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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Robin W. KImmerer는 “이끼와 함께Gathering Moss”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끼를 매우 작지만 대단히 우아한 식물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끼는 잎, 줄기, 뿌리의 구별이 분명치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향기를 머금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 열매를 맺지도 않습니다. 바위나 쓰러진 채 오래 방치된 고목古木, 습한 곳이나 척박한 도시의 보도블록들 사이, 가로수 아래나 건물의 그늘진 모퉁이 등 흙이 거의 없는 척박한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작고 단순한 이끼의 특성은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합니다.
비록 위로 높이 자랄 수는 없지만, 표면에 납작 달라붙어 있는 특성상 아주 적은 양의 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큰 식물들이 수분을 잃지 않기 위해서 줄기에 물을 저장하고 껍질을 발달시키는 등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이끼는 수분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잎을 말고 기다립니다. 물이 있으면 에너지를 많이 쏟아 붓지 않으면서도 쑥쑥 자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선용善用합니다. 또 이끼는 대단히 느리게 자랍니다. 아니 자라고 있다는 느낌 곧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자랍니다.
하나하나는 얼마나 작은지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함께 모여 있을 때도 마치 초록색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나무나 꽃들과는 달리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못합니다. 사랑받지도 못합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곳에서 자라는 불필요한 존재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존재라고 단정을 지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끼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밀어닥친 자연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황폐한 땅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사시나무들이 뒤를 이어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알맞은 환경 곧 터전을 만들어줍니다. 이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나무는 새를 부릅니다. 새는 주변에 가득한 열매들을 물어옵니다. 열매들은 씨를 남깁니다. 사시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은 흙과 함께 썩으면서 얇은 부엽토腐葉土 층을 형성합니다. 동시에 새를 통해서 주변의 숲으로부터 이주해 온 각종 열매 맺는 나무들의 씨들이 발아發芽하여 뿌리를 내리고, 곱고 여린 새싹을 틔우고, 향기를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고, 무수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 마련됩니다.
황폐했던 땅은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것은 물론 온갖 생명체가 깃드는 기름진 땅으로 탈바꿈합니다. 끔찍한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복원됩니다.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이끼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깃들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번성하며, 다른 생명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터전까지 마련해 주는 이끼로부터 시작된 지극히 긍정적인 변화의 과정을 일컬어 “생태천이生態遷移”라고 합니다.
한편, 이끼는 무려 이만 이천 가지나 되는 많은 종種이 있습니다. 종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과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 사는 명주실 이끼는 자신을 복제한 다음, 주변에 퍼뜨리는 무성번식無性繁殖에 집중합니다. 경쟁이 심하고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오래 버티기 어려운 곳에 사는 지붕 빨간 이끼는 유성번식有性繁殖에 집중합니다. 유전자를 조합한 포자를 멀리 날려 보냅니다. 네 삭치 이끼는 밀집된 정도에 따라 성별을 바꾸거나 죽음을 감수하면서 번식합니다.
사슴의 배설물에 사는 스플락눔Splabnum 이끼는 바람을 매개媒介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이끼들과는 달리 화려한 색과 강한 냄새에 취약한 똥파리를 통해서 포자를 퍼뜨립니다. 또 다양한 종의 이끼들 가운데 절대적인 우열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패랭이 우산이끼로 완전히 뒤덮여 있는 절벽 하나가 있습니다. 물이 범람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물살 때문에 여기저기가 뜯겨져 나갑니다. 빈자리가 생깁니다. 침수에 강한 봉황 이끼가 뜯겨져 나간 빈자리를 채웁니다. 또 무성하게 자란 이끼들은 생명의 보고인 열대우림과 같이 너무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됩니다.
