에 새로운 제물을 올리려는 신성한 갈증으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창작에 몰입하였을 터이다. 벽에 걸린 금강경은 한 서예가의 몸으로 전사(轉寫)한 것이다. 십수 년을 사바에서 부처의 세계로 도달하려는 수도승처럼, 붓 한 자루를 지팡이로 삼고 예도(藝道)를 닦아 오늘에 이르렀다. 화가인들 아니 그럴까. 이젤을 마주하고, 켄트지에 심상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칠하고 문지르는 작업으로 얼마나 육체를 혹사시켰겠는가. 온몸을 흥건히 적시는 땀의 결정체, 진액의 결정체에서 어찌 비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한때 화랑을 운영해 보고 싶었다. 시간만 나면 전시장을 기웃거리거나 인사동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80년대 초에 그것도 지방에서 화랑을 운영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생심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의 호사스러운 취미에 불과했을 때였으니 봉급쟁이 아낙으로선 당치도 않은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당찮은 생심은 정신의 허기에서 기인된 일종의 치기였다. 그래도 한때 치기를 부리고 다녔던 것이 동기가 되어 적잖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다.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작품 중에서 눈길을 자주 보내는 것은 전축에 올라앉은 12호 크기의 ‘미완의 집’이다. 청주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엄 교수가 충북미전에 초대작품으로 출품했던 것인데 그는 그림을 들고 와선 한마디 툭 던지고 갔다.
“두고 보면 괜찮을 겁니다.”
비구상에 가까운 이 그림은 곡선이 없는 일자형으로 된 집이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벽의 절반을 지붕이 차지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집의 본바탕은 연회색과 흰색 유화를 섞어서 문질러 놓았다. 게다가 지붕의 중심에 오브제로 붙여 놓은 기역자 모양의 나무쪽은 진한 회색을 거칠게 덧발라 놓았다. 아무리 보아도 색채와 조형요소는 다 빼놓은 일종의 은유와 상징만으로 표현되어 벽에다 걸어 놓기에는 좀 난해한 듯싶었다. 엄 교수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거실 바닥에 세워 놓는 것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 후로 이 그림은 있어도 없는 듯, 벽 밑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지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간 어느 날 아침이었다. 거실 바닥을 닦다가 그림 앞에서 지극히 절제된 선과 색채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꿈과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제서야 ‘두고 보면 괜찮을 것’이라던 엄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날로 ‘미완의 집’이라고 화제를 달아 놓고, 곧바로 전축 위로 올려 놓았다. 그 자리는 거실의 중심이라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특석이었다. 청빈한 당상관이 하루아침에 대사헌이 되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날이 갈수록 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짓다가 만 허전한 공간에다 어떤 모양의 집을 지을 것인가를 구상해 보았다. 시원하게 트인 일자형에다 지붕이 서원처럼 진중하게 내려앉았으니 아무래도 한옥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심심하면 그림 앞에 앉아서 수수깡을 빗살로 엮어 벽을 만들고, 잘게 썬 짚을 황토에 섞어 성근 벽을 메워 나갔다. 지붕은 기와보다는 이엉을 엮어 얹으면 둥근 모양이 더 아늑할 것 같았고, 마루는 송진내 나는 적송을 켜서 깔면 쾌적할 듯싶었다. 문은 미닫이로 달고 덧문의 창살은 정자(井字)로 짜서 달기로 하였다. 상상으로 집 한 채를 짓다 보니, 마음 밑자리에 내재되어 있던 정서의 본질이 고개를 들었다. 흙에 대한 향수, 포근하고 아늑한 울림이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시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노상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사는 것 같던 도시 생활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글을 쓰는 것으로 채우던 정신의 허기가 다시 도졌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 지병인 섬유조직염이 날로 악화되었다. 흙으로 돌아가야만 몸도 마음도 치유될 것 같아 산촌으로 들어갈 계획을 서둘렀다. 이곳 저곳을 물색하다가 친정 조카의 안내를 받고 찾아온 곳은 산의 등고선이 첩첩 주름잡힌 두메였다. 이런 두메산골로 들어온 후로는 헛헛증도 사라지고 늘 포만감으로 혼곤하다. ‘미완의 집’도 비로소 다시 미완인 채로 비워 두게 되었다.
요즈음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미완의 집’을 보면서 ‘밀로의 비너스’를 생각해 보곤 한다. 두 팔이 없어 탄력 있는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옷자락, 그 부끄러움을 거두어 올릴 손이 없어 여신의 천성(天性)을 지킬 수 있었다. 터질 듯한 젖가슴과 잘 익은 포도알 같은 젖꼭지, 아늑한 동굴을 연상시키는 깊은 배꼽과, 약간 비틀린 관능적인 몸매를 지니고도 여신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팔을 잃어서였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팔이란 욕심을 심부름하는 원죄에 속한 것”이질 않던가.
밀로의 비너스가 원죄를 심부름하는 팔을 제거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고 한다. 밀로의 섬에서 비너스가 발견되었을 당시, 이미 팔은 부러져 나가고 없었다는 것이다. 팔을 훼손당하므로, 사랑하고 번민하고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여성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플러스적인 사고로 인하여 과감하게 아틀리에로 진출하여 수많은 화가들의 붓과 조각가들의 칼과 끌을 통해서 미술계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앞으로도 팔 없는 밀로의 여신은 데생의 모델로 그 자리를 고수할 것으로 여겨진다.
