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수의 자기 선언(7)
본문: 요 15:1-8 (11월26일 설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성전 문 위에 새겨 있는 포도나무 문양을 보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본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포도나무였습니다. 시편 80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이방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여기셨던 하나님, 그래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포도나무를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나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나무로는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집을 지을 목재로 쓸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땔감으로 쓰기에도 부적합니다. 왜냐하면, 땔감이 되려면 불이 붙었을 때 오래 가야 하는데 포도나무는 곧 사그러들기 때문입니다.
가구가 될 수도 없고, 목재가 될 수도 없는 이 포도나무, 그런데 왜 존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포도나무라고 하셨을 때, 그 분께서 원하셨던 것은 오직 '열매'인 줄 믿습니다. 포도나무의 사명은 열매입니다. 집을 지을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가구가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고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들을 가리켜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기에 가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작 있어야 할 열매는 없고 가지와 잎만 무성하다면 주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도 호세아 10장 1절에서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작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없고 원하시지 않는 주변적인 것들만 풍성하다면 큰 문제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달력을 보시면 첫 머리에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주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묻기를, 왜 주일은 빨간색이냐고 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머리나쁜사람 잊어버리지 말라고 눈에 띄게 해놓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안식후 첫 날,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이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날인 줄 믿습니다. 그 날을 빨간색으로 칠했든 파란색으로 칠했든 달력의 색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그 주일을 위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존재하는 줄 믿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는 세상에 거하며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우리의 수고는 주일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 가치관이 달라 일요일이 주말이자 휴일이기에 그 날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육체의 쉼만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성도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기에 단순히 육체의 쉼만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삶의 스케줄을 주일을 중심으로 하여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일 때문에 예배할 수 없고, 봉사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다면 잘못된 일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에 가르치는 사역을 대통령이라는 일 때문에 포기하지 않은 분으로 유명합니다.
포도나무인 우리의 사명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맺는 일인데, 열매는 없고 무성한 가지와 잎만 있다면, 중심적인 사역에의 헌신은 없고 주변적인 것만 화려하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장 2절에서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랬더니 들 포도 열매만 맺었다"고 탄식하는 주님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속적인 포도나무를 거부하십니다. 부실한 포도나무도 거부하십니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이스라엘 갈릴리의 가나에 가면, 기념 교회 옆에 넓은 정원을 가진 집을 볼 수 있는 데, 포도나무 한 그루가 온 정원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웠습니다. 한 그루가 저렇게 번성할 수 있다니...
아버님께서 강화군 난정리에서 목회를 하실 때 일입니다. 교회 근처 한 가정에 가지가 온 뒤뜰안을 뒤덮고 있는 무성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농부인 그 집 주인이 아버님에게 말씀하기를 "이게 가지만 무성하지 열매는 꼭 산포도같이 시원치 않다"며 애로사항을 애기했을 때 아버님께서 "그러면 내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해드릴까요? 아마 두어 상자는 딸 수 있을텐데.."하시자 "정말입니까?"하며 반색하던일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약속을 받아내신 아버님께서 하루는 전지 가위를 가지고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뒤에서 물꾸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농부는 아버님께서 가지를 마구 잘라내시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 잘라버리면 포도는 어디서 맺습니까?" 그러나 아버님은 들은 척도 안하고 몇 가지만 남겨놓고는 다 잘라버리셨어요. 포도나무 옆에 1m쯤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잔뜩 넣게하신 후 걱정스런 모습의 농부를 뒤로한 채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봄이 지나면서 새 순이 돋기 시작하고, 수 많은 가지에 포도송이들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합니다. 아버님께서 그 농부에게 이런 농담을 하셨습니다. "적어도 몇 상자는 딸 것 같은데 그 중 한 상자는 내게 보내주세요" "아, 물론이지요. 몇 상자라니요. 우리는 그동안 한 상자는 커녕, 포도다운 포도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한 상자가 뭡니까? 다도 드리지요" 그 해 가을 몇 상자가 넘는 포도를 땄지만 한 상자도 목사님게 보내지 않은 남편의 처사를 원망하며 부인되는 집사님이 안타까워합니다. "그 양반 욕심이 웬만해야죠..."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지를 깨끗케 한다고는 말은 전지한다는 말입니다. 농부의 입장에서 볼 때,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지와 입만 무성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불필요한 곳에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쏟아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지난 한 해를 사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인 포도나무로서 열매를 맺는 일보다는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않았습니까? 그저 바쁘다며 한 해를 보내왔지만 정작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쓰신 시간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열매를 위하여 깨끗게 하자" 전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제하여 버릴것은 제하며, 끊어야 할것은 과감하게 끊는 결단을 요청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장 실속없는 사람이 누구예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바쁘기는 한데 가져오는 것은 없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바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것이 중요해요. 가지가 무성하고 잎이 무성하면 뭐합니까? 열매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열매를 위하여 가지를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좋은 포도 맺기를 원하셨지만 들포도만 맺었던 그들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좀 더 강조를 하셔서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라"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주님은 또 다시 실패하지 않으시겠다는 각오가 담겨져 있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이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의 사명이지만 그들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기에 주님께서 손수 제대로 된 열매를 맺어 본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열매인 "사랑"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우리를 향한 참 사랑을 실천하신 줄로 믿습니다. 참 포도나무의 열매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절에 보면" 과실을 맺는다"는 표현과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으로 점진적으로 과실을 맺는 나무는 더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1절에서 "내 아버지는 농부요, 자신은 그 농부의 인도함을 받는 포도나무"임을 말씀 하시면서 자신이 얼마나 그 분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농부 없는 나무도, 나무 없는 가지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들은 언제나 나와의 교제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곧 주님과의 교제의 결과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열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해볼까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왜 이렇게 벙어리가 많아요. 예수 믿은 지 10년이 넘어도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안나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곗돈 날짜만 외우지 말고 그런 것 좀 외워봐요....
신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 그 열매 중에서도 첫째인 사랑의 열매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포도나무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 주님께서는 12절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의 열매를 강조하셨어요. 모든 성령의 열매가 중요합니다만 주님은 더욱 사랑의 열매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로 충만하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러나 만일 사랑 대신에 빈정됨과 불친절이 우리에게 있다면, 희락 대신에 우리에게 우울증만 있다면, 오래 참음 대신에 조바심만 가득하다면, 충성 대신에 게으름만 있고, 절제 대신에 방종만 있다면 주님은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매는 또한 봉사의 결과로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존재하되, 가난한 자들만을 위해서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처럼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이들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가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해야 하고, 그런 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면 "역시 우리 목사님은 옳은 말씀만 하신다"고 좋아하지만 이것은 총론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것니다. 보편적이란 말은, 부담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페이지를 넘겨 각론으로 들어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특별헌금을 하여 사회복지센타를 지어 지역주민들을 사랑의 품으로 않읍시다." 이러면 또 입장이 달라지지요.
그래서 교회는 추상적 사랑만 있지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고 자주 비판을 받지 않습니까? 실천적 삶이 없어서 교회가 사회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샬롬 복지센타"를 역곡 일대의 주민들을 위해 짓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품에 안자는 거예요. 그럴려면 헌금도 하셔야지요. 그럴려면 희생도 하셔야지요. 그럴려면 자원봉사도 해야합니다.
