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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예속에서 벗어나라!
1월 12일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 사태는 900여 만 명의 인구1)중에 사망자 35-50만 명, 부상자 30만 명에 가옥 파괴 25만 채, 집 잃은 사람이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2)미증유의 피해를 낳아 세계적으로 커다란 관심과 동정을 불러 일으켰다3). 연일 보도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사태의 원인을 진단하는 글도 온·오프라인에 적잖이 실렸다. 이처럼 사태가 많이 알려지고 그 원인도 웬만큼 짚었는데, 우리가 굳이 이 글을 써서 발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참상은 많이 알려졌지만 진상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고, 원인 진단과 처방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아이티 지진 사태는 압도적으로 인재(人災)다. 어째서 인재인가? 다음의 사실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첫째, 현대에 손꼽히는 지진 사태로는 간토(1923년, 일본)4), 난샨(1927년, 중국), 탕산(1976년, 중국)의 지진과 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휩쓴 지진해일(일명 쓰나미, 2004년), 수마트라(2004년, 인도네시아), 인도와 카슈미르 지진(2005년), 최근의 쓰촨 대지진(2008년, 중국) 등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아이티 지진은 앞에 열거한 것들 중에 강도가 가장 약했으면서도(리히터 7.0) 피해는 가장 크다.5)
둘째, 미국 과학자들이 몇 해 전부터 아이티의 지진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셋째, 아이티의 지진 대처능력은 처참할 정도로 빈약하다. ‘내진 설계’된 건물은 아예 없고, 철근을 넣은 건물조차 많지 않다. 철근 대신 철사를 넣었다고 한다.
넷째, 아이티는 지진 뿐만 아니라 여타의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무방비 상태이고 무대책이다. 그 결과 아이티는 2000년대에 들어 거의 해마다 허리케인으로 물난리를 겪었고, 2008년 한 해에만 800명이 숨지고 백 만 명의 이재민을 냈다. 그런데 바로 이웃한 쿠바는 같은 허리케인을 맞았으나 그로 인해 단 한 명도 숨지지 않았다. 아이티에서는 숲이 거의 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 피해를 막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르뽀 기사들은 아이티인들의 심정을 전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아이티는 죽었다.” “하늘이 벌을 내렸다.”는 넋두리가 많았다. 지진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회와 국가를 한탄하는 절망의 말이다. 이 말이야말로 아이티의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2. 절망의 땅 아이티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섬나라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있다. 이스빠뇰라 섬의 서쪽 ⅓이 아이티이고 동쪽 ⅔가 도미니카다. 국토의 넓이가 한반도의 7분의 1이고, 한반도와 비슷하게 70%가 산악지대이다. 지금의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최빈국이다.6)인구의 4분의 3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극빈층), 인구의 과반수가 하루 1달러 벌이에 만성 영양실조 상태이고 문맹(文盲)이다. 15세 미만 어린이가 인구의 ⅖인 4백만 명 가까이 되는데, 초등학교를 마치는 어린이가 27%에 불과하다. 남의 집 더부살이로 사는7)아이도 40만 명이나 된다. 평균수명이 52세이고, 영아 사망률과 AIDS 감염률이 아주 높다. 전깃불을 밝히는 집이 10%다. 그러나 아이티 민중의 가난은 무엇보다 ‘진흙 쿠키8)’로 끼니를 잇는 아이들로 기억해야 한다! 이번 지진이 고아를 백 만 명이나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부랑아로 떠돌거나 강제 노동과 성매매, 심지어 장기(臟器) 매매까지 인신 매매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
지배층은 인구 5%의 뮬라토(흑백 혼혈인)으로, 대다수 흑인들이 아이티 크레올어를 쓰는 반면, 이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9)상위 1%가 부의 절반을 차지하여 ‘1 : 99’ 또는 ‘5 : 95’의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립하여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정부 예산의 3분의 1이 해외 원조로 충당되고 있으며, 바닥 민중 가운데는 해외로 떠난 가족과 친지의 송금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200만 명이 해외로 나갔다). 가령 2007년의 송금액은 16억 5천만 달러인데, 이는 아이티 국가 1년 예산의 두 배, GDP의 30%에 달한다.10)
지진 사태에서 아이티 정부의 무능함이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기실은 2004년부터 아이티는 UN 평화유지군(PKO)이 지탱해 오고 있다. 아이티인들이 자랑으로 여긴다는 화려한 대통령궁은 지진으로 무너졌는데 부유촌 ‘벨빌’은 끄떡 없었다. 또 지진 이전부터도 발전소가 변변찮아서 밤이면 수도 포르드프랭스 시내가 온통 캄캄한데 미국 대사관은 지금도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아이티는 1960년대부터 미국의 조립 공장이11)들어오는 등 자본주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농촌의 몰락도 동시에 진행되어 살 길을 잃은 농민들이 점점 수도권 빈민가로 몰려들었다. 커피값이 폭락하자 커피 농민들이 ‘숯’ 굽는 일로 대부분 전환하는 바람에 숲이 (국토의 2%만 남을 정도로) 다 소멸해버렸다.12)1986년 IMF 구제금융의 대가로 쌀시장이 개방되고 1995년 수입쌀 관세가 30%에서 3%로 낮춰지자, 자급자족해 오던 쌀농사가 거덜나고 덤핑으로 들어온 미국쌀이 시장을 모조리 점령했다. 미국은 가축 전염병을 계기로 토종 돼지의 전면 폐사, (사육 비용이 훨씬 많이 먹히는) 미국 돼지의 사육을 강요하여 또다른 피해를 안겨주기도 했다. 아이티인의 빈곤이 극심해진 것은 농촌이 파탄나고부터다. 2008년 4월에는 세계적인 농산물값 앙등이 겹쳐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이티는 실업률도 75% 안팎이라고 하니 이는 ‘시초 축적’을 넘어 한 사회의 산업 기반이 모조리 무너진 셈이다. 그 결과로 임금 수준이 턱없이 낮아져서 이웃 도미니카의 4분의 1에 불과한 하루 2달러에 머물러 있다. 현실이 이러하니 아이티를 ‘절망의 땅’이라 소개한 언론 기사들이 적지 않다.
