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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적 메타포의 존재론적 의미화
- 김연화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가방은 내 삶의 축소판이다. 어쩌다 선물로 받은 비싼 가방도, 봄을 닮은 아름다운 가방도, 아주 귀해 보이는 앙증맞은 가방도 없진 않지만 이들은 그냥 바라볼 뿐 가까이 붙여지지 않는다. 그저 나의 인연과 삶을 닮고, 오래 묵은 서랍처럼 내 세월의 이끼가 피어있는 가방은 한결같이 엉뚱하고 못났다. 이러나 저러나 그래도 세상 떠날 때는 어깨의 가방을 벗어버리고 민들레 씨처럼 가볍고 훌훌 떠날 터이다. 하여 나는 조금씩 더 견고해지는 것이리라.
- 김연화, <가방> 中에서 -
I. 열며
문학은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고, 작가는 자신의 삶에다가 공감할 만한 세련된 정신세계를 접합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김연화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라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뿐만 아니라, 타자의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김연화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이 수필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재에서 얻는 경이와 충격만으로 수필을 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김연화 수필의 가치는 진솔한 자기 표백에 있다고 하겠다. 고백문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필의 출발점이 자조이고 결승점이 그것의 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학성을 주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김연화는 이런 문학화 작업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제 물상은 의미화 작업을 거쳐 옹골찬 미학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내온 수십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조 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예술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연화의 인지장치는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도전이, 김연화 수필집의 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역사는 실제 있었던, 일어났던 사실 하나 하나를 그대로 말한다. 반면에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 그것은 추측이나 상상, 아니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추리와 당위성에 의거한 서술을 말한다. 문체상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그럴듯하게,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며 철학적인 진리성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녀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연화 수필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 작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이것이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예술로서 수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문학가와 철학자는 다르지 않다. 문학이 보다 깊은 철학일 때 우리는 세계인과 만난다. ‘가방’ 때문에 김연화는 짐연화라고 불린다. 위의 <가방>이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비움으로 더욱 견고해지는 자신의 단단한 삶을 수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네 조각으로 나눠 실은 수십편이 세련된 문학성의 향기로 해서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자조문학의 진수를 맛보면서 필마의 기운이 주는 뿌듯한 감동을 경험하기 바란다.
II. 펼치며
1. 잊을 수 없는 사람과 가족, 그 이야기
김연화의 수필적 테마는 인간이다. 특히 가족은 그녀에게 보약 같은 사람들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이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가족들 앞에서 작가는 원고지를 뒤척이며 고뇌하는 예술가가 된다. 무엇보다도 김연화의 값진 점은 창작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절대로 붓을 꺽지 않는 불굴의 예술정신이다. ‘너는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칸트가 말했듯이 작가로서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항상 분투하며, 언제나 좋은 수필을 위한 꿈을 꾼다. 베토벤은 ‘인간은 고뇌를 통하여 환희를 얻는다. 그리하여 훌륭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싸르트르는 ”글을 피로써 쓰라.“고 했다. 무릇 작가라면 의식이 있어야 한다. 강렬한 제작성으로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의지로 써낸 수필이 김연화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의 운명적 사랑이다. 수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작가의 문학관은 사랑을 통하여 오늘을 소중히 아낄 줄 알고, 그 어제를 부끄럼 없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화는 제1부 수필군는 ‘어머니’, ‘아버지’, ‘스승’, ‘동기’, ’선배‘, ’딸’, ‘교장’, ‘언니’, 등의 인물이 수필의 제재로 등장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출연이 단연 최고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의 운명적인 관계를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과거 지향적 추억 속에는 항상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가 놓여 있다. 이런 모성에 대한 천착은 곧 그녀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사그라진다. 수북하던 등이 편평하니 가라앉고 뭉툭하던 손끝도 가늘어졌다. 몸을 만지면 뼈가 잡혀 인체 골격도가 그려질 정도다. 작은 키는 더 작아져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 같다. 육 개월을 침상에 누워 잇으니 얼굴색이 바래서 굳이 진주가루를 바르지 않아도 핏빛 없이 하얗다. 너무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평온한 얼굴이 새 각시캍이 곱디곱다. 팔순이 되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험한 삶이 투영되어 마음이 아프더니, 침상에 눕고서야 거친 삶을 벗어 내렸다.
