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9. 만리장성과 방산석경
14,278개의 ‘운거사 방산石經’ 보고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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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산의 석굴과 석경> |
사진설명: 운거사 맞은편에 위치한 석경산엔 석경을 보관하고 있는 석굴이 있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석굴문들은 시멘트로 봉해져 있고, 몇 개 석굴만 공개되고 있다. |
선비족의 신심(信心)이 만들어낸 운강석굴을 마음에 담고 북경으로 달렸다. 그 때가 2002년 10월13일. 북경 부근에 도달한 시점에도 운강석굴에서 받은 감동으로,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대동을 출발한지 3시간 만에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도착했다.
모택동(1893~1976) 주석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호걸이 아니다”고 했다는 그 만리장성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달나라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중국인들의 자존심이기도한 만리장성(팔달령 부근)에 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성벽을 바라보며 만리장성의 역사를 되새겼다.
장성을 축조하다 비운에 사라져 간 수많은 사람들도 떠올렸다. 주지하다시피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까지, 총연장은 약 2,700km나 실제는 5,000km에 이른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에서 비롯됐다.
전국시대 들어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북방민족을 경계하기 위해 성을 구축했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기원전 214년 당시까지 연.조나라 등이 북방에 구축했던 성을 연결하고 증.개축했다.
서쪽의 감숙성 남부 민현에서 시작, 황하 서쪽을 끼고 음산산맥을 따라 동쪽의 심양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했다. 진시황이 손 본 장성은 전한 무제 시절, 돈황 바깥쪽의 옥문관까지 연장된다.
물론, 진.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자리로 남하한 것은 거란.돌궐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5세기 초 양자강 이북을 통일한 북위(北魏)는 북방민족인 유연을 막기 위해 장성을 보강하고, 5세기 중엽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 다른 성벽을 구축했다.
6세기 중엽 화북지방을 다스린 북제(北齊)는 현재의 대동 북서쪽에서 거용관.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오늘날 내장성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했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 지방 남변에 장성을 축조했다. 당나라는 영토를 훨씬 북쪽까지 넓혔기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오대(五代)이후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에 점령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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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만리장성 전경. |
만리장성이 산해관에서 가욕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나라 때였다. 영락연간(1403~1424)부터 보강되기 시작, 정통연간(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각각 수축됐다.
가정연간(1522~1566)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난주를 거쳐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이 개축, 장성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됐다.
명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눠 각각에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견고한 성을 설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성도 청나라 이후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몽골지역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머물게 된다. 북방민족의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리장성에 올라 중국대륙 일별
장성을 일별하고 북경 시내에 들어왔다. 현 중국의 수도인 북경은 과연 붐볐다. 도성다웠다. 북경은 일찍이 화북대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역사에 등장했다.
처음엔 ‘계’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고대취락의 위치는 현재 노구교가 있는 곳에 인접한,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평야지대와 산간지대 사이의 교통이 빈번해지자, 교통로의 요충을 차지한 고대취락이 점차 발전했다. 주나라 초기엔 연(燕)나라의 도읍 ‘계성’이 북경에 조영됐다.
진(秦).한(漢) 이후 당나라 말기에 이르는 기간엔 대체로 유주(幽州)의 치소(治所)로, 동북변방의 정치.군사상의 요지로 성장했다.
2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한 한민족(漢民族)의 고구려 침략, 수양제와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당시엔 다같이 북경이 원정의 전진기지가 됐다. 고구려에 패한 당태종이 전몰장병의 넋을 애도하기 위해 민충사(憫忠寺)를 - 지금의 법원사(法源寺) - 건립한 곳도 북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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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북경 광제사에 있는 손가락으로 그린 ‘승과묘인도’. |
938년 요(遼)나라는 이곳을 부도(副都)로 삼아 남경(南京)이라 했다. 요나라를 물리친 금나라는 처음 이곳을 연경(燕京)으로 부르다 1153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도(中都)’라고 고쳤다.
몽고가 남하해 중도성(中都城)을 빼앗은 뒤, 쿠빌라이(世祖)는 북경에 새로운 성을 쌓고 ‘대도(大都)’로 명명했다.
몽고가 중국을 통일하여 원(元)나라를 세우자 대도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중심지가 됐고, 마르코 폴로가 ‘칸발릭(Khanbalik)’으로 기록할 만큼 호화로운 도시로 발전했다.
명나라도 처음엔 국도를 남경에 두었다.