우리의 눈물겨운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공동체가 선교와 봉사에서 구체성을 띠자고 하는 것이 밀레니엄 사역의 두 기둥, 즉 필리핀에서의 P.P.M 선교센타의 건립과 역곡지역을 위한 샬롬 복지센타의 건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매는 봉사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 중에서와 같이 다른 이방인 중에서도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교회 안에서만 열매를 맺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 밖에서도 열매를 맺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은교회 공동체처럼 예수 믿는 사람만 있는, 정말 선한 마음만 가져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사실 일주일 동안에 우리의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짧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사는 시간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 성도의 특징들을 지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40년을 애굽의 궁궐 안에서 살았으면서도 그 어머니 요게벳의 품에서 살았던 그 짧은 시간들이 모세의 삶의 특징으로 나타났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보면 주일 아침에 와서 공부하는 시간은 길어야 2시간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과 수십 시간씩, 그리고 또 과외공부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수백 시간이 되겠지만, 그 많은 생활의 공간 속에서도 그 아이의 특징은 예수님의 자녀라는 특징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많은 시간이 사람을 더 변화시키는데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 한시간을 주님의 공동체에 있었어도, 대부분의 생활을 사회 속에서 하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이어야 하고 소금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서와 같이 모든 이방인 중에서도 너희에게 열매가 있기를 원하노라"
호세아의 탄식처럼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랬지만 들포도만 맺은, 무성한 잎만 가득한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사명을 위해 흘린 눈물의 기도가 몇 번 있었나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충성했던 분들에게는 기쁨의 단이 넉넉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열매를 위해서 필요한 나무, 그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나와 붙어있으라" 주님과 밀착된, 그래서 언제나 그분과 동행하면서 좋은 열매 맺으시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의 자기선언 일곱 가지를 통해 시간마다 깨닫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손수 본을 보여주셨고, 이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줄 믿고 풍성한 열매들을 맺기 에 부족함이 없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7 예수의 자기 선언(6)
본문: 요 14:1-7 (11월19일 설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 "내가 너희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척 염려하고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은 나를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지금은 왜 따라갈 수 없느냐면서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따라가겠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장면이 13장 후반의 내용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4장 1절의 말씀은 그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하지만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베드로의 속마음을 읽으셨지만 그러나 그의 연약한 부분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무서울 때는 죽으려고 결심한 때입니다. 우리가 권력기관을 두려워하거나 심지어는 미끄러지면서 "아휴, 죽을뻔 했네!"라는 외마디 외침도 결국은 죽음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이 분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서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의 억울함을 목숨을 끊음으로써 결백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고 선언함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물론 주님도 이 베드로의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아시고 인정하셨습니다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가지를 더 알고 계셨습니다. 즉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한계, 육신의 한계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그 자리에서 "주님은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가 그 증인입니다"라는 증인이 필요했을 때, 베드로는 증인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군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서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은 했는데, 실상 죽음의 문제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는 그것이 두려워 부인을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우리는 이해합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의 육신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서 이렇게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네가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앞으로 삶의 현장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제자답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복되는 실패를 계속 용인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그 실패가 사탄의 올무가 되어 너를 약화시키고 너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요청됩니다.
21세기 영성의 탁월한 지도자인 '헨리 나우웬'은 "The Living Reminder"라는 책에서 적어도 제자라면 세 가지 부분에서 예수님이 생각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치유하심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두 번째는 '주님의 붙드심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13장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이란 수평적인 관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두 가지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데 하나는 수직적인 사랑의 관계요, 또 하나는 수평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땅의 크리스챤 1,000만을 수직적인 사랑 관계로만 생각한다면 모두 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기로 고백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사실 주님과의 수직적 사랑의 관계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평적인 사랑 즉 이웃사랑에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입니다." 먼저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 얼굴을 한번 쳐다보세요. "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 사랑할 수 있는가?" 즐겁다가도 그 사람만 보면 즐거움이 싹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는 얼마나 있습니까? "난 누구는 싫어. 난 누구랑 안맞아" 그래서 성도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이웃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 이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사랑하는 일, 나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이들을 품에 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제자라고 말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제자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을 바라볼 때 주님의 사랑이 생각나고, 주님의 인도하심이 생각나고, 주님의 위로하심이 생각나는 그러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면 잘 생긴 사람들을 뽑습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이 분명한 사람들을 찾아내지만, 저는 언제보아도 '미스코리아 진'이라고 뽑아놓은 사람이 예쁘다고 생각 되진 않아요. 그 말은 그 사람의 외적인 신체 구조는 남보다 뛰어나지만 그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예쁨'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얼굴의 이미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만 사실 얼굴 전체가 마음의 창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얼굴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나우웬'의 '예수님이 생각나는 사람이란, 곧 거듭남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에게서 만이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에서 도마와 빌립이 묻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가시는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한번 보여줄 수는 없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천국은 존재하지 않아. 단지 내 마음에 있을 뿐이야"
어느 신학자가 독일에 공부하러 갔다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데 논문을 지도하는 교수가 논문 내용을 보더니 안타까운 듯이 질문을 하나 합니다. "이보게, 자네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복음주의 신학으로 자라온 그는 굉장히 당황을 했어요. "물론이지요. 저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 근데 말이야, 사실 하나님은 없네..." "그러면 우리가 왜 조직신학의 가장 중심인 이 신론에 대해 배우고 또 가르치시나요?" "그건 그냥 마음에 있는, 관념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야..."
그는 그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왔어요. 그러나 이제 그 문제는 외국 신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일부 신학교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유념해야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죄가 없고,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고, 저주가 없고, 어두움이 없으며, 그곳은 주님이 계시는 곳이며,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거할 곳이라"
계시록에 설명된 하나님 나라를 보면 그곳이 장소임과 동시에 상태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장소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돼요. 적어도 이 평안의교회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고백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할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의 죽음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나사로는 가난하게 살았고 부족했어요. 반면에 그 옆집에 사는 부자는 늘 넉넉하여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에 인도했다고 했어요. 아마도 천사들이 해야 할 마지막 사역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나사로는 거지가 아닙니다.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임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땅에 사는 것보다 더 귀하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춰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이라면 이 땅에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주님께서 오라고 부르실 때 기쁨으로 그의 나라에 임하는 준비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기다립니다. 그 만남의 중요한 과정이 죽음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갑자기 다가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라 준비되고 예비된 일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는 우리 집사님 가정에 초상이 났어요. 건강하신 분이 병원에서 건강 검진 받으시기 위해 위 내시경 검사를 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 내시경 검사를 합니까? 명백한 의사의 실수임을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어요. 그 분의 형제들을 만나보니까 참 놀라웠어요. 오토바이에 치어 넘어져도 수백만원을 뜯어내려는 그런 사회적인 풍조 속에 의사가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됐습니다"라고 사건을 종결시키는 그 온유와 믿음과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 너무 아름다워보였습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먼저 손해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 말씀 속에는 "너희가 먼저 희생하라"는 권고가 담겨져 있는 거예요. 성숙은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주님의 재림을 믿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 만날 기약을 하면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설레이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0세기 후기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하는 사조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길이 많다는 것이지요. 이 길로 가도 괜찮고, 저 길로 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아무곳으로 가도 결국 꼭대기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어도, 이슬람을 믿어도 결국은 하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다원주의에 속해 있는 신학자들은 전도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더구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절대로 전도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심지어는 쓸데없는 일들 한다고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여러 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 길, 한 길인줄 믿습니다. 성경이 많은 책 중의 한 책이 아니라 바로 그 책인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유일한 길인 줄 믿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어떤 이름도 이 세상에 주신 적이 없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차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와 같다. 그것은 생명이 있고 없음의 차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 요즘 세계를 보면 옛 것에 대한 가르침은 있어도 새 것에 대한 배움이 없는 시대입니다. 학교라고 하는 'School'은 사실 고대 헬라어의 '스콜레' 즉 '여가'라는 말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가를 잘 선용하는 사람이 학교를 잘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는 어떻습니까? 학생들의 여가를 죽이는 곳이 학교 아닙니까? 끊임없이 학습을 위한 학습만 규칙적으로 반복시키는 학교, 삶을 위한 진정한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현실 속에 우리의 자녀들은 그 과정을 반복해 오고 있습니다.