3. 아이티의 역사 : 노예에서 주인으로, 다시 예속민으로
1492년 컬럼버스가 이스빠뇰라 섬(아이티의 옛 지명)에 당도했을 때 이곳에는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카리베족 선주민이 살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주의의 갖은 악행과13)외지에서 묻어간 전염병의 창궐로 30년 뒤에는 선주민이 다 멸종했고, 스페인은 금 채굴과 면화 재배를 위해 흑인 노예를 들여왔다. 프랑스는 17세기 중반부터 해적질로 스페인을 압박하다가 1697년 이 섬의 일부(지금의 아이티)를 프랑스령으로 빼앗았다. 스페인령의 사람들은 아이티 독립투쟁 과정에서 한 나라로 합쳐졌다가 1844년 따로 갈라져 나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는 이스빠뇰라 섬의 일부를 접수한 뒤, 대규모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을14)세웠다. 이 선진 설탕산업으로 하여 아이티는 ‘앤틸리스의 진주’라 불릴 만큼 제국주의자들이 흥청거리는 곳이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 한때 국부의 4분의 1을 이 섬에서 생산한 설탕과 커피, 담배로 벌어들였다.15)아이티는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 커피의 60%를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봉홧불이 오르자,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 혁명사상에 고무된 이곳의 흑인 노예들이16)1791년에 봉기를 일으켰다. 근대 설탕농장에서 집단의식과 규율을 터득한 노예들이 삽과 쇠스랑을 들고서 프랑스, 영국, 스페인 군대에 맞섰고, 1804년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 독립국이요, 흑인들이 세운 첫 나라요, 스파르타쿠스 이래로 노예들이 혁명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아이티인들은 근대 인류사의 선구자였다. 부르주아지(백인)들이 주도한 반봉건 혁명을 노예(흑인)들이 나서서 이어 받았으니 18세기를 뒤흔든 혁명 3부작의17)하나로 꼽힐 만하다. 시몬 볼리바르가 이 혁명에 고무되어18)1811년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세웠고, 아이티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민중의 독립운동에 돈과 무기와 군대를 지원했다. 미국 노예들의 일부도 아이티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미국 지배세력은 이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악착같이 막다가 반 세기가 지난 1862년에야 마지못해 독립을 인정했다.19)아이티 독립은 정치혁명이자 사회혁명이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고, 토지개혁으로 플랜테이션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변혁의 선두 주자가 겪은 역풍이 너무 거셌다.20)프랑스와 미국이 해상 봉쇄, 무역제재를 가했으며, 아이티인들은21)1804년 독립하고 나서도 인구의 ⅓이 절멸되고 국토가 다 파괴되는 투쟁을 견뎌야 했다. 1823년 평화협정을 맺는 대가로 1억 5천만 프랑의 터무니없는 독립 배상금을 물기로 한 것도 어쩔 수 없는 패배적 선택이었다. 그 돈은 지금의 210억 달러에 맞먹는다. 이 돈은 1947년에서야 다 갚았는데 이를 갚기 위해 미국 은행에 돈을 빌리기 시작하면서 아이티는 건국 초부터 외채의 덫에 빠졌다. 아이티는 생물다양성이 높은 울창한 원시림을 자랑한 나라였는데, 배상금 명목으로 프랑스가 삼림을 마구 벌채해 가는 바람에 19세기 중반에 이미 숲의 상당 부분이 거덜났다.