- <환골탈태> 중에서 -
이 글에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작가의 인상은 무한 희생과 사랑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시장에 나가지 말라고 온 자식들이 매달려도 어머니는 사십 년을 디뎌온 땅을 버리지 못했다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어머니는 작가의 가슴에 살아있는 불굴의 정신이다. 김연화의 수필을 이루고 있는 그림자 형상은 누가 봐도 ‘어머니’다. 어머니는 김연화 수필의 근본적인 핵이다. 그녀의 사고 영역에 ‘어머니’는 언제나 항상 존재한다. 융에 의하면, 그림자는 어머니, 즉 집단 무의식으로 향한 글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하였다. 어머니야말로 우리의 무의식에 영원히 살아있는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환골탈태>에는 이러한 팔순 어머니의 험난한 삶의 모습이 녹아 있다. 특히 <환골탈태>란 수필은 문학적 형상화가 빛난다. ‘어머니는 우리의 아킬레스건이다.’라는 진술에 더하여지는 ‘생명을 나누어주고 생명보다 진한 사랑으로 자식들을 곧추설 수 있도록 밀어 올린다. 꿈만 좇는 아버지의 몫까지 짊어지고 삶의 현장에서 버티었고 손톱자랄 새 없이 일을 해 여섯 남매 주춧돌이 되었다.’는 뒷받침 문장과 그 다음 단락으로 연결되는 ‘땅에 살짝 내딛는 걸음걸이에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듯 어머니도 그렇게 무너졌다.’는 표현은 단연 압권이다. 이 수필은 ‘아킬레스건’이라는 메타포로 인해 어머니의 삶이 문학적으로 잘 구축되었다고 하겠다.
수필의 멋은 냉철한 이성과 논리보다는 오히려 안온한 인정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을 진실로 이해하고, 하나의 삶을 진정으로 가슴에 지녔다면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끌어들인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멋은 온갖 갈등을 극복하고 이해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을 때 남기 때문이다. 제1장에는 가슴과 가슴을 이어가면서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삶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하늘 길 다섯 시간>에는 노자나 장자보다 더한 절체절명의 간결한 언어로 삶의 통찰력을 가르치며 우리를 담금질해 주던 스승의 인격적 삶이 물결치고, <자신당>에는 목소리까지도 닮은 동기들의 우애가, <병상일지>에는 목발을 짚고서라도 불어 강의에 빠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딸이, <염>에는 삶의 끄터머리에 서 있는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이, <아사도라 판도라>에는 언제나 전 교사의 이름이 적혀있는 가로세로 일미터 되는 큰 나무판을 들고 순시를 하였던 어느 교장 선생님의 특별한 삶이, <언니네>에는 언제 들어도, 불러도 생각해도 간지러운 부드러움으로 각인된 언니의 삶이 그려져 있다. 절절한 사연이 감동을 준다. 문학이 담당해야 할 사명 중에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할 때, 그 첫 번째로 할 일이 혈육이 갖는 의미를 부활시키는 일일 것이다. 김연화는 이런 인물수필을 통해 화해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김연화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인연 이야기에 대한 탁월한 해석력에서 가능하다. 수필은 발단의 예술이다. 조형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필의 가치는 발단부 첫 문장과 결말부 의미화 문장에서 그 가치가 바로 드러난다. ‘도마의 독주음은 행복의 근원이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집의 첫 작품 <도마> 하나만 보더라도 그녀의 세련된 시선과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바슐라르 이론에 의하면,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력을 양극으로 하고, 역동적 상상력이 물질적 이미지를 변형 발전시켜 나가면서 미지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가는 탐색자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미는 상상력의 가장 탁월한 활동 그 자체이며, 상상력은 미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의 의식화된 체험 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로 말미암아 과거의 체험은 인간의 심리 속에서 현재의 체험과 결합되고 재구성되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체험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김연화의 수필은 이러한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중년을 넘기면서 시달려야 했던 고독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 갈 수 있다. <밥상>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눈물로 버무러진 저 아침상이 근 십여 년을 끝없는 실패로 절름절름 이어진 내 삶의 버팀목이다.’ 라고 썼다. 동양시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궁이후공론’에 의하면, 좋은 문학은 그 어떤 연출가도 잡아낼 수 없는 ‘고통에서 끌어올린 영혼이 빚은 예술’이라고 정의된다. 무엇보다도 고생을 투자해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딸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오면서 ‘그 어떤 것도 어머니의 밥상에 올려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는 후회가 눈물로 녹아있는 <밥상>은 작가의 녹녹치 않은,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가시밭길 아니랴’로 시작되는 <화려한 전쟁>에는 기쁨과 불행이 공존하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인생관이 녹아 있는 글이다. 어머니의 시퍼렇던 삶을 작가는 ‘굽이굽이 펼치면 책 몇 권’이 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이 수필에서 대쪽 같은 아버지의 성정으로 말미암아 고뇌에 찬 어머니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내어 감동을 준다. 맛깔스런 묘사는 수필에 재미까지 더해 준다. 순결한 자기 삶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작가가 여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생활수필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본격수필과 마주하고 있다. 이 수필의 ‘그래도 삶의 끝에서는 두 분이 편안해지셨으면 싶다’는 결말부 진술은 주제의식를 상상화하면서, 부부가 끝내 도달해야 할 세계의 원형을 위기의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수필의 전형적인 마무리인 문제해결구도라고 하겠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김연화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수필집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사상 감정의 정서화는, 신선한 상징들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물론 상상도 관념연상을 일으키지만 진폭이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작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은 작가의 기도가 절절한 <아버지>는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 된 작품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끝에서도 신의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음이 삶의 비극이다. 삶의 갈무리가 비극적인 아버지를 닮을까 봐 두렵다. 세포 한 개 한 개 떨어져 나가 공기 속에 섞이는 모습을 오랜 세월 지켜보고 싶진 않다. 열흘간 입 꼭 다물고 곡기를 끊어 마지막을 당기셨다는 은사님의 지독한 마음을 끌어들인다. 원래 마지막 기도 하나는 들어주신다지. “축제처럼 떠날 수 있게 하소서. 부디 이승의 걱정일랑 아무 것도 마시고, 모든 미련 버리고 훌훌 털고 편하게 떠나도록 도와주소서!”.
