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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愁(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지줄대는 :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를 내는
해설피 : 느릿느릿하고 길며 왠지 슬픈 느낌을 주는 소리와 생태를 의미함
함추름 : '함초롬'의 사투리, 물이 배어나오도록 담뿍 젖은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성근 : 여러가지가 섞여 엉크러진
서리까마귀 : 가을까마귀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정지용 생가 정지용 시비, 시제는 '향수'>
* 정지용 생가(충북 옥천)의 시비에 근거한 <향수>의 전문에서는 1927년 [조선지광]에 수록된 원문에서 예를 들면, '아버지→아버지가, 그립어서→그리워, 마음대로→함부로, 누이가→어린 누이가'로 변형되었다.
시비의 전문에는 1920년대 당시의 시어를 현대의 표준어와 한글맞춤법에 따라서 예를 들면, '회돌아 → 휘돌아, 참하 → 차마, 조름→졸음, 짚벼개→짚베개, 여쁠것도 →예쁠것도, 안해가→아내가, 줏던-줍던, 돌아앉어→돌아앉아'로 수정되었다.
시비에서 예를 들면, '지줄대는(시비) - 지절대는(표준어), 얼룩백이(원문, 시비)-얼룩배기(표준어), 찾으러(원문)-찾으려(시비)' 로, 혼용되고 있는 충청도 방언과 표준어는 시비와 같이 정리하였으며, 또한 '비인 - 뷔인(원문) - 빈(시비)'은 원문의 표준어에 따라 '비인'으로, '함추름(원문) - 함초롬(표준어, 시비)'은 방언인 '함추름'으로 정리하였다.
뛰어쓰기는 맞춤법에 맞게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 곳이 - 그곳이, 전설바다 - 전설 바다, 알수도 - 알 수도'. 또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한 원문에 따라서 쉼표와 마침표를 16곳에 추가하였다.
1983년 김희갑 작곡의 노래가사에서는 예를 들면, '얼룩백이-얼룩배기, 비인-빈, 파아란-파란'으로 변형된 것을 알 수 있다.
<향수>는 습작이 동인지 [요람]에 처음으로 활자화되었고, 1927년 [조선지광]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가, 그후 지속적인 교열을 거쳐서 1935년 [정지용시집]에, 1946년 [지용시선]에 수정되어 수록되었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시어는 1연의 '해설피'다. 해설피는 '해가 설핏하게 지는' 해질머리(문덕수, 오탁번, 김재홍, 최동호), 혹은 '해가 설피게' 즉 햇살이 거칠고 성긴 모양(이승훈) 이나, 헤피와 슬피의 결합어로 '헤프고 슬프게'(민병기), 입을 어설프게 또는 헤벌쭉하게 벌리고 있는 모양(박경수), '어설피'의 이형으로 꼭 짜이지 못하여 조밀하지 않다는 뜻(이희중) 등으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나는 해설피를 '해'와 '슬피'가 결합한 것으로, 여기서는 슬피의 의미를 강조한 일종의 '구슬피'와 같은 의미라고 본다. 물론 구슬피가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지닌다면, 해설피는 금빛 울음 소리와 어우러져 보다 맑고 고운 분위기를 환기한다. 즉 '해설피'는 '해맑고 슬픈'의 의미로, 황소가 울음 우는 것을 직접 수식하는 부사어라고 생각한다.
또한 5연에서 하늘에는 '석근 별'이 있다. 석근 별에 대해서는 식자공의 실수란 설이 있으나, 성긴 별(문덕수, 이숭원), 혹은 큰 별과 작은 별이 뒤썩인 별(민병기, 최동호), 저녁에 어스레한 때의 별(박경수) 등으로 해석되어진다. (박민영/문학평론가, '현대시 산책')
<해설> 정지용이 일본에 유학갈 때 고향을 그리며 쓴 시로, 1927년 3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되었고, 작자의 제1시집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1935)에 수록되었다.
정지용은 능란한 시어 구사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살리는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이며 감각적 이미지를 구체화함으로써 독창적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향수>는 감각적, 회화적, 향토적인 언어 구사를 통해 인간의 공통된 정서인 향수를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이다. 특히 감각화된 이미지들과 아름다운 우리 말 시어들이 이 시의 서정적 승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고향의 풍경과 삶의 모습은 개인의 체험에서 벗어나 민족의 보편적 정서에 닿아 있음으로써 공통적인 감동을 느끼게 한다.
