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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 30 - 33 기도를 부탁함
11. 기도를 부탁함( 15: 30 - 33 )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롬 15: 30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도를 부탁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로나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또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피차 권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용기로 권면하며 무슨 용기로 기도 요청을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들이 그와 힘을 같이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비록 한 자리에서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구한 것이다.
합심 기도는 힘이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수요예배나 금요예배에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예배에 못나오는 자들은 그 시간 다른 곳에서라도, 아니 동일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일을 중요히 여겨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특히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의(義), 우리의 힘은 항상 부족하다.
어려운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은 여지없이 드러나곤 한다. 우리는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고 우리의 기도조차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1]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본문을 좀 더 쉽게 직역하면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공동 번역)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는 일반적으로 수단, 매개, 동인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여기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매개로 하여 권유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 권하노니'라고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함축적으로 자신의 부탁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J. Murray).
'성령의 사랑'(*, 아가페스 투 프뉴마토스)은 '성령이 지니고 있는 사랑', '성령이 성도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을 의미한다(E.F. Harriso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란 말이 위엄과 권위로써 권하는 성격이 있다면 반면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란 말은 사랑에 호소하는 부드러운 권고적 성격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 자신의 권위나 주관이 전혀 없이 오직 크신 삼위 하나님이 그 이유와 근거와 내용이 되고 목표가 됨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만큼 심각하고 강력한 부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의 사역에 기도로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2]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바울은 그에게 닥칠 위험으로 그의 선교 계획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처방책 즉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 19)는 말씀에 따라 합심하여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해 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 고후 1: 11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나고니사스다이 모이'(*)로 여자적으로 '죽을 힘을 다하다'라는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신약에서 본 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 뜻은 운동 경기에서 한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처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서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뜻이다(Lenski).
또한 이것은 기도가 내포하고 있는 씨름을 암시하고 있다. 기도는 끈질기고 열심을 내는 것이어야 하며 마치 투쟁(鬪爭)과도 같은 것이다(John Murray).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수단이며 성령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다.
* 행 12: 5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물론 이때 힘써서 하는 기도는 자기 욕심의 응답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한다. 무조건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이루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전례 없는 강력한 기도의 요청은 현재 사도 바울이 처해 있는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롬 15: 31 예루살렘에 대하여 -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하고, )
바울 사도가 요청한 기도의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본 절에 두 가지가 나오고 다음 절에 한 가지가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유대의 순종치 않는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이 아까워서이었겠는가? 아닐 것이다.
성도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들을 위해 더 살 필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와 하나님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서 살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뜻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취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뜻에 순응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낫고, 죽음 후의 안식은 이 세상의 수고로움보다 훨씬 더 낫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죽음을 겁내며 왜 육신적 목숨을 유지하기에 급급하겠는가?
둘째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곧 바울의 구제헌금 전달의 일이 성도에게 받음직하게 되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아마도 그 구제 헌금이 구제하는 성도의 자랑이 되지 않고 구제받는 성도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지기를 구한 것일 것이다. 사랑은 예절을 지키는 것이다.
남에게 상함을 주는 선행은 참된 사랑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 마 6: 3-4 -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기도 부탁을 한 데에는 두 가지 주요 목적이 있었다. 본문이 그 중 한가지이다.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의 헬라어로 '아포 톤 아페이둔톤 엔 테 유다이아'(*)인데 여기서 '아포'(*)는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나타낸다(Ridderbos).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란 복음에 대적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데, 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나 팔레스타인의 남부에서 뿐 아니라 전 유대 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Ernst Kasemann).
그는 이전에도 그들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행 9: 29-30 -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를 대적하는 열기가 식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가게 될 경우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어야만 했다'(행 21: 13).
이런 상황 때문에 바울은 더욱 간절하게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화를 입지 않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바울은 회심 전에 두드러진 유대주의자 이었다.
* 갈 1: 14 -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당대 최고의 랍비에게 수학하였고,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핍박 하였다.