- <아버지> 중에서 -
자식들에게는 그지없는 사랑을 쏟았지만, 아내에게는 평생 못할 일을 너무 많이 시켰다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해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이 작품 속에서 절경처럼 그려져 있다. 묘사에 힘입은 정서의 객관화가 문학성을 한층 더해 준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사상의 정서화는 필수적이다. 작가는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하고 있다. ‘어머니의 토막난 밤은 이어지지 못하고 또 다른 삶을 갉으며 새벽을 맞는다.’는 서술은 참신한 표현기법이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김연화의 <일곱 개 뜬 달>이다. 이 수필은 작가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꼭 닮고 싶은 스승의 형상을 달에 비유해서 그려낸 감동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가슴에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그 분의 이미지를 일곱 개 뜬 달로 의미화해서 풀어내고 있는 이 수필이 주는 감동은 메타포의 활용에 있다. ‘밤하늘에 걸려 있는 달’에는 자연과 같은 삶을 살던 어르신이, ‘영도 바다에 비친 달’에는 인자하고 친절한 관리자가, ‘학생들의 눈에 비친 달’은 학생을 사랑한 교장 선생님이, ‘마누하님의 눈동자에 서린 달’은 지혜롭고 멋진 관리자가, ‘문상객의 오감에 잠겨 있는 달’에는 인간적인 모습이, ‘후배들의 가슴에 뜬 달’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일곱 개로 뜬 달의 이미지 결합이 주는 의미는 ‘당당하고, 청렴하며 지혜롭고 멋진 관리자에 대한 그리움과 그리고 편안한 안식’을 동반한다. 항상 ‘뒤처리는 내가 할 꺼이니 너거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밑의 부하들을 믿은 진정한 선배 교사에 대한 묘사가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것은 김연화 수필이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나는 강점이다.
삶의 방향을 물어대던 우리 몇몇의 가슴에는 아픈 일곱 번째 달이 떠 있습니다. 이 세상 마련 없이 훌훌 떠나셨기에 꿈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누군가의 변명처럼 죽음 중 제일은 심장마비라 여기며 마음 다스립니다. 그래도 길 가다 길 잃으면 물어볼 곳이 없어 멍하니 그냥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면 기댈 곳 없어 눈만 껌벅거립니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는 아직도 아프고, 아프면 꼼짝 않고 조용히 웅크립니다. 고통도 별 것 아니라지만, 심장에 새겨진 달은 종종 아픔으로 뚱하니 얼얼합니다. 살아계신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 <일곱 개 뜬 달> 중에서 -
인용된 표현에는 닮고 싶은 스승의 삶이 역력하게 묻어난다. 그분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작가에게 어떤 분이었는지 아는 데에 화려한 수사가 필요 없다 ‘살아계신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는 표현에 너무도 잘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 수필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나의 고통을 껴안아, 나를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작품은 이외에도 수두룩하다. 이 작품은 선배의 의로운 삶을 간접화해서 문학적 정서로 잘 표현하고 있다. 스승의 내면을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은 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는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스승에 대한 따뜻한 동정이야말로 공감의 통로다. “길 가다 길 잃으면 물어볼 곳이 없어 멍하니 그냥 서 있습니다.”고 한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과 깊은 이해를 나타내며, 비유법에 의한 상상의 이미지가 감동의 고지로 독자를 유도한다.
‘고통도 별 것 아니라지만, 심장에 새겨진 달은 종종 아픔으로 뚱하니 얼얼합니다.’라는 표현 역시 절경을 이룬다. ‘스승을 잃은 슬픔’을 ‘심장에 새겨진 달’로 은유한 것도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치면 기댈 곳 없어 눈만 껌벅거립니다.‘는 표현도 묘사를 통한 상상력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이다. 그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창작의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 언어를 부리는 탁월한 역량이 그녀의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인 셈이다.
2. 탈영토화를 위한 탈주, 그 여정
또 하나, 김연화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탈영토화를 위한 탈주성이다. 김연화 수필의 상당수 작품들이 여행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으로, 심리 치료, 구원 구제의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결말 구도가 탈주를 통해 문제 해결의 구도로 설정되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족, 자기 비하, 시기심, 열등감, 우울증, 열패감 같은 한두 가지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피해의식의 부정적인 경험은 잘못된 세계관을 형성하고, 파괴적이고 비관적인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김연화는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정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를 도와주려고 한다. 내출혈의 독백이 그 증거고, 단서다. <나무 그늘>은 이런 화해 구도를 가진 대표적인 수필이다.