배움이란 스스로 배우면서 그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확인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움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움은 끊임이 없는 거예요. 졸업식장에 가면 "졸업은 인생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언제나 듣는 이 교훈은 참으로 옳은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시면서 우리의 생명을 온전케 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셔서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 둘째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주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영벌에 들어간다고 요한복음은 선언합니다. "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말은 곧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이 놀라운 주님의 말씀 속에 여러분의 삶들이 새로워지고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제자의 삶으로서 언제나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이 땅에서 온전히 제자의 삶을 표현하며 주를 사랑함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예수의 자기 선언(5)
본문: 요 11:21-27 (11월12일 설교)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좋은 관계를 갖고 사는 것보다 더 축복된 일은 없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아주 원만한 관계를 가졌던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관계가 아주 좋아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라든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베다니'라는 동네의 나사로 가정을 주님은 자주 들르셨습니다. 자주 들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편한 관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는 말씀처럼 주님은 참으로 쉴만한 곳이 없으셨지만, 때때로 나사로의 가정에 들러 그들과의 아름다운 대화로 기쁨을 누리셨을 줄로 우리는 짐작합니다. 편안함이 있는 가정, 따뜻함이 넘치는 가정이 나사로의 가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가정은 말씀으로 무장된 가정인 것을 27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로서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고 사상을 표현합니다. 말은 대단히 중요한 그 사람의 인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보면서, 이것이 예사롭지 않은 신학적 기초가 단단한 그런 고백이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평상시에 그의 가정이 말씀으로 무장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막내였던 마리아는 주님의 장사를 위해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음으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여성이었습니다.
헌신이 있는 가정, 말씀이 충만한 가정, 그리고 편안하게 주님을 쉬게 할 수 있는 따뜻함이 있는 나사로 가정의 이 특징들이 저는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가정의 특징이 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그런 나사로의 가정에 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그 집에 제일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의 문제가 다가오면 부부간에도, 부자간에도, 그리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지금 오라비 나사로의 죽을 병으로 인해 두 여동생들은 굉장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그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제일 먼저 주님을 생각해내는 쉽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서 주님 계신 곳으로 보냅니다. 주님을 찾으면 빨리 오시도록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다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셨고 그들이 보낸 사람을 통해서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주님은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고 나사로의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 실망을 하거나 혹은 시험에 든다는 말을 합니다. 주로 신앙적인 기준에 의해서 옳고 그름에 의한 시험이 아니라 내가 기대한 것과 맞지 않은 데에서 오는 인간적 감정의 섭섭함을 주로 한국의 성도들은 "시험에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를 떠났습니다. 목회자에게 휴가라고 하는 말은 사실 90년대 이전에는 거의 쓰기 어려웠습니다. 저도 지난 여름에 분주한 일로 휴가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주간에 며칠을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휴가를 떠나는 목사님, 온 가족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저 수원쯤 갔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아무개 성도가 운명하셨습니다" "나 지금 휴가 중이니까 부목사님이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리고 장례식을 목사님이 주재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국 교회 성도 대부분은 "그럴 수 있느냐?"라며 실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역시 한국 사람이었어요. 휴가를 떠나다가 전화를 받고 나서 온 가족이 실망은 했지만 "우리의 큰 일이니 돌아가자" 결국 초상을 치르는 일로 휴가를 대신했다가 술회하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영국에 있는 1년동안 단 한번도 10불만 주면 하루종일 칠 수 있는 골프를 치지 않은 것을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운동, 그것보다 더 저렴하고 좋은 기회가 없는데 저 사람은 왜 그것을 안할까?"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답답하고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한국 사람이구나" 왜냐하면 내가 목회해야 할 필드는 한국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나사로 가정의 위기를 들으셨을 때 무려 이틀이나 더 머무시고 난 후에 그곳을 찾아가셨을 때, 두 여인이 대조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집에서 맞았습니다. 그 말은 마음 속에 심각한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집과 그렇게 좋은 관계를 가지고 계셨던 주님이 큰 위기를 맞았을 때 이틀씩이나 더 계시다가 오실 수 있습니까?"라는 마리아의 서운함이 그대로 배어져있어요.
반면에, 언니 마르다는 나아가서 맞이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면 마르다 역시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속에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매월 첫 주에 떡과 잔을 나누는 성만찬은 행동화된 말씀에의 참여입니다.
우리 내면의 생각은 행동이라는 '가시적 방법'으로 표현됩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맞으러 나아갔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이 신앙고백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이틀 전에만 서둘러 오셨다면 오라비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텐데..." 라며 마르다가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 라고 아직도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은 "네 오라비가 살리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랬더니 마르다가 얼른 그 말을 받아서 "물론이지요. 마지막 날에는 부활할 줄 믿습니다"라며 신앙고백을 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말을 정정시킵니다. "마지막이 아니고 지금이야..." 우리 모든 성도들은 마지막 때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그 축복된 삶이 믿는 자의 소망이요 믿음이지만, 오늘의 말씀은 바로 지금이라는데 놀라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틀 후에 오셨을까? 이 부분은 많은 이들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빨리 오시지 않았다는, 자기의 기대에 맞지않았다는 그 이유 만으로도 충분히 실망하고 시험에 드는 그런 얕은 신앙의 모습들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마르다의 보습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틀 후에 오신 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사로가 죽을 병에 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주님이 먼저 하신 말씀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제자들도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깊이있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벼운 신앙인의 모습이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주님의 자기선언 다섯 번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신 후에 마르다에게 다시 묻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지금도 수없이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해 이 말씀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철저한 신학적 정의까지 겯들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과 맥을 같이 하는 수준 높은 고백입니다.
사실, 마르다가 이 정도의 신학적 기반을 가진 고백을 하기까지에는 주님과의 많은 영적 교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가 말씀할 때 여러분이 "아멘"하시는 것은 제가 선포한 말씀에 대해 "제가 그렇게 믿습니다. 그 고백은 바로 제 것입니다"라는 동의이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동참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는 "아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예비군 훈련장에서 가끔씩 종교(정신)교육을 시킬때면, 천 여명이 넘는 예비군들이 강당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지만 그들은 말씀을 들어도 "아멘"하지 않습니다. 개중에 크리스챤들이 간혹 "아멘"하곤 하지만 그러한 자리에서 신앙고백적 표현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예비군 훈련장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자리는 말씀의 자리, 아멘"이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거예요. "아멘"이 없는 자리는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네가 그것을 믿느냐?"고 했을 때 "내가 믿나이다" 그것이 "아멘"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주님이야 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이십니다"라는 대답을 듣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필요할 때 왜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사실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 때는 누구보다도 신앙적인 표현에 너그러우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왜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물론 베드로는 곧 통곡의 회개가 있었지만,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나의 메시야라고 고백하지 못한 한이 평생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그 시간, 어려움과 불편함을 감수할지라도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줄 믿습니다.
