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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에 당하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어렵고 힘든 현실을 견디고 우리에게 임한 고난을 위로받고자 합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롭게 살고 인내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믿는 이들이 합심하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주안에서 국적과 인종과 그리고 성별을 초월해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샬롬!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육체적인 고난만 많이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고 달리시는 고통도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고 가시관을 쓰시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시며 나무에 달리시는 것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곁에 없는 관정에서 홀로 무지한 로마 병정에 의해서 채찍에 맞는 것도 역시 너무나 큰 고통이며 이때 예수님께서 보혈을 많이 흘리셨고 그렇게 주께서 채찍에 맞음을 통해서 우리는 나음을 입습니다.
이 일이 바로 2000년 전의 일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분의 고통에 동참해서 그분과 고통을 나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겪는 고통을 생각하며 묵상할 때 우리는 위로 받고 또 치료도 받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우리도 여러가지 어려운 현실의 고난을 잘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몸이 아프신 분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를 겪는 분도 계시고, 직장과 가정에서 갈등으로 괴로워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으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있는데서 오는 고통도 있으며, 홀로 외롭게 의지하고 대화할 대상도 없이 고독한 경우도 있는데 이 모든 경우에 주님의 고난과 고독을 묵상하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우리도 내가 겪는 고통을 나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장의 사가랴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온 세상의 죄인을 구원하시려 오셨습니다. 어둠에 있는 백성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맺은 약속을 지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예언하신 모습대로 오셔서 예언된 데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중한 짐을 지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되었으나 택한 이스라엘의 많은 제사장과 율법학자 그리고 믿지 않는 백성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구원하려 오신 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듯 역시 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만드셨다고 믿는데 역시 인간의 창조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작품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손으로 흙을 사용해서 먼저 아담을 빚으시고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된 우리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고 광야에서 율법을 주시고 가르치시고 그리고 마침내 젓과 꿀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이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모든 일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종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종이기도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예수님을 주라 불렀습니다. 구약을 좀더 세밀히 살피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계시면서 또 한편으론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창조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냉대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백성과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자신의 백성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때론 독사의 자식들아? 하기도 하셨고 화가 있으리라 선포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외치며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고, 또 복받게 하려고 오셨고,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왕이 오셨지만 그분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슬프기도 하셨을 것이고 안타깝기도 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로부터더 버림을 받게 되었으니 그 마음에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모든 나라에서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이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건져서 해방하고 저주에서 풀려나게 해서 축복을 받게 하려고 머나먼 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선교사님들도 역시 그렇게 멀리서 왔습니다. 한국에도 천주교는 약 400년 전에 이 땅에 들어왔는데 이 땅의 권력자들과 백성은 처음에는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들이 믿게 되고 믿는 이들이 늘자 왕과 고관은 당시의 양반제도와 왕제도를 흔드는 종교로보고 혹독한 박해를 행했던 것입니다. 동족인데 동족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생각한 것이 왕권과 양반이 누리던 권리였습니다. 반면에 중인계급의 사람들과 천민들은 인간의 차별이 없고 서로 평등하며 예수님 안에서 종과 상전이 없이 서로 형제로 지내는 것을 보고서 많은 무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민족에게도 예수님은 성도들의 순교와 박해를 통해서 큰 아픔을 겪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사가랴의 예언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래 모습과 하실 일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며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 인간이 절대로 피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두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혈통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시고 거룩한 선지자 즉 예언자들이 예언서를 통해서 미리 예언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약속 즉 복의 근원이 되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게 하는데 믿음으로 자손이 되는 복에 대한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분의 인간에 대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에 의해서 입니다. 로마서 5장8절에서 죄인을 위해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전 세상은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진리는 없고 인간은 오직 죽음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어둠을 비추는 빛 즉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진리가 나타나고 사망이 물러가고 비로소 인간은 평화를 누리가 되었습니다. 저주도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가 성령안에서 건설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 인류에게 가장 복되고 큰 선물을 가지고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은 몰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약 2000년을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들이 이미 예고가 되었고 그리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과 출애굽의 역사와 가나안의 정복 그리고 다윗의 번영된 통치 그리고 왕국의 분열과 불순종을 통해서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한 민족 이스라엘에 이 모든 일을 하시고 아시는 분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왕이 오셨고 자신의 구원자가 오셨고 자신들의 하나님께서 오셨는데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예로 자녀가 아직 젓먹이 일 때 아버지가 외국으로 돈을 벌고자 가고 어머니와 둘이 살다가 어머니가 죽고 그리고 아들이 성년이 되어 혼자가 방탕하게 사는데 아버지가 이제 돈을 많이 벌고 모든 것을 다 준비를 해놓고 아들을 찾아서 내가 아버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모든 너가 살 준비를 내가 살던 나라에 다 해놓았다 해도 이를 믿지 않고 당신은 내 아버지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니 볼품도 없고 초라하니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하고 절대로 믿지 않고 도리어 술을 먹고 아버지께 남에게 대하듯이 횡포를 부리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면 이 아버지는 얼마나 슬프고 그리고 안타깝고 그리고 또 화도 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을 따르면 모든 세상의 사는 문제가 다 풀리고 자신과도 화목하게 재미있게 배우자도 만나고 아들도 딸도 낳고 살 수가 있을 것인데 아버지로 인정치도 않고 도리어 폭력을 행사하니 이 모든 것을 알고 당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극심한 고통과 죽을 운명에 처해졌지만 자신을 매달고 찌르는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공생애를 하실 때도 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충돌을 하였고 온 세상이 다 자신이 창조한 자신의 소유임에도 피조물인 인간들이 차지하고 자신의 것이라 우기면서 영접하지 않으면서 갈 곳이 없게 되시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생기고 추종자가 나왔지만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모두가 도망을 갔습니다. 늘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제가 예수님도 성경도 잘 모르고 복음서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점은 예수님께서는 외롭고 쓸쓸한 나그네의 삶을 사시는 구나 였습니다. 