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봉수, 조훈현만 만나면 힘이 불끈! | 조-서 라이벌 시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 온 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서’는 어떨까. 조훈현과 서봉수의 이름을 합친 이 조어(造語)는 앞서 거명한 ‘독립된 이름’ 못지않게 바둑 팬들과 친숙하다. 이들 두 기사가 우리 바둑계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다.
한국 바둑계의 50년대가 조남철이 열어젖힌 여명기, 60년대가 김인에 의해 시작된 중흥기였다면 70년대는 도약기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조훈현과 서봉수가 있었다. 두 기사가 지금껏 겨룬 판 수는 무려 360판. 이 대국 수는 이후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를 맞아 싸운 301국(이창호 183승 118패)보다도 많다(2006.6.1일 기준). 360판이란 숫자는 아마도 지구상 특정 승부에서 특정 2인이 겨룬 최다 기록일 가능성이 많다. 1대1 개인 대결이 가능한 스포츠 종목 중 탁구 테니스 씨름 복싱 유도 태권도 배드민턴 등 어떤 종목을 대입해도 이 같은 대결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 70년대 한국바둑 정상을 다툴 당시의 '조-서'모습
두 기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우선 1953년 생 동갑내기다. 반면 조훈현이 어린 나이에 당시 세계 바둑의 메카로 불리던 일본 유학을 거친 반면 서봉수는 중학 시절 바둑을 배워 독학으로 프로가 됐다. 조훈현이 최고의 엘리트로 각광 받으며 스타로 떠오른 지 한참 뒤, 어느 날 인가부터 서봉수의 인기도 다른 모습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유학은커녕 뒤늦게 독학으로 배운 순 한국출신 기사가 일본 유학파들과 어깨를 견주자 ‘된장바둑’이라며 팬들이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첫 만남은 1973년 1월 제1회 백남배 본선 때 이루어져 조훈현이 이겼다. 당시 조훈현은 5단, 서봉수는 2단. 서봉수는 명인 타이틀 보유자였고, 일본서 갓 돌아와 공군에서 군 복무를 시작한 조훈현은 무관(無冠)이었다. 둘은 74년 5월 제6기 명인위를 놓고 최초의 타이틀전을 펼쳤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서봉수가 3대1로 승리하며 타이틀 3연패(連覇)를 이뤘다. 서봉수는 이 무렵 기사실에서 조훈현과 약간의 돈을 걸고 연습 바둑을 두어 줄기차게 잃으면서 조훈현의 ‘선진 문물’을 흡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인전 도전서는 실패했지만 전체적으로 조훈현은 서봉수를 계속 앞서나갔다. 74년 이후 연도별 상대 성적에서 조훈현이 서봉수에게 패한 해는 하나도 없다가 97년도에 가서야 깨졌다. 2006년 6월 현재 공식전 통산 전적은 조훈현의 243승 117패(승률 0.675). 대략 3판 중 2판을 이겼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3판 중 ‘나머지 1판’은 조훈현에겐 더 없는 채찍으로 작용했고, 한국 바둑의 입장에선 도약의 밑거름이 됐다. 만약 서봉수라는 브레이크가 없었더라면 70년대 중반 이후 약 20년 간은 조훈현의 독주체제였을 테고 그 자신의 기량도 퇴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훈현이 두 발을 떼 놓으면 서봉수가 한 발을 쫓아가는 추격전 속에 바둑의 인기가 높아졌고 그 와중에 이창호 등 후발 스타들이 잉태됐다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조훈현을 향한 하찬석 서능욱 김희중 김인 등의 도전이 70년대 말까지 ‘진압’되면서 80년대는 그야말로 ‘조-서’ 두 사람의 ‘2인무(人舞) 무대로 바뀌었다. 조훈현은 80년 7월 명인전서 서봉수를 꺾으며 1차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했고, 다시 82년 7월 서봉수에게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2차 전관왕으로 군림했다.
