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은 새우젓의 계절이기도 하다. 뭐니 뭐니 해도 김장 재료의 기본은 새우젓이다. 김장 새우젓(추젓)의 국내 최대 산지가 강화도 일대 어장이다. 그 중 선수어장은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를 길게 흐르는 석모 수로의 남쪽 입구에 해당한다. 석모도와 마주보고 있는 후포항 선수포구에서 대를 이어 새우잡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 ‘꽁당배’ 서해호의 한대경 선장(60)이다.
부친따라 탄 배, 선수포구 현역 선장으로는 최고참 젓갈용으로 잡는 젓새우 중에도 봄에 잡는 것을 오젓, 여름에 잡는 것을 육젓, 가을에 잡는 것을 추젓이라고 한다. 크기로는 육젓이 추젓보다 낫지만 한대경 선장은 추젓이 작으면서도 싸고 맛있다고 강조한다. 부인 김점임 씨는 “육젓이 눈으로 먹는 새우젓이라면, 추젓은 맛으로 먹는 것”이라고 육젓과 추젓의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한다. 겉보기에 크고 좋아 보이는 육젓이 추젓에 비해 가격이 서너 배나 비싸지만 맛에서는 추젓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선수포구의 주력 어종은 추젓이다. 우리나라 최대 새우어장으로 꼽히는 전라도 쪽에서는 주로 육젓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강화 선수어장에서 잡는 새우가 김장철이면 전국의 새우젓 명소에서 ‘강화’나 ‘선수’란 이름은 빠진 채 그곳만의 이름을 달고 팔려 나간다고 한 선장 부부는 입을 모았다.후포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선착장에는 선수어판장이 있다. 17개 가게가 나란히 있다. 새우젓도 팔고 포구 맛이 물씬 나는 음식점도 겸한다. 겉으로 표시가 나지는 않지만 이들 가게는 입구에서부터 순서가 매겨 있다. 배를 먼저 부린 사람이 1번 자리를, 그다음이 다음 순서를 받는 식이다. 한대경 선장은 2번이지만 현재 배를 부리는 사람으로 치면 1번이다.선수포구의 현역 선장으로는 최고참이 된 한대경 선장이 선장 면허라고 할 수 있는 해기사 면허와 통신사 면허를 딴 게 1977년이다. 한 선장이 배를 본격적으로 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이다. 아버지를 따라서였다. 부친은 황해도 연백에 살다가 전쟁 때 이곳으로 피란 나와 터를 잡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부리는 배에서 뱃일을 시작한 한대경 선장은 자신의 배로 독립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선수어장의 새우잡이는 한시 허가를 받아서 한다. 새우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은 9월에서 11월 사이에 3개월뿐이다. 이곳 강화와 김포 일대에 새우잡이 배만 140여 척이 있다. 그 중에는 한대경 선장 등 어부들이 ‘꽁당배’라고 부르는 배가 많다. 새우잡이를 하는 꽁당배는 바다에 자리를 잡고서 배 양편으로 그물을 펼쳐놓고 움직이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 때 새우가 조류를 따라 드나들다가 그물에 걸리게 된다. 따라서 꽁당배에는 잡은 새우를 뭍으로 나르는 운반선이 별도로 따라붙어야 한다. 한대경 선장은 새우도 잡고 운반선도 맡는다. 그래서 배가 2척이다. 배에서는 사고도 많기 때문에 보험은 필수다. 한대경 선장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배가 침몰한 적도 있다. 선체 공제에만 1년에 500만 원가량 붓는다. 선원 보험은 급여에 따라 차등으로 치러야 한다. 꽁당배에는 보통 3~4명의 인부가 같이 일하게 되는데 이들의 인건비로 3개월간 한 달에 한국인은 500만 원씩, 외국인은 300만 원씩이다. 한 선장은 한국인 근로자만 쓴다. 외국인들은 싸기는 하지만 못마땅한 점이 많아서다.