복어독 같은 독소가 뿜어져 나오는 나를 살려내야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매일 밤 사채업자가 집 안을 들락날락하는 고단한 일상에서 아이들은 메말라 갔고 나는 야위어 비틀어지고 있었다. 아들은 풀리짖 않은 속병으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하고, 강한 척 식구들은 위로하던 어린 딸은 깊이 숨어 번득이는 두려움으로 밤마다 눈을 감고 엄마품을 찾아다녔다. 난 노란 쓸개즙을 게워내며 십오 층 아파트 아래를 깊은 심연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곷없는 칠레가시 같은 아이들의 마음에서 가시를 솎아야 했다. 큰 나무 그늘이 절실했다. 오로지 생활과 싸누느라 누르고 눌러만 왔던 스크레스가 일본행으로 불길같이 뻗쳤다. 처연히 떠나리라. 카드의 마지막 남은 액수를 뽑아내서 일본행 배표와 일본철도 일 주일 권을 끊었다. 주먹밥과 김 몇 장, 조금의 밑반찬과 보온병 하나, 수저 세 벌이 가방에 들어있었다.
-<나무 그늘> 중에서 -
위의 인용문은 발단부 첫 문단으로, 작가가 생활의 중압감을 드러낸 것이다. 결말은 치유로 마무리된다. 가족들이 사체업자가 들락날락하는 일상에서 힘들어 하자, 그녀는 이런 환경에서 탈주를 계획하고 일본으로 떠날 짐을 싼다. 김연화는 이런 수필의 치료적 특성을 잘 활용하여 떠남으로써 에세이 테라피 효과를 구축하고 있다. 체험을 통한 자기 수양과 용서의 미학으로 반성적 성찰을 구축함으로써 수필을 영혼을 치료하는 데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수필을 통해서 작가는 삶의 온갖 억압 기제 속에서 틀어박혀 새로운 사고나 도전을 거부하며 가족들이 살아가게 할 순 없다는 것이다. 수필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하고 영혼의 치료사인 까닭이다. 일단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을 건설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희생자라는 사실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스스로를 부정적이고 인생의 실패자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바람직하지 못한 일상은 탈주로 해결한다.
또한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한다. 짐을 싸는 탈주는 이런 '피해자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 여행이 큰 나무 그림자를 만드는 일의 시작이었다.’는 결말부 문장은 여행이 구원과 힐링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필을 선택한 이상, 더 이상 피해의식의 덫에 빠져 아웃사이더나 실패자로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김연화 수필은 결말의 화해의 구도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감으로써 자신의 고통과 심리불안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책임회피와 보상심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역할극을 하는 것이다. 삶의 문학이자, 인간학인 수필은 화해 해결 구도를 통해 독자들이 타인과 화해하고 세상과도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필 <나무 그늘>에서 드러나는 김연화 작가의 생각이 그렇다.
사람마다 고통을 대하는 모습이 다를 터이다. 내 눈이 아프다며 아침마다 바위덩어리만한 눈곱을 밀어내고, 여기저기 머리 주름 사이로 검은 피가 몰려다니며 아픔을 호소하고, 시시로 때때로 심장이 고통스럽다며 비명을 질러대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반년이 지나자 몸이 아니고 정신이 못 참겠다며 정신줄을 들었다 놓았다 흔들어댄다. 겨울밤 전깃줄 사이로 흐르는 바람처럼 정신줄이 운다. 떠나야만 했다. 고통을 배가시키는 하이에나는 삼각형 못 마땅한 눈꼬리로 떠나는 나를 쏘아보고 있다.
- <북해도> 중에서 -
김연화 수필의 가장 강한 특징은 손맛의 유려함이다. 존재의 집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그녀는 문학의 재미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축한다. 그녀는 참신한 발상과 비유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아픔을 호소하는 몸의 신호를 예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수필 <북해도>는 구조면에서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잘 갖춰져 있어 명료성을 준다. 특히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돕는 발단부 묘사는 매우 역동성이면서 시청각적 이미지의 보고다. 발단부의 전개예고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의 인식은 수필 감상의 흥미를 더한다. 무엇보다도 김연화 수필을 읽는 매력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깊은 명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겨울밤 전깃줄 사이로 흐르는 바람처럼 정신줄이 운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 소리를 회화화하여 현실의 삶에 투사시켜 내는 작가의 저력으로 그녀의 작품은 예술적인 향기를 풍긴다고 하겠다.
전깃줄에 대한 정신줄의 은유나 비유 등의 수사법에 의해 그 이미지가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 수사적 장치 형성은 독자로 하여금 연상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여기서 작자는 ‘바위덩이만한 눈곱을 밀어내고’ ‘검은 피가 몰려다니고’ ‘정신이 못 참겠다며 정신줄을 들었다 놓았다’ ‘고통을 배가시키는 하이에나는’ ‘삼각형 못 마땅한 눈꼬리로 떠나는 나를 쏘아 보고 있다’ 등의 비유를 통해서 관념을 감각화시킴으로써, 독자는 상상과 연상에 의해서 고통을 전깃줄의 울음소리로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이 같은 물화에 의한 의미의 전달과 이해의 과정이 왜 필요할까? 가장 빠르고 정확한 표현은 직접적 설명일 것이다. 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산문은 이런 형태를 따른다. 그렇지만 김연화는 빠르고 정확한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전달의 효율성을 따진다. 얼마만큼 감동적이냐가 성패를 가르기에 그래서 수사적 장치를 최대한 활용한다. 감동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설명적인 글은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런 흥미 유발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도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고통을 배가시키는 하이에나는 삼각형 못 마땅한 눈꼬리로 떠나는 나를 쏘아보고 있다.’는 묘사로 그녀는작품을 음미하며, 문장을 소화하며 작품을 완성시켜 나가도록 독자를 돕는다.