![]() ▲최근의 '조-서 대결장면' 1월 4일 전자랜드배
물론 서봉수도 가만있지 않았다. 조훈현의 첫 전성기에 해당하는 80년대 초반부터 83년 말 사이 서봉수는 명인 왕위 최고위 국기 기왕 등 6개 타이틀을 획득했는데 그 상대가 모조리 조훈현이었다. 조훈현은 86년 여름 3차 전관왕을 이룩하지만 4개월 뒤 서봉수에게 왕위를 빼앗기며 영토의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
조훈현과 서봉수가 평생 겨룬 타이틀전 수만 해도 69개에 달한다. 물론 이것도 기네스 북 감이다. 이 이전투구 결과 조훈현은 56개, 서봉수는 13개의 타이틀을 가져갔다. 지금까지 평생 우승 회수가 조훈현 157, 서봉수 30개인 걸 감안하면 이들이 서로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특히 이창호 등이 본격 등장하기 전, 두 기사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7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바둑계는 서봉수 조훈현 두 사람의 난타전으로 하루 해가 뜨고 졌다 해서 과언이 아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이창호 유창혁이 타이틀전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봉수는 조훈현의 주 파트너 역할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90년대 이후 둘 간의 결승전은 7회에 불과한데 그 중 6회를 조훈현이, 1회를 서봉수(92년 국기 도전기)가 각각 기록했다. 둘 간의 마지막 타이틀전 결승 무대는 95년 박카스 배(조훈현 3대0승). 이창호를 정점으로 한 막강한 젊은이들이 결승전을 수놓기 시작하면서 이제 더 이상의 ‘조-서 결승 대결’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또 한번의 ‘조-서 결승’이 성사됐다. 5월 하순 국수전 50주년 기념 역대 국수 초청전에서 두 기사가 결승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조훈현은 이 기전 사상 최다인 16번이나 국수에 올랐는데 서봉수는 그 중 7회에 걸쳐 제물이 됐다. 또 서봉수가 87년과 88년 우승할 당시 결승 상대는 두 번 다 조훈현이었다. 50년간의 국수전서 배출된 역대 국수(우승자) 수는 총 9명. 이 중 노환으로 기동이 불편한 조남철 9단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이 토너먼트를 펼쳤다.
 ▲ '조-서', 영원한 라이벌!
준결승까지 마친 결과 조훈현은 윤기현 이창호를, 서봉수는 하찬석과 루이나이웨이를 각각 연파함으로써 또 한 번의 패권 다툼이 이뤄진 것. 95년 박카스배 이후 11년만의 양자간 결승이었다. 6월 8일 벌어진 결승전 승자는 서봉수. 물론 이번 행사는 공식전 아닌 이벤트 성 미니 타이틀전이어서 공식전 전적엔 포함되지 않는다. 비 공식전을 포함한 둘 간의 대국수는 이로써 총 371국, 승패는 조훈현의 248승 123패로 재조정됐다.
나이 50 중반고개로 접어들면서 조훈현의 머리엔 흰 서리가 소복하고, 서봉수의 속알머리(?)는 갈수록 황폐해 가고 있다.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고 내려왔더니 수 백 년이 지났다더니, 이들 희대의 두 라이벌은 바둑판 앞에서 30 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셈인가.
젊은 시절 서봉수는 조훈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시니컬한 화법으로 “바둑의 내용에선 내가 앞선다”고 강변하곤 했다. 하지만 약 10년 전부터 그는 “돌이켜 보면 조훈현이야 말로 내 스승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혈기만 앞서게 마련인 풋내기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달인(達人)의 차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조훈현 역시 말은 안 하지만 서봉수 특유의 투혼과 승부감각에 높은 점수를 주어왔다.
그러나 둘은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다. 막상 바둑판 앞에 앉으면 지금도 둘 사이엔 서릿발 같은 냉기가 감돈다. 둘 간의 가장 마지막 대국이었던 금년 1월의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대결(서봉수 승)이 끝났을 때도 두 사람은 복기(復棋)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 물론 인사말 따위도 없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좀 삭막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만나면 피차 불 같은 투지가 솟는 모양이다. 젊었을 때의 그 투혼 그대로 진검(眞劍)승부를 나누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둘이 공식전 패권을 놓고 다시 격돌할 날을 기대해 본다.
국수전 50주년 기념 역대 국수 초청전 결승(2006년 6월 8일) ○ 서봉수 9단 vs ● 조훈현 9단 - 결과 : 200수 백불계승
※ 이 칼럼은 조선일보 바둑 전문기자이자 LG배 세계기왕전 관전필자 이홍렬 기자가 쓴 내용으로, [이홍렬의 바둑이야기] 코너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