결혼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해 먹던 밥 안해 먹고, 빨래 안해도 되고, 신문도 집어다 주고, 커피도 아내가 타주는, 그래서 모든 것이 싱글 때보다 편리해지는 '안락함'을 위함이 아니듯이, 결혼이란 오히려 상대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사랑의 행동일 때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결혼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십자가상에서 확인되었고 더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심은 사랑의 최고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0여명의 희생자를 낸 그리스의 여객선 침몰 사고가 지난달 26일에 있었습니다. 승객과 승무원 500여명을 태우고 에게해를 운행 중이던 '익스프레스 사미나' 호는 암초와 충돌함으로 인해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갑판 위에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구명조끼가 부족해 어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입고 있는 것을 빼앗아 자기가 입고 바다에 뛰어내리기도 했었다고 생존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고 당시 홀 안에서는 유럽 축구 결승전이 텔레비젼으로 방영되고 있었는데 승객들 뿐만 아니라 승무원들도 모두 브리지를 비워둔 채 중계를 보고 있어 같이 중계를 보고 있던 한 승객 부부가 남편에게 이렇게 농담을 했답니다. "여보, 모두가 축구 경기를 보고 있으면 이 배는 누가 운행하지요?" 그 염려가 사실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빛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했다"고 하셨지만, 어두움을 밝혀야 할 사명을 가진 우리는 마르다처럼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주님의 놀라운 선언에 마르다가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온전히 확신하며 영접했던 것처럼, 오늘 이 이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같은 믿음으로 고백하기 하옵소서.
부활 신앙을 땅끝까지 증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 예수의 자기 선언(4)
본문: 요 10:11-14 (11월5일 설교)
세계 역사를 보면 영웅 호걸이라고 불리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몽고의 징기스칸, 헬라의 알렉산더, 근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나폴레옹도 모두 영웅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라크의 후세인 왕이나 유고의 밀로세비치 대통령도 그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시대의 몇몇 왕들이나 근래의 고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들이 영웅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대가로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사상의 차이나 종교의 차이 때문에 수많은 목숨을 전쟁의 대가로 앗아가기도 합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나 사라센 전쟁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조선시대 왕조를 여러분들은 배웠을 것입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아마 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그 정도는 다 외웠을 것입니다. 그 조선시대의 왕들 중에 쓸만한 사람들이 몇이나 됩니까?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 대부분의 삶들을 보냈습니다.
세계의 이 많은 인물들을 보면서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그리고 백성들의 삶의 아픈 부분과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준 좋은 왕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좋은 목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영적으로 혼돈 상태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하거나 혹은 혼합 종교 사상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헬라의 사람들을 보고 종교성이 많다고 말했지만 아마 동북아시아의 3개국을 알았다면 종교성이 극히 많은 나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곳곳에 우상과 샤마니즘이 자리잡고 있고 더구나 일본은 800만 가지의 우상이 존재하는 나라라는 표현까지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서로 혼합되어져서 공존하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가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천황을 섬기는 신사 안에 불교의 법당이 있다든지, 혹은 불교의 법당 절 안에 샤마니즘적인 요소가 있다든지, 예를 들면 짚신 신을 섬기는 절이 있는데 그 짚신의 크기가 수 m에 달합니다. 큰 짚신을 만들어 매달아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혼합되어져 있지만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전의 구약시대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바알과 아세라, 혹은 수많은 이방 종교가 혼합되어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종교의 혼합을 경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편 80편에 보면 "요셉을 양떼와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라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는 주님께서 당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선한 목자의 본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선한 목자같은 인도자를 모든 사람들이 갈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고 선한 목자가 아닌 삯군 목자요, 이리가 오면 도망치는 거짓 목자였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여기서 '선한' 이란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목자라"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한 목자라고 할 때에 그 말 속에 주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온유하심이 강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분으로서의 모습, 이기적이지 않고 희생하는 주님의 모습이 그 표현 속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누가 선한 목자가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주님의 자기 선언을 들으면서 이리와 수많은 맹수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울타리의 출입구를 자기 스스로 문이 되어 양떼들을 보호하는 목자의 모습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맹수의 공격에 제일 먼저 노출되어 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이라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문은 반드시 진리의 문이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에서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길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그 문을 통하지 아니한 어떤 것도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 줄 믿습니다. 선한 목자는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목자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결코 진리의 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해 타산을 따져 보아서 도움이 될 때는 목자 노릇을 하지만, 손해 보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 삯군 목자들이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이 거짓 목자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물질적, 정신적, 신앙적 피해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시에도 거짓 목자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면 이제 우리는 거짓 목자가 있음을 한탄하기 보다는, 거짓 목자와 참 목자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러한 능력을 우리가 지녀야 할 것입니다.
터어키에 가면 유명한 '터키석'이라는 보석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이스탄불의'그랜드 바자르' 보석상들은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대부분 '터키석'을 사 가지고 옵니다. 원산지이니까 국내보다는 쌀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오는 대부분의 사람들...
보석을 취급하는 한 장로님이 제게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성도들이 터어키에 가게 되면 제발 그것 좀 사오지 말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대부분이 가짜들을 사 가지고 와서 아들 결혼 반지해달라, 며느리감 목걸이 해달라 부탁하는데 참 안타깝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분위기 따라서 가짜를 시중보다 비싼 가격에 사 온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의 현장에서도 거짓 목자가 많다고 한탄하기 보다는 참 목자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게 분별의 영을 주옵소서"
두 번째, 누가 선한 목자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양의 음성을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수많은 거짓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수많은 이단 사상들이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새로운 도시에 복음을 증거한뒤 가정 교회들을 세우고 떠나면 어느새 이단 사상의 선지자들이 들어와 사도 바울을 거짓 선지자라고 매도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더구나 주님의 부활도 영의 부활만을 강조하고 육의 부활은 부정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 증인과 비슷한 교리를 가졌습니다.
또한 천사를 숭배합니다. 사실 우리가 부활하여 주의 나라에 거하면, 천사는 부리는 영인데 그 천사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금욕주의가 성행합니다. 주의 성전된 몸을 학대하고 결혼을 경원시 하고 인간의 공로와 의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절제된 삶은 중요하지만 금욕주의는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도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보수주의 신학은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사회적인 구원을 특히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아침 주보에 우리교회 특수선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상황이 담겨진 전도지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10명에서 20명씩 한 팀을 이룬 그 특수 선교회는 그 자체가 사회적 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선교적 공동체입니다만,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일대일로 다가가 주님을 전하여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다면 그것은 개인 구원을 이루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회라면 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의 사역을 함께 품을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한 영혼 영혼을 다가가셔서 치료하시고 상처를 꿰매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0장에 보면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많은 양 무리를 인도하는 그러한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어린양을, 부족하고 상처받은 양들을 당신의 팔로 안아 품에 안으시는, 그래서 우리가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에 어린양을 품에 안는 주님의 그 모습을 떠올림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고 말씀으로 깨닫는 시간이 필요한가 하면, 한 가정 한 가정을 찾아가 심방하는 일도 그들의 영육간의 부족한 부분들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는 시간이기에 참으로 필요한 줄 믿습니다.