거실에 있는 저 ‘미완의 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회색빛 도시에서 창백한 얼굴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가 팔을 제거함으로 신화의 원형을 지킬 수 있었듯, 은유와 상징만으로 표현한 한 화가의 절제성을 통해 나는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미완(未完)’은 이렇게 완성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앞으로 집수리를 하게 되면 벽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떼어 낼 생각이다. 이제는 산창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만으로도 고적함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2003년 첫여름에)
6월, 그 하나의 불티를
유월은 한 해의 절반에 속한다. 태양이 하지점을 통과하는 절기여서 일 년 중 해가 가장 길다. 때문에 ‘미끈유월, 또는 ‘찔하지’란 속언이 따르기도 한다.
해는 길고, 무량하게 쏟아지는 볕이 자글거린다. 배불뚝이 늙은 독은 자글거리는 볕을 끌어안아 된장의 떫은맛을 삭히고, 쟁깃발 실하게 받아넘기던 다랑논에선 벼포기가 넌출넌출 불어난다. 나무들은 수관(樹冠)을 높이고, 마지막 허물을 벗고 나온 보리매미는 무조(無調)의 가락으로 목청을 틔운다.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바람이 휘휘 달려와 밤꽃 향기를 풀어놓는다. 일순 코끝에 스치는 남성의 향기, 밤새 닿을 수 없는 사랑의 환영을 쫓다가 더는 어쩌지 못해 거친 숨결 몰아 쉬며 쏟아 놓은 수음의 꽃내음.
6월은 이렇게 남성의 꽃내음이 온 산하를 휘감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청상의 고쟁이 속까지 넘본단다. 하나의 불티를 만나지 못해 그리도 몸을 달구는 것이리라. 애써 감추려 해도 자꾸만 근육에 실리는 성성한 힘을 주체 할 수 없어 그러는 것이리라.
6월이 오면, 비음(悲吟)의 멜로디가 귀울음으로 깔린다. 유혈의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노래 ‘백학’이다. 러시아 특유의 우수와 정서가 짙게 밴 이오스프 꼬브존이 부른 ‘백학’을 듣고 있으면 정말 학이 보인다. 내 눈에 밟히는 학은 낯선 땅에서 쓰러진 젊은 영혼들이 아니다. 차마 안쓰러워 시선조차 마주치기 민망했던 여인의 모습이다.
유년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눈에 비친 그니의 모습은 분명 한 마리 학이다.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충혼탑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곤 했다. 그때 바람에 나부끼던 옥색 치마며 겨자색 생모시 적삼이며, 우물가를 돌아가던 조신한 자태와, 가늘고 긴 목선이 그럴 듯 학을 연상시켰는지 모른다. 학이 깃을 치듯 길을 나섰다가는 일몰이 온 산을 술 취한 얼굴로 물들일 쯤이면, 얼굴에 수심을 달고 돌아왔다. 위령제에 가면 같은 처지의 미망인들을 만날 수 있어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남편의 죽음을 번번이 확인하는 심정이 더 참담하였을 터였다.
충혼탑을 다녀온 날 밤이면 그니는 방에 불을 켜지 않았다. 우물 속처럼 깊은 방안에선 가끔씩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와 여인의 흐느낌만 들려 왔다. 숱많은 떡갈나무 숲에선 어김없이 소쩍새가 울어 에었고, 밤꽃은 구름처럼 피어 향기를 풍기었으며, 어린 개구리들은 길 위로 올라와 혀짤배기 딸꾹질하듯 단음절로 비를 불렀다.
돌쩌귀 하나도 암수가 있었다. 아니 만물의 형상이 음과 양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니는 서러웠다. 묵정지에 핀 망초꽃마저 화냥기도 없으면서 더운 숨결을 쏟아내며 미풍에도 자지러지게 몸을 떨었지만, 그니는 불두화(佛頭花)처럼 외로웠다. 우유빛 살집이 아무리 흐벅져도 벌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무성(無性)이어서 사람들에게 ‘고녀’라는 놀림을 받는 그 꽃처럼 외로웠다. 그래서 하루에 삼천 번씩 울어 저를 지킨다는 종달새처럼, 울음으로 젊음을 소진시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니는 열아홉에 양천 허씨 문중으로 시집을 왔다. 세 살 더 먹은 신랑과 맺은 인연이 일생을 그토록 고적하게 바꾸어 놓을 줄은 꿈엔들 짐작이나 하였을까. 남편과 일심동체로 살아온 세월이란 게 고작 3개월 남짓이 전부였다. 역사의 등줄기에 문신처럼 새겨진 6·25는 이렇게 스물두 살의 앳된 신랑을 총알받이로 데려갔다. 입대 전날 밤, 아내를 품고 또 품어도 자꾸만 소름이 끼쳐 끝내는 새댁의 가슴에 얼굴 묻고 소리내어 울었다는 청년이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집을 나가선 다시는 대문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여인의 자궁 속에선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참 다행이라고들 입을 모았고, 시어머니는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혈점이 생겼으니 날아가진 않을 것이었고, 문중에도 낯이 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열아홉 새댁에게 아기는 발목을 잡는 올무였다. 올무에 발목이 잡혀 있었건만 시어머니는 철저한 감시자였다. 두 사람의 경계선은 안방과 윗방을 가로지른 네 쪽 미닫이가 전부였다. 돌아눕는 소리까지 들리는 경계선 위쪽에서 하고많은 날을 흐느낌으로 몸을 저미는 젊디젊은 며느리를 지켜보는 시어머니의 가슴인들 오죽했을까. 타고 또 타서 숯이 되었을 것을.