부지런하지도 않으면서 늘 바깥세상이 궁금하다. 익숙한 길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한다. 강에는 물안개가 피었는지, 골골이 안개가 꿈처럼 흘러 다니는지, 이 새벽을 못 참아내고 그예 벌떡 일어선다. 파라호에는 물안개 대신 일엽편주 두둥실, 물에 떨어진 두 개의 해가 있다. 삼차산업의 장이 열리고, 맞은 산 넘어 사악한 음모의 소리가 가슴을 후비면서, 오소소 소름 돋는 아카시아향이 불안한 마음을 부추긴다. 털어내고 싶다. 그만 혼란한 정신을 간추리고 싶다.
- <사람을 만나다> 중에서 -
김연화 수필이 주는 맛이 어찌 손맛뿐이겠는가. 향기 또한 가득하다. ‘익숙한 길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수필의 제재를 통해 그녀가 여행 매니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털어내고 싶다. 그만 혼란한 정신을 간추리고 싶다.’ 라는 표현에서 일상을 바로 세우고 싶다는 그녀의 염원과 도전정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겠다. ‘파라호에는 물안개 대신 일엽편주 두둥실, 물에 떨어진 두 개의 해가 있다.’는 진술을 통해 독자는 스스로의 상상력에 의해서 작가의 내면세계의 깊이를 그려 나갈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적 진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유를 풀어내면서 문맥 속의 본래 의미를 발견해 나갈 때의 감동은 작자가 직접 설명으로 전해 준 경우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즉 <사람을 만나다>에서 사실적 묘사를 따라가다가 그 뒤에 숨겨진 작가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땅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같다. 사실 이 작품의 두 번째 단락에서 ‘붕어섬에는 물이 들려주는 바람소리가 있다. 왜가리가 개구리 잡아먹는 소리, 개구리 죽어가는 소리, 미루나무에 아침이 걸리는 소리, 등등 여러 가지 소리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표현들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 들끓는 무거운 생각들이 작가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은 매우 크다. 이 이상 감동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주변인과 타자를 향한, 그 시선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포커스를 놓는 삶의 태도는 인문학적이다. 김연화 수필의 한 줄기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을 향한다는 차원에서 그 출발점이 인문학에 있다고 하겠다. 푸코는 권력은 사회적 힘들의 관계이며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지배 권력으로부터 저항하고 탈주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적 생성력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들뢰즈는 권력에 대한 지향의지와, 이를 통제하고 이탈하려는 양면적 의지를 통틀어서 ‘욕망’으로 설정한다. 권력이라는 것은 오이디푸스적인 것이며 질서와 자아, 주체성뿐만 아니라 억압과 체계화, 표준화, 총체화의 문제이다. 또한 그 이면에는 언제나 탈주와 빈틈과 누출과 새로운 혁명적 생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이들을 탈주선이라고 부른다. 환언하면 욕망이란 억압의 지배 권력의지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고 저항하며 그것을 넘어서려는 탈주의지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작가는 글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난>에서는 관습적인 관행에서 이탈하고 저항하며 그것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탈주의지가 보인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마지막 보루라 여겨지는 교사들에게 영전 시 전해지는 난분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춘 듯하다. 그러나 한 명의 선비에게 고십 개의 난은 너무 무겁다. 오십 개가 아니라 백 개의 난은 선비의 이미지를 땅으로 내동댕이친다. 언제부터인가 배달되어 오는 난들이 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저 개체 한 개 대신 쌀 한 말이 오면, 오늘 아침 구십 도 꺽어진 허리로 땅을 보며 빈 상자 서른 개를 실은 밀차를 끌고 오르막 오르던 할머니네 집 앞에 던져 놓아도 좋으련만. 저 난 두 개 값이면 전기 끊겨 밤이 적막강산 같은 까치고개 할아버지네 전기 이어주고 텔레비전이라도 밝혀 드릴텐데...... 저 난 서른 개 값이면 미얀마의 마부 안츄어링에게 아름다운 마차 한 대를 선물해 평생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줄텐데...... 아니 저 난 열 개만 하면 다리가 헐어 고름이 줄줄 흘러도 치료받을 수 없었던 인도의 릭샤에게 근사한 자전거 달린 마차 한 대 선물해 어린 아이 셋 잘 기를 수 있을 터이다.