각 연은 '∼던 곳'으로 끝나 이미지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고, 각 연의 후렴구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는 순환리듬의 전형을 보여주며, 각 연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서 시에 훌륭한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후렴구의 반복은 시각적인 자극과 아울러 청각적인 자극을 줌으로써 원형적 고향으로 돌아가는 체험을 반복하게 한다. '∼ㄹ리야'와 같은 부드럽게 다듬어진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애틋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곡가 김희갑(金喜甲)의 아름다운 멜로디의 가요로 만들어져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두산백과)
* 이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정지용의 초기 작품이다. '금빛 게으른 울음'과 같은 감각의 전이를 활용한 표현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등의 세련된 감각적 표현으로 정서적 호소력을 더하고 있다. 각 연은 고향에 대한 정경묘사와 후렴구를 이용한 감정의 직접표출로 이우어져 있다. 기발하고 참신한 이미지들은 향수의 정서와 적절히 섞이면서 화자의 그림움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거둔다. 각 연은 고향의 풍경을 묘사한 독립적인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편적이면서 특수한 성격을 띠는 이러한 장면들은 '고향'이 초라하지만, 정답고 따뜻한 곳이며 삶의 근거임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 일제 강점하의 망국민의 상실감이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1945년 8월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맺을 때까지 일제하의 문인들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살아야 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정지용은 자유로운 세상이 온 것으로 일시 판단하기도 했지만, 국제 사회의 갈등과 역사적 격동은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민족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으며 그 결과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지용은 납북되어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정부 당국의 해금 조치가 있을 때까지 한국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는 실로 민족의 비극이며 문학의 비극이자 인간의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20세기 최고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정지용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일반 독자에게도 다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의 일이다. 민족 분단으로 인해 문학도 분단되었던 것이다.
2002년 5월 11일 지용의 고향 옥천에서 거행된 '정지용 탄생 100주년 문학 포럼'에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정지용의 당대 수용과 비판」에서 지용의 시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920년대에 출중한 시편을 보여 주면서 1935년에 처녀 시집을 상자했고, 1941년에 분명히 시인으로서의 성숙을 보여 주는 제2시집을 간행한 정지용에 와서 비로소 우리는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전문적 시인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러한 판단은 작품의 성취도나 어느 정도의 작품적 균질감이나 20년에 걸친 지속적인 정진과 관련되지만 무엇보다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을 열렬히 자각했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적 평가는 지용이 문학사에서 사라져 버린 후 1960년대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시적 기치와 중요성을 설파한 유종호의 남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적이라고 할 것이다.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전문 시인으로서 지용의 문학적 의미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유종호를 비롯한 많은 문학적 지지자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정지용의 산수시와 성정(性情)의 시학」에서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탄신 백주년을 맞아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미를 돌이켜보니 그가 한국 현대 시의 아버지라는 말을 새삼 음미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거론한 바대로 성정의 미학에 근거하여 한국 현대시를 주체적으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것이 그 첫째요, 다음으로는 이상의 시를 『가톨릭청년』에 소개하고,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으며, 해방 후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상의 서구적 근대 감각,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의 전통적 서정의 감각, 그리고 윤동주의 저항시적 감각 등의 세 가지 시적 감각들이 우리 시문학사에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공헌하였다는 점에서 정지용은 가히 한국 현대시사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된다.
이의 시각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시적 전통의 현대적 혁신이 그것이요, 둘째, 서구적 근대 감각과 전통 서정시의 감각을 되살린 문학사적 흐름의 연속성의 확립이며, 마지막으로 윤동주를 부활시킴으로써 식민 치하의 저항시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정지용보다 더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은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용이 20세기 한국 현대시사에 미친 것과 같이 깊고 넓은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 시인은 쉽게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지용 이전에 김소월과 한용운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들은 정지용만큼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투시하여 독자적인 어휘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지용 시에 이르러서야 한국어는 현대적 의미의 모국어로서 민족 언어의 완성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동호/고려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다)
* 작가의 말, '시와언어'