양떼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목자의 소리는 공허한 소리입니다. 또 목자의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떼들도 그 우리에 들어갈 수 없는 자격 없는 양떼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양떼와 다른 양떼를 구별하여 우리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분별되어야 합니다. 양떼들은 목자를 분별해야 하고 목자는 양떼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목회는 이 두 양자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좋은 목자를 만나야 하고 또 목자는 좋은 양떼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목자와 좋은 양의 관계를 위해 우리는 주님 오실 때 까지 지혜롭게 분별하면서 살아야 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선한 목자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목자라면 '양을 위해 희생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이리가 달려들 때 참 목자는 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지키지만,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기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는 어려움을 서로 겪어봐야 합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교회를 떠나는 자는 좋은 양이 아니겠지요. 교회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떠나는 목자도 좋은 목자는 아니겠지요.
어느 교회 성도님들이 고백합니다. 교회가 건축을 시작을 해서 막 건축의 열기가 더해가고 있는데 담임목사님이 큰 교회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건축 중이었지만 섬기던 교회를 떠나 청빙한 교회로 갔어요. 그 일이 20년이 지났는데도 성도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진정으로 성도와 함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목자가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강조하셨고 그리고 주님은 말씀 하신 그대로 사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이 참 목자인 줄 압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마지못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기도하신 후, 자기를 잡으러 오는 가룟 유다와 로마 군사들 앞으로 스스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찾는 그들에게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잠언 27장 23절에 보면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교회는 저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주의 종들과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여러 모양으로 주의 일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교사로, 성가대원로, 선교회의 임원으로 많은 부분에서 섬기는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섬겨야 할 대상을 위해 부지런히, 정말 부지런히 맡은 양떼들을 살피십니까? 또한 우리의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지요. 목회자도 세상 일에 너무 바쁘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목사님께 권면을 했다지요. "목사님, 교회 밖의 일은 좀 절제하시지요" 무슨 이사장, 무슨 회장 등등 , 명함을 앞 뒤로 새겨도 모자랄 지경이었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결심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교회 밖의 일을 꼭 해야 한다면, 선교에 관계된 일만
하자" 여러분들은 어느 부분에 시간을 많이 쓰십니까? 그 일 때문에 여러분들이 꼭 해야 할 주의 일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지는 않습니가? 하나님의 일은 자투리 시간을 써서 할 만큼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저는 이 평안의교회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그 사명을 위해서 온 마음과 온 시간과 온 물질을 다 투자해야 합니다.
주님은 생명을 다해 양떼를 사랑하신줄 믿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좋은 양떼가 되어 오늘도 그와 함께 들며 나며 꼴을 먹고 풍성한 양식으로 우리가 배부를 뿐 아니라 그 넘치는 은혜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생명을 다하신 좋은 목자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가 좋은 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자와 양,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예수의 자기 선언(3)
본문: 요 10:7-9 (10월29일 설교)
한 사람이 양떼들을 이끌고 가는 목자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자가 양떼들을 자기의 울타리로 인도해 간 이후, 그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밤새도록 양떼들을 이 우리 안에 둡니까?" "그렇습니다" "이 주위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요" "물론 맞습니다" "그 짐승들이 양떼들을 잡아먹으려고 해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해치려고 듭니다" "제가 보니까 이 울타리에는 출입구만 있지 그것을 막는 문이 없는 것 같은데요. 사나운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그때, 목자는 말없이 그 출입구에 가서 드러누운 후에 대답했습니다.
"내가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자기 선언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문'이라는 비유의 표현이 성경에 많이 있지만 예수께서 직접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신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주님께서 문이라고 했을 때 그 문의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가정마다 문이 있습니다. 단독 주택이라면 큰 대문이 있어서 양쪽으로 열게 되어있습니다. 문을 닫았을 경우에는 쪽문이 있어서 그 쪽문을 열고 드나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편지함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밖을 내다 보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편지꽂이를 통해서 밖을 확인하곤 했었고, 보통땐 쪽문을 열어두어 집안 식구들이 드나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귀중한 손님이 올 때는 대문의 한쪽을 열어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출입할 수 있도록 했고,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문 전체를 활짝 열어놓곤 했었습니다. 문을 어떻게 여느냐에 따라서 그 문을 출입하는 사람의 위상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양떼들에게 있어서 문이라고 하는 것은 들어가는 통로도 되지만 나가는 통로도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떼를 다른 양떼와 구별한 후에 목자는 울타리가 있는 자기의 거처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양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양떼들을 확인한 후에 자신은 그 울타리 출입구에 드러누워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양떼가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그 목자를 지나지 않으면 안되고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해치려고 해도 그 목자를 먼저 넘어서지 않고서는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떼를 보호하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곧 목자는 가장 위험한 상황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는 그런 의미에서 양떼 전체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양떼들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목자를 통과해야 합니다. 밤중은 위험한 곳이고 어두움은 죄악의 시간입니다. 어두움을 향해서 나아가는 양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는 울타리 문에 드러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지역의 목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비유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전함을 얻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보호함을 얻는 곧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의 통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진리의 문이 되시고 생명의 문이 되시고 구원의 문이 되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메시아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한 분 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분명한 메시아적 선언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어느 분이 메시야인지, 어떤 일을 하는 분이 구세주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두 그룹 즉, 하나는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가 있고, 또 하나는 나보다 먼저 온 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히 울타리를 넘어가는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울타리를 넘어가는 자들... 오늘 이 시대에도 울타리를 넘어 양떼들을 도적질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증인처럼 교패가 있는 집만 찾아다니면서 전도한다는 것은 말이 전도지 도적질하러 다니는 것이지요. 교회 버스를 아파트 앞에 대놓고 자기 교회를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타라고 강요하고 잡아끄는 사람들도 역시 도적질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다양하고 지능적으로 울타리를 넘어 다니는 절도며 강도들이 참으로 많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절도며 강도인 두 번째 모습은 "나보다 먼저 온 자"라고 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누구를 가리킬까?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신구약 중간시대부터 예수 당시까지 있었던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5장 36-37절에 보면 그 당시에 가장 존경받는 바리새인 중에 가말리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붙잡아놓고 죽이려고 할 때에 그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스스로 자랑하다가 약 400명이 그를 따랐는데 그가 죽임을 당하매 쫓던 사람이 다 흩어졌던 사실을 기억하느냐?
갈릴리 유다가 백성을 꾀어 쫓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쫓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던 사실을 기억하느냐? 만약에 이 베드로와 사도가 이렇게 드다가 갈릴리 유다와 같이 거짓 선지자라면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시겠느냐?" 그럼으로 우리는 이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공회 앞에서 변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지 모릅니다. "너희가 도대체 누구를 증거하느냐?"고 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매달에 죽인 예수를 우리의 조상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고 죄사함 받게 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제자들의 당당함에 그들은 기가 죽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그 분명한 신앙고백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의 두 번째 의미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그들은 언제나 주님에게 있어서 절도며 강도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듣고 따라다닐 때 그들은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의 제자됨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절도며 강도인 그들의 모습,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날마다 그 수를 더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단의 세력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예배하지도 주님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10절에 보면, 절도며 강도인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죽이고 빼앗고 멸망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살리기 위해서 왔고, 그들로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이려고 왔지만 주님은 살리려 오셨고, 그들은 빼앗으려고 왔지만 주님은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문을 말할 때도 "그 문"(the gate) 입니다. 흔하디 흔한 많은 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 유일한,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문이란 사실을 주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유일한 진리의 문, 구원의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오신 줄 믿습니다.
