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관란 선생 원호의 묘소와 묘비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내남송)
昔在端宗初元光廟威德日盛集賢殿直提學元公謝病歸鄕里與世相絶及端宗遜于寧越就越之西築室名以觀瀾或臨流嘯咏或閉戶著書晨夕瞻望涕泣以寓戀君之忱乙亥端宗運訖服方喪三年制畢復歸原州舊廬不出戶庭人莫得見其面其從子判書原城君孝然屛徒御踵門請見堅拒不許光廟特除戶曹參議召之以死自誓不應命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焉蓋以莊陵在舊居之東也始端宗降號魯山君今上朝陞封大君至戊寅冬追復位號爲端宗大王陞享于祧廟封寢園爲陵時錫鼎實膺摠理事使監董封陵白于上請褒尙其時節義人於是公則旌其閭金時習掌憲嚴興道贈官配享于六臣祠因鄕儒疏請躋享公於耘谷書院又以公及李孟專趙旅金時習成聃壽南孝溫諸公建祠于嶺南之咸安並享焉曠世哀榮至此而殆無憾矣公諱昊元氏爲原州著姓高祖諱弘弼仕高麗官門下侍中曾祖諱廣明宗簿令祖諱方甫贈吏曹參議考諱憲贈兵曹參判妣元氏高麗國子進士天常之女非一元也公詞藝早成擢永樂癸卯文科文學聲望大爲一時儕友所推重歷敭淸顯文宗朝官至集賢殿直提學其後公之孫叔康以史官直筆被禍公遂取平生著述及疏章盡焚之且戒其諸子勿復讀書求名利以故家無隻字遺藏年代且夐邈官歷生年事行始終無傳焉噫當革除之際事有至難言苟非明識特操超然於利害禍福之塗夫孰能高擧遠引歸潔其身以盡自靖自獻之義也哉若先生見幾勇退旣得大雅之明哲精忠大節允爲百代臣人之軌則而致命遂志又泯然無迹與成謹甫諸公異塗而同歸後之篤論者曰悅卿今之伯夷六臣今之方練又曰烟村霧巷比六臣較高嗚呼此可以尙論古人矣霧巷卽公所居烟村卽崔直學德之云易曰明夷利艱貞內難以能正志箕子以之余竊以爲直學元公以箕子爲心者也公娶寧越辛氏保勝郞將乙賢之女生四男一女是長孝行生員次孝廉文科弘文館校理次孝乾進士次孝坤進士女適吳致宗公墓在州南十里南松夫人同岡而異墳舊無碑表今將鑥石樹諸經後孫松齡草公遺事來請銘銘曰
人臣事君盡節爲忠死生殊軌其心則同卓卓先生生際不淑天位有歸故主殞覆明燭幾決焉遐征屛居鄕里脫屣榮名越山之西爰來結屋坐臥必東若星拱北天地崩淪我守基貞身服方喪跡弗戶庭不事二君矢死罔僕猗嗟六子並我心曲聖王在宥邦禮式昭新躋端廟列于宗祧洗雪積寃神人胥悅乃眷先生旌褒棹楔贈享之典延洎梅嚴百世之下有聳觀瞻舊闕墓碑載營載刻節彼雉岳維水激激是邇莊陵遺魄所依靈神盻蠁擁祐無違公有雲仍圭薦黍稷作爲銘詩風玆千億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崔錫鼎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趙相愚書
崇禎紀元後二癸巳十二月 日立
옛날 단종 초 원년(1453)에 세조(수양대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무성해가니 집현전 직제학 원공이 병을 핑계 삼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는데, 단종이 임금 자리를 내어 놓고 영월로 물러나자 강 건너편 서쪽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관란정이라 하였다.
간혹 강가에 나가 휘파람을 불거나 시를 읊었고, 때로는 문을 닫고 들어 앉아 글을 지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정자에 올라 멀리 단종이 계시는 곳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 임금을 그리워하였다.
을해년(1)에 단종이 승하하자 마치 부모 상을 당한 것처럼 삼년상을 치르고, 상이 끝나자 다시 원주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조카 판서 원성군 효연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맨발로 문밖에 꿇어앉아 뵙기를 간청하였지만 굳이 거절하고 방안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세조께서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불렀지만 죽기를 맹세하고 왕명에 따르지 않았다.
앉을 때면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눕기를 한 평생 그리하였으니 이는 장릉이 살고 있는 집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단종을 낮추어 노산군이라 했는데 숙종 때에 이르러 대군으로 올려 봉하고, 1698년(숙종 24) 겨울에 이르러서는 다시 단종대왕으로 복위하여 높이고 종묘에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묘소도 장릉이라고 높였다.
