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에서 돌아온 후 문 밖에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수도회 봉쇄규정 때문에 외부활동이 제한되어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라며 교황청에 허락을 요청합니다.
3년이라는 기간을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의료교육을 마친 다음 캘커타의 빈민가로 들어갑니다.
데레사 수녀를 도우려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제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힌두인들과 무슬림인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빈민가의 일을 3년 더 연장해준다는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이 있었지만 3년 뒤 다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마더 데레사는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새로운 수도회를 신설하기로 결심합니다.
교황청에서는 현존하는 그 어떤 수도회에서도 마더 데레사가 의도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랑의 선교 수녀회’ 설립을 승인합니다.(1950.7.10)
이 모든 일은 마더 데레사의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신앙의 토대는 기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양식이라 깊이 기도하면 응답을 꼭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버려진 이들을 데려와 임종 때 사랑 속에서 편안히 눈을 감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버려진 흰두교 칼리하트 사원을 얻어 임종자의 집을 엽니다.(1952)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대하며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본다면서 자신의 삶을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마더 데레사의 그 거룩함은 매우 심오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깊이를 초월합니다.
인도정부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관심을 가졌지만 그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자신은 단지 주님 손 안에 있는 연필일 뿐이라며 한 없이 겸손했습니다.
어둠의 세상 속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서 빛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지만 끝이 없는 어둠 속에서 외로움과 고통을 겪으며 영적갈등과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도 보여줍니다.
어두움과 고뇌를 인내한 덕에 소명을 이루어냈고 그 어떤 상도 받기를 원하지 않던 마더 데레사는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이들에게 전 세계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설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에서 상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수상의 기쁨을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이름으로 하겠다면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낭독합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1950년 12명의 수녀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현재 전 세계 4천명이 넘는 수녀들이 속해 있으며 100여개 국에서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제들이 차츰 감소하면서 다른 수도회들은 축소되었으나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지금도 여전히 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