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과 공동체 이야기
2009-01
중 용(中庸)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겨울의 고요함을 느껴보았는가? 보통의 아름다움을 맛보았는가? 몇 해 전에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오른 나무 메타스콰이어로 줄지어있는 장태산에서의 고요함을 잊을 수가 없다. 산울은 한얀 눈으로 덮여있는데, 그 가운데 여기저기에 곧게 곧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그 나무의 아름다움은 흰 눈 쌓인 산속이라서 적막강산이 아니라, 새하얀 숲 속에서의 검은 아름드리의 돋보임이었다. 그 속에서의 이른 아침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정적감이 가져다주는 고요함, 하얀 함 속에서의 곳곳의 검은 줄기의 치솟음은 회색(灰色)이 아닌 별개의 하얀 한 것과 검은 것이 가져다주는 조화속의 겨울날의 상쾌함이었다. 겨울의 고요한 청정(淸靜)함은 차가운 바람과 몸의 수축이 가져다주는, 바로 느슨함이 아닌 옷을 여미는 긴장감을 초래할 수 있으니 연초(年初)에 갖는 다짐과 맞물린다.
벌써 지나간 해의 시월 말경의 가을에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의 기념관인 추양 하우스에서 이웃교회 동료목사님으로부터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받았다. 광범위한 중용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不偏不倚 無過不及 而平常之理(불편불기 무과불급 이평상지리)란다. 그것은 어느 곳에 치우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느 곳에 기대지 않으며, 지나침도 그렇다고 모자라서 미치지 못함도 없는, 평상의 보통 됨의 이치라고 말씀하신다. 몇 해 전에 그 장태산 속에서 보았던 한얀 설원(雪原) 속에서 곧게 하늘로 뻗어 올라 줄지어서 서있던 그 검은 나무들, 기대거나 지나치거나 미침도 없는 흰 평원(平原) 속에서의 검은 수직(守直)의 조화였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평(平)과 직(直)의 조화, 흰 것과 검은 것의 잘 어울림, 중용(中庸)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옛날에 놀이로 행하던 널뛰기의 널빤지를 바치어주던 축이 한가운데에 있어 어느 곳으로 치우침을 가져다 주어서서는 아니 되었다. 성서는 어느 곳으로 치우치는 것을 편벽(偏僻)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편견을 없이하여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디모데전서 5:21). 그것을 또 다른 곳에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다(신명기 5:32). 중용의 말로는 무과불급(無過不及)과 비슷한,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있다. 성서도 이를 말하고 있다. 지나침도 그렇다고 모자라서 미치지 못함도 없는,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적절하다는 말이나, 적당하다는 말이 얼마나 와 닫는 말이던가?
나는 1980년대 중후반에 신학교를 다녔는데, 시대 상황의 혼란스러움이 계속되었다. 우리를 학교에만 머물러있게 하지 않았다. 사회상황 속으로 뛰어들게 하였다. 그런 파생물로 어느 사람들은 성서를 사회 민중(民衆)의 해방적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도시 빈민의 계도(啓導)에 힘쓰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교회적으로는 도시산업선교라고 불렀다. 나의 스승님이 되신 목사님은 동안의 얼굴에 유순한 성품의 어른이심에도 불구하고 와일드한 이 일에 앞장 스셨다. 몸소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도시빈민선교에 몸담고 일하셨다. 나는 그 일을 돕기 위하여 대전시 목동(牧洞)의 방송국 뒷마을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공부방, 탁아소, 어머니한글교실, 무료진료 등의 일 가운데 한두 부분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밖으로는 빈민선교와 함께 교회 안에서는 전통적인 구령(救靈)에 힘쓰시는 신앙을 추구하셨다. 나도 그 양립의 지향을 팔구년 동안 배웠다. 그래서 그 이후에 십 삼사년이 지났는데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는 소외된 곳의 지향점을 장애인과 함께하는 곳에 삶을 투여해 가고 있다. 이 분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여러분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3-공동번역성서)라고 말씀 드리고 있다. 나 역시 하나님 안에서 마음의 갈증을 많이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어지러운 그때에는 한참 동안 개인구원이냐? 아니면 사회구원이냐?의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라는 사람이 비로소 철이 드는 것은 사회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좌로나, 개별적인 개개인의 구성원들을 바라보는 우로 치우치지 않고 좌우를 서로 아우르는 삶을 살 때에 철든 삶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논어(論語)에 和而不同 同而不和(화이부동 동이불화)라는 말이 있다. 소인배들의 사귐은 이해가 같다면 의리를 굽혀서까지 ‘같게 되기’를 구하나, 군자들의 사귐은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만 그렇다고 의리를 굽혀서까지 모든 견해에 ‘같게 되기’를 구하지는 않는다. 의리를 잃지 않으면서 조화로움에 애쓰려고 했던 삶, 쉽지는 않지만 힘써볼 노릇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이 말처럼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병행, 양립, 조화, 중용, 통합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나와 다르면 배척하기 일쑤인 우리들, 이것은 나라를 압도해간, 소위 이야기하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산물로 여겨지며, 그들은 우매한 이들에게 지금껏 그렇게 가르쳐왔다. 여기에 종교도 배타성(排他性)을 지닌 채 이러한 일에 일조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예전에는 다음의 말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수와 그리스도<기독(基督)>가 서로 싸운다”는 말이다. 어떻게 말하면 흰 것과 검은 것을 뒤섞어놓은 회색분자가 필요한 때이다. 뚜렷하지 않은 것이 때로는 사람을 이어준다. 획일이 아닌 여러 다양성이 요구된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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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08년 12월 23일에 대덕교회(이중삼 목사님)에서 공동체 식구들에게 겨울 방한복을 성탄절 선물로 전달하여 주셨습니다.
* 2008년 12월 25일 성탄절 오후에 대전도원교회에서(정길채 목사님) 함께 하셔서 아동부가 축하 행사를 새터공동체에서 가졌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신평교회.충전교회.이원교회.정무래.최영애.라홍채.박종만.진영택.최성재.김정화.수영교회.추부제일교회.김기홍.채윤기(박현실).예원교회(최동주).양오석.최선희.이광승(김미경).금산경찰서(5인).대전충남지방통계청.진명구.반석교회(박화태외7인).향림원푸드뱅크.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지방교회여전도회(황인칠외11인).금성교회.세광교회.임장혁.대전성남교회.대덕교회.신건태.살림교회(박상용외8인).대전성남교회중등부(김영균외31인).장진성.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4인).대전성남교회중등부(김영균외11인).지방교회(황인칠.김정순).주식회사EG(이광형).오산교회(이영옥외12인).대전노회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