도미니카의 독립 자체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 분할이 그대로 재생산된 것이다. 도미니카는 1844년 독립한 뒤 얼마 가지도 못해 1859년 다시 스페인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 5년간 식민지 시대를 다시 겪었는데, 그렇다면 도미니카의 이른바 ‘독립’을22)누가 부추겼는지 분명하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따로 살았으니 민족적 동질감이 희박했을 것이다. 도미니카의 독립 과정에서 서로 앙금이 남아 양국이 오랫동안 불화 상태로 지냈다. 아이티는 1804년 건국 뒤에도 1820년까지 남북 분열의 상태를 맞았는데 과거의 프랑스령, 즉 지금의 아이티와 스페인령이었던 지금의 도미니카가 통일에 실패함에 따라 두 민중이 외세에 맞설 힘은 훨씬 줄어들었다.
아이티는 1871년 무렵부터 지배층의 내분이 다시 심해짐에 따라 구한말의 조선과 비슷하게 서구 열강들의 먹이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뒷전으로 물러났지만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이 앞다투어 이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라틴아메리카의 패권을 차지한 뒤로 차츰 아이티에 영향력을 넓혀 갔다. 1915년에는 아이티를 점령하여 1934년까지 ‘보호령’으로 삼았다.23)1차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의 카이제르(Kaiser) 황제가 카리브해에서 해군기지를 확보하여 개입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프랑스도 호시탐탐 진출의 기회를 엿보던 터였고, 아이티 정부가 전쟁의 기회를 틈타 유럽과 미국이 투자한 아이티은행의 금괴를 몰수하려 했던 것도 점령의 이유였다.
미국은 점령기간에 외국인 토지소유와 투자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을 삭제하여 자본 진출의 길을 닦았다. 1918년 헌법개정 선거는 해병대의 총부리 하에 치러졌고, 5%만이 투표에 참여했는데도 합법으로 인정되었다. 숱한 농장이 미국 자본가의 소유로 넘어갔으며, 토지를 잃은 아이티 농민들이 설탕을 항구로 실어 나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다. 노예제도도 사실상 부활했다. 미군은 19년의 점령 기간 동안 6만 명을 학살했다. 1934년 미국의 점령에 대한 아이티인들의 저항이 터져 나오자 미국은 한 발 물러나서 간접 통치로 전환한다. 미국의 충실한 종속국 아이티는 2차 대전 때는 미국을, 한국 전쟁 때는 이승만 정권을 도왔다.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아이티인들의 저항이 점점 커져 갔다. 보호령 시대에 ‘카코스’라는 농민 게릴라들이 아이티 북부에서 저항투쟁을 벌여 토지를 빼앗긴 기층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 지도자 샤르멘느 페랄트는 80년대 후반 들어 외세에 저항하는 아이티인의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1934년의 미군 철수도 민중 저항의 결과다. 1929년 세계대공황과 커피값 폭락이 그 도화선이었다.
1946년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 좌파 성향의 에스티메 정권이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소 연합국의 승리로 아시아와 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24)혁명의 파고가 거세게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는 미국 소유의 바나나 농장을 국유화하고, 소득세를 신설하고 농업의 집단농장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저항을 물리치지 못해 연임에 실패했다. 후임인 마글루아르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꾀하다가 민중의 저항을 받아 물러났다.
1957년부터 1986년까지는 뒤발리에 부자(父子)가 권위주의적 독재를 휘두른 시대였다. ‘파파 독’(아버지 뒤발리에)는 흑인 민족주의를 선동하여 집권했으며25)부두교(아이티 토속종교)를 믿는 기층 민중들에게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했다. 그는 국가보안대를 창설하고 ‘마쿠테’라는 만 명 규모의 친위자위대(사실상의 테러단)을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다. 마쿠테는 처음엔 부두교의 농촌 사제(司祭)들을 조직해 주술의 힘으로 뒤발리에를 우상화하는 조직이었는데 점차 테러의 임무를 맡아 끔찍한 살육을 벌이게 된다. 뒤발리에는 노조와 시민단체의 결성을 아예 금압했으며 심지어 국민들이 카키색이나 어두운 색의 옷을 착용하는 것까지 금지해서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더불어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1971년까지 ‘파파 독’ 치하에서 3-6 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9세의 아들 ‘베이비 독’이 그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부자(父子)는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면서 뒷돈을 챙기는 등 세습기간 동안 아이티 국가 부채와 맞먹는 돈을 착복했다.26)부자(父子)의 집권기간 동안 국가 부채는 18배나 늘어났다. 1964년 아이티 국민소득은 연간 80달러로 서반구 최저였고 정부가 문맹 퇴치를 외쳤지만 문맹률이 90%를 넘었다. 아들 뒤발리에는 애초의 공약이었던 ‘반(反)뮬라토’ 노선도 포기하고, 경제의 ‘자유화’를 추진했으나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 커피값 하락, 석유가 상승, 가뭄 등으로 외채가 늘었으며 부르주아들도 점차 정권에 등을 돌렸다. 미국의 레이건마저 ‘인권 개선’과 ‘민주 선거’를 권고할 만큼 철권 통치가 계속되자 1986년 민중저항이 폭발한다.