* 행 7: 58 -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 행 9: 1-2 -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 행 22: 3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하지만 다메섹 도상의 회심을 통하여 성도가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의 변절에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바울은 핍박자에서 핍박을 받는 자로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활약이 커지고 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바울에 대한 율법주의자들의 핍박도 커졌고, 급기야 바울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건짐을 받게 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뤼스도'(*)는 바울의 이런 심정을 잘 반영해 주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 20: 24)고 고백하였지만 유대 불신자들의 살인적 음모에 대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무모하게 내어 맡기거나 또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비겁하게 타협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의 증진을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John Murray). 그는 결코 불신자들의 무모한 살인적 음모에 희생당하므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2]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본문은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 중요 목적 중의 또 다른 한 가지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한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감사함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사랑의 선물이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의 큰 고통을 덜어주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제공되고 있지만 그들이 이방인 교회의 헌금 받기를 거부하거나 형식적인 감사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있었다(E. F. Harrison).
그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 행 15: 19-29 -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의 바리새적인 유대인 성도들은 바울과 이방인 교회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 행 15: 5 -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둘째,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역과 그의 활동에 관한 잘못된 거짓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 행 21: 20-21 -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예감하고 예루살렘 교회 방문시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갈등의 소지가 없도록 로마의 성도들에게 미리 기도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롬 15: 32 하나님의 뜻을 따라 -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
1]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셋째로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가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로마로 가기를 원한 바울의 소원은 몇 번 좌절되었었다. 그러나 인간의 소원은 좌절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생애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만은 드러날 것이다. 그는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완전하시고 완벽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은 완전무결하여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는 주권자이시며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완전히 남김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기쁨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바울의 전도 사역이 기쁨과 자원함의 사역임을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도 그러해야 한다. 억지의 봉사, 억지의 헌금, 억지의 전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작은 봉사일지라도 자원함으로 하고 큰 봉사도 기쁨으로 해야 한다. 우리에게 기쁨이 부족하다면 이것을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으로 자신을 우리 위해 주셨다. 사랑은 기쁨의 헌신이요 기쁨의 봉사이며 기쁨의 희생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 성도와 함께 며칠간 편히 쉬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그가 오락이나 세속적 쾌락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전도자의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행한 일들을 반성하고 혹은 감사하고 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새 힘을 얻는다. 그러한 휴식과 반성과 기도를 통해 그의 사명은 더욱 명료해지고 그의 소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롬 15: 33 평강의 하나님 -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
평강은 평안과 평화와 안녕과 안정을 다 의미한다. 평강과 반대되는 말은 싸움과 고통과 불안과 우울함과 두려움 등일 것이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강이 충만하시며 우리에게 평강을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평강의 복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한글 개역 성경에는 헬라어 성경에 있는 '데'(*, '이제는')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넣어 해석하면 지금까지 말한 15 장 전체의 결론이 맺어짐과 동시에 로마 교인들을 향해 부탁했던 그 내용들의 간절성이 한층 살아난다.
혹자는 본 절에 '아멘'(*, Amen)이 있는 것을 이유로 들어 이 대목이 본 서신의 끝이고 16 장은 다른 곳에서 삽입된 독립된 서신이라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본 절의 아멘은 기도의 끝에 따라오는 당시의 전통적인 축복 양식의 한 표현으로서 바울 사도가 지금까지 로마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한 내용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그 내용에 대한 중요성 및 그것들이 그대로 성취될 줄을 믿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사본에서 보더라도 본장에 뒤이어 16 장이 계속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축도 중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16: 20).
* 고후 13: 11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빌 4: 9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살전 5: 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살후 3: 16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유대교적 표현으로서 바울이 '평화'(*, 에이레네)를 하나님과 함께 관련지어서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성도의 평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John Murray).
이 평강의 본래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영혼의 평온한 내적 상태, 항상 만족한 상태를 가리킨다(Hodge).
바울이야말로 이러한 참된 평화를 간절히 바랬고 그의 모든 독자(讀者)들이 이 평화를 누리게 되길 소원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 전 도중에 방문할 예루살렘에서의 많은 충돌과 고난을 예상했기에 이 평화를 갈구했다.
* 행 21: 13 -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또한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일치와 기쁨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참된 평화가 있어야만 했음을 안 것이다.
그런데 평화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왜냐하면 평화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즉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모든 축복이 로마 교회 안에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역자의 심정을 잘 보여준 것이다(J. Murray).
결론적으로, 30절부터 3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 우리는 합심하여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합심하여 서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일은 더욱 힘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좌절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자.
셋째, 우리의 봉사는 기쁨과 자원함의 봉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봉사는 억지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기쁨의 헌신이요 기쁨의 봉사이며 기쁨의 희생이다.
넷째,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충만한 평강을 경험할 것을 소원하고 기대하자.
그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