황해도 피란민들 정착하면서 새우잡이 본격화 한대경 선장은 지금은 선수 어장 밖을 나가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 전라도 충청도 등지로 다니면서 그물질을 했다. 전라도 신안까지 가면 그곳에 땅을 얻어 잡은 것을 말려서 팔고 하는 식이었다. 전라도 충청도 등지의 주요 포구에 땅을 얻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새우 중에서는 빨간색의 북새우가 참 많이 잡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새우 대부분을 일본에 수출했다. 일본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했던 게 북새우다. 그 찌꺼기는 사료공장에 팔았다. 그런데 지금은 북새우 잡기가 쉽지 않다. 전라도 쪽에서 가을에만 조금 잡히는 정도다. 예전에는 준치도 많이 잡혔는데, 지금은 도통 나지를 않는다.선수어판장에 나들이 왔다가 생새우나 추젓을 맛본 사람은 김장철만 되면 멀리서도 선수포구 새우를 찾는다. 요즘은 전국으로 택배 서비스가 되니 큰 부담 없이 주문할 수 있다.한대경 선장은 새우가 열이 많다고 했다. 잡은 즉시 소금과 섞어 절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변한다는 거다. 그래서 새우잡이 배에는 소금이 필수다. 예전에는 선수어장의 새우잡이 배들은 강화 삼산염전의 소금을 썼다. 강화 새우와 강화 소금의 궁합이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삼산 소금의 질도 최고로 쳤다. 그러나 지금은 삼산 소금이 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신안 소금을 쓴다고 했다. 강화 선수 어장이 추젓 새우의 본고장이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선수포구의 새우잡이가 본격화 한 것은 황해도 피란민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인 것으로 보인다. 한대경 선장의 배 서해호는 3년 전에 1억5천만 원을 주고 산 것이다. 30여 년 동안 배 10척 정도는 바꾼 듯하다. 지금은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꽁당배 초창기까지도 닻은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 중에서 가장 무거운 축에 드는 삼나무와 박달나무로 닻을 만들었다. 또한 사람의 양 팔처럼 그물을 매달아 고정시키는 것도 지금은 쇠파이프를 쓰지만 예전에는 나무였다. 그걸 ‘길’이라 불렀다.
전국 추젓의 70~80%가 강화도에서 생산 선수어장의 추젓이 유명해진 것은 1970년대 이후인 듯하다.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발간된 『경기도지(京畿道誌)』와 강화문화원이 1976년 발행한 『강화사』를 비교하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경기도지(京畿道誌)』는 ‘관내 수산물의 주요 어획물’ 중 첫 번째로 ‘새우(鰕)’를 꼽고 있다. 그러면서 새우의 대표 산지도 소개하고 있다. ‘현재 본도(경기도를 말함)의 주요 어장의 수위를 점하는 것으로는, 종래 매년 전 어획고의 3할에 달하고 있다는 새우잡이(鰕漁業)를 들게 되는 바, 이들 새우류는 현재 주로 부천군 북도면, 용유면, 덕적면 및 강화군 서도면 연안에서 3월부터 12월까지에 대부분 어획되고 있으며, 새우류의 다음 어획물의 대종으로선 민어를 들게 되는 데 …’라고 쓰고 있다. 그 새우가 잡히는 지역도 지금의 옹진군 북도나 덕적도, 중구 용유도, 강화군 서도면 연안이라고 해 강화 석모도 서쪽 지역에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는 지역에서 새우잡이가 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서도면 동쪽인 선수어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나마 강화 서도면 연안은 후순위로 밀려 맨 뒤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우는 강화의 주력 수산물로 등극했다. 강화문화원이 1976년 발행한 『강화사』에서는 “현재 본군(강화군) 어업의 수위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연간 어획량의 3할을 차지하고 있는 새우잡이를 들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새우가 강화군 전체 어획량의 30%나 차지했다는 것이다.전국 추젓의 대부분은 강화 쪽에서 잡힌다고 한다. 선수포구를 포함한 강화 일원에서 잡히는 추젓이 전국의 70~80%는 된다고 한다.물때가 맞을 경우, 초지대교를 지나다보면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염하 한가운데에 배 여러 척이 가만히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양팔을 벌리고 있는 듯 ‘길’을 양쪽으로 늘이고 있다. 바로 꽁당배의 새우잡이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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