미국은 ‘파파 독’이 처음에 흑인 민족주의를 들고 나오자 한때 경계했으나 곧 의심을 거둔다. 때때로 뒤발리에의 민중 탄압이 심해질 때에 원조를 끊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영구 집권을 묵인했다. 아이티 공산당을 탄압하고 쿠바 혁명의 전파를 쿠바의 코 앞에서 막아내는 부자(父子)의 정치적 역할이 대단히 막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미국 기업들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것도 뒤발리에 정권이 미 제국주의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였다. 1976년에는 48%였던 극빈층이 1985년에는 81%로 늘어났다. 그 덕분에 미국 기업들은 1970년대에 아이티 노동자 6만 명을 하루 1.3달러의 기아 임금으로 부릴 수 있었다.
1986년 1월 민중 봉기가 터져 나와 수십만 민중이 거리로 나서자 미국은 서둘러서 아들 뒤발리에를 국외로 내보냈다. 여성들도 역사상 처음으로 거리행진에 나설 만큼 감격적인 해방 공간이었다. 파업과 거리 시위가 빈발했으며, 마쿠테 테러단을 처형하고 부유층의 저택을 몰수하기까지 했다. 다음해에 자유주의적인 신헌법이 제정되었고, 선거는 마니가 집권, 군부 쿠데타, 역쿠데타, 아브릴 집권, 민중저항으로 아브릴 사임, 1991년 2월 해방신학자 아리스티드 신부의 집권으로 이어졌다.27)그러나 아리스티드의 집권에 뮬라토 지배층이 일제히 반발했다. 반년 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아리스티드를 쫓아내고 1993년까지 유혈 통치가 계속된다. 적어도 3천 명이 살해되었고, 노동조합과 풀뿌리 라디오방송국이 철퇴를 맞았다. 4만 명이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대부분이 국내로 송환되거나 관타나모 난민 캠프에 갇혔다. 미국은 아이티 군부에게 난민들을 심사하고 체포해 갈 권한을 주었다. 1990년대 초는 군부 세력이, 2000년대 중반에는 테러단 FRAPH과 그 뒷배를 보아주는 유엔군이 ‘뒤발리에 없는 뒤발리에주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아이티 군부의 유혈 통치와 플로리다에 몰려드는 아이티 난민들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다. 민중 반란으로 미국이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어서 아리스티드가 미국과 IMF의 지침에 따른다는 조건 하에서 1994년 아리스티드의 권좌 복귀를 허락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최저 임금 인하, 공공부문 노동자 4만 5천 명 중 절반 해고, 관세와 수입규제 폐지, 농업의 구조조정(환금작물 재배로의 전환) 등이 그 주된 내용이었는데 아이티 민중은 이 프로그램을 ‘죽음의 계획’이라 불렀다. 아이티 군부를 내쫓고 또 아리스티드 정권을 감시하러 미 해병대 2만 명이 함께 들어 왔다. 아리스티드는 민영화 일정을 늦추는 저항은 했지만 미국, 국제자본의 명령에 상당 부분 굴복했던 까닭에 노동조합과 학생들의 지지를 일부 잃었다. 하지만 권좌에 복귀하자마자 쿠데타의 진원지이고 유혈통치를 일삼은 군대를 해산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여 여전히 빈민들 대다수의 신뢰를 받았다.
아리스티드는 ‘연임 금지’ 제도 때문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가 2000년말 민중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된 뒤, 그 기대와 압력에 부응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 요구대로 자유무역 지대(free trade zone)를 설치하여 노동조합들의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무상 식량배급소를 열었으며 최저임금도 두 배로 올렸다. 2만 개의 문맹퇴치 센터를 비롯해 과거 200년 동안에 세워진 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세웠다. 문맹률이 1996년 85%에서 2003년 55%로 떨어졌다. 아동노동 착취 관행도 줄었다. 그는 1세기 전 배상금 명목으로 강탈해간 1억 5천만 프랑(210억 달러)를 돌려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요구하기도28)했다.
그는 거대 농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도 단행했다. 부르주아 언론들이 ‘농업 개혁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토지분배가 획기적이었다고는 단언하기 일러도, 나중에 그가 쫓겨난 뒤 옛 땅을 되찾으려는 지주와 농민들 간에 투쟁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얼마쯤이라도 시행된 것은 분명하다(후임인 프레발 대통령도 작은 규모나마 토지 분배를 했다).