올해에도 밤꽃은 필 것이다. 꽃이라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어여쁜 구석이라곤 손톱만치도 없다. 두엄탕에서 막 기어 나온 지렁이 같은 이삭에 빛깔마저 신통치 못하다. 그런 주제에 세상 여자들 다 후려 볼 배포로 별난 꽃내음을 산지사방으로 날려보낸다.
열정이 많은 자일수록 방황이 길고, 번뇌가 많다. 번뇌가 많을수록 크게 깨닫는 법. 밤꽃이 무성한 소문을 달고 하나의 불티를 만나기 위해 몸을 달구지 않았던들, 어찌 소슬한 바람 한 점 빌리지 않고서도 그토록 가볍게 해탈할 수 있었을 것인가. 울음으로 살을 저미던 그니도 칠십 중반이다. 주일이면 성당에서 신부님이 내려 주시는 성체를 받아 입에 무는 노안이 해처럼 밝다.
6월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한 해의 절반에 속해 있어 확실한 질서의 필연성이나 도덕적 가치를 따져 묻기엔 기가 너무 승한 탓이다. 흑장미도 열여덟 살빛으로 터져 정신 아득하게 다가오고 있질 않는가. 그 얼마나 고운 아픔이랴. (2004년 6월)
젖어미
1. 불임의 땅
지난 여름에 서역을 다녀왔다. 동아시아와 유럽을 이어 주는 ‘실크 로드’에서의 여정은 몹시 힘들었다. 열사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대지에 기적처럼 세운 도시와 고대인들이 남기고 간 유적을 찾아,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7박 8일을 집시처럼 떠돌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의 땅을 보았다. 불임의 땅은 눈물겹도록 쓸쓸했다. 우루무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광활한 평원은 건초처럼 메말라 있었고, 황사의 발원지인 황토고원과 흙산이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바람에 살이 깎여 나가고 태양이 습기를 삼켜 버린 그 곳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문학적 은유마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루무치와 쿠차, 유원, 하밀, 돈황, 투르판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은 천산에서 내려오는 젖줄에 매달려 도시를 세우고, 양을 치고 관개수로를 이용하여 목화와 포도와 하미과를 경작하면서 그런대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 가고 있었다. 천산의 덕이었다. 천산이 머리에 이고 있는 만년설이 아니었다면 고비 사막에 둘러싸인 그 도시들도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진 ‘누란’과 같이 참담하게 몰락하고 말 것이었다.
‘누란’은 오아시스 도시였다. 타림 강이 로브노르 호수로 흘러드는 삼각주 위에 세워진 ‘누란’은 한때 서역에서 가장 경제와 문화가 번성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그런 고대의 한 도시를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 것은 모래바람이었다. 수시로 불어오는 모래폭풍이 악마의 손길처럼 도시로 뻗치면서 강과 호수를 삼켰고,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유린했다. 사람들은 물을 찾아 ‘누란’을 버렸고 인적이 끊긴 도시는 깊은 모래 바닷속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고 한 샤트 브리망의 말이 옳았다.
나는 첫 기착지인 성도에서 시작하여 우루무치, 돈황, 유원, 하밀,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투르판까지 비행기와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면서 그 모든 도시들이 언젠가는 ‘고창국’이나, ‘누란’처럼 전설만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버리면 물 없는 땅에서 인간의 존립이 불가능함은 자명할 터였다.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도 아닌데 강물이 흘러간 흔적과 호수의 퇴적층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메마른 벌판, 검은 뼈대만 앙상한 산, 황량함을 느끼게 하는 강의 퇴적층이 이처럼 불길한 예측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해마다 누란을 함몰시킨 모래바람이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막기 위해 중국은 ‘서부 대개척’이란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모래바람과의 싸움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서역으로 떠나기 전부터 호기심을 가졌던 곳은 ‘사막의 미술관’으로 알려진 돈황석굴과 명사산이었다. 모래가 현악기처럼 맑은 공명을 낸다는 명사산 남쪽 사암(沙岩) 기슭에 있는 천여 개의 감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천년 동안 수많은 화공들과 역경사들과 조각가들이 만들어 놓은 감실 속의 불상과 벽화들이 사뭇 호기심을 부추기었다.