- <난> 중에서 -
탈주와 이탈의 욕망운동이 절대 가벼움의 세계를 도출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배 권력으로부터 이탈하는 소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 그것만이 새로운 창조적 생성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원래 철학적 의미에서 소수자라 함은 권력이 부과하는 다수자의 모델을 거부하고 욕망의 탈주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작가는 전통적으로 가지는 권력을 따르는 다수자가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당당히 소수자로서의 탈주선을 그린다. ‘누구보다도 교단에 선 사람은 선비정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라며 영전 시에 주고받는 난 선물세례에 작가는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타자를 도와준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권력을 가진 자나 재물을 가진 자가 먼저 선을 베푼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시작이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환경이 직조됨을 의미한다. 선비 정신 속에 가려진 교사의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기에 자신도 역시 기꺼이 소수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현 시대의 마지막 선비군이 교사들이라 감히 자신할 수 있는가. 세상을, 삶을 관조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선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을 땅을 환경을 나를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리라.’ 고 외치고 있는 작가다. ‘책상의 상판 모서리 위에 앉은 먼지를 논하고 선비인 척 하는 사람은 영도 앞바다의 작은 자갈 하나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지 않은가. 교사가 선비가 아닌데 어찌 우리가 선비를 길러낼 수 있는가.’라며 작가는 교사들의 선비정신이 현실인식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대단한 의식이다. 작가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관습과 관례에 저항한다. 작가는 저항 주체여야 한다. 그녀는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자족과 자기 분수를 아는 까닭이다. 작가의 말대로 ‘교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없는, 그렇다고 북풍한설 몰아치는 거리로 나설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선비들’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에 거미줄 몇 가닥 덤으로 붙이고 돌아서는 마지막길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시월의 가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 생엔 나무가 되고 싶다. 하늘을 이고 서서 홀로 명상하고, 가진 것 모두 풍성하게 나누어주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의 마지막엔 이 밤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가지를 꺽어도 원망 없고, 온 힘 다하여 열매 맺은 밤도 두루 널리 떨구어주며, 같이 살아지고 싶다. 생을 많이 닦아야 나무가 될 수 있다고 하니, 힘 다하여 남은 생을 가꾸어야겠다. 밤빛 같은 말년을 바라며,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밤나무가 주는 인생을 너울너울 줍는다.
- <밤나무> 중에서 -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조화’요, ‘배려’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다음 생엔 나무가 되고 싶다. 하늘을 이고 서서 홀로 명상하고, 가진 것 모두 풍성하게 나누어주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는 이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 수필 <밤나무>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오랜 방황과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김연화의 수필세계임을 알 수 있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배어있는 따스한 정이 놓일 때, 좋은 수필이 완성된다. ‘삶의 마지막엔 이 밤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가지를 꺽어도 원망 없고, 온 힘 다하여 열매 맺은 밤도 두루 널리 떨구어주며, 같이 살아지고 싶다.’는 김연화가 혼신의 힘으로 그려낸 이런 정스민 수필은 한국 수필 전체와 맞서 있는 거대한 기념품이다. 그녀는 머리보다 가슴에 와 닿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이 수필 속에는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끌어올려주는 깊이가 있다. 자신을 비운 자리에 순수를 채우는 일이 김연화에겐 숙명 같은 일이다. 타자의식을 통해 겸허한 자신을 쓰다듬는 자기 성찰의 모습에서 독자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우수잡지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한국에세이 작품상을 수상한 김연화 작가가 본격수필이라는 화두를 달고 이렇게 수필집을 엮어내지 않았다면 얼마나 적조했을까.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가난한 제자들과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현실에 부딪치는 일이 이 땅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육자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통해 작가가 인간적 향내를 풍기고자 하는 것은 김연화 수필이 지닌 가치 평가에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하겠다.
4. 자성을 통한 갈등의 연소, 그 순수
수필은 삶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뿌리로 하여 그 가치를 펼치고, 잎을 키우는 한 그루 나무다. 그래서 김연화에게는 자신의 삶만큼 절실한 관심의 대상도 있을 수 없다. 김연화 수필의 네 갈래 길에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조명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겠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정서가 ‘외로움’과 ‘사랑’이다. 인간에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없다면 언제나 만족스럽고 꽉 있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만족감을 오래 누리고 있지를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일거리를 만들고 소일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작가는 서울올림픽의 해에 특히 많이 힘들었다. 고통스럽다는 정서는 이미 창작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열악한 환경에 이식되었으며, 도둑, 소매치기, 질병들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는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미장원 강도까지 나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녀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한 발이라도 담그고 게으르게라도 수련을 시작해 보고자 했다. 스쿠버를 해 보면 바닷속에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이해하고, 동굴탐험을 해 보면 땅 밑에 또 다른 지상 세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듯이, 수련을 해보면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가 실재함을 믿을 수 있으리라. 요가나 명상이나 기도나 단전호흡이나 또 다른 무엇이라도,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치열한 길은 같으리라 여겨진다. 그 길 따라 내 안으로 들어가 보면 무언가 보이리라. 그 끝없는 무한한 세계를 향해 내 좋은 사람들과 ‘같이’ 걸어가서 ‘가치’를 확인하고 싶다.
