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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입다 사사시대[11장]
그 다음 중요한 사사로서는 입다의 출현이다. 이때는 압몬족속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이다. 입다는 길르앗 출신이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 땅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과 갓지파가 차지하고 있던 그 땅이다. 용사였으나 출신이 미천하다. 미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자기들 가운데 유업을 주지않고 떠나라고 해서 비류처럼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외침에 의해 위기를 당하게 되자 입다가 용사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장로들이 입다를 청해서 그들의 방백이 되어서 암몬자손들과 싸워 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이 청을 들으면 길르앗 거민의 우두머리로 삼을 것을 약속하자 입다가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의 진행 과정 자체가 과연 얼만큼 타당한 것인가, 물론 나중에 입다가 정작 암몬자손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를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전혀 하자가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별히 암몬자손과의 전쟁을 앞두고 만일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면 나를 맞으러 나오는 자를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이기고 돌아 왔더니 자기를 맞은 사람이 무남독녀 딸이었다. 이미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해서 크게 슬퍼하는 가운데 그 딸이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 죽겠다고 한다. 얼마간 기간을 주어서 처녀로 죽음을 슬퍼하게 해 달라고 한 다음에 기록된대로 그렇게 하였다.
* 인신제사가 의미하는 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생각하면 참 곤혹스러워 한다. 기생 소생이었고 비류 출신이었고, 그런 사람으로 끝났다고 하면 별난 사람이었구나라고 치부해 버릴텐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씀 다음에,전쟁에 임하면서 입다가 이런 서원을 했다는 것이다. 입다가 이런 서원을 했다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도 설왕설래가 있고 그리고 서원을 행한 것이 잘한 것이냐 못한 것이냐 등등, 일단 하나님께 약속을 했으니 무슨 일이든 무조건 해야 된다. 즉 잘한 것이다 하는 이도 있고 잘못한 것이다라는 이도 있다. 그런데 나중에 뭔가 되긴 된 것 같은데 끝말이 명백하지가 않다. 번제로 드렸는가? 사람을 잡아서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너무 엄청난 일이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딸을 성소에 보내서 평생을 성소에서 지내면서 처녀로 늙어 죽게 했다고 해석을 하는 이도 많이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어려움을 느껴서 이런 저런 해석을 하는 것인데, 우선 맨 마지막에 처녀로 죽음을 슬퍼했다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해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규례가 생겨났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소에 가서 처녀로 늙어 죽은 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슬퍼했을까?(시집 못간것 때문에) 그것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서원을 행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 분명히 입다는 번제로 드리겠다고 했다. 어떤 이는 번제를 영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번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문제가 됐다는 것 자체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 가지고 슬퍼 할 것은 못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입다가 서원한 것은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인신제사를 서원했었고 돌아와서 자기 딸이 바로 그 대상으로 지목이 되었고 그리고 죽었다. 결국 죽었다는 것이 그 뒤에 나오는 내용으로 봐서 맞는 것 같다. 단순히 성소에서 독신으로 늙어 죽었다는 말만 가지고는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반응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입다의 딸 자신이 몇 달 동안 슬퍼했다는 것 등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실제로 있었으니까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문제는 입다의 서원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냐, 그것은 아니다. 서원 자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서원을 하는 것이 잘못 됐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에 의해서 암시가 되고 있다. 결국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 딸이었다는 것은 입다의 서원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고 잘못 되었다는 것인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서원에 얽매어서 딸을 죽였는데 이런 것은 사사시대의 사사들,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을 일으킨 그런 사람들을 너무 완벽한 사람들로 이해할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할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 흘러온 사사기의 전체 흐름을 볼 때 또 사사기 초두에서 이야기한 대로 세월이 갈수록 이전 시대보다 그 다음 시대가 더욱 부패했다는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결국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들 조차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했고,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 얼마나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고, 상식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자라고 하면 분명히 이것이 어긋난 일이라는 것을 알만한 데도 무모한 짓을 행한 불상사였다고 생각한다.
주변국가에서는 아주 후에 일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칠 때 거의 성이 함락될 위경에 처했을 때 모압 왕이 자기의 황태자를 잡아서 제사를 지낸다. 이렇게 주변국가에서는 위경에 처했을 때 사람을 죽여 제사하는 일이 있었다. 만일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하면 입다가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나가면서 그와 같은 서원을 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세상의, 이방의 타락한 종교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기드온시대 이후로 이스라엘의 타락의 도가 얼마나 심화 되었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 교회의 분열(주도권 쟁탈)
입다에게 와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했는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을 행했는가? 사람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를 만큼 무지했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입다에게 와서 이스라엘에 가장 아픈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다. 이 분열의 기미가 기드온 때 어느 정도 표면화 됐었다.
