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산문'은 올해 새로이 정출헌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유영봉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최두헌 본원
연구원, 박수밀 한양대학교 미래인문학교육인증센터 연구교수, 조윤선 본원 연구원,
부유섭 본원 연구원, 최채기 본원 수석연구위원. 이상 일곱 분의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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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일 (월) |
사백예순
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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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과(文武科) 두 과 가운데 어느 하나는 취하고 어느 하나는
버릴 수 없다.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서 생도들을 증원하고 강학에 힘쓰도록 하여 인재를 육성할 것이다. 과거제도의 본래
취지는 나라를 위한 인재를 뽑는 것이다. 그럼에도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며 공적인 선발을 사적 은혜로 여기고 있으니, 법을 세운
뜻과 매우 어긋난다. (중략) 세 차례의 시험을 통해 합격한 자 33인을 상고하여 이조로 보내면, 이조에서는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도록 하겠다.
감시(監試)는 폐지한다.
文武兩科, 不可偏廢, 內而國學, 外而鄕校, 增置生徒, 敦加講勸,
養育人才. 其科擧之法, 本以爲國取人, 其稱座主門生, 以公擧爲私恩, 甚非立法之意. (중략) 通三場相考入格者三十三人, 送于吏曹, 量才擢用,
監試革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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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년 7월 28일(정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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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17일,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조 이성계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500년의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의 새로운 500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정치적 쟁투를 겪으며 많은 사람의 피가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이인임, 최영 그리고 정몽주 등등. 즉위식을 치르던 그때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든가 삶과 죽음으로 엇갈린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임이 분명하다. 시위하고 있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로부터
열하루 뒤인 7월 28일,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교서가 반포되었다. 즉위교서에는 총 17항목에 달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개혁 방안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호포(戶布)를 감면해 주겠다거나 국둔전(國屯田)을 폐지하겠다는 등 민생을 추스르기 위한 개혁안으로부터
충신ㆍ효자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를 포상한다든가 즉위식 이전까지 범했던 일반 범죄는 벌하지 않겠다는 사면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각계각층의 현안을 포착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가 뚜렷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아마도 종묘사직을 바로잡고 고려 왕족을 대우하겠다는 의례적인 첫째와 둘째 항목에 이어진 과거시험의 개혁
방안이었을 것이다. 위의 인용은 바로 그 세 번째 항목의 일부이다. 문과와 무과,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약속. 중앙과 지방,
그 모든 곳에서 인재를 고루 육성하겠다는 의지. 공적 제도[公擧]를 사적 관계[私恩]로 전락시켜 버린 고려왕조의 과거제에 대한 비판. 이런
일련의 구절은 모두 새 나라를 함께 다스릴 문무 관료들을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의해 선발하겠노라는 정책의 천명, 그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군대 병력과 행정 관료의 무마와 장악이 가장 필수적인 사항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이 그런
정치적 조처들이 매우 주도면밀하면서도 발 빠르게 실천되고 있다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관료 선발의 공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험의
절차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은 물론 출제의 범위를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는 유가 경전으로 특정해 두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건 유교 지식이
학문 권력으로 전화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지배계층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열린 태조 이성계의 즉위식은 단순히 국가의 권력이 왕씨에서 이씨로 옮겨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에서 천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교 국가가 유교 국가로 옮겨가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교 문명 국가로서의
조선적 국가 정체성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문이 언문에 국어(國語)의 지위를 넘겨주기까지 강고하게 유지되어 왔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즉위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조선의 건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정도전의 역할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가 교서에서 마지막으로 밝히고 있는 17번째 항목은 역사적 격변기에서 종종 마주치는 얄궂은 운명을 실감케 한다. 거기에는 새 나라 건설에
협력하지 않고 반란을 도모했던 56인에 대한 처벌 내용을 하나하나 밝혀 놓고 있다. 정도전 자신의 스승이던 이색을 비롯하여 우현보ㆍ설장수는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아 직첩이 회수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절도 해상으로 유배 보내졌다. 그다음은 직첩을 회수하여 장 1백 대에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동문수학으로 절친한 벗이었던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갔던 이숭인은 한 달 뒤쯤 황거정(黃居正)이란 자에 의해 다시 등골에 모진 곤장을 맞아 죽고 말았다. 『태조실록』 1년
8월 23일(임신)의 기사에는 평소 사감을 품고 있던 정도전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참혹하게 죽였다고 적혀 있지만, 태종 11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숭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조정의 논란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도전에게 모든 죄를 몰아가고 있다는 혐의가
다분하다.
물론
지난 역사의 진위를 분별하기란 어렵게 마련이다. 다만 그들의 비극적 최후를 염두에 둘 때, 불과 몇년 전에 주고받은 우정의 글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정도전은 우왕 14년(1388)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는 이숭인에게 시집 서문을 지어 주며 전송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일월성신은 천문이요, 산천초목은 지문이며, 시서예악은 인문이다.[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라는 말로 그를
기렸다. 이숭인의 시문을 보면 『시경』과 『서경』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기』와 『악기』에서 자연 발현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바, 도(道)에 깊이 들어간 벗에 대한 찬사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가 경전의 정신에 충만한 인물은 정도전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인간의 전범인 동시에 그가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국가 비전이기도 했다.
잘 알고 있듯, 새로운 도읍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사대문의 이름을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한 글자씩 따서 명명했던 것도 그였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는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그 모두가 ‘신뢰[信]’에 근거해야 함을 분명하게 밝혔다. 믿음에 근거한 인의예지로 가득 찬 나라, 아니 모든
백성을 그런 인문정신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보겠다는 국가 비전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과연 그런
원대한 비전을 조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 걸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나라의 모습을 매일 목도하고 있는 요즘, 범상하게 읽었던 즉위교서가 새삼
떠올라 되묻게 되는 질문이다. |
글쓴이정출헌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주요
저서
- 『조선
최고의 예술, 판소리』, 아이세움, 2009
- 『김부식과
일연은 왜』, 한겨레출판, 2012
- 『추강집:
시대정신을 외치다』, 한국고전번역원, 2014
- 『점필재
김종직, 젊은 제자들이 가슴에 품은 시대의 스승』, 예문서원, 201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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