답사 매니아들을 따라 인천공항에서 성도로, 성도에서 우루무치를 거쳐 세 번째 당도한 돈황이란 도시는 공항 로비에서부터 그 분위기가 달랐다. 공후를 손에 든 보살상의 고요한 미소가 우리들의 피로를 보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막의 미술관’ 어딘가에서 모방한 조형물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허투루 넘기려 했으나 이내 끌려들고 말았다. 문화의 고졸함이란 땅과 공기에까지 밴 연후래야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2. 월아천
여행 네 번째 날 아침나절에, 일행은 명사산으로 향했다.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그 산은 바람이 불거나 사람이 산에 오르면 울고, 밟으면 부서진다는 말이 해조음처럼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그러나 엷은 황금빛이 감도는 8월의 명사산은 공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모래의 입자가 하도 고와 부서지기는커녕 실크자락처럼 발목을 잡고 자꾸만 뒤로 끌어내렸다. 낙타의 등에서 내려 대나무로 만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본 시계(視界)는 개벽한 태초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모래로 조형물들을 설치해 놓은 대단원의 전시장 같기도 했다. 새삼 풍백의 위력이 느껴졌다. 바람의 신이 아니고는 고운 입자로 삼각주가 분명한 피라미드와도 같은 산을 무슨 재주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 음조의 높낮이처럼 이어지는 형상에 경탄을 바치고 나서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보았다. 그리고는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생각했다. “우리가 무심히 떼어놓는 한 번의 발자국 밑에는 4만 마리나 되는 미생물이 있다”던 그의 말을.
하지만 내가 손으로 움켜쥔, 그 한줌의 모래 속에는 단 열 마리의 미생물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슬조차도 내리지 않는 그 땅에는 물의 윤회도 없었다. 이슬의 전생과 구름의 전생과 비의 전생이 하나의 원융(圓融)이 란 것을, 그 원융에서 유기질과 무기질이 발생하는 고리의 순환을 거부한 채 오직 불볕과 모래바람의 폭정만 난무하는 고독한 땅이었다.
낙타는 달관자의 모습으로 멀리서 온 순례자를 등에 싣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낙타의 고삐를 잡은 소녀도 낙타처럼 걸으며 우리를 월아천(月芽泉)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낙타와 소녀는 오아시스로 가는 동안 내내 나를 우울하게 했다. 평생을 사막의 짐꾼으로 살아야 하는 낙타의 운명과, 불과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 소녀가 하루 종일 밑창이 얇은 운동화를 신고 뜨거운 모래펄을 걸으며 길라잡이를 한다는 것이 안쓰러워서였다. 낙타에게는 고삐를 풀어 주고, 소녀에게는 신록이 아름다운 한국의 5월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로 흔들리는 낙타의 요람이 못내 가시방석이었다.
문화 순례자들은 마침내 낙타와 소녀를 따라 월아천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물이 있었다. 젖어미가 희뿌연 사막 한가운데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앉아서 젖가슴을 열어 놓고 목마른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물가에는 나무도 있었고 갈대와 온몸을 가시로 무장한 낙타풀도 연보라 꽃을 달고 있었다. 누각 마당에는 꽃밭도 있었고, 꽃밭에는 우리 집 정원처럼 백일홍, 분꽃, 과꽃, 족두리꽃도 다 있었다. 젖어미가 젖을 물려 기른 어여쁜 생명들이었다.
여인이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사막과 함께 생겨서 지금까지 그렇게 초승달처럼 고운 자태로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중국의 비단이 그 길을 따라 멀리 로마나 인도로, 혹은 러시아 등지로 유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에 수많은 대상들과 승려들이 낙타를 끌고 여인의 젖가슴으로 파고들며 목을 축이고 여정에 지친 몸을 쉬어 갔다는 사실이다. 국적도 묻지 않고, 종족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목숨들을 품어 주던 젖어미는 8월의 모래바다 한가운데서도 흐트러짐 없이 의연했다.
나는 돌아와 물을 마실 적마다 그 어미를 생각했다. 희뿌연 모래바다에서 가슴을 열어 놓고 목마른 생명을 기다리는 관음의 젖가슴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여 내가 살아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린 물과, 이 강산과 국토를 기름지게 하기 위해 살신(殺身)한 젖어미들에게, 그리고 공장의 폐수로, 또는 도축장으로 들어가 죽은 소들의 핏물을 씻어낸 관음에게 이 부족한 글을 바친다.
(2002년 9월)
│김애자 작품론│
김애자 수필의 작품세계
유 경 환
수필가·시인·언론학 박사
1. 들어가며
시 소설 평론 희곡 따위 장르에선 작가가 작품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숨을 수 없다. 이것이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차이다. 작품 뒤에 작가가 숨을 수 없다는 것은 수필의 특성이기도 하다.
수필에선 작가가 작품 속에 들어와 있다. 때문에 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작품 그 자체와 작가가 따로 설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수필을 인간학(人間學)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 수필은 인간을 담는 그릇이다. 흙을 빚어 구워낸 그릇이 아니라, 글자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빚어낸 그릇이다. 이 그릇에 담기는 것은, 그릇을 빚은 사람 곧 작가이다.
이런 전제로 본다면 김애자의 수필세계라는 것은, 김애자가 빚은 글그릇에 담긴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 된다. 김애자의 수필세계를 살피는 작업은, 곧 그녀의 글그릇에 무엇이 담겼는가를 알아보는 일이 된다.
‘김애자의 수필작품 속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이런 물음에, ‘김애자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어요.’라고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인생관 자연관을 이루는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가치기준을 살펴내는 일이 작품세계를 알아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사고방식과 사유의 틀이 드러나는 글마디를 추려내 마디 마디 짚어 보기로 하자.
