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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1장 18-25절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특별히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이요, 그런 그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세우고자 하신 뜻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충성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를 사랑한다고, 자신이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답변하지만, 세 번이나 물으실 때 세 번째 답변에서는 근심하기까지 하면서 답했던 것이 베드로입니다. 답은 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성정을 따라 더욱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말대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주께서 잡히실 때 도망했고, 베드로의 경우는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반복되는 질문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불안이 우리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또 그를 세우고자 하신다고 할 때,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이런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확인시키시고 그 사랑을 받아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돌판의 요약이요, 율법의 첫 번째 자리입니다. 그러나 무턱대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서문을 통해 알리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창조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창조 이후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을 강요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내가 먼저 너희를 사랑했기 때문임을 늘 밝히십니다. 사랑의 시작도 주님께서 하셨고,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모든 제자들의 모습처럼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대하여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연약함이요 완악함이지만, 그런 인생을 계속해서 사랑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욱 사랑하라고 요청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온통 점과 흠이요, 실수투성이인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도 괜찮은가? 죄를 죄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죄입니다.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죄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보다 앞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회개하기 전에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회개가 점과 흠도 없이 완전한 회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죄에 대해서 다 회개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용납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에 이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도로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주님의 양떼를 영적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떼를 오직 그의 말씀으로만 먹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만의 사명이 아니라, 오늘날 목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사명을 모두가 다 올바르게 감당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구약 시대 때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시대에도 거짓된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 목사 가운데도 거짓된 목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단지 말씀 사역자가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로서 무엇을 먹이느냐가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물론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떼를 가르칠 것입니다. 말씀 사역자라면 응당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 안에 이단들이 나왔다는 것은 말씀의 이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답게 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할 때 무엇을 먹이느냐, 무엇으로 치느냐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고,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할 때, 그리고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뽑힐 수밖에 없다고 할 때,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은 남게 되지만, 나무, 풀, 짚과 같은 가르침은 뽑힐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목사는, 모든 말씀 사역자는 금, 은, 보석과 같은 가르침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고, 성도 역시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사모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세우시면서 사명을 주실 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하여 예고하십니다. 먼저 18절과 19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이 18절입니다.
여기서 ‘젊어서는’이라는 말과 ‘늙어서는’이라는 말로 비교를 하는데, 단순히 나이가 적을 때와 많을 때를 비교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그가 늙어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을 때부터 주를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젊을 때와 늙을 때가 완전히 대조적이라는 데 있는데, 이런 점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성령 강림 사건 이전과 이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 이전에는 주를 위한 열심은 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많은 부분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패한 본성이 사라지고 그의 모든 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점과 흠이 있으며, 실수 또한 하게 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의 범과 흠, 실수를 말하는데,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 13절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이 일을 책망한 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이기 때문인데(갈2:14), 분명 성령 강림 사건 이후의 일이지만 이런 연약함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젊어서는, 신앙에 있어 좀 미숙할 때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 이전 예수님을 따라 다니긴 했지만 마치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충성심에 따라 뭔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으면,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경고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늙어서는, 다시 말해 신앙에 있어 미숙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성숙해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갈 때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원하지 않지만 주께서 억지로 그를 이끌고 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표현은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기도하셨던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연약한 본성을 따라서는 주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을 따라 자발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코 억지로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19절의 말씀처럼 18절 말씀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소위 순교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본성을 따라서는 그 일으 감당할 수 없지만,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십자가형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교부들의 해석에서 이런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것도 거꾸로 달린 채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속설일 뿐 분명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예고하시고 계신 것처럼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순교하게 될 것입니다. 주를 버리고 도망했던 그이지만, 뿐만 아니라 주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이지만, 그런 그를 주를 위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에베소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를 뿐이었습니다(엡2:2).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할 뿐이었습니다(엡2:3). 그런 우리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의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엡2:1).