복음서는 기쁜 소식이라고 했는데 기쁨보다는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쓸쓸함과 고독이 느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 중에서 가장 큰 왕따를 당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함께 더불어서 사는 존재이고 친구집단이나 혹은 직장이나 혹은 가족과 서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서로 협력해서 자연도 극복하고 농사도 짓고 타국과 싸움고 하고 함께 놀고 자라고 울고 웃고 해야만 되는 존재인데 이런 인간 관계에서 따돌림을 받고 소외가 되면 인간은 극도의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심한 왕따를 당하면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왕따는 지속이 되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간에게 왕따를 당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인간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니 인간이 당하는 왕따보다 더욱 극심한 왕따로부터 오는 소외감을 느겼을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인 수난을 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시기에 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동정녀를 통해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전에 왕이 백성의 복장을 하고 성을 나서서 거리고 나가서 민심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평복을 하면 왕인줄 몰라보고 그냥 평민으로 막 대합니다. 고관은 없신 여기고 평민도 존중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데로 대합니다.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신 것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에서 냉대를 당하고 고관에게 종취급받는 것도 너무나 견디기 어렵습니다. 참기가 어려운 세상의 왕은 바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함부로한 사람을 벌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를 지실 때까지 이런 막 대하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용서를 하시고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인간의 대통령이나 왕이 이렇게 참을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이렇게 피조물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는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역시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제가 고명환 목사님의 책을 읽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목사님께서 자신의 어린 아들이 자신의 목전에서 버스 바퀴에 깔려서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이런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위로를 하시면서 즉 그 아들이 천국에 있으니 그리고 그런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이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할 때 아버지의 심정도 전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들도 아버지도 모두가 큰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직접 육체적인 고통을 겪지 않는 목사님의 고통도 말도 못하게 클 것이고 역시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도 클 것이 분명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 땅에 사는 죄인인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비롯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6-8 절에서 그 사랑을 한 번더 증명합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십자가에는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부끄러움과 수치와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 있습니다. 옷을 온전히 입지 않은 채로 나무에 높이 달려서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영광으로 상을 받기 위해서 사람앞에 잘 차려입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고 죄인으로 취급이 되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리고 복장도 잘 갖추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앞에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형의 고통이 육체적으로 임하고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역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예상이 됩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조롱과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다 도망을 가고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을 구해 주시지 않습니다. 온전히 예수님께서 홀로 이 모든 것을 인내하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렇게 피를 흘림과 죽으심의 육체적인 수난과 함께 이와 같은 크기의 정신적인 수난이 또 따라야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난이 나의 몫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수난을 내가 겪고 죽는 것이 아니라 내 대신에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모두 감당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건지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리고 그 아들의 육체적인 수난과 정신적인 고통이 동시에 있음을 우리는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갖 인간이 어찌 작은 마음으로 바다보다 깊고 넓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벌을 합당하게 받을 죄도 조금도 없은 분이 형벌을 받고 그리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벌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 억울함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허물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 형벌을 받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죄인으로 취급이 되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분의 의를 더 이상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과 같이 묵묵히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의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와 여러분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 예수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엇그제 청계산에 청소를 하려 갔다가 어떤 분을 차를 이동하는 중에 만났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제 일을 보고 점심을 사겠다고 하고 다시 만났고 점심을 먹으면서 예수님을 전하고 그리고 영접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치유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의 일을 도구로서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온 세상의 왕따를 당하시고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고 그리고 많은 사람앞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고 그리고 죄가 없이 죄인이 되는 억울함을 다 견디셨습니다. 이와 함께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인 못박힘과 십자가에 달리심과 죽음을 견디셨습니다. 인간이 어느 하나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는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런 사실을 믿으면 나의 죄로 인한 이런 죽음과 고통과 수치심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세상에서 이런 부당한 일을 겪으면서 당하는 고통을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치료도 받고 위로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세상이 알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고 그리고 그 수치를 참기 힘들 정도의 죄에 대한 비난을 받을 일을 자행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그런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잘 나고 의롭다 착각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당하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형벌을 다 받아야만 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하나님께서 전도자가 전해주신 성경책으로 찾아오셔서 제 죄를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그 이름의 세례를 받게 하시고 저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제 죄로 인해서 겪을 형벌이 없게 되고 수치가 없게 되고 조롱이 없게 되고 그리고 사망 즉 죽을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렇게 예수님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은총도 말로 다 할 수가 없는데 높으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신분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분의 사랑이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사랑덕분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과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제가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흉악한 죄인이었던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정신적인 치유도 받았습니다. 용서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성호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이런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분이 예수님을 묵상하며 과거에 겪은 용서하기 어려운 일들을 용서하고 위로받고 치료받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홀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 분노와 슬픔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내게 그런 일을 한 사람이나 대상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하게 올라옵니다. 이럴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에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묵상하며 위로받고 이겨내고 그 대상을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해야 될 것입니다.
고난 주간이 다 끝이 나갑니다. 이제 부활의 놀라운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옵니다. 찬란한 봄이 어둡고 추운 겨울을 몰아내듯이 부활의 기쁨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모든 우울과 불안과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고독을 이겨내고 밝은 빛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또 사랑할 용기로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올립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