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되는 일상이 짜증도 나고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여자의 본능일까. 가구를 옮겨 보기도하고 이유 없이 까탈도 부려 보건만 소리 없는 통제를 받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구실을 만들어 바람난 사람처럼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정한 곳도 없이 떠나 잠을 잔 곳은 자주 갔던 백암이었다. 청춘도 아니면서 새벽부터 부산을 떠는 조급증은 밖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동해안 길을 따라 가다가 해지면 자고 날 새면 사람 사는 구경하면서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야지, 집과 식구들은 아주 멀리 잊어버리자. 간섭 받지 않고 눈치 볼 일도 없으며 훼방 받을 일도 없다. 새처럼 훨훨 날아 혼자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가 집이 그리우면 돌아가리라. 죽변항에 닿으니 동해에 푸른 물결 빛나는 아침 찬란한 붉은 태양 새날이 밝아온다. 송림 숲을 따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다가 식당에 들어갔다. 잘게 채를 썬 채소와 초고추장에 물 회를 버무린 조반은 바닷가에서만 즐길 수 있는 아침밥이다. 3월로 접어든 날씨는 쌀쌀한 바람에도 봄이 묻어나 상쾌하다. 조석(朝夕)걱정 하지 않으니 이만하면 해방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원산 함흥 청진 까지 이어질 내 나라 우리 땅인데 경계의 삼팔선 벽은 언제면 무너질까. 좁은 땅이 갑자기 더 작아 보인다. 사람은 갈 수 없어도 푸른 바닷물은 서로 부딪히며 어우러질 것이고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도 남과 북이 만나 인사를 주고받을 것이다. 하늘의 구름도 서로 손 붙들고 안부를 물으며 지나가겠지. 이념이나 사상이 없는 자연이 이루어낸 자유가 부럽다. 묵호항에 들어섰다. 해풍에 꾸덕꾸덕 알맞게 말린 오징어와 가자미, 젖은 것과 마른 것들, 없는 것이 없는 묵호항의 어물전이다. 이글거리는 연탄화덕 석쇠위에 왕새우와 오징어가 설설 구워지고 있다. 냄새만으로도 구미가 당긴다. 바닷물에 절로 저려진 짭조름한 냄새, 알맞게 구워진 오징어와 대하를 손으로 그냥 들고 먹는다. 재미도 있고 맛도 일품이다. 양념도 필요 없고 배어 있는 간이 입맛이다. 내게 관심 갖는 이도 없고 아는 이가 없으니 세상 편하다. 본능으로 행동해도 치사(恥事)하지도 않다. 값을 묻지 않아도 먹은 후에 계산하면 될 것 같다. 일탈이 안겨준 멋진 자유다. 내 또래로 보이는 노점 주인이 “술은 뭐로 할까. 막걸리? 소주?” 오래 사귄 친구처럼 반말이다. 고개를 저었더니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세상 헛산다고 눈을 흘긴다. 술 한 잔에 마음열리고 안주 한 점에 정이 오고 가는데 재미없는 여자라며 나무란다. 위선도 가식도 없는 말투에 오래 사귄 친구처럼 궁합이 맞는 것 같다.
바닷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에는 풍상을 격은 연륜이 수북이 쌓여있다. 두렷한 이목구비와 복스러운 웃음, 심성도 좋아 보인다. 예쁘다는 내 말에 볼이 붉어지는 걸 보니 막일을 하고 살지만 그도 여자다. 전대를 겸한 앞치마에 큼직하게 달린 호주머니가 지폐로 불룩했으면 좋겠다. 한잔 팔고 한잔 먹는다는 여자한테 소주 한 병을 사서 잔을 채워 따라 주었다. 술을 사서 나를 주는 손님도 다 있고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이라며 내 등을 툭 치며 친구 하잔다. 술 배워서 다시 오겠다고 했더니 관상을 보듯이 아래위를 한참을 훑어보며 술 배우기는 틀렸다며 입으로 주먹질이다. 작은 포장마차 하나가 삶의 터전인 그를 보며 이러고 다니는 내 모습이 사치 스러워 가책을 받는다. 구운 오징어를 봉지에 담아주는 손을 잡으니 더덕처럼 거칠다. 좋은 바람 불면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술 배워서 와” 하며 소리친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전통문화와 신식문화가 공존 하는 강릉의 밤은 아름답다. 개성이 넘치는 카페와 모던한 커피의 거리, 안목해변은 무리지어 밀려오고 밀려가는 젊은군상들의 세상이다. 이방인처럼 나만 혼자인 것이 쓸쓸하고 외롭다. 갑자기 식구들 생각이 난다. 펜션에서 밤바다를 내려다본다. 토하듯 밀려오던 파도의 외침도 조용해졌다. 갈매기의 노래도 그치고 바람도 잠들었다. 깊어서인지 넓어서인지 자연의 질서는 정적(靜寂)으로 가득하다. 순리가 자연의 법인 것처럼 참 평온하다. 미움도 없고 분쟁도 없는 유연하게 흘러가는 자연처럼 가만히 순하게 살고 싶다. 속초의 아침은 밤사이 들어온 풍어로 파시를 이룬다. 바다가 업이고 파도가 친구인 어부들의 눈은 핏발이 선 것처럼 붉다. 사람도 살아있고 생선도 살아있다. 상기된 사람들의 얼굴에서 밤을 새운 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싱싱한 생선을 보니 집 생각이 난다.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을 스티로폼상자에 골라서 담고 얼음주머니를 얹으니 혼자 들기에는 버거운 무게다. 이만큼이면 당분간 찬 걱정은 하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욕심은 밥 짓는 필부(匹婦)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어릴 적에 보았던 손오공 만화가 생각난다. 막대기 하나를 들고 하늘을 휘젓고 날아다닌 손오공도 결국 삼장법사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였는지 허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잠시도 집과 가족들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박삼일이었다. 법을 지키고 사는 것이 자유이듯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법인가 보다.
현관에 들어서면 내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훈기가 도는 집, 어디에 간들 내 집만 할까. 쉴 만한 물가요 푸른 초장인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 에세이 21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산영문학회 회원 * 산문집 : 편지에 채워진 행복 이야기 * 수필집 ; 푸른 계절의 약속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