그러다 1420년 영락제가 이곳을 국도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했는데, 북경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도 1644년 이후 멸망될 때까지 북경을 수도로 삼아, 내성엔 만주족을, 외성엔 한(漢)족을 살게 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에도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나, 북벌(北伐)이 완성된 뒤 남경으로 천도, 이곳을 북평(北平)으로 개칭했다. 그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다시 수도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경에 도착한 기념으로 취재팀은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천안문 광장, 자금성, 골동품 거리인 유리창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북경거리와 안면을 익힌 뒤 2002년 10월14일 운거사로 갔다.
태행산(太行山) 줄기인 방산(房山)의 골짜기에 위치한 운거사(雲居寺)는 7세기 초 수나라 때 세워진 사찰. 운거사는 맞은편의 석경산(石經山)과 더불어 중국불교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는데, 1만4278개의 돌에 대장경을 새긴 방산석경(房山石經)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방산석경이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628년), 정완(靜琬)스님의 발원에 의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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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운거사 전시관에 보관 중인 방산석경. |
석경산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운거사에 석경이 매장돼 있다는 기록이 전해온 것은 11세기 말 이후부터다.
‘석경 관련’ 기록이 빛을 발한 것은 1957년. 운거사 경내 한 모퉁이에서 요(遼).금(金)대의 석경 1만4278점이 발굴된 것. 발견된 석경은 운거사에 보관됐으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1999년 9월9일9시9분9초에 매장식을 갖고 다시 땅 속에 묻혔다.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유물’이라는 점에서만 방산석경이 주목되는 것은 아니다. 의상스님이 지은 ‘화엄일승법계도’와 관련해 90년 중.후반 한국불교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방산석경(요금석경)’에 각인(1118~1196)된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이 발견돼, 저자 문제가 다시 거론됐던 것.
방산 운거사의 석경이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628년)부터지만, 석경에 있는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은 12세기(1118~1196) 때 각인됐다. 새겨진 후 보존을 위해 바로 매장됐다. 방산석경이 발굴된 후 연구가 진척됐다.
손가락으로 그린 광제사 ‘승과묘인도’에 탄복
방산석경 연구가 어느 정도 이뤄진 1996년 중국불교학자 요장수(姚長壽)는 논문을 발표 “법성게를 포함한 ‘일승법계도합시일인’과 ‘서문’은 지엄(602~668)스님이 지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엔 오스트레일리아의 불교학자 존 요르겐센도 요장수 학설을 받아 “서문이 의상 작인지 아니면 지엄 작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 불교사상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기에 한국불교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이에 대해 동국대 해주스님은 90년대 후반 ‘일승법계도 저자에 대한 재고’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방산석경에는 ‘일승법계도합시일인’과 ‘서문’이 ‘엄법사조(儼法師造)’라 각인돼 있으나,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다시 발견되지 않는 한 ‘일승법계도’는 그 전체가 분명 의상스님 작임이 변함없다”고 논박했다.
북경을 출발한지 2시간 만에 운거사에 도착했다. 운거사는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사찰이었다. 한 전각을 지나면 또 다른 전각이 나오고,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생각하면 뒤에 전각이 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산석경을 일부 보관하고 있는 전시관도 훌륭했고, 석경을 탁본한 것 등을 진열한 박물관 또한 좋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요나라 때 조성된 북탑(北塔)이었다. 전각 지붕 위로 우뚝 솟은 탑은 마치 운거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했다.
운거사를 돌아 본 뒤, 맞은편에 있는 석경산에 올랐다. 수나라 때부터 명나라 시대까지 1000년 동안 스님들이 석굴에 대장경을 새긴 것으로 유명한 산이다. 지금은 석굴에 석경들이 보관돼 있다.
석경산의 석경들과 석굴들을 찬찬히 살펴본 다음 운거사를 출발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2002년 10월15일. 중국불교협회가 있는, 금나라 말기인 13세기 때 창건된 광제사(廣濟寺)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불교협회 국제부 부부장 보정스님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보정스님과는 한.중불교교류 등 국제행사에서 여러 번 인사를 나눈 사이. 스님의 안내로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드렸다. 석가불.가섭불.미륵불 등 삼세불(三世佛)이 불단에 모셔져 있었다. 보정스님은 후불벽 뒤편에 있는 ‘승과묘인도(勝果妙因圖)’를 보여주었는데, 불화를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이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인 이 불화는 1744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제작된 걸작. 웅장한 규모와 강렬한 선(線)을 가진 이 그림은 “당대(當代) 도석인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중국불교협회 사무실에 들러 인사를 나눈 뒤 다과(茶果)를 하며 친선을 다지고, 광제사를 빠져나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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