이때 석정(저자)이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일을 총괄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당시 절개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을 포상하게 하였으니 공은 정려를 세웠고, 김시습(2)은 사헌부 관원으로 추증하였으며, 엄흥도(3) 또한 벼슬을 추증하고 사육신 서원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지방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서 공을 운곡서원에 모시고 또 공과 이맹전(4), 조려(5), 김시습, 성담수(6), 남효온(7) 등 여러 사람을 영남 함안에 서원을 세워 함께 모시게 하니 오랫동안 유감스럽던 일들이 이때에 이르러 거의 해결 되었다.
공의 휘는 호요, 성은 원씨인데 원주에서 유명한 성씨이다.
고조부 휘 홍필은 고려에서 문하시중이었으며, 증조부 휘 광명은 종부령이었고, 조부 휘 방보는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휘 헌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원씨는 고려 국자감 진사 천상의 딸인데 같은 원씨가 아니다.
공은 학문을 일찍 성취하여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하고 학문이 높아 명성과 물망으로 한 시기에 높이 평가되고, 친구들 사이에 추앙을 받았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서 문종 때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훗날 공의 손자 숙강(8)이 사관으로 글을 사실대로 썼다가 화를 당하여 죽으니 공이 그만 평생 지은 글과 상소문등을 가져다 모두 불태우고 또 여러 아들들에게 훈계하기를 “다시는 글을 읽어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집에는 한 글자의 기록도 남지 않게 되었으며 또한 연대가 오래되고 보니 벼슬에 오른 경력이나 출생 연도 등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전해오는 것이 없다.
아! 혁명의 시기를 만나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 밝은 식견과 특별한 지조를 가져서 이로움과 해로움으로부터 초연하고 재앙과 복되고 길함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높이 처신하고 멀리 떨어져서 한 몸을 깨끗이 하여 자기 몸을 보전하고 선왕을 위하는 충성과 의리를 다할 수 있으랴!
* 각주 --------------------------------
(1) 을해년(1455)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왕위에 오른 해이며, 단종은 1457년에 죽었다.
(2) 김시습(金時習, 1435~1493) : 강릉김씨.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법호 설잠(雪岑). 생육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우른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지었다.
(3) 엄흥도(嚴興道) : 조선 전기의 지사(志士).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는데,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렀다.
(4) 이맹전(李孟專, 1392~1480) : 생육신. 계유정난 때 관직에서 물러나 선산에 내려가 김숙자(金淑滋) 등과 교유하며 일생을 마쳤다. 안렴사공파 11세 인재공(訒齋公) 휘 현(晛)의 외고조부. 인재공이 지은 <이맹전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5) 조려(趙旅, 1420~1489) : 함안조씨. 생육신. 자 주옹(主翁), 호 어계(漁溪).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 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주요 저서에는 <어계집>이 있다.
(6) 성담수(成聃壽) : 창녕성씨. 생육신. 자 미수(眉叟), 호 문두(文斗), 시호 정숙(靖肅). 성삼문의 6촌. 아버지 희(熺)가 병자사화에서 심한 고문 끝에 김해로 귀양을 갔다가 용서받고 돌아와 울화병으로 죽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파주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서울에 발을 끊고 그 곳에 파묻혀 살았다.
(7) 남효온(南孝溫, 1454~1492) : 의령남씨. 자 공(伯恭). 호 추강(秋江). 생육신. 현덕왕후 능(陵) 복위 상소를 올렸으나 저지당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저서로 <육신전>, <추강집>, <사우명행록> 등이 있다. 7세 산당공(山堂公) 휘 충성(忠成)과 친했다.
(8) 숙강(叔康, ?~1469) : 원주원씨. 자 중화(仲和), 또는 화중(和仲). <세조실록> 편찬 실록청 기사관으로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초(史草)를 거둘 때 작성자 성명을 첨부하면 공정함을 기할 수 없다고 반대하고, 자신의 사초에 과오가 기록된 대신들로부터의 보복이 두려워 비위 기록을 수정하였다가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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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같은 분은 하늘의 기밀을 미리 알고 용감하게 물러나니 큰 선비로서 명철한 일을 실천한 것이며 정충의 큰 절개는 백 대가 흐른 이후 까지 신하된 사람들이 가야할 길을 보여 준 것이다.