반면에 양떼들을 가리키면서도 "그 양떼"(the sheep)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수적인 의미에서의 유일함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분별력 있는 양을 말합니다. 아무 목자에게, 거짓 목자에게 끌려 다니는 그런 양떼가 아니라 오직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그 양"을 말합니다.
이 시대에는 분별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아무 것이나 그럴 듯 하고 매스컴을 타고 인기가 있으면 따라가는 그런 주관없는 양이 아니라 분별력을 가진 영적 안목을 가진 양떼들입니다. 세상이 두쪽이 나도 나는 이 길만을 가겠다고 하는 분명한 소신을 가진 양들입니다. 유일한 문이 되시는 주님을 분별력을 가지고 따라가는 양떼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풍성한 꼴을 얻는 줄 믿습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불러도 그냥 부르지 않고 각각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양떼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 목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성이 있습니다.
흔히 목회자들이 유혹받는 약점 중의 하나가 좀 더 거룩한 목소리를 가질 수 없을까? 하는 것이지요. 흔히 holy voice라고 그럽니다. "여~보세요. 아, 그러~십니까?" 천천히 그리고 바리톤 색으로 나오다가 "나야. 황목사!" 그러면 "응, 황목사!" 이러면서 금방... 거룩한 목소리가 세속적인(?) 목소리로 달라집니다.
저는 이런 경우에 갈등을 느낍니다. 운동장에서의 목사의 목소리와 전화할 때의 목사의 목소리, 그리고 설교할 때의 목사의 목소리가 왜 달라야 할까? 신중한 면은 있어야 하되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같아야 됩니다.
목자가 양을 부를 때는 그 만의 목소리, 만들어진 목소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우면서도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목소리로 양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양들은 그 음성을 인식하고 응답을 합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흉내를 내도 양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과거 같으면 여름 성경학교를 하면 아이들은 수첩에 몇 월 몇 일부터 몇 일까지는 어느 교회, 며칠부터 며칠까지는 어느 교회 등을 적어놓고 한바퀴 순회를 합니다. 일찍하는 교회도 있고 방학 끝무렵에 하는 교회도 있거든요. 방학 한달동안 성경학교를 하는 교회들을 순회하고 나면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들은 1년치 학용품을 다 마련하는 거예요. 가방, 모자, 티셔츠, 연필, 필통까지 상으로 타놓고는 흐뭇해 하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성경학교 외에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대방동으로 이사간 한 집사님의 아이가 전도지를 주면서 "야, 우리 교회 나와라" "저 교회 다니는데요" "어디 다니냐?" "역곡의 평안의교회 다니는데요" "야, 그렇게 멀리 다니냐? 이리로 나와라" "아니예요. 저는 꼭 가야 되는데요" 대심방을 갔다가 그 얘기를 전해듣고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겨웠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내가 꼭 평안의교회를 가야 한다고 얘기할 때 목사는 자존감이 생기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목회를 해야 할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런 양들을 위해 울타리의 출입구에 누워서 위험 상황에 가장 먼저 자기 몸을 내맡기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그 말은 곧 나는 그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생명을 다해 양들을 위해 헌신할 목자가 필요할 때인데 저를 비롯해서 수많은 동역자들이 그런 심정을 가지고 울타리 입구에 누워 내가 문이라고, 위험이 다가올 때 내가 먼저 감당하겠노라고 생명을 거는 그런 목자가 필요한 이 시대입니다.
큰 목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그 분을 본받아서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일에 주저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그 분 앞에서 드나들며 꼴을 얻고 풍성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귀한 은혜들을 누리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의 지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생명과 구원의 문이 되신 주님, 그 문을 드나들며 풍성한 꼴을 얻고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분별력이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음성을 따라 오늘도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예수의 자기 선언(2)
본문: 요 8:12-16 (10월22일 설교)
주님께서 장막절의 절정을 이루는 큰 등불이 타는 가운데 당신의 자기 계시의 두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성전 여인의 뜰에서 하셨습니다. 20절에 보면 "성전 헌금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했는데 이방인의 뜰과 그 안에 여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있는 성전 구조의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여인의 뜰은 여성들은 물론이고 모든 남성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서 거기에 헌금궤를 놓았습니다.
성경에서 '빛'이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빛'이라고 할 때에 먼저 분명히 해야 할 부분은 그 빛은 많은 빛 가운데 하나가 아닌 '그 빛'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유일한 빛이시고 온 세상을 위한 참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영어의 대문자로 사용하듯이 주님을 빛이라고 할 때에도 많은 빛 중의 하나가 아닌 '오직 하나' 그래서 'The Light' 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그 빛"은 다른 것과 구별해서 괜찮은 빛이 아니라 유일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실 때 당시의 상황이 1장 5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왔지만 빛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상황이 당시의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장 19절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을 미워하는 배척의 분위기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이 세상도 주님이 오실 때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빛으로의 삶을 환영하기보다는 악의 모습으로 어두움의 모습으로 다가갈 때에 반가워하고 편안해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최근 국립보건원의 발표에 의하면, 서울 시내 모 여고생의 에이즈 양성반응 결과를 발표하면서 현재 10대 에이즈 환자가 20명이 된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국회 청소년 보호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현재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종업원 가운데 48.1%가 17세 미만의 미성년자라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17세 미만이라면 지금 한창 중학교, 고등학교를 열심히 다녀야 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9장 5절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 어두움에 깔려있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절망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낮이기 때문이예요. 낮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하는 때입니다. 주님께서 당시의 어두운 영적 환경을 한탄하시면서도 아직 기회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12장 46절에서는 "내가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어두움의 자리에서 빛의 자리로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고 있습니다.
5살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눈물로 다짐합니다. 이 아이가 매를 맞는 이유는 호기심에서 교회 헌금 바구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냈기 때문인데, 그 이후에 이 어린이는 단 한번도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땀흘리지 않고 큰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의 정직성은 갈수록 빛이 났고 미국 국민들은 그를 그들의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 지도자보다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의 지도자로 정직한 지도자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지금도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봉사합니다. 평일에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으로 그는 분주합니다. 헤비타트 운동의 선구자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빛의 자리로 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어두움의 자리는 편안합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무드가 좋다고 할 때는 대개 조명이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범죄와 죄악들도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흥업소치고 환하게 밝혀진 곳이 없어요. 계단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침침합니다. 어두움이 편안하고 어두움이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를 빛의 자리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빛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할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방식은 사랑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하면 역시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필리핀 산 파비안에 '선교센타'를 지어야 하고, 왜 우리가 역곡을 위해서 '복지센타'를 지어야 합니까? 그 논리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사랑의 원리에 있습니다.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주의 백성다운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많은 빛들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아 국가적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 발표된 노벨상들을 보면 동북아시아가 2000년 첫해에 굉장한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노벨 화학상'은 '시리카와 히데끼'라는 일본인이 수상을 했고, '노벨 문학상'은 '가오싱 젠'이라는 중국의 망명 작가가 수상을 했습니다.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이 노벨상의 중요한 세 부분을 수상을 했다고 하는 것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은 이번을 포함해 9번이나 수상을 했고 우리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들 분야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기까지의 과정들입니다. 공산 독재 치하에서 타협을 거절하고 프랑스로 망명을 해서 자신의 문학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펼쳤던 '가오싱 젠'이나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공로가 크다고 인정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모두 그들의 인내의 세월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야를 사랑하고 자기의 세계를 사랑한 사람들도 세상에서 우뚝 빛으로 섭니다. 하지만 이 평화상이나 화학상, 문학상 등은 조금 있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질 것입니다. 세계를 감동시켰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을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십니까? 제가 어제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쭉 보았는데 지금 제 머리에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시리카와 히데끼도, 가오싱 젠도 곧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는 사랑의 빛으로 다가오신 주님은 2000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지금 이 극동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빛이 서진을 한다고 그러지요.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로마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제 한국이 중심이 되어 13억 중국과 3,000만 북한을 향해 끊임없이 이 빛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그랬지만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시대에 왔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빛의 자녀의 삶이 무엇입니까? 빛은 주변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움을 밝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패배의식을 희망과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빛이 되어서 그 빛으로 살아가는 곳곳에 변화의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빛으로 사는 사람은 기준이 다릅니다. 빛으로 사는 사람은 삶의 중심이 다릅니다.