문제는 주께서 주신 믿음을 따라 산 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숙하다는 데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지식 없이, 내 열심과 노력에 따라 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것이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믿지 않을 때는 이런 것조차 주를 향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를 향한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단지 내 열심, 내 노력, 내 충성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는 그 자리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께서 우리를 주가 원하는 자리에 세우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대하여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주께서 주의 뜻을 이루실 때 하나님 자신이 “내가 하겠다”고도 하시지만 사람에게 “네가 하라”는 식으로도 말씀하십니다. 명령의 형식으로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형식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될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의 모든 명령은 명하신 분이 명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의미에서 말씀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어쨌든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앞에 있는 23절과 연관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그것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사람의 일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과 상관없는 열심,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열정, 이런 것들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철저히 주의 뜻을 따라, 주의 말씀을 따라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과 2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비교하자면 자기를 부인하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한번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입니다. 매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십자기를 지는 것이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일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한 예로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매우 힘듭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한번 정도는, 좀 더 나은 사람은 두 번 정도는, 아니 정말 믿음에 진보를 이룬 사람은 몇 번 정도는 주의 뜻을 따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하는 것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대는 것이 아니라 두 배, 세 배의 복수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속옷을 가지기 위해 고발하는 자에게 겉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맞고소로 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단지 명령조의 말씀만 하시는 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처럼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도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미숙한 신앙을 성숙한 신앙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미숙한 채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있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배웁니까? 왜 우리가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주의 말씀 앞에 서게 됩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달리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온전함은 죽음과 함께 주어지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우리를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심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이것을 위해 말씀 사역자를 두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말씀에 부합한 자가 되지 못한다면 선지자들이 당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말했던 것처럼 진노와 징계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진노와 징계는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기를 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진노와 징계까지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린 아이로만 있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해야 합니다. 결코 거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킴이라고 할 때 베드로는 분명 순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주께서 우리를 완성하는 자리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자리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 사역자를 두시지만, 결코 이 땅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죽음을 통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로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 불가능한 것을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는 거기에서 하나님은 완전성화를 이루십니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전적으로 주께서 행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그 영광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우리를 살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요한복음 13장 36절도 주목할 수 있는데,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열심, 베드로의 열정은 주께서 가는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입니다. 주를 따라 가겠다고 했지만 주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현실이요, 어떤 면에서 우리의 현실입니다. 즉 우리는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내 열정으로, 내 노력으로 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주께서 따르게 하십니다. 여기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다면, 그래서 주의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서 꽃 피우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결과 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에 속한 모든 것,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은 주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참고). 내 공로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우리를 더 이상 그런 자가 아닌 자로 세우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장래에 대해 말씀하시자 옆에 있던 동료 제자의 장래 일도 궁금해 졌는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21장 7절에서도 표현되었지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사도 요한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중 베드로 눈에 들어온 제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 못지않게 사도 요한도 열심이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런 특심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는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마20:21).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은 스스로 그런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을 만큼 열심을 다했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이런 요한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기를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인지 물었던 자라고 덧붙입니다. 그만큼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바로 그 밑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요한이었고,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던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9:25-27).
이런 요한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간단히 말하면 내가 너에게 준 소명을 따러 너는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비교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나은 것 때문에 자신이 잘난 줄 압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못한 것 때문에 낙심합니다. 그리고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내게 주신 소명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호기심입니다. 이런 비교는 내게 주신 소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신앙현장에도 이런 비교가 있습니다. 누가 더 기도를 많이 하는가? 누가 더 성경을 많이 읽는가? 이런 식의 비교입니다. 이런 비교는 결국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이,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이 경건한 것인 줄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어머니를 통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요, 거기에는 자신들이 더 잘 낫다는 비교 의식도 있는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2-23) 특히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결국에는 너희가 내 잔을 마시겠지만,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잔을 마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내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는 늘 내가 행한 것에 따라 결과 되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저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행위 결과 논리로 가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습니다. 부패된 본성을 따라 살아갈 때가 많은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즉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공의시행의 원칙에 따라서만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에 감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낫다는 교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없음을 원망하는 것으로 나타낸다면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8장에 보시면 제자들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크냐로 싸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2-4) 성경은 어린 아이일지라도 본성의 부패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자신의 공로에 따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서 어린 아이는 늘 부족하여 부모에게 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늘 이런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교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자신의 공로요 다른 사람보다 없으면 낙심하고 원망하는 그런 자가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자로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닌 철저히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쓸데없는 비교, 무익한 비교, 오히려 해로운 비교를 금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에 따라 겸손하게 주의 말씀만을 따라 사시면 됩니다. 자꾸 다른 사람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만 주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죄악된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없는 자들은 없다는 것 때문에 원망 불평해서는 안 되고, 자족할 수 있는 마음과 때로는 그런 모든 문제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22절과 관련해서 2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2절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은 사도 요한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뜻은 사도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사도 베드로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인데,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오늘날 말씀 사역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 이런 오해들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유일한 목자요, 스승이요, 선생이십니다. 그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해를 합니다. 그런데도 올바르게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이해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지라도 오해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칼빈은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이것은 오늘날 날마다 일어나고 있으며,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권속에 속해 있던 그의 제자들이 그처럼 잘못 알고 있을 정도였다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직접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자들은 얼마나 더 잘못하기가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건덕이 되고 효용이 되도록 분명하게 가르치시지만, 우리는 그 명백성을 자신들의 의식이 만들어 낸 악한 생각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고안과 상상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말씀에 대한 오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왜곡시킬 정도의 방자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늘 우리는 주의 말씀 앞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부패된 본성에 따른 생각이 주의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24절과 25절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마치는데,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즉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자신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증언과 기록이 단지 제3자의 입장이 아니라 친히 듣고 본 바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듣고 본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듣고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증언이 참되다고 할 때 거기에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지 사람의 증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다는 것은 이미 요한복음 20장 30절에서 밝혔습니다. 얼마나 많은가?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정도라고 말합니다. 문학적 이해로 하자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밝힌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요한복음의 이 기록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모든 성경, 즉 66권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그를 통해서만 생명의 풍성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66권 이 성경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이 성경만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오직 66권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만 그 말씀의 합당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그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