시의 표현에 있어서 언어가 최후의 수단이요, 유일의 방법이 되고 만 것은 혹은 인류 문화 기구(文化器具) 의 불행한 빈핍(貧乏) 일지는 모르나 언어의 불구(不具) 를 탄(嘆) 하는 시인이 반드시 언어를 가벼이 여기고 다른 부문의 소재를 차용치 않았다. 언어의 불구가 도리어 시의 청빈의 덕을 높이는 까닭이다. 언어의 불구에 입명(立命) 하여 시의 청빈에 귀의치 못한 이를 시인으로 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제약을 통하지 못한 비약이라는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이다. 가장 정신적인 것의 하나인 시가 언어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차라리 시의 부자유의 열락이요, 시의 전면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언어를 언어학자처럼 많이 취급하는 사람이라든지 달변가처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 개개의 세포적 기능을 추구하는 자는 다시 언어 미술의 구성 조직에 생리적 리프트 기버(lift giver) 가 될지언정 언어 사체(死體) 의 해부 집도자인 문법가로 그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시인을 만나서 비로소 혈행(血行) 과 호흡과 체온을 얻어서 생활한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다. 시는 언어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인간화) 적 일치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으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 제작에 오를 수 없다. 다만 시의 심도가 자연 인간 생활 사상에 뿌리를 깊이 서림을 따라서 다시 시에 긴밀히 혈육화되지 않은 언어는 결국 시를 사산시킨다. 정신(精神) 이 거하는 궁전이 언어요, 이를 다시 방축(放逐) 하는 것도 언어다. (김은자, [정지용] '새미' 1996)
* 정지용 시인의 연인
정지용이 1923년 도지샤대 영문과에 입학했을 때 한 살 많은 동급생인 김말봉(1901~1944, 밀양 출신 소설가)과 어울려 다니며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 나눴다고 한다. 지용은 가모가와 강의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하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용의 글을 보면 ‘우리 둘은 거닐다가 자리를 잡으면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학기시험에 몰려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서 보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에 사람은 둘이니 한 우산 안으로 꼭 다가서 걷는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면 이미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강가에 앉은 두 남녀의 부질없는 돌팔매질은 사랑의 신호이며 노트를 누워서 볼 때 베개는 연인의 허벅지가 제격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느 하루는 천변을 걷다보니 너무 멀리 걸어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비예산 케이블카 건설 현장에 이른다. 두 사람의 선남선녀가 동포라는 사실을 알자 노동자 숙소에 억지 초대를 받아 식사를 대접받는다. 그때 “둘은 어떤 사이냐”는 물음에 엉겁결에 “사촌 간”이란 옹색한 변명을 했다고 한다. 지용이 쓴 산문의 행간에는 이미 두 사람은 플라토닉을 넘어선 상태임을 은연중에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지용에겐 12세 때 결혼한 동갑내기 송재숙이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둘은 1929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다. 돌아와서 소식이 없자 지용을 못 잊어하던 말봉이 옥천을 찾아온다. 지용 대신에 아내가 사립께로 나가 “누구신데 어쩐 일로 왔시유“하고 퉁명스럽게 묻는 것으로 말봉의 사랑은 끝난다. 이 라스트 신은 영화 ‘초원의 빛’에서 아내가 지켜보는 옛 애인 위렌 비티를 찾아온 나탈리 우드의 머쓱한 표정 그대로 일 것 같다. 함부로 쏜 화살을 맞은 상한 가슴은 떠나버린 그 사람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구활/수필가, 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시인 정지용 (鄭芝溶, 1902~1950)
* 1902년 충북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
* 1918년 휘문고보 입학. 재학 중에는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발간.
* 1923년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
* 1924년 시〈석류〉와 〈민요풍 시편>을 발표.
* 1925년 시 <새빨간 기관차〉와 〈바다〉등을 발표.
*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과 [문예시대]에 시 <Dahlia〉,
<홍춘〉 등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
* 1927년 <뻣나무 열매>,〈갈매기〉등 을 발표. [조선지광], [청소년], [학조] 등에 〈갑판우>, <향수> 등 30 여편의 시를 발표함.
* 1929년 졸업한 후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 1933년 월간잡지 [카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이상(李箱)의 시들을 발표케 하여 시단에 내세웠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경향신문] 편집국장직을 맡기도 했다.
*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아 일을 하다가,
*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됨.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관되는 도중 또는 이관된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 그가 남긴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지용시선](1946)이 있다. 소설로는 <三人>(1919)과 평론집으로는 [문학독본](1948), [산문](1949)이 있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정지용문학관>
<충북 옥천군 하계리 정지용생가 정지용문학관과 동상>
<경남 통영시 미륵산 정지용 문장비, 기행문 '통영5'의 일부>
* 통영5(일부)/정지용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한산섬을 중심으로 하여
한려수도 일대의 충무공 대소 전첩기를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기록해야 할만치 문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륵도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를
다시 읽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이것은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라고 보여진다.
차라리 여기에서 흐르는 동서지류가 한려수도는 커니와
남해 전체의 수역을 이룬 것 같다.
<일본 교토 도시사(同志社)대학 교정 정지용 시비, 시제는 '압천(壓川)'>
* 압천(鴨川) /정지용
가모가와 십리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떳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 시인 중의 시인, 한국시의 좌장
거장 시인. 한국 현대시 사상 기념비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1930년대 문학의 주요 흐름 어느 곳에나 그늘을 드리우면서도 역량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특정 집단 속에 잘 꿰어 맞춰지지 않는 시인이다. 그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향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지용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약상을 경영하며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밀어닥친 홍수로 가세가 기울면서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공부하게 된다. 이때 4년 가까이 산천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겪은 고향의 갖가지 풍습은 감수성 짙은 그의 소년기에 깊이 각인되어 문학에 대한 꿈으로 익어간다.