이러한 얼마쯤의 좌선회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지원 덕택에 가능했는데, 베네수엘라는 염가로 석유를 공급해주고29)쿠바는 의사를 보내주었다. 지난 10년간 쿠바는 6천 명이 넘는 의료진을 보냈고 쿠바에서 무상으로 의과대학을 마친 학생이 570명, 수료중인 학생이 540명이다. 이들은 섹스 관광의 유산으로 늘어나던 에이즈 퇴치부터 서둘렀다.30)
그러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는 2000년 선거의 공정성을 ‘뒤늦게’ 트집 잡아 원조를 끊고 약속된 미주 개발은행 4억달러 대출금 지급을 봉쇄하는 등 압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아이티 정부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GDP가 폭락하여 아리스티드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선거를 통해서는 더 이상 권력을 쥘 수가 없게 된 뮬라토 지배층이 이미 대선 직후부터 정권 흔들기에 나섰던 데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2004년 2월 에는 아이티진보전선(FRAPH)의 두목 샹블랭과 전 경찰청장 필립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해산된 군대가 다시 재건되어 권력을 움켜쥐기를 바랐다. FRAPH는 1991년 쿠데타 이후 손에 피를 묻힌 ‘죽음의 군대’를 개명한 테러조직이고, 샹블랭은 마쿠테 테러단 출신이다. 필립은 미국에서 훈련받았고31)미 CIA와 접촉해 왔다. 이들은 미국이 제공한 M16 소총, M60기관총, 로켓추진식 수류탄 등 고성능 무기를 갖춘 소수 정예부대로 도미니카를 거쳐 아이티에 입국했다. 그들은 점령한 도시마다 정부 관리들을 색출하여 살해했다.
아이티경찰은 너무 약체여서 반군이 수도로 진격해 오는 것을 변변히 막지 못했다. 아리스티드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지만 결정적 전투가 벌어질 시점에 이르러서 그의 지지층에게 총을 나눠주는 것을 망설였다.32)남아공에서 (아이티와의 원조협정을 이행하려고) 무기를 선적하고 아이티로 향한 비행기가 재급유를 위해 자메이카에 들렀는데 그는 비행기의 입국을 보류시켰다. 그리고서 반대파(이른바 ‘민주 야당’)와의 협상에 매달렸으나 반대파는 자기들의 승리를 자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전격적으로 그를 납치했다. 반군이 수도 입성을 앞둔 2. 29일 아리스티드는 한밤중에 납치되어33)미군 비행기에 태워져 중앙아프리카로 내쫓겼다. 그들로서는 격렬한 내전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미국이 쿠데타 세력과 한 통속임이 명백하게 드러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고 아리스티드 체제가 사수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드 축출에는 프랑스와 캐나다도 한 몫 거들었다. 2.25일 UN 안보리 회의에서 ‘아이티 정부를 구하러 유엔군을 보내자’고 자메이카 외상이 호소했으나 그들은 아리스티드가 야당과의 ‘권력 분점’ 협정에 서명하지 않는 한 보낼 수 없다고 미국을 편들어 퇴짜를 놓았다.
미국이 아리스티드를 두번이나 축출한 것은 아이티 민중의 변혁적 진출을 억누르고 중남미 변혁세력과의 연대에 쐐기를34)박기 위해서였다. 아직 미국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절이라 이 날강도 같은 납치극에 대해 이웃 나라들이 변변하게 항의하지도 못했다.
미국의 부시는 아리스티드를 납치한 바로 다음 날, 해병대 선발대를 아이티에 투입하고, 유엔군35)을 결성해 주둔시켰다. 아이티 민중의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모면하려고 유엔의 외피를 뒤집어 쓴 것이다. 부시는 미국의 앞잡이인 FRAPH 같은 테러단이 발호하여 아리스티드 지지층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도 묵인한다. 여기서 부르주아 언론들이 이른바 ‘무장한 갱’ 또는 ‘키메라’라 불렀던 존재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구실로 하여 유엔군의 주둔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리스티드와 풀뿌리 운동단체 판마 라발라스를 지지하는 빈민가 ‘시테 솔레이유’와 ‘벨 에어’의 무장한 빈민들이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판마 라발라스는 오래 전에 FRAPH와 마쿠테 테러단, 경찰에 의해 분쇄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가해자와 피해자, 원인과 결과를 기막히게 뒤바꿔 보도하는데, 이른바 ‘무장한 갱들’ 때문에 유엔군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기실은 아리스티드가 대중과 이들 무장한 빈민 자위조직을 불러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이는 2002년 베네수엘라 군부 쿠데타로 차베스가 납치되자 카라카스의 빈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차베스를 구출했던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아이티에서는 불행하게도 2004년 아리스티드 납치극이 벌어지자마자 FRAPH 테러단이 시테 솔레이유 빈민가에 난입하여 라발라스 지지자 수백 명을 살해했다. 브라질 군인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이들 우익 민병대와 경찰의 악행을 비호했을 뿐 아니라, 2005년과 2006년에는 시테 솔레이유에 스스로 난입하여 수십 명을 살해했다. 유엔군은 강간과 성폭행 등의 악행도 자주 저질렀다.
