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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quer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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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회복하자”는 은사의 끈질긴 설득에 복귀 결심
설날장사 목표로 구미 모교 체육관서 다시 담금질
김종화 감독은 천하장사 이태현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고 그를 씨름판으로 이끈 은사(恩師). 18년 동안 구미초등학교 선수단을 지도했고 2001년부터 구미시청 씨름단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감독님이 그러셨습니다. 선수의 시작을 나하고 함께 했으니 마지막도 나랑 같이하자고.” 씨름판 복귀를 결심한 결정적 계기에 대한 이태현의 대답이다.
“처음과 끝을 함께 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외국에서 힘든 생활 한 것 다 안다’ ‘씨름계가 많이 침체돼 있다. 네가 나와 줘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나’ 하셨습니다. 밥 먹으면서, 소주 한잔 하면서…. 또 전화 한 번씩 넣어주시고.”
김종화 감독은 격투기 무대에서 비참하게 두들겨 맞는 제자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꼭 내가 맞아서 KO되는 것 같았다니까요.” 10월에 계약이 끝난다는 소식을 들은 감독은 7월부터 “씨름판으로 돌아오라”는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7~8 차례. 지난 10월 말, 구미에 있는 한 식당에서 소주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감독은 “명예회복을 해야 안 되겠나” 물었고 제자는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계약 기간은 1년.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5000만원이다.
김종화 감독은 이태현을 “촌놈이라 어수룩했고, 운동장을 돌라고 지시하면 체력이 약해 코피를 줄줄 흘렸던 녀석”으로 회상했다. 제자에겐 스승이 무섭고 또 무서운 존재였다.
“길 가다가 감독님 목소리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숨었으니까요. 그때 집이 김천이라 40분, 한 시간씩 버스 타고 (구미로) 다녔는데 집에 갈 때는 (엉덩이를) 하도 맞아서 버스 자리가 남아돌아도 앉아서 가지를 못했죠. 너무 쓰라려서.”
모래판에선 그렇게도 엄혹했지만 스승은 큰 선수로 성장하는 제자의 모습을 잊지 않고 지켜봤다. 이태현은 설날장사 씨름 대회 때면 초등학교 꼬맹이 후배들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아와 응원하는 김 감독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설날 대회가 열리면 보통 아이들이 명절 쇠러 가잖아요. 근데 감독님은 꼭 초등학교 후배들을 데려와서 플래카드 내걸고 응원하는 거예요. 그 목소리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힘이 솟고….”
격투기 데뷔전 뼈아픈 패배 후 러시아서 강훈
세 번째 경기선 1회 KO패… 1승2패 초라한 성적
이태현이 모래판에서 거둔 성적은 눈부시다. 1993년 데뷔해 이듬해 부산 대회에서 같은 팀(청구씨름단) 동료인 백승일을 꺾고 처음 천하장사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은퇴할 때까지 모두 세 차례(1994·2000·2002년) 천하장사에 올랐다. 백두장사 18번, 지역장사 12번까지 합하면 민속씨름에서 33차례나 꽃가마를 탄 셈이다. 통산 경기 전적은 630전 472승 158패. 승률이 74.9%에 달한다. 472승은 역대 최다승 기록이며 그가 현역 시절 받은 상금 5억9396만원은 역대 최고액이다. 반면 격투기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의 데뷔전은 2006년 9월 10일 일본 사이타마현 수퍼아레나에서 열린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 2006 원매치. 당시 이태현은 브라질의 노장 히카르도 모라예스에 1라운드 8분8초 만에 TKO로 무너지며 팬들에게 깊은 실망을 안겼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종합격투기 강국인 러시아행. 효도르가 속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체육관에서 4개월 동안 혹독한 강훈을 묵묵히 소화했다.