정지용은 1918년 4월 휘문고보에 입학하는데, 당시만 해도 웬만큼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서울 유학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기를 눈여겨본 가까운 친지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서울 유학이 실현된 것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 1학년 때 ‘요람 동인’을 결성해 동인지를 간행하고 ‘문우회’ 학예부장을 맡는다. 이어 2학년 때는 《서광》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한다.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 등은 뒷날까지 그와 가까이 지낸 이 시절의 문우들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에 들어간다. 1926년 유학생 회지 《학조》 창간호에 그는 「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을 비롯해 시조와 동요 등을 발표, 다양한 문학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그는 근대 풍물과 이국정서를 신선한 감각으로 화폭에 담은 듯한 시들을 발표한다. 곧 문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된 정지용은 이듬해 《신민》과 《문예시대》에 「홍춘」, 「따리아」, 「산엣색시 들녁사내」, 「갑판우」, 「이른봄 아침」 등을, 《조선지광》에 「바다」, 「향수」 등을 잇달아 쏟아낸다. 또 당시 일본 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 《근대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지면을 장식함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1929년 그는 귀국하고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근무한다. 그런데 기초 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는지 종종 학생들에게 신경질을 부려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1930년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이 된 그는 《시문학》 창간호에 「이른봄 아침」, 「경도 압천(京都鴨川)」, 2호에 「바다 2」, 「피리」, 「저녁 햇살」 등을 발표한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나온 『정지용 시집』은 그동안 여러 동인지와 잡지에 발표한 시편들을 다듬어 실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이양하의 「바라던 지용 시집」이라는 글은 이 시집에 대한 문단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시집 출간에 맞추어 1935년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4회에 걸쳐 발표된 것으로, 서평이라기보다 정지용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다룬 시인론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마침내 우리의 욕심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처음 씨의 시집이 출판되었으매 우리는 한아름 꺾어든 꽃다발처럼 씨의 시집을 그러안고 그의 아름다운 색채를 향기를 형체를 윤곽을 마음대로 그리며 엿보며 어루만질 수 있게 되었다.' (이양하, 「바라던 지용 시집」, 조선일보(1935) )
이양하는 극채색의 언어로 정지용의 시집을 처음 대하는 감격과 기쁨을 한껏 드러낸다. 『정지용 시집』에 실린 작품 중에는 전통적 순수 서정성을 머금은 시도 보이지만, 바탕에 외래 취향이 깔린 시도 적지 않다. 첫 시집을 펴낸 이후 정지용은 동양적 세계와 자연에 한결 심취하게 된다. 「옥류동」, 「비로봉」, 「장수산」, 「백록담」,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창 단신(旅窓短信)」 등은 여백의 미를 살린 산수화 같은 느낌이 드는 시편들이다. 그는 이런 면모를 살려 1939년 2월 이태준이 발간한 종합 잡지 [문장]에 「장수산 1·2」와 「인동차」 등을 발표한다. 그는 이 잡지의 시 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신인을 발굴할 때도 의도적으로 서구의 소재나 어휘를 사용한 것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꼬집어내서 동양적 취향을 더욱 굳힌다. [문장]을 통해 수련을 쌓고 정지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박남수 등은 뒷날 한국 시단의 기둥들로 성장한다. 이 시인들은 정지용에게서 얻은 양분을 해방 뒤 후학들에게 전달해준다.
1941년 정지용은 <문장사>에서 또 한 권의 시집 『백록담』을 펴낸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행간마다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이가 배어 있는, 남과 북으로 이어진 정지용의 고단한 여정이 시편으로 맺힌 결정체들이다. 명성이 높아지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다투어 그의 국토순례를 지원하며 기행문을 쓰게 하는데, 이때의 체험이 무르녹아 나온 것이 『백록담』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사회 상황이 악화하며 마지못해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의 시를 내놓기도 하지만, 정지용은 작품 활동을 거의 중단한 채 한동안 침묵 속에 묻혀 지낸다.
해방되고 정지용은 휘문중학교를 떠나 이화여전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여전히 시는 거의 쓰지 못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 세계를 고집하던 시인이 느닷없이 민족문학 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단체인 ‘문학가동맹’에 가입한 사실이다.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이 이념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지용의 문학가동맹 가입은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닌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儀典) 행위’로서 미온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 그리고 오랜 지기인 이태준, 이병기 등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는 그의 말에서도 이런 점은 드러난다. 그러나 정치 투쟁을 지향하는 문학가동맹이 체질에 맞지 않아 정지용은 좀처럼 창작에 손을 대지 못한다. 이화여전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을 거친 그는 1948년 이후 《문장》의 속간호와 소년 잡지 《어린이나라》를 주관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 공산군에 끌려가 사망했다. (발췌) (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