쿠데타를 이어받은 라토르튀 정부는 반동적인 괴뢰 정권이었다. 해외 원조의 상당 부분을 착복했다. 농산물 관세 장벽을 낮추고, 농산물 보조금을 폐지했다. 테러단과 경찰이 아리스티드가 세운 학교들을 탄압했고, 농촌에는 옛 지주들이 되돌아 왔다. 그러나 뒤이은 2006년 선거는 미국의 기대를 깨고 라발라스 출신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현 대통령 르네 프레발은 1991년 아리스티드 정권에서 총리를 맡았던 사람이다. 1996년과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아리스티드의 분신’이라고 선전해서 라발라스 지지자들에게 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위에서 말한 이른바 ‘무장한 갱’들은 2006년 “프레발이 당선되면 무기를 버릴 것”이라고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프레발은 집권 후 라발라스 가족당과 거리를 두었다. 미국의 요구에 아리스티드만큼도 맞서지 못했고 관료들의 부패도 막지 못했다. 첫 번 재임때에는 연 2500만 달러 수익을 내던 국영 밀가루 공장을 단 900만 달러에 매각했다. 민중이 두 번이나 기대를 걸었지만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뮬라토 지배층이 그를 신뢰한 것도 아니다. 아이티 경찰이 아리스티드 지지층을 습격하는 것을 프레발이 허락하지 않자, 부시 정권과 뮬라토 지배층은 그 악역을 유엔군에게 떠맡겨 유엔군의 빈민가 습격이 자주 일어났다.
프레발 또는 아이티 정부들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이티 정부를 거쳐서 아이티에 원조를 보내지 않고, 갖가지 국제NGO들을 통해 아이티에서 사업을 벌인다. 이들은 갖가지 기금과 구호금을 떠맡고 있는데 누구한테 위임받은 적도 없고 민중에게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미국은 치안은 유엔군에 맡기고, 물자는 NGO들을 통해 들여와서 아이티 정부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90년대부터 아이티에서 사업하던 자본들이 중국이나 푸에르토리코로 더 좋은 입지를 찾아 옮아갔으니, 미국으로서는 아이티가 ‘반공 기지’로 구실하는 것 외에 아이티 정부에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4. 제국주의의 가장 큰 범죄는 무엇인가?
아이티에서 제국주의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스페인 제국주의는 아이티 선주민의 씨를 말렸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아이티 노예들의 노동의 단물을 빨아 먹었다. 당시 흑인 노예의 평균 수명은 20세를 밑돌았다. 아이티 건국 후에도 프랑스는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의 노다지를 빼앗긴36)분이 풀릴 때까지 도시와 마을을 짓부수고 자연자원을 약탈해 갔다.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에서 배운 근대혁명 사상으로 프랑스와 대결했다.
미 제국주의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미국은 기업가들이 진출하여 값싼 노동력을 갈취하여 돈을 벌었다.37)농업시장 개방을 강요하여 미국 쌀을 팔아 먹고, 아이티 경제를 미국 경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38)미국은 걸핏하면 군사 쿠데타를 부추겼고, 숱한 민중을 학살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가장 큰 범죄는 살육이 아니다. 갈취도 아니다. 그들의 가장 큰 범죄는 백수십 년에 걸쳐 아이티 정부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그리하여 아이티인들의 ‘자기통치 능력’을 박탈해온 것이다. 왜 이것이 죄악인가?