2. 풍부한 어휘력의 기저(基底)
… 나무들은 수관(樹冠)을 높이고 마지막 허물을 벗고 나온 보리매미는 무조(無調)의 가락으로 목청을 틔운다. …
―「6월, 그 하나의 불티를」 중에서
위의 인용에 구사된 ‘무조의 가락’이라는 묘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풍부한 어휘 구사력을 보여 주는 보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백이 작품 「외로운 축제」에 나와 있다. 퇴계집 율곡집 익재난고 열하일기 따위 고전들을 산절 뒷방에서 읽었다고. “‘새벽 이슬 속에 한 송이 금빛 국화가 피어나기 위해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더라’는 백거이의 시 한 편만으로도 외부와의 고립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외로운 축제」에서 인용) 보라. 서정주의 시의 발상이 어디에 있었는지, 감히 밝혀낸 실력이 김애자에게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늑막염과 뇌빈혈로 진학을 포기, 중학 과정은 집안 오빠에게서 지도를 받고, 고등학교 과정은 뒷날 올케가 된 대전사범 여학생에게서 배우고, 그리고 충북대에 들어가려고 하니 서양의 예술 대가들이 대학을 나와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고 심리학 교수가 만류하여 …” 결국 그녀는 각급 학교 졸업장 하나 없이 인간학을 터득한다. 만일 졸업장을 차곡차곡 받아 두었다면, 오늘날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 수필가가 되지 못하였으리라.
필자의 은사인 박두진이 정년퇴임 기념 고별강의를 하는 연세대에서 “나는 학사도 아니고 석사도 아니고 물론 박사도 아니다. 선비 사(士)자가 3개나 겹쳐도 대학 강단에 서기 어렵거늘, 하나도 없는 내가 15년이나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고 하여 장내를 숙연케 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과연 김애자가 송강 노계 고산의 가사문학을 읽지 않았던들, 신심명과증도가강설이나 원효 그리고 한산시(寒山詩)를 읽지 않았던들, 이름 그대로 「사랑받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을까?
3. 품격 지닌 문체
… 스님은 벽장에서 무명보자기에 싼 대금을 꺼냈다. 노스님의 손때가 묻어 있는 유품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떼었다.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소리가 법문이라 하시더군요.” … 바위에 걸터앉자, 감찰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포르릉 자리를 피해 주었다. 곧이어 스님의 어깨에 가락이 실렸다. … 손가락 끝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빈 벌판을 달리던 바람소리가 점차 청아하면서도 애 저린 가락으로 바뀌는 음절변화에, 나는 눈을 감았다. …
―「어느 봄날의 대금산조」 중에서
이것이 김애자의 서술법이다. 더 붙이고 뗄 것이 없다. “통나무 둥치를 놓고 한 꺼풀씩 한줌씩 벗기고 떼어내다 보면 남는 것이 형상이다”라는 조각가의 말처럼, 마음에 둔 원형만 남기고 나머지 상념들은 모두 칼끝으로 떼어낸 글과 다름없다.
불필요한 것들을 깔끔히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 조상(彫像)이라는 말 그대로, 글자를 가지고 형상화하는 그녀의 손작업이 조각가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 그 후로 산은 무시로 내게 정신적인 편력을 충동질하였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 준 산의 말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듣던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한정없이 그리워서였다. …
―「어느 봄날의 대금산조」 중에서
… 산으로 들어와 비로소 영혼의 닻을 내리게 되었다. 낮은 땅에 엎드려 텃밭을 가꾸며 하심(下心)을 배웠고 내 손으로 키운 상추며 오이 호박을 따다가 밥상을 차리면서 생의 의미와 인간에 대한 정애(情愛)를 새로이 깨달았다. …
―「외로운 축제」중에서
산에서 김애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 구원을 수필로 풀어내는 작업에 동원한 낱말에, 격(格)이 있으며 품(品)이 있으니, 깊은 골에서 차게 내리는 물처럼 그 문체가 맑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적잖이 수집하였다는 화가들의 화첩 가운데, 이대원(李大源)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이대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볕 밝은 날의 붓끝 같은 필치가 그녀의 글에서 엿보인다. 아침 햇살을 처음 받는 자연의 반사, 그 영롱한 인상파(印象派)적 기법이 읽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한다.
4. 숙성되고 발효된 생각
… 다시 고즈넉하다. 추녀 끝에 매달려 얼음의 결정(結晶)인 듯 명징한 울림을 떨구던 풍경마저 미동도 않는다. 눈발 속에서 미동도 않는 침묵이 오히려 발원(發願)의 중량보다 더 무겁다. …
―「산국을 태우며」 중에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도자기를 굽기 전 표면을 가늘게 파고, 금사나 은사 또는 자개를 집어 넣는 상감 작업을 손으로 하는데, 김애자는 글을 쓴다기보다 ‘파내고 그 자리에 마음을 끼워 넣는’ 그런 작업을 한다.
읽는 이가 읽기는 쉽게 읽어도, (읽는 이가) 미처 몰랐던 그 손작업을 어쩌다 떠올리게 되면 다시 되짚어 읽게 된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엔 이만큼의 공들임이 당연한 것임을 다시 알게 된다. 상감청자가 좀 지나친 비유라 한다면 뜨개질에 비유해 보자. 그녀의 글은 바늘코를 가지고 뜬 뜨개옷 같다. 뜨면서 무늬를 넣는 작업이 그토록 치밀하고 단아할 수가 없다.
