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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5) - 2024. 07. 10(수) |
이번 순례는 경북 북부지역 안동 교구 산하 영주의 홍유한 고택지와 봉화의 우곡 성지이다. 그리고 가는 길에 군위의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의 공원을 거친다. 거리로 봐서나 성지 규모로 보아도 부담이 가장 적게 여겨지는 순례이다. 다만 출발 이틀 전부터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와서 중부지역을 위주로 폭우 피해가 엄청나다고 방송에 나온다. 우리가 가려는 경북 북부지역에도 비가 많이 와서 폭우 주의보까지 내린 터에 선뜩 출발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코스를 대구 근교의 성당 성지로 바꾸는 것도 생각했지만, 운전봉사를 할 고 요셉 형제는 예보에 오후는 비가 갠다고 하니 그대로 시행할 것을 주장하여 따르기로 했다. 군위에 도착하기 전에는 폭우는 아니더라도 비가 적잖게 내려서 사진 촬영 등이 많이 불편하리라 했는데 사랑과 나눔의 공원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서 우산 없이도 이동이 가능했다.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의 공원 -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
경북 군위군 군위읍 군위금성로 270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2018년 3월 27일 개장하였다. 이 공원은 김 추기경이 유년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군 용대리 생가를 중심으로 그 일대 3만㎡ 규모로 조성됐다. 공원은 추모기념관관(전시관)을 비롯해 경당(經堂)과 추모정원, 십자가의 길 등으로 꾸며졌다.
특히 추모기념관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부터 사제서품, 추기경 서임 등 김 추기경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500여 m 떨어진 옛 군위초등학교 용대분교 자리에는 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섰다.
김수환 추기경 - 집안 내력 및 출생에서 추기경 서품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姜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 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유복자로 추기경의 아버지 영석(永錫, 요셉)을 낳았다.
김영석은 성장한 뒤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의 일을 도왔으며. 동학란을 만나 피신차 신나무골과 가까운 왜관의 장자동(왜관읍 봉계동)과 평장목 옹기굴(왜관읍 왜관동 340번지의 현재 순심중고등학교 자리) 및 김천의 지대골 옹기굴(대항면 향천동) 등지를 전전했다. 이때 뮈텔, 김보록 두 신부의 중매로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 서용서(徐用瑞) 회장의 딸 중하(仲夏, 마르티나)와 혼인을 하였다 이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요셉)과 서중하(徐仲夏,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다시 살기가 어려워 1926년 다시 대구를 떠나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로 이사를 와서 옹기를 굽는 생활을 했다. 용대동에서 법주 공소에 살던 이윤석 베드로와 그리고 교우 정씨를 만났다. 이들 세 신자 가정은 옹기굴 앞의 김영석 요셉의 집에서 주일 첨례를 드리는 등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 후 신자수가 늘어나자 새로 공소 건물을 짓고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김수환은 1929년 군위 보통학교(소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 자랐다.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1935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을 맞아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상지 대학에 복학하였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학(가톨릭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김 신부는 서품 이후 경북 안동 본당의 주임 신부로 사제 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1955년 경북 김천 본당 주임 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Münster)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31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이때 김 주교는 초대 교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사목 행정을 운영해 나갔고,한국 주교회의 부의장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한국 부대표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慮 基南, 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동년 4월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이듬해 4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30일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식을 가졌다.
성당에서 아침 7시에 출발을 하여 8시가 조금 지나 도착을 했는데 네비게이션은 정문을 두고 후문(실제 문도 없음)으로 안내하여 들어가니 김수환 생가가 먼저 나타난다. 그래서 순례기 작성은 순서를 바꾸어 정문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정문 부근에 매우 큰 주차장이 있다. 그리고 커다란 성지 안내도 게시판이 서 있다.
중앙광장 및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중앙광장의 천사상 뒤쪽에 옹기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옹기는 한국교회의 박해와 신앙의 상징이다. 당시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신자들은 옹기를 내다팔며 신앙을 유지 했다. 김 추기경의 부모도 그렇게 신앙을 지킨 가난한 옹기장수였던 것이다. 옹기는 음식도 담고 오물도 담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삼았다는 김 추기경이다. 검박한 성품에 세상을 너그럽게 품었던 김 추기경의 삶은 그대로 옹기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원의 호처럼 둥글게 휜 건물의 맨 왼쪽은 쉼터가 있고 안쪽이 기념관(전시관)이다.
▲그를 증언한 많은 사람들의 사진 자료
그는 한번도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정치적 발언을 한 그를 두고 좌파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난했지만 추기경은 사람마다 ‘각자의 사명’이 있다면서 그들을 이해했다.
▲그가 남긴 유품들
▲각종 활동 사진 자료들 - 이들 제목이 바로 김 추기경의 업적이 된다.
▲데레사 수녀와 김추기경
기념관에서 계단을 올라와 경당 쪽으로 가면 경당 앞에 쉼터 건물이 있다. 그리고 언덕 난간에 김 추기경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천진난만한 그림도 걸렸다.
스테파노 경당
김수환 추기경의 세례명을 딴 이름이며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된 경당으로 매일 오후 3시에 미사가 있다고 하나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잔디광장
2019년 6월15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을 맞이해서 조성한 광장이다. 이 안에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이 있다. 중앙광장의 천사상과 함께 성물 작가 정미연 소화데레사의 공들인 작품들이다.
십자가의 길
평화의 숲
맨 위쪽에 예수님 상이 있고 그 아래로 김수환 추기경의 나이와 같은 86개의 나무데크로 된 계단길이 있다. 공중에서 보면 십자가 형이다. 꼭대기에서 김수환 바보 지게길이 이어지고 길 따라 묵주기도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김수환 추기경 생가
1922년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복원해 놓은 곳으로 초가삼간 옛집의 모습은 좁은 툇마루, 낮은 처마가 정감을 더해주는 소박한 느낌이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며 종교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어린 시절엔 작은 초가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추모 정원
오솔길을 따라 조성된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다. 갈색 타일에 웃는 얼굴과 생전의 어록, 성모상, 추기경 문장 등을 새겨 놓았으며, 삶을 함축하여 타일작품으로 표현하였다.
1. 말-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듣고,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2. 책- 수입의 1%는 책을 사는 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3. 노점상 -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깍지 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사는 것이다.
4. 웃음 - 웃는 연습을 생활화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젊은이를 동자로 만든다.
5. TV -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 바보로 만든다.
6. 성냄 -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7. 기도 - 기도는 녹쓴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8. 이웃 - 이웃과 절대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큰 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 봐야 한다.
9. 사랑 -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와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당신만이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당신 혼자 미소를 짓고
당신 주위의 사람이 모두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시골뜨기'에서 한국 가톨릭의 최고 지위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의 현실 참여와 인간 존엄, 공동선에 대해 늘 한결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언급한 취임사에는 신을 향하고, 인간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사회 교리로 삼아야 합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평생을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신념들을 사목현장에서 하나씩 실천하며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자 노력했다.
절망적인 노동현실과 마주한 노동자들,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빈민들, 산업화와 이농현상에 따라 소외된 농민들, 한 때의 잘못을 뉘우치는 재소자들,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녘동포들을 위해 김 추기경은 기도했다. 그들은 김 추기경의 가까운 이웃이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이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동아 벌여왔던 김 추기경의 시복 운동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달 교황청은 김수환 추기경을 시복 대상자로 승인을 하여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시복, 시성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할 단계에 왔다.
김수환 추기경이 시복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홍유한 유적지를 향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