재난을 맞은 아이티인들을 비춰주는 서방 TV 화면에는 두 종류의 인물 군상만이 주로 등장했다. 무너진 집 앞에서 넋을 잃은 ‘피해자’와 상점 유리를 깨고 물건을 집어 가는 이른바 ‘폭도 또는 약탈자.’ 오직 자비의 손길을 기다릴 뿐인 사람들이 한 사회를 힘차게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옆 사람이 밟히건, 노약자가 뒤로 떠밀리건 구호품을 받는 대열의 앞자리로 가려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에게서는 고난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는 영혼39)이 느껴지지 않는다. 약탈자도 있고, 아이티 정부는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유엔군이 필요하다”는40)생각도 자연스럽다. 지진이 일어난 지 나흘 뒤부터는 이재민이 고통을 겪는 장면이 아니라 군중들의 혼란스런 약탈 장면이 화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서방 TV는 은연중에 “아이티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다. 그들은 열등한 국민이므로 법과 질서를 부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잠깐 미국이 아이티를 직접 통치했던 20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가자.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은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1915년 “아이티인들은 스스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국민들”이라고 그 점령을 정당화했다. 촘스키의 말을 들어보자. “... 보호령 시대에 아이티에서 미국의 만행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동안, 미국 언론은 침묵을 지키거나 정부에 대한 지지로 일관했다. 1917-1918년 ‘뉴욕 타임즈’ 기사 색인을 들춰보면 아이티 사태에 관한 항목이 아예 없다.... 미국 언론은 아이티와 도미니카 국민들을 ‘깜둥이’ ‘잡종’ ‘해로운 존재’ ‘벌거벗은 검둥이떼’로 묘사하곤 했다...”41)
지금의 미국 정부는 윌슨처럼 노골적으로 한 민중을 2등 국민으로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미국 언론도 아이티인들을 함부로 ‘깜둥이’라 조롱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티 정부가 무능해질수록, 아이티 민중사회가 자조(自助)의 능력을 잃어갈수록 유엔군 즉 제국주의 국가들의 합동군대의 주둔 명분은 커진다. 그러니 아이티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여전히 주된 화두이다.
서방 TV의 과오는 무엇인가? 아이티의 가장 소중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TV속 모습과는 아주 다른, 능동적인 민중들의 실천이 있었다. ‘아이티 리베르떼(Haiti Liberte)'42)의 기자 킴 아이브(Kim Ives)에 따르면 “아이티인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주민위원회를 조직해 시신을 수습하고 난민 캠프를 세우고 치안을 확보했다”43)는 것이다. 아이티 행동위원회의 빌 퀴글리(Bill Quigley)도 아이티인들의 자조(自助) 노력을 전해준다.44)미국 전 대통령 클린턴도 “엄청난 파괴와 죽음을 겪고도 그들은 놀라울 만큼 침착하다.”고 TV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미군과 UN군은 주민위원회의 존재를 묵살하고45)자기들이 안전한 '레드 존(Red Zone)' 내에서만 원조물자 배급과 외국인들의 구호 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아이티인들의 주체적 노력을 묵살해 버렸다. 헬리콥터에서 떨어뜨려주거나 외국인 구호단체를 찾는 것 외에 구호를 받을 길이 없게 되자, 아이티인들은 ‘구호품 받기 경쟁’에 내몰렸다.
아이티에서 미국이 저지른 온갖 범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 헬리콥터가 원조 물자를 비행기로 떨어뜨리거나 트럭 위에 버티고 선 미군이 몰려든 군중에게 물병을 던져주는 광경에서 아이티인들이 무엇을 느꼈을지,46)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군중이 혼란을 빚는다 하여,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티인이 상점에서 음식물을 집어 나온다 하여 함부로 사람을 쏴 죽이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미국의 풀뿌리 언론 ‘데모크라시나우(democracynow)’는47)한 아이티인의 분노를 전했다. “우리는 그들이 던져주는 뼈다귀나 받아 먹는 개가 아니다!48)”
여기서 잠깐, 지진 구호과정에서 미국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정면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 미 제국주의는 아이티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아이티로 들어가는 미 해군 장교들에게는 1915-1934년 아이티 점령의 역사를 연구하고 가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본래 지진 재난 구호의 상식은 사태발생 72시간 안에 구호활동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나자 미군 병사와 군수 물자를 아이티로 수송하고 아이티 난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바다를 봉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포르토프랭스 공항을 점령한 미군은 구호 물자를 싣고 온 ‘국경 없는 의사회(MSF)’나 프랑스 수송기를 번번이 돌려 보냈다. 세계 각국의 수색구조대 중에 아이티에 도착한 팀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루 이착륙 비행기 200여 대의 태반은 미군 수송기였던 것이다. 몇몇 의사들은 절단용 수술 장비 도착을 기다리다 못해 시장에 달려가서 톱을 구해야 했다. 구호 물자는 지진이 난지 1주일이 넘어서야 도시 내 ‘안전한 배급소’로 옮겨갔고, 국제 수색구조팀이 지진 후 1주일간 구해낸 사람은 7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국제적 인사들이 묵는 대형호텔이나 구조팀이 머문 건물 근처만 수색했을 뿐이다. 미군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플로리다로 이송하는 것조차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미 국무장관 힐러리는 미국 해군이 진료와 구호에 앞장섰다고 뻔뻔스럽게 자랑했는데, 그가 언급한 대형 병원선은 지진이 난 지 8일 뒤에야 아이티에 입항했다. 첫 72시간을 흘려 보내고도 120시간이 더 지나간 다음에야!
아이티의 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빌 퀴글리가 Znet에 올린 글에 따르면 2월 6일 현재, 수도권의 아이티인 백 만 명이 살 길을 찾아 시골로 되돌아간 것을 제외하고도, 백 만 명의 사람이 굶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그동안 세계 각국이 보낸 구호 물자를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세계식량기구 관계자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보낸 구호물자들이 어디로 샜는지, 따져 물어야 하는데 대답해줄 데가 없다.