… 벌을 잡지 못하고 헛손질만 하면 팔이 된통 아프다. 고 작은 것에도 기가 있어 배드민턴 채에 맞으면 기와 기가 부딪쳐 아픈 것을 모른다.
하지만 구사일생 저렇게 살아서 달아나면 어깨와 팔로 내리뻗는 신경과 인대가 쩌릿쩌릿하다 필시 살의를 품고 내리친 힘의 탄력을 자업자득으로 되받은 탓일 게다. …
―「무죄」 중에서
… 아울러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오는 동안 나는 그 시대 특유의 정서로 마음의 샘을 팠다. 두레박을 내려 아무리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우물을 파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재즈와 팝송을 즐기는 오빠는 그 우물에 뜬 반달이다. …
―「회상」 중에서
체험이 아니고서는 이런 서술이 불가능하다. 수필을 체험의 문학이라고 하는 말을 그녀는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겪어낸 체험이기에(말벌 잡는 이야기지만), 그것에 이끌려 읽게 된다. 한 사람의 체험은, 읽는 이에게 저마다 다른 경험의 맛을 떠올려, 다시 음미하도록 해 주는 재미의 꿀이 되기도 한다.
인용된 두 번째의 글은, 김애자의 문학수업에 영향을 준 집안의 작은오빠와 그리고 일찍 돌아간 사촌오빠 두 사람 가운데, 작은오빠에 대한 회상이다. 그런데 그 회상을 그려낸 묘사력이 매우 멋지다. 아무리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우물, 그런 (생각의) 우물에 뜬 반달이라고 했다.
가슴속에서 어떤 생각을 충분히 숙성시키고 발효시키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남모를 속앓이를 아프게 감당했을까?
5. 큰 하나 속의 ‘자연과 삶’
… 담을 치지 않고 주목으로 울을 삼았으나 아직은 품이 넉넉치 못해 키가 훤출한 해바라기를 심으면 여름 내내 에움벽 구실을 해 준다. 그러다가 9월이 오면 노란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꽃 중에서도 해바라기처럼 소담한 꽃이 어디 또 있을까. 꽃도 소담하고 씨도 풍성하여 품덕(品德)이 으뜸이다.
… 눈 오는 날에 새들의 먹이를 놓거나 안개 낀 이른 아침에 알밤을 주워 소쿠리에 담아 들고 걸어오는 남편의 실루엣은, 나에게 존재의 고마움과 황혼의 비애를 동시에 안겨 준다.
―모두 「남편의 실루엣」 중에서
김애자의 삶. 숲 속에 묻혀 흙 갈고 땅을 파서 소출을 얻고 즐기는 삶이, 어쩌면 이렇게도 소박하고 또 성스럽게까지 나타나는가. 필자는 이런 구절을 읽다가는 한동안 멈춰 글 속의 풍경을 바라본다. 글과 사람이 따로따로이면, 읽는 이가 끌려가지 않는다. 필자는 어딘지도 모를 숲에 가 보곤 하는 것이다.
… 가끔씩 밤나무 잎사귀에 맺혔던 이슬이 빗방울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이는 밤의 습기를 털어내는 지구의 기침(起枕)이다.
… 날짐승에게 겨울은 시련의 계절이다. 제까짓 것들이 무슨 수행자나 된다고 그토록 철저하게 무소유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양식은 고사하고 한끼 먹이조차 갈무리해 두지 못하는 가난뱅이다. …
―모두 「남편의 실루엣」 중에서
글쓴 이의 내면이 얼마나 정갈하면, 내면에 비친 사물을 이렇게 끌어낼 수 있겠는가. 필자는 조용히 감탄하게 된다. 산숲에 들어가 살아야 할 이유를,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읽는 이에게 속삭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읽는 이는 이를 수긍하게 된다.
6. 그녀가 가꾸는 ‘작은 행복’
… 그저 아무때나 내가 가고 싶으면 찾아가 마음 편히 앉았다가 올 수 있는 쉼터를 잃었다는 것이 못내 애석했던 것이다. 사소하나마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작은 행복을 잃고 나는 봄내 막막하고 쓸쓸하였다.
―「카페 샤갈의 풍경」 중에서
김애자의 작은 행복은 이런 것이다. 작은 행복이기에 그것은 작은 풍선처럼 큰 힘 들이지 않고 팽팽하게 차 오를 수 있다. 불어도 불어도 채워지지 않는 질량의 것이었다면, 그녀는 아직껏 지족(知足)의 삶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그녀는 뉘보다 큰 가슴을 지녔다.
… 장맛비에 우쭐거리는 여름산은 보기만 하여도 눈이 시원하다. 바람에 쓸리는 풀잎들이며 밭에 심어 놓은 참깨며 콩포기들이 나붓나붓 크고 있는 들녘과 그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 허리띠 같은 길을 따라 ….
―「카페 샤갈의 풍경」 중에서
그녀의 시선과 관심은 늘 이런 풀목숨에 쏠려 있고, 그러면서 김애자는 자연 속의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자신의 더운 숨결을 자각한다.
…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당찮은 생심을 낸 것은 정신적인 허기에 기인한 일종의 치기였다. 그래도 한때 그런 치기를 부리고 다닌 것이 동기가 되어 적잖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다.