격투기(格鬪技)에서 ‘격투’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맞붙어 치고받으며 싸운다는 뜻이다. 격투기에선 엄청난 난타전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씨름 선수로서 ‘맞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을까. 이태현은 “경기 중에는 시합에 몰두해서 그런지 고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은 적은 있었지만 아픔 때문에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훈련할 때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러시아에서는 거의 매일 실전과 같은 훈련이 이어졌습니다. 첫날 스파링을 하다 왼쪽 눈두덩이 찢어졌어요. 피가 팍 터졌는데 거기 사람들은 ‘어디 봐. 괜찮네’ 하더니 그냥 계속하라고 해요. 체육관에서 훈련할 때는 상대가 일반 학생부터 사회인까지, 개중에는 여자 선수들도 있었는데 그냥 잽을 던지니까 효도르의 코치가 그러더군요. ‘(이태)현, 지금 장난치나.’ 시합 상대에 남녀노소가 어디 있냐며 그 따위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코뼈가 돌아가고 부어올라도 괜찮다고 그냥 하라고도 했어요.”
한 해 뒤인 작년 10월 28일, 그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서울대회에서 일본의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1회 TKO로 꺾고 첫 승리를 거뒀다. 장충체육관은 그가 꽃가마에 올라타기도 했던 장소다. 하지만 지난 6월 15일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드림4 미들급 그랑프리 2라운드’ 수퍼파이트 경기에선 네덜란드의 알리스타 오브레임에 1회 36초 만에 KO로 무너졌다. 초반 탐색전을 벌이며 경기를 풀어나갔으나 기습적인 원투 펀치와 니킥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선수의 기량이라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확 느는 것이 아니거든요. 훈련량이 쌓이고 쌓이면서,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주먹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고, 기술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가 풀고 일어나게 되고…. 그럴 때 희열감이랄까, 전율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어요. 마지막 대회 때에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너무 허망하게 무너졌어요. 충격이 너무 컸어요.
이종격투기 나설 때 축하해주던 이들도 등 돌려
귀국하고 3개월 동안은 집 밖에도 잘 못나가
선수에게 패배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은 주위의 질시와 냉대다. 이태현 역시 격투기 전향과 부진한 성적 때문에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다. 씨름선수로 잘나갈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픔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성격이 전혀 다른 전장(戰場)이었지만 한국 씨름의 간판 선수였던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팬들의 아쉬움은 농도가 진했다.
“인터넷 악플, 전 그냥 남들 이야기로만 생각했어요. 데뷔전에서 패했을 때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실감했어요. 시합 끝나고 호텔방에 있는데 매니저가 당분간 인터넷 볼 생각을 말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더 궁금해지는 거 있죠. 노트북을 열고 내 이름을 딱 검색하는 순간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팍 드는 거예요. (이종격투기로) 갈 때 좀 떳떳하지 못한 것은 있지만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도전한 건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경기에 나간 것은 인정하지만…. 심지어 이종격투기로 간다고 할 때 축하하고 악수하고 사인 받아간 사람들조차 한 경기 졌다고 ‘니가 실실 웃고 깝죽거리고 돌아다닐 때 알아봤다’ ‘격투기 바닥이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설치냐’ 하며 욕설을 쌔리삐는데…. ”
그는 귀국해 집에 돌아온 뒤 3개월 동안 동네 슈퍼는커녕 집 밖에도 못 나갔다고 했다. 내가 모르지만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악플과 욕설을 쏟아낼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대인기피증,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지난 6월 패한 뒤에는 아예 인터넷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팬들이 그의 격투기 진출을 곱잖은 시각으로 보게 된 데에는 그의 깔끔하지 않은 처신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2006년 2월 용인대 대학원에서 ‘민속씨름 선수들의 체급별 유·무산소성 운동능력과 최대운동 후 회복기 산화적 스트레스 차이에 관한 연구’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태현이 그 해 7월 “교수가 돼 후배들을 키우겠다”면서 은퇴를 선언했지만 언론을 통해 이종격투기 프라이드 FC로 진출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후배 양성을 위해 씨름판을 떠나는 스타를 아쉽게 보내주려 했던 팬들은 이태현의 이중적 행보에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격투기 때 줄인 체중 늘리는 게 급선무
“멋지게 재기해 명예도 팬도 되찾겠다”
격투기와 씨름 사이에는 ‘옷을 벗고 하는 운동’이란 공통점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두 종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우선 호흡법부터 다르다. 씨름에서는 기술을 걸거나 힘을 쓸 때 숨을 참지만 격투기에서는 숨을 참으면 쉽게 지쳐버리기 때문에 쉬지 않고 짧게 호흡하는 방법을 쓴다. 펀치를 내는 순간에도 씨름할 때처럼 숨을 참고 내지르면 몸이 굳고 파괴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씨름에서 순간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말 그대로 내 품 안에서 놀 수 있게 만들려면 엄청난 근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반면 격투기에서는 순간적인 근파워뿐만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힘을 낼 수 있는가 하는 근지구력의 중요성이 높다.