- <단전호흡> 중에서 -
작가는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말하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기회를 엿본다. 그러고 보면 앞에서 읽은 <가방>이라는 작품도 오늘의 현재를 반추하기 위한 성찰의 키워드였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연화의 작품은 수필의 세계가 고수해야 할 실제적 사실성을 전체적으로 유지해 나가면서 이것을 유추해 낼 수 있는 상징적 세계로서 사물을 옮겨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법은 사실성 자체로 시작되고 끝나는 다른 수필에 비해서 더욱 예술성을 높이게 된다. 모든 문학은 한 마디의 말과 구와 절과 문장의 바른 해석이 따라야 하고, 전체 주제 파악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필에 비해서 김연화의 경우는 작자의 창의적 상상력만큼 독자도 많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려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뒤에 가려진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 그리고 더 나가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작가의 삶과 애환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끝없는 무한한 세계를 향해 내 좋은 사람들과 ‘같이’ 걸어가서 ‘가치’를 확인하고 싶다.‘는 결말부 마지막 진술은 김연화 수필의 문학적 가치와 함께 그녀의 고고한 정신세계까지 엿볼 수 있게 하는 압권의 문장인 것이다.
새해다. 몸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 한 번도 사랑하지 못 햇던 내 몸을 사랑해 보아야겠다. 관심을 가지고 아프면 제 시간에 병원에 가고 힘이 부칠 때는 몸을 보할 수 있는 약도 먹어야겠다. 사과가 몸에 좋다고 하여 하루 다섯 개씩 먹다가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는 판정을 받고는 다음날 바로 사과를 끊어버린 교수님의 자세를 본받아야 하리. 윗몸 일으키기를 백 개쯤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자식에 짐이 되지 않을 정도의 몸은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깨달아 다짐하고 바르게 행하고 싶다. 골고루 뿌려지는 햇살처럼 핏줄 속의 피가 온 몸으로 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몸> 중에서 -
맹자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이를 지나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가 연구하던 ‘이미지의 현상학’에 대하여 그것은 “혼의 울림, 즉 미적 감동을 추적하는 일 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상상력에 의해서 원형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의 감동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식에 짐이 되지 않을 정도의 몸은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에서 미적 쾌락은 문장의 구조나 묘사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은 수필에 있어서 생명적이다. 그만큼 수필은 표현을 중시한다. 김연화가 구사하는 언어는 적절한 표현의 옷을 입고 있어 감동을 준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골고루 뿌려지는 햇살처럼 핏줄 속의 피가 온 몸으로 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 비유적 표현 속에는 생명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놀라움은 즐거운 미적 감동을 준다. 다만 바슐라르가 주로 물. 불. 흙. 공기 같은 사물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논해 간 것과 달리 수필로 환생한 <몸>에는 스스로 몸을 사랑하지 않아 얻어진 자욱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김연화의 인간사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아마 ‘가방’과 ‘자동차’일 것이다. 전봇대, 흑곰, 연꽃내음, 자연성, 아정, 국민배우 등 자신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는 듯 없는 듯 단어들이 김연화 곁에 머물고 있지만 현재 작가의 형상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이 ‘가방’으로 인해 생긴 또 하나의 이름, 짐연화다. ‘가방은 내 삶의 축소판이다’라고 하는 작가에게 ‘자동차’ 역시 가방만큼 소중한 존재다. <애마>는 작가는 빚잔치 끝에 남은 십오년이나 된 자가용에 관한 수필이다. ‘무모한 주인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고 애마를 위로하는 이 수필이 주는 가치와 힘은 올곧은 인간 정신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 이별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현실의 메마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이라는 환상의 프리즘이 아닌가. 눈물의 습기를 통해 인간은 때로 황홀한 기적 같은 것들과 만날 수 있다. 작가는 폐차장 다큐를 보다가 급기야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슬픔이라는 정서의 결과이다. 눈물은 적절히 절제될 때 아름답지만, 눈물을 진실로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그것 또한 인생의 아름다움일 수 있다. 만남과 이별이라는 이 절묘한 서정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찌하면 폐차장으로 끌여가 장기를 기증하듯 필요한 부품은 뜯겨내어지고, 마지막 골체는 납작하니 뭉그러진 채 사라지는 바람소리 같은 이별의 인연을 허망하지 않은 만남의 흐름으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기다림이라는 참을성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여지껏 단 한 번도 주인을 길 위에 내팽개친 적이 없는 고마운 피붙이다’는 문구에 그 해답이 배여 있다. 이것 또한 문학의 세상이 자신에게 봉사한 자에게 마련해 주어야 하는 커다란 힘이어야 할 것이다.
기도 말미에 갑자기 눈물이 솟는다. 새해 새 아침부터 눈물바람으로 기도하지 않으려 애써 참는다. 오래 같이 하지 못할 어머니에게 살아생전 자그마한 직함 하나는 내밀고 싶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어 하다못해 교감 며느리라 말하는 시어머니께 진실을 선물하고 싶다. 아버지 생전에 드리지 못한 명함을 유택 앞에라도 바치고 싶다. 열심히 살면 작은 것이라도 바라는 대로 이울 수 있다는 증거를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 십여 년부터 해마다 마음 졸이던 형제들에게도 이제 마음고생을 그만시키고 싶다.