목숨을 바치고 뜻을 관철한 그 밖의 일들은 묻혀서 남은 흔적이 없어졌으나 상고 하건대 공이 걸어간 길은 비록 성삼문 등 사육신들과는 달랐지만 충렬과 의리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후세에 와서 그 일에 대하여 독실하게 평론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시습은 지금의 백이(9)요, 사육신은 지금의 방련(10)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연촌과 무항은 사육신에 비하여 그 충절이 더욱 높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아! 이는 가히 고인에 대한 마땅한 논평이 아니겠는가! 무항은 공이 살던 마을 이름이요, 연촌은 직제학 최덕지를 말하는 것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명이(11)는 어렵고 힘든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곧음이 이롭다. 속으로 어렵고 힘든 문제에 부딪힐 때 능히 그 뜻을 바로 하니 기자(12)가 그와 같이 했다.” 라고 하였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직제학 원공이야 말로 기자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공은 영월신씨 보승 낭장 을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효행은 생원이고, 차남 효렴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삼남 효건은 진사요, 사남 효곤도 진사이며, 딸은 오치종과 혼인하였다.
공의 묘소는 원주 남쪽 10리 밖 남송에 있는데 부인과 같은 산에 모셨지만 봉분을 따로 하였다.
예전에는 비석이 없었는데 지금 돌을 깎아 옆에 세우고 후손 송령이 공의 행적의 대강을 적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명을 지어 가로되;
신하로서 임금을 섬겨
절개를 다하는 것이 충성인데
죽고 산 결과는 다르지만
마음만은 같았다네
높고 높은 선생은
맑지 못한 세상에 태어나
임금의 자리는 옮겨지고
옛날 임금은 돌아가셨네
다가올 일을 미리 알아
단연코 멀리 떠나
고향에 숨어 살면서
영화와 명예를 벗어 버렸네
산 너머 서쪽에다
한 칸 집을 새로 짓고
앉거나 눕거나 반드시 동쪽으로만 향했으니
별들이 북극성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네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직 나의 길만 갈 것이니
3년 상복 치르고도
대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네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
죽어서 인은 들 하인이 될 수 있으리오
아름다울 손 사육신이여
그 마음 나와 같구나
성상께서 용서하시니
나라의 예식을 밝혔으며
단종의 사당을 새로 짓고
종묘에도 모셨도다
눈처럼 쌓인 원한을 씻어내니
귀신도 사람도 다 함께 기뻐함이여
선생께서 사시던 곳에
정충각이 높이 섰네
증직하고 향사하는 나라의 큰 은전은
김시습과 엄흥도에게도 미치었으니
100 세대가 지난 후에도
모두들 우러르고 본받을 것이네
옛집과 묘갈을
다시 짓고 다시 세우니
높고 높은 치악산에
물소리도 맑고 시원하다
장릉에서 멀지 않으니
혼백이나마 의지할 곳 생기셨고
귀신도 감동하여
공의 혼령 돕고 보살필 것이네
후손들이 끊임없이
공을 찾아와 제사올리고
비석에 시를 새겨
천억 만 년 전하려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최석정(13) 지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조상우(14) 씀
1713년(숙종 39) 12월 일 세움
* 각주 --------------------------------
(9) 백이(伯夷) : 백이숙제(伯夷叔齊). 중국 고대 주나라(周)의 전설적 형제 성인.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殷) 주왕(紂王)을 토벌하자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
(10) 방련(方練) : 1402년(건문 4) 명나라(明) 황위를 찬탈한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항거하다 죽은 방효유(方孝孺)와 주변 사람들.
(11) 명이(明夷) : <주역> 64괘의 하나. 밝은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
(12) 기자(箕子) : 중국 은나라(殷) 군주 문정(文丁)의 아들. 주왕(紂王)의 숙부. 주왕의 폭정에 간언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하여 유폐되었다. 은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들을 이끌고 주나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은나라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13) 최석정(崔錫鼎, 1646~1715) : 문열공계 전주최씨.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초명 석만(錫萬). 자 여화(汝和), 호 명곡(明谷), 존와(存窩), 시호 문정(文貞).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국조보감> 속편과 <여지승람> 증보 편찬을 지도했다. 영의정으로 장희빈 처형을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소론의 영수로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고, 배척받던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수학에 능통하여 저서 <구수략>에서 마방진(魔方陣) 연구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14) 조상우(趙相愚, 1640~1718) : 풍양조씨. 자 자직(子直). 호 동강(東岡). 시호 효헌(孝憲). 이경석(李景奭), 송준길(宋浚吉)의 문인. 경사에 밝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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