―「미완의 집」 중에서
… 그날로 나는 ‘미완의 집’이라고 화제를 달아 놓고 곧바로 전축 위로 올려놓았다. 그 자리는 거실의 중심이라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특석이다. 청빈한 당상관이 하루아침에 대사헌이 되는 파격적인 출세였다.
―「미완의 집」 중에서
김애자의 정신세계엔 굵은 대들보가 보이는, 한옥 같은 고풍 구조가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음악과 미술에서도 그 뉘에 뒤지지 않는 상식과 교양을 지니고 있음이 글에서 생선의 뼈처럼 드러난다.
“잘 익은 밤송이가 툭 소리를 내며 해탈한다”고 인식하는 그녀는, 그림 한 폭에서도 “미완은 이렇게 완성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만한 잠재능력을, 정신의 하부구조로 쌓아 올려, 그 위에 수필가 김애자를 스스로 세웠다.
7. 나오며
위에 옮겨 놓은 여러 조각의 인용문에서 김애자의 글버릇과 특징을 엮어 보았다. 엮어 놓은 것을 갈래로 늘어놓으면, 대강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김애자는 글로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는다. 올려 놓으려 하지도 않고 또 내세우려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필자 같은 독자는 그녀를 치켜세우려 한다. 여기에 김애자의 본(本)과 질(質)이 나타난다.
둘째, 김애자는 글을 꾸며 쓰려 하지 않는다. 있는 대로, 본 대로, 그리고 경험한 대로 쓰고 있으나, 그러나 경험에서는 단순히 겪은 대로가 아니라 평소 생각해 온 생각을 넣고 버무린 체험으로 쓰고 있다. 있는 대로 본 대로 쓰는 일도, 자기만의 눈으로 묘사하지 결코 타인의 말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애자만의 안목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김애자는 글을 억지로 쓰려 하지 않는다. 장독이든 가슴이든, 발효되어 넘쳐 나오는 것만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위의 세 가지를 새끼줄 꼬듯이 꼬아 보면, 김애자의 수필엔 김애자식 생활과 삶이 들어 있는데, 그냥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줄로 탄탄하게 엮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산골, 오지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산그늘 내리는 산숲 한 자락 어디쯤에, 흙에 가장 낮게 가슴을 대고 살고 있는, 아니 ‘개척자처럼 살아가는’ 그 소박한 생각과 그리고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 가치기준의 생활 철학이, 빗속의 나뭇잎새처럼 너울거리고 있다.
│문학적 자전│
영혼의 닻을 내리고
김 애 자
1. 한의 원류(源流)
내 문학의 원류는 한(恨)이다.
최초의 한은 아버지께서 딸이 태어난 기념으로 심었다는 매화 한 그루와, 한 폭의 묵매로 시작되었다. 아들 형제를 두고 얻은 딸이라 그랬을까. 강보에 싸인 핏덩이를 품에 안고 적이 기뻐하셨다고 했다. 보름을 아기 곁에 머물다가 만주 길림으로 떠나가기 전날 밤, 먹을 갈아 아내와 딸을 위해 매화 한 폭을 그려 놓고 “梅以冷而花 其品潔”이란 시 한 줄을 써넣으셨다. 갓 태어난 딸과 서른넷인 아내에게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의 절개는 맑으나 소름이 돋는 서릿발이었다. 화선지에 그려 놓은 묵매 한 폭에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겨 놓고 떠나가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내가 태어난 지 열 달 만의 일이었다. 서른여섯에 만주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신 아버지는 명절날 아침이면, 고사리 손으로 차례를 모시는 우리들 등뒤에서 “쪽박의 밤톨같이 어린것들만 두고 간 무정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차례를 모실 적마다 “쪽박의 밤톨과 무정한 사람”을 처연하게 들추었지만, 처연하기는 쪽박의 밤톨들도 마찬가지였다. 삼 남매가 머리를 맞대고 붓끝으로 서툴게 지방을 쓰고, 과일 접시를 날라다 제사상을 차리는 모습 자체가 가련하였을 터였다.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아버지는 무정한 사람이었다. 아니 내게는 더욱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리워하고 싶어도 생후 10개월 만에 돌아가신 부친을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었다. 단지 어머니를 통해서만 아버지의 행적과 품성을 들어야 했고, 어머니께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몇 컷의 사진만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추억의 갈피를 뒤적이며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가슴을 막고 있는 울혈을 풀어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자위였다. 그 눈물겨운 자위의 타당성을 나는 시집와 자식을 낳고서야 헤아릴 수 있었다.
2. 오빠의 인멸(湮滅)
두 번째 한은 내 몸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병주머니를 달고 나온 아이는 항시 숨이 가빠 입술은 파리했고, 악성빈혈로 자주 쓰러졌다. 열 살이 되어서야 큰오빠 등에 업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이들 무리에 끼여들지 못했다. 고무줄 넘기에서도 공기놀이에서도 제 본을 따지 못해서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안에는 친오빠 두 분을 비롯하여 사촌과 육촌까지 도합하면 열 분의 오빠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게 더없이 훌륭한 교사들이었던 오빠들은 누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화책과 동화책을 맘껏 볼 수 있도록 구해다 주었다. 그것이 책을 탐닉하는 연원이 되었고, 글쓰는 데 밑천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부님 둘째 아들인 중호 오빠의 영향이 제일 컸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오빠는 국문과를 원하였지만, 글쟁이는 배곯아 죽기 십상이라고 큰아버지는 한사코 농대 연초과를 지원케 하였다. 오빠는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였으나 정작 손에서는 소설책과 시집이 떠나지 않았다. 후일 나는 그 책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기쁨을 누렸지만 거역할 수 없은 ‘운명의 힘’은 오빠의 폐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초기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약물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깊어지자 새 언니 손에 이끌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집으로 안치되었다.