길르앗 사람은 요단 동편 사람들이고 그외 나머지 지파들은 요단강 서편에 기업을 얻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고 대체로 그때 전쟁을 수행한 사람은 요단강 동편 지역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통해 놀라운 구원을 베푸시자 이제는 에브라임 사람이 들고 일어난다.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정작 필요할 때 일찍 달려와서 도와 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로서의 위신, 권위 이런 것들을 세우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자의 허세다. 일종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을 때는 기드온이 겸손하여서 나는 당신 발치에도 못미치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이 무마가 되었다. 그런데 입다의 경우는 따지고 든다. 우리가 당신들을 불렀지 않느냐, 당신들이 오지 않고 선 이제와서 딴소리냐 하고서는 싸움이 붙어서 큰 전쟁이 나는데 에브라임 사람이 패한다.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 나루터를 지키고 서서 요즘도 우리 나라의 경우도 지방에 따라 말이 다르듯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는 씹볼렛 발음을 하게 해서 잘하지 못하면 잡아 죽이는 불상사가 생겨났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교회가 동서로 분열했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이러한 교회 분열의 심각성을 암시하는 일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다. 정복전쟁이 거의 마무리가 되고 여호수아는, 이 때까지 자기들의 가족과 모든 소유를 요단강 동편에 남겨두고 요단강을 건너와서 자기 형제들을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하던 르우벤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의 용사들을 다시 고향에 돌려 보낸다. 돌아 가면서 이들이 요단강 가에 큰 제단을 쌓았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소식을 듣고 여호수아가 노발대발하고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나서 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사장을 시켜서 진상을 확인하는데 확인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이 왜 이런 제단을 여기에 세웠느냐?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곳까지 예배 드리러 와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그 땅이 싫으면 이리로 건너오면 얼마든지 땅을 주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말 속에 어떤 뜻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면 성소가 두 개 생기게 되면 결국 교회가 둘로 분열되고 만다. 그 성소를 중심으로 섬기는 제사장이 서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가 분열되고 마는 것이다. 오직 한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신 그 뜻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그 중에 아주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영적 통일성 곧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한 뜻이 그 속에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요단강 동편에 또 하나의 제단을 쌓았다고 했을 때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결국 무엇에 대한 분개인가하면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 명령의 참 뜻이 이스라엘에 영적으로 하나의 구심점이 있게 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 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것은 교회 분열에 대한 분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해석이 타당한 것은 그 후에 이 일이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때 그쪽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이런 제단을 우리가 만든 것은 여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요단강 서편에 동일한 제단을 쌓아 둠으로서 너희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세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수긍하고 돌아가고 만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속한 이스라엘과 하나인 것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증거로 쌓은 하나의 제단이다, 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어떤 조처였다고 이야기를 하자 납득하고 돌아간 일이 있다.
이런 사건을 살펴 보면 초기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분열을 얼마나 심각한 것으로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하던 그 일이 여기 입다 때 와서 교회 내의 주도권 쟁탈 즉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 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갈라서고 만다. 이 때까지는 적어도 이스라엘 내에서 서로 싸우는 일은 별로 없었다(소규모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집단적으로 큰 규모로 서로 죽이는 일은 본격적으로 여기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때까지는 교회의 대적이 교회 바깥에 있었으나 이제 여기서는 그 대적이 내부에도 있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의 모습이다.
기드온시대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본격화 되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좀 소극적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변질이 시작되었다. 우선 교회 지도자에 대한 상이 변해졌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온 세계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나 특별한 의미에서) 영역이요 하나님께서 왕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고 하는 그것을 빼고 나면 교회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바로 그 교회를 다스리는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가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것이다. 세상처럼 좀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세상의 지도자와 비슷한 교회 지도자상을 원하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완전히 표면화된 것이 첩의 소생 아비멜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스라엘내 교회 지도자상과 관련해서 어떤 변질이 일어났는가? 그것이 사건으로 돌출된 것이 아비멜렉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내 편이 되라 그러면 잘 해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이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 본질 자체의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입다에게 와서는 사람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무지막지한 일로 나타나게 되었고 더우기 교회의 헤게모니 쟁탈로 인해서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