5. 아이티의 재건과 반제국주의 연대
아이티 재건의 열쇠는 더 많은 원조인가?
아니다. 아이티에는 원조가 답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첫째, 그 원조는 아이티가 짊어진 대외 부채를 갚는 데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49)아이티는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 등에 9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는데 빚 갚기는 원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정당하지 못한 수탈이다. 국제금융기관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만 챙긴 것이 아니라, 구제금융을 대가로 쌀시장 개방을 강요해 아이티의 농업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그러니 미국과 IMF는 원조를 생색내기에 앞서, 아이티의 빚부터 탕감해야 옳다.
둘째, 이번 재난에 각국으로부터 12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받았다고 하는데, 동남아시아 쓰나미 때도 그랬지만 약속액의 상당 부분이 공수표가 될 개연성이 높고 무엇보다도 그 돈이 민중 생활의 개선에 쓰일지도 의심스럽다. 갖가지 국가개발계획의 명목 하에 부패한 관리와 뮬라토 지배층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그러니 외부의 원조를 제대로 요긴하게 쓸 정부부터 세워야 한다. 원조도 무상 원조여야지, 빚을 주는 식이어서는 원조라 할 수 없다.
셋째, 이번 지진과 최근의 허리케인 피해 등으로 아이티는 사회 인프라 전반의 재건이 시급하다. 뿐만 아니라 농업을 살리고 숲을 복원하는 발본의 경제개혁을 필요로 한다. 이는 단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이른바 ‘자유무역’ 명령에 맞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경로로 나아갈 때라야 사회경제를 재건할 뿐 아니라 민중의 자기통치 능력도 회복되고 함양될 것이다. 이 길을 개척하지 않고서는 외부의 원조가 아무리 많이 들어온다 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아니, 원조에 기댈수록 아이티 민중의 주도성이 더 위축될 것이므로 활기찬 사회 재건의 길에서 더 멀어진다.
촘스키를 비롯해 세계의 여러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최근 아리스티드를 불러오라고 주장했다. 아이티인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그 요구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아리스티드와 라발라스 가족당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금지돼 있는데, 절망에 빠진 아이티인들도 아리스티드가 나라를 맡는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고 사회 재건에 동참할 것이다.
민중의 신뢰를 받고 있는 아리스티드가 정부를 맡으라는 주장은 UN군50)과 지진사태를 틈타 밀고 들어와 대통령궁을 차지한 미군이 아이티에서 물러나라는 뜻이다.51)실제로 UN군은 인권을 짓밟는 아이티 경찰과 뮬라토 지배층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민중의 불신을 사서 재작년 식량 폭동때 이미 ‘물러나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52)풀뿌리 대중운동이 얼마나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살피기는 어렵지만 식량 폭동(2008)에서 저항 구호가 터져 나오고, 재난의 주체적 극복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주변 정세가 받쳐 준다면 대중운동의 활기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53)문제는 외세의 간섭을 어떻게 돌파하여 민중 정권을 세우느냐다.54)
한반도에만 시야를 가두고 살아온 우리는 아이티의 재난 사태를 어찌 맞아야 할까? 차베스는 최근 아이티가 베네수엘라에 진 빚 3억 달러의 탕감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오히려 아이티에 ‘역사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미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적 흐름을 직접 이어받은55)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 살아온 우리도 세계 제국주의 세력들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다.
눈길을 넓히자면 코펜하겐 국제환경회의가 우리를 일깨웠듯이 인류의 절멸마저도 염려해야 할 만큼 세계자본주의가 탐욕과 파괴의 길로 치닫고 있는 ‘역사적인56)시간’에 우리의 세계적 연대 노력은 아직 보잘 것 없다. 돈을 벌러 아이티를 찾은 한국인은 예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재건 사업에서 한 몫 챙기러 아이티를 찾는 기업인이 늘어날 것이다.57) 기업과 국가와 군대는 그곳에 작지 않은 관심을 쏟는데58)정작 한국의 언론과 사회운동은 그동안 별다른 관심과 연대의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59)유엔군의 아이티 주둔이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데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도울 길은 헛된 결과를 낳을 원조가 아니다. 아이티와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중남미 변혁세력이 서로 연대하여 미 제국주의의 간섭을 물리치고 세계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벗어나 대안적인 경제체제를 꾸려갈 수 있도록 변혁의 정치를 가동하는 길이다. 제국주의에 맞설 예속국 민중투쟁과 세계자본주의를 넘어설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동맹인 ‘제5 인터내셔널’이 그래서 요청되고 있다.
--“결국 이 작은 행성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은 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아이티 전 대통령 아리스티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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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티 민중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