나도 비슷한 시기에 결핵성 늑막염이 폐로 전이되었다. 어머니는 밤마다 염주를 손에 들고 지장보살께 간구하였다.
“애비 얼굴도 모르는 저 불쌍한 것,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사이다.”
어머니의 기원은 간절하였다. 하고많은 날을 비루먹은 당나귀 꼴로 방구석에서 비실거리는 딸은 피를 말리는 애물이었다. 중호 오빠가 마침내 외딴집에서 처참한 몰골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톨스토이와 안톤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마리아 릴케, 타고르, 소월, 윤동주. 이들이 쓴 작품집으로 작가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주었던 오빠의 인멸(湮滅)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몸 안에서 창궐하고 있는 죽음의 세포들로 하여 나도 언젠가 외딴 곳으로 위리안치되어 중호 오빠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3. 유배지에서
당시 결핵은 폐병이라 불리었다. 폐병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천형으로 여겨 내 병은 봉인된 비밀문서였다. 대전 63병원에서 군복무를 하던 작은오빠는 문창동에 방을 얻어 동생을 불러 내렸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메디컬센터에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어서였다. 이로써 나에게 ‘아름답고 슬픈 문창동 시대’가 열렸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축음기로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가정교사를 두고 고등학교 과목을 마치었다. 그러나 복용하고 있던 스트렙토마이신의 부작용으로 약을 중단하는 바람에 병이 악화되었다. 더 이상 세상 속에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아 스스로 유배를 청하였다. 일 년 반 동안 머물렀던 문창동을 떠나 약보따리를 싸 들고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구학산에 있는 한 암자로 도망가듯 잠적하였다.
암자에 몸을 의탁하고부터는 운명과의 대결을 포기하였다. 차라리 고통스러운 육신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산은 적막하였고, 겨우내 눈은 무릎까지 쌓였다. 밤이면 부엉이가 울었고, 여기저기에서 설해목 넘어가는 소리에 골짜기가 울렸다. 내 생애에 가장 춥고 긴 겨울이었다.
마침내 봄이 왔다. 차라기 죽기를 원하였건만, 역으로 각혈이 멎었다. 선혈에 물든 손수건을 더 이상 감추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입맛도 조금씩 살아나 자주 산으로 걸음을 놓았고,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에 앉아 종일 책을 읽거나 물소리에 귀를 모으곤 하였다. 밤이면 선반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고서를 찾아 읽었다. “새벽 이슬 속에 한 송이 국화가 피어나기 위해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더라”는 백거이 시 한 편으로도 외부와의 단절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국역총서에서 『익재난고』 『퇴계집』 『목민심서』를 찾아 읽으며 고전에 눈을 떴다. 고독한 평화 속에서 책과 투약으로 건강이 호전되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스물넷이었다. 일생에 단 한 장뿐인 청춘이란 티켓 사용 기간이 끝나기 전이었다.
4. 삶의 정처(定處)
60평생을 책 속에서 살았다. 어느 때인가부터 나는 무엇인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실한 갈증에 시달렸다. 이는 누에가 뽕잎으로 실샘을 채우고 나면 고치를 짓는 소이와 같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학동네에 입성한 지도 이러구러 열다섯 해가 되었다. 처음 신문에 칼럼을 쓴 것이 동기가 되어 월간수필문학사에서 수필가란 조명탄을 쏘아 올린 이후 나는 어머니의 한과 나의 한을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유전(流轉), 어머니의 강, 춘매(春梅), 놋화로, 귀거래사, 회상(回想) 등을 통해 쪽박의 밤톨들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한 여인의 가슴속에 서리고 맺힌 한을 퍼냈다. 다음은 문학청년의 꿈을 사촌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외딴집에서 쓸쓸하게 눈감으셨던 오빠를 위해 내가 만난 사람들의 한을 탁본하듯 원고지에 옮기고자 애썼다. 글에 대한 높낮이를 겨루려는 시샘도 가져 보지 않았다. 오직 쓰는 행위, 정직하게 쏟아 놓은 언어들이 모이고 모여 가슴 차 오르는 노래가 되었다.
다시 산으로 들어와 비로소 영혼의 닻을 내렸다. 낮은 땅에 엎드려 밭을 가꾸며 하심(下心)을 배웠고, 내 손으로 가꾼 상추며 오이 호박을 따다가 밥상을 차리면서 생의 의미와 생명에 대한 정애를 새로이 깨달았다. 이렇게 삶의 정처(定處)에 안주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의 표박(漂泊)을 일삼았던가. 앞으로는 가능한 한, 농촌의 정서와 이곳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삼고자 한다. 그래야 문학과 생활이, 도시와 농촌이 서로를 아우르며 예술이란 총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끝으로 작품평을 써 주신 유경환 선생님께 감사를 올리며 일매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