성경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울이요, 하나는 다윗입니다. 사울은 늘 불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 대부분이 다윗을 상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불행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의 기쁨이 자기에게는 불행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의 상대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불행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았기에 그는 끊임없이 다윗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사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훌륭한 궁궐을 소유한 사람이었고 백성들을 호령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그는 늘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유다 광야로 피신을 다니면서도 그는 늘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상대는 사울이 아니라 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기뻐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었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에 가더라도 그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확신 때문에 행복했고 기뻤습니다.
그는 어떤 장소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궁궐이나 초막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이것은 다윗을 삶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 최고의 중심이 되는 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행복한 것입니다.
변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빛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그분이 빛이고 우리는 그 빛의 자녀이기에 언제나 빛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계신 곳에 빛의 자녀인 우리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인 줄로 믿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도 주님의 상황과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지의 상황이고 배척의 상황이고 아직도 우리는 빛으로서의 삶에 어려움을 겪는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더 편안하고 편리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빛으로서의 삶을 이제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등불을 등경 아래 두는 자가 없다' 그래야 빛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아직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의 자리가 더 편함으로 그곳에서 머물러 있음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빛으로서의 삶을 원하신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어두움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꺼지지 않는 빛으로 정말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을 힘입고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빛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예수의 자기 선언(1)
본문: 요 6:35 (10월15일)
사람에게는 많은 욕구들이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지식의 욕구도 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은 욕구도 있고, 좀 더 자유하고 싶은 자유의 욕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빵에 대한 욕구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빵에 대한 욕구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첫 부분은 바로 이런 인간의 빵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셨던 아주 중요한 표적입니다. 우리는 그 표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저녁이 되어서 돌아가려 할 때에 주님께서 그들의 시장함을 아셨습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는 주님,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사서 나누어주기를 말씀하셨고, 빌립이 그 말씀을 받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사용하더라도 200 데나리온이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실천이 불가능함을 우회적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오면서 아주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에게 이 도시락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드레의 이야기도 그렇게 소망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말에 대답을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줄을 맞추어 앉게 하셨습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서도 주님은 질서를 원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축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고 제자들은 군중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성실하게 했습니다. 좀 더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주님의 세심한 배려의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즘 음식을 먹고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시민 운동이 한창입니다. 심지어는 식당 벽에 "남기면 벌금이 몇 천원"이라는 문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만은 사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음식 남기지 않기 운동'은 벌써 2000년 전에 주님께서 시작하신 운동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는 것을 처리하는 것도 주님의 관심이셨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모았을 때 12광주리나 되었고, 그것은 제자들의 그 다음날 양식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음식 문화는 대부분 체면 문화로 인해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신사와 숙녀의 매너처럼 여겨졌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식사후 남은 것들을 싸가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체면 문화보다는 실용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는 무엇보다도 빵 문제를 해결한 지도자가 가장 인기있는 지도자로 인정 받는 시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을 얘기할 때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높은 국가로 알고 있지만, 미국민이 클린턴을 계속해서 선택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재임 중 미국 역사상 가장 안정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그를 선택한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현실적인 빵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해 준 사람이 더 낫다고 하는 미국의 선택이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 현직 두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훈수를 둔 적이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은 민주주의를 위해 사신 분들이라 자기보다 훨씬 정치를 잘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과는 실망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분은 IMF의 환난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또 한 분은 거기에 못지 않은 경제 위기 상황 때문에 "나는 독재를 했지만 백성들의 빵의 문제는 해결해 주었다"는 그 당당함이 두 전직 대통령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빵의 문제는 이렇게 우리에게 큰 문제입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마태복음 4장 4절은 그것을 잘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떡 없이 살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삶의 우선 순위의 문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의 자기 선언은 "떡"이라고 하는 주제로 시작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일곱 번의 자기 선언 중에서 떡으로 시작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은 곧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는 떡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이 독특한 어법을 우리는 '에고 에이미'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는 "나는 OO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자기 계시적인 어법은 출애굽기 3장에서 처음으로 소개가 되어져 있습니다. 타지 않는 가시덤불을 보면서 모세가 놀라움으로 다가갔을 때 그 불길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자기 계시에 대한 가장 분명한 이 언급은 이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요한복음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새롭게 자기 계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목격한 백성들이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저 분은 우리의 최고의 관심인 먹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도자다" 그래서 그 기적을 맛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뒤로하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산으로 가셨다고 하는 말은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흔들렸을 거예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께로 몰려와서 "당신은 우리의 빵의 문제를 해결한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왕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뒤로하고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기도의 시간인 줄 믿습니다. 주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 우리의 생각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적인 여러 가지 이야기와 사상에 휩쓸릴 수 밖에 없어요. 주님을 왕으로 삼자고 할 때에 기도하지 않는 주님이라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갔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신속히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목적에 흔들림이 없도록 새로운 다짐을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기도생활하지 않는 집사님들이 교회생활을 계속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성가대를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군중들의 기대와 흥분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본문 말씀 24절에 보면,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가버나움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흥분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하룻밤을 자고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많은 배들을 동원하여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소개해야 되겠다는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너희들이 내게로 몰려온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 아니냐? 내가 원하는 것은 이제 너희들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생명의 양식을 위해 일하기 바란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합니다.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생명의 떡이 되신 나를 너희들이 소유하기를 원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군중들은 두 그룹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그 말씀을 듣고 거부 반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관과 다르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66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또 다른 반응이 생깁니다. 소수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소수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게 갱신하고 이제는 진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그러한 새로운 신앙의 소수들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그러한 질문 앞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계시거늘 우리가 뉘께로 가오리까?" 떠나가는 사람은 다수요, 남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단순히 빵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할 때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옵니다. 6.25를 전후해 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밀가루와 우유를 공급했을 때 아마 6.25 전쟁을 겪은 사람 치고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 배급이 끝나는 날, 그들은 교회에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주님의 평가는 정확해요. "너희가 나를 따르는 목적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단순히 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지만 영적인 양식을 위해서 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의 제자들만 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식으로 삼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의 자기 선언을 통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소수의 제자들이 주님께 남아 생명을 다해 주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생명의 떡이 되신 주님과 함께 살기 원하는 분명한 온전한 신앙의 고백들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1 참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