무수히 많은 생명이 깃듭니다. 자연을 채우고 있는 일부로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재능에 따르는 책임과 역할을 다합니다. 눈에 쉽게 띄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작지만, 존재 의미만큼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기에도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떨렸습니다.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혼비백산했습니다. 죽는 자리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패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각기 살길을 찾아서 피신했습니다. 그야말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습니다.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선동자로 낙인찍힌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했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드러내 놓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평소 그들만 알고 있던 은밀한 장소에 함께 모였습니다. 문이란 문은 모두 굳게 잠가두었습니다. 로마 정부나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군사들이 언제 자신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떨쳐버릴 수 없는 절망이 심령 깊숙이 갈마들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전전긍긍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성금요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까지 절대절망을 가리키는 무덤에 갇혀 있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이었다고 주장해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스스로를 골방에 가둔 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깨뜨릴 엄두를 낼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사망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① 제자들 마음에 가득 차 있었던 두려움과 절망을 흔적도 없이 완전히 몰아낼 수 있는 평강εἰρήνη을 기원하셨습니다. 이는 제국이 약속할 수 있는 평강이 아니었습니다. 힘과 폭력으로 찍어 누르는 반생명적인 평강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부자유스럽게 하고 주눅까지 들게 만드는 평강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돌봄과 이해와 관용과 섬김, 무엇보다 거룩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평강이었습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평강이었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절망은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는 평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안에 있을 때 곧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평강이었습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아니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으로부터는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②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못 박힌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라는 평행본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사랑했었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꿈인지, 생시生時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어 장사까지 지낸 사람이 살아날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먹을 만한 음식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구워져있던 생선 한 토막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듯 올라오는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기뻐하다χαίρω”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기원하셨던 하나님의 평강이 제자들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실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제자들이 졸지에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채 목자 없는 양 같은 신세로 전락했을 때 가졌을 법한 황당하고 곤혹스러운 심정을 생각할 수 있다면 기쁨의 정도가 얼마나 컸었을 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요14:27)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보내는 동안 한순간도 빠짐없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고 있었던 평강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줄 수 없습니다. 아니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영원히 주어지는 기업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내팽개쳐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생의 가장 어렵고 외롭고 위험한 때에도 반드시, 무조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는 환난과 시험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기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b)라고 이어집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을 이리들로 들썩이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라는 증거대로,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불구덩이로부터 세상을 건져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굳이 그들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역을 완성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려 삼년 반 동안이나 동고동락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를 가시든, 누구를 만나시든, 어떤 일을 행하시든 언제나 함께 동행 했습니다. 가르치는 현장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온갖 종류의 귀신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베풀어주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2b-23)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쳐주셨을 때도 잠시 근심할 뿐이었습니다.
예전의 생각과 삶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 대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동안은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서로 심하게 다툴 정도로 갈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기력하게 잡히고, 자신들에게도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한명도 남지 않고 모두 다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기에는 민망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환난과 시험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습니다.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받아드리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성령을 받으라.”(요20:22b)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받으라λάβετε”를 직역하면 “영접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 절은 “성령을 (인격적으로) 모시기 시작하라 또는 성령을 모셔 들일(곧 영접할) 준비를 하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어떤 능력이나 도구적인 의미에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십니다. 어떤 존재도 흉내 낼 수 없는 거룩한 인격이십니다. 누군가의 안수나 기도 등을 통해서 주고받을 수 있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 속에 모셔야할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 이후, 제자들을 통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될 희한한 역사들의 근본이십니다. 원천이십니다. 유일한 주체主體이십니다. 또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이해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던 온갖 종류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채 너무나 허무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드러내기 위해서 진리를 행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혔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동시에 이루어지게 될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전제로 제자들을 세상 한복판으로 파송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과 함께, 그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주어진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했습니다. 자격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따질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b),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행20:22a)라는 고백에 따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도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다면 성령께서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성령께서 여전히 이끌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성령께서 변함없이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⑥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a)라고 이어집니다. “사하면ἀφίημι”은 “허락하다, 떠나보내다, 가게 하다, 탕감하다.” 등의 뜻입니다. 어떤 일과 상황 또는 감정에 붙들려 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가해와 피해라는 지극히 부정적이면서 어두운 도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상실과 슬픔과 아픔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탕감해줍니다. 용서해줍니다. 완전히 털어버립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돌려보냅니다. 죽이기보다는 살리는 삶을 삽니다. 미워하기보다는 용서하는 삶을 삽니다. 파괴하기보다는 창조하는 삶을 삽니다.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혔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아낸 삶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로 우글거리고 있던 산헤드린 공의회로 끌려갔습니다. 취조를 당했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춤을 추었습니다. 완전히 망가져있던 세상을 치유했습니다. 갈라져버린 세상을 이어주었습니다. 고립되어 있던 세상을 연결시켜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완성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해결할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세상을 살 맛 나는 세상으로 바꾸는 삶을 살았습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한 배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이전보다 더 새로워지고 풍요로워지는 “생태천이生態遷移”를 이루어내는 너무나도 고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살아내야 하는 삶입니다. 평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金南祚은 “사랑엔 낭비가 없다 / 더 많이 주었다면 / 그 풍요로 이미 보상받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주어져 있는 재능에는 서로를 배려해야 할 책임과 역할이 따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모진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받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너무나 소중한 교훈입니다. 낭비하는 곧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이미 부활을 사는 사람입니다.
“생태천이” 곧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누구에게도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재능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들이 언제든지 깃들 수 있도록 활력과 함께 생명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터전이 되어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 완벽하게 사로잡힌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복된 삶, 절망에 찌들어 있는 세상을 참된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곧 생태천이生態遷移를 이루는 복된 삶,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모진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