- <기도> 중에서 -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수필 <기도>는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 실린 작품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열심히 살면 작은 것이라도 바라는 대로 이울 수 있다는 증거를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와 같이 수필은 내면의 고백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첫 기도는 동분서주하지 말고 오롯이 나만을 위한 기도가 되길 바라며 기도터를 잡는다’는 고백에는 상상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수필만의 고유한 예술적 기법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의 허구성이나 시의 압축적 언어와 달리 이것은 상상 아닌 실제적 사실의 세계를 전제로 하고 그 내면에서 또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상징적 연상으로 병행시켜 나가는 형태이며, 이는 오직 수필만이 가능한 특수한 상상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예술성은 물론 다양한 복합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생전에 드리지 못한 명함을 유택 앞에라도 바치고 싶다.’와 같은 문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예술성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이다. 상상에 의한 구체화로 이어지는 연상기법이다. <기도>에서 보이는 이런 독자적인 기법은 김연화 수필의 우월성을 확보해 준다.
외면의 소용돌이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선물한다. 변방으로 쫓겨남아 내면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속으로 보내준다. 이전에도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이 공부를 시작하게 해 주었고, 교문을 발로 차며 들어갔던 학교는 형제 같은 동료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지지리도 궁상맞은 여행이 마음의 부를 일궈내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제막된 뇌 안에 새겨진 강한 훈화말씀을 꼭 기억할 일이다. 돌아보면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다.
- <제막식> 중에서 -
김연화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제막식>은 ‘감은 눈 속에서, 칭칭 감고 있던 덩굴이 벗겨지며 흰 연산홍이 말간 얼굴로 서 있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작가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싶은 상대방의 마음과 욕설에 날마다 금을 긋는다.’ 어느 날 측은지심이든, 용서심이든 마음이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선다. 작가는 이를 축복으로 여긴다. ‘외면의 소용돌이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선물한다.’라는 깨달음에서 작가는 전화위복의 가치를 발견하고 용서의 미학을 추구한다. 작가는 제막식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그렇게 해서 그림자를 드러낸다. 이렇게 형성된 그림자는 투사의 기전으로 제막식을 통해 나타난다.
자기 성찰을 할 때 투사는 오히려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림자는 인격에서 제외된 부분이다.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우리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미움의 제막식이란 투사를 통해 작자는 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을 지평선 위의 한 점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미움의 제막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문을 발로 차며 들어갔던 학교는 형제 같은 동료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지지리도 궁상맞은 여행이 마음의 부를 일궈내었다.’는 표현은 제막식이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필은 전화위복을 통한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III. 나가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연화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상사의 보고에 치중하는 생활서정에만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묘사를 통한 예술성 추구라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수필의 문학성을 새삼 확인해준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자신의 수필들을 네 부류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놓았다. 제1부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제2부는 국내 및 국외로 여행에 녹아난 글들로 채워졌다면, 제3부는 주변인 타자를 통해 느낀 세상사의 소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제4부는 나에 대한 사색과 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다양한 내용 구성과 그녀만의 독특한 묘사적 기법 등의 형식을 통해 결국 글은 그 사람이라는 등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수필세계는 김연화라고 하는 한 작가의 정신적 성장사요, 화자의 사상적 변증의 역사라 할 것이다. 수필을 읽는 가장 큰 매력이 작가의 내면 풍경을 보는 것이라면, 화자만큼 자신의 심중에 있는 그림자와 체취를 수필에 투영시킨 작가는 드물지 않을까 여겨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의 사유를 하는 사람과 되기의 사유를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이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사람과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는 사람은 다르다. 김연화는 수필가이기 때문에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기호체계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수필가는 본격수필가의 세계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수필이 문학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수필이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김연화는 기존의 영토적 틀을 벗어던져버리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접속 속에서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녀의 수필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찾고자 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적 이상에의 의지, 그러한 사상의 유산이다. ‘선비되기’의 정신으로 수필을 쓰면, 들뢰즈의 철학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군 속에 언젠가 김연화도 이름을 새길 날이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대로 글쓰기의 고해성사란 새로운 출발을 예감하는 ‘통과의례’일 뿐 그 자체가 미래의 길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수필집은 김연화 수필의 완성태가 아니라, 그의 수필이 앞으로 걸어나갈 기나긴 장정을 알리는 ‘출사표’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연화는 상상력을 통해 미의식을 추구하고, 구성적 메타포의 존재론적 의미화를 통해, 창조적 생성의 탈주선을 그리며 ‘선비되기’를 희망하는 열린 의식의 작가인 것이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기를 위무하고, 나아가 수필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려는 구도적인 자세로 인해 그녀의 수필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문학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와 창조적 사상 그리고 선비되기의 정신 속에 교육의 참된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조망하고 있다는 것을 김연화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직 좋은 수필 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초보 수필가들에게 또는 어떻게 하면 감동이 생기는지 알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김연화의 수필집을 길라잡이로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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