본문: 요 1:1-14 (10월8일 설교)
사람은 일생에 세 번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만나는 부모나 형제들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의사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는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의 인생의 삶을 결정적으로 인도하시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만남은 자신의 의사, 혹은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만남입니다. 의사에 반하여서 만났다고 해서 어떤 이들은 부모나 형제를 원망하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제 뉴스를 잠깐 보니까 요즘에는 초등학교에도 골프가 유행이 되어서 유학을 보내거나 레슨을 받게 하는데, 보통 전문 코치에게 받는 레슨비가 한 달에 약 300만원이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골프 과외활동으로 단체 레슨을 받아도 약 35-50만원의 레슨비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나 골프도 배우고 어떤 아이들은 부모를 잘못 만나 골프는커녕 점심도 끼니를 거르는 그런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부자간이라고 부모를 원망할 수도 형제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하고 엄청난 만남을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11절에 보면 성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참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며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그러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신약에서는 복음서가 시작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말하는데 이 복음서도 성격과 개성이 아주 독특합니다. 4복음서 모두 역사적인 배경 안에서 예수님의 위치를 설정하고 시작하지만 그 특징은 아주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족보로 시작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설교로,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전혀 새로운 각도인 신학적인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주제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빛, 생명, 말씀, 혹은 아버지, 아들, 영광, 진리 등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1장 1-14절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이 담겨져 있는데 그 중에 첫째는 말씀이라고 하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이나 '메시지'를 의미하는 헬라어인데 매우 보편적입니다. 로고스는 유대의 지혜 문학 뿐만 아니라 헬라에 있어서 철학적인 단어로도 종종 쓰여지는 매우 광범위한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당시의 헬라 철학과 유대의 지혜 문학에 익숙해져 있는 성도들,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이 친숙한 단어인 로고스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연설에 있어서도 그렇고, 대화에 있어서도 그렇고, 설교 말씀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 5분입니다. 본문을 다 준비해놓고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때문에 고민하는 적인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1장 1-18절까지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장 중요한 서론 부분을 로고스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19절에서 20장 31절까지를 본론으로, 그리고 21장을 맺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 믿게 하려 함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인 줄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할까?" 이것이 요한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우리가 들여다볼 때 믿음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지 아니하면 요한복음은 철학적인 글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이 말씀은 사도요한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선언을 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입니까?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말씀에 대한, 로고스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알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시작을 알리는 두 성경을 봅니다. 하나는 창세기요 하나는 요한복음입니다. "In the beginning" 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두 성경은 그렇지만 조금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베레시트"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엔 아르케"라는 헬라어로 처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해서 시작을 알린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의 선재성이 가져다주는 의미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더 나아가 14절에서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준비해도 가장 중요한 생명을 잃으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주님이 반문하셨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재산인 이 생명을 주님께서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 육적 생명의 시작이 주님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그분은 또한 빛으로 오신 줄 믿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비추는 빛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빛으로 오셨기에 우리는 그를 생명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성에서 보면 빛은 에너지를, 윤리적인 측면에서 빛의 의미는 선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관계에서 빛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되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다 영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영접하는 자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탄생은 자연적인 탄생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의 탄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밀을 거듭남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특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특권이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이신, 빛 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한 줄 믿습니다.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변했습니다. 관리들이 변했습니다. 심지어는 핍박자들도 변했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에 가장 큰 사건은 변화인데 그 변화는 어느 민족, 어느 종류의 사람이든지 예외일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애 최고의 만남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두 번째 결과는 우리가 더욱 더 주님과 깊은 교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싹트고 점점 신뢰를 쌓아가면서 커지기 시작합니다.
옛날, 어느 처녀가 자꾸만 자기를 쳐다보는 한 남자를 보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쳐다보지 마세요" "왜요?" "쳐다보면 정들어요" "정들면 좋지 않습니까?" "아니예요. 정들면 안됩니다" "왜 정들면 안됩니까?" "정들면 돈들어요" 시골 처녀의 순박한 얘기입니다.
자꾸 만나야지요. 사랑이 싹트려면 자꾸 만나야지요. 여러분이 주님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관계가 끊임없이 계속되려면 자꾸 주님을 만나야지요. 주님을 만나는 최고의 시간이 무엇입니까? 예배인 줄 믿습니다. 친교를 통해서도 만나고, 교육을 통해서도 만나고, 행사를 통해서도 만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은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가장 주님 앞에 진솔하게 내어놓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이 드러나는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를 더욱 깊은 교제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세 번째의 결과는 증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만난 기쁨을 가슴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안드레는 그래서 자기 동네로 가서 자기 형제 베드로를 끌고 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많은 도전이 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내 형제에게, 내 부모에게, 내 이웃에게 그것을 가슴에 숨겨두지 못하고 그것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안드레의 열정이 과연 내에게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베델 1-4기가 생활편을 공부하면서 특별히 전도에 관한 주제로 이제 벌써 두 학기째를 공부하고 있어요. 이제 곧 있으면 두 명씩 조를 짜서 역전 앞에서 전도지를 나누는 훈련을 할 것입니다. 전도의 A B C 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거예요. 사실 전도지를 받았다고 예수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통계를 보면, 부흥회 소개지를 보고 부흥회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그런 전단지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홍보적인 차원에서, 인지도를 넓히는 차원에서 효과가 있는 것이지 신문 사이에 끼어진 간지를 냅다 쫓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아침 7시쯤 되면 역곡역 앞에서 정장을 하고 교회 주보를 나눠주는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냥 무안해서 씩 웃고 지나가지 말고 "이른 아침에 수고하시네요" 한마디를 건네고 가시면 좋을 듯 합니다.
안드레가 형제 베드로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뛰어가 얘기하고 그를 끌고 올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주님 만난 사람의 변화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만난 사람의 기쁨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단순히 "말씀으로 오셨다"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으미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그 주님이 어린아이의 과정부터 인간의 모든 고뇌와 슬픔의 모든 과정들을 겪어가시는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눈물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모든 부분들을 이해하셨습니다. 기도하자고 데려간 제자들이 쿨쿨 잠자는 것을 보면서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하다고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셨습니다. 나사로나 혹은 과부의 아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며 인간이 해결 받아야 할 가장 깊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서기관들이 그 선언을 들으면서 기절초풍합니다. "어찌하여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이 엄청난 선언들이 그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제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주님,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요한복음이 주는 그 놀랍고 엄청난 하늘의 비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한 주간씩 나누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안에는 7가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이 나와있습니다. 다음주부터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그 7가지의 자기 선언을 한 주씩 나눌 것입니다.
지금은 단풍철입니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사람들을 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단풍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기온이 식물의 최저 생육온도인 5도 이하로 내려가면 엽록소 활동이 중단되면서 그 잎 속에 남아있던 색소가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최고의 관심은 변화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작년의 여러분과 지금 여러분은 분명히 달라야 할 줄 믿습니다. 이 다름이 예수 안에서 만난 진정한 생명과 빛을 소유한 사람으로서의 변화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되신 주님과 같이 이제 우리는 주님의 그 사역의 남은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되신 주님께서 이제 주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또 빛으로서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빛의 공동체로서의 평안의교회가 그 역할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빛으로 오셔서 생명을 주시고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새로운 소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주의 은혜가 이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사명을 통해서 또 나누어지게 하시고 증거되게 하옵소서. 빛의 자녀로서 부족함이 없는 종들로 저희들을 이 시대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