이태현은 “20대 초·중반에만 시작했어도 (격투기 무대에서) 승부수를 띄울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기술 훈련에 투자했지만 자신이 배운 기술이 격투기 바닥에서는 초보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제 주특기는 씨름의 넘어뜨리는 기술을 응용한 테이크 다운이었는데 그 기술만으로는 애초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옆으로 비껴 파고드는 법, 타격을 하다 잡는 법 등 기초부터 배웠는데 정교함과 파괴력을 따라갈 순 없었습니다.”
그는 씨름 등 종목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1~2년의 짧은 준비로 다른 종목의 최고에 오르는 것은 욕심이라고 했다. 앞으로 취미로 격투기를 해볼 순 있겠지만 선수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내년 1월 말 열리는 설날장사 대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이태현은 곧 구미에 숙소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할 계획이다. 이태현의 매니저인 이재철 JC컴퍼니 대표는 최근 이만기 인제대 교수 등 씨름계 선배들을 찾아 인사드리며 ‘신고식’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12월 중순에는 남해 통합장사 씨름대회를 둘러보며 경기 감각을 조율한다. 그리고 △새벽 5시 기상 후 1시간 러닝 △오전의 파워 트레이닝 △오후의 2~3시간 실전 훈련 △저녁의 마무리 운동(유연성과 테크닉 보강)의 프로그램으로 본격적인 몸 만들기에도 나선다. 현재 몸무게는 130㎏을 조금 넘는 수준. 격투기 선수 시절 125㎏ 수준의 체중을 씨름 전성기 때의 138~140㎏대로 늘려 파워를 보강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민속씨름위원회 김정필 기술위원장은 현대코끼리씨름단에서 이태현과 한솥밥을 먹은 선배다. 그는 “어려운 우리 씨름판에 태현이가 활력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몇몇 팀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프로씨름은 현대삼호중공업이 프로연맹을 탈퇴하면서 현재 단 하나의 프로팀도 남지 않은 상태다.
“동계 훈련을 통해 체력을 확실히 보강해서 내년 봄 설날장사 대회에서 보란 듯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랍니다. 태현이는 남들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본인 스스로 잘 알아서 하는 선수입니다. 씨름이 무엇인지 기술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선수, 한 판 지고 있어도 마음을 잘 가다듬어 두 판 역전을 일궈내는 선수죠. 마인드 컨트롤이 강한 선수입니다. 불안감을 떨치고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경기 시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연장전 없이 바로 계체에 들어가 체중이 덜 나가는 선수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개정 룰도 이태현에겐 유리한 환경이다. 최근 백두급 장사들의 평균 체중이 150~160㎏ 정도 나가기 때문이다. 이태현은 “처음 천하장사에 오를 때도 백승일과 1시간30분 혈투 끝에 계체로 이겨 ‘저울장사’라는 꼬리표가 한동안 따라붙었다”면서 “호쾌한 기술 씨름으로 멋진 승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2년 정도 씨름 선수로서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겁니다. 그 다음엔 지도자의 길을 걸어야지요. 무엇보다도 내년 설날장사 대회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실력과 기량으로 팬들의 사랑을 되찾겠습니다.”
이태현
-구미시청 씨름단 소속
-976년 1월 17일생, 197㎝, 125㎏
-구미초, 의성중·고, 용인대 격기학과, 용인대 체육교육학 석·박사
| 모래판 전적 |
-천하장사 3회(1994·2000·2002년), 백두장사 18회,
-지역장사 12회 등 33회 우승
-630전 472승 158패. 승률 74.9%
-상금 5억9396만원(역대 최고액)
| 격투기 전적 |
2006년 9월 10일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서
히카르도 모라예스(브라질)에 1R 8분8초 TKO 패
2007년 10월 28일 K-1 히어로즈 서울대회서
야마모토 요시히사(일본)에 1회 TKO 승
2008년 6월 15일 드림4 미들급 그랑프리 2라운드 수퍼파이트서
알리스타 오브레임(네덜란드)에 1R 36초 KO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