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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 거지 나사로>의 줄거리: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이 직접 창작하여서 내게 제시하신 유일한 롤모델입니다.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성공의 상징들을 바라보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하신 우리의 목표는 절대 궁핍의 상징인 거지 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에 나를 포개는 행복함을 경험해보셨나요?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 거지 나사로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 거지 나사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 거지 나사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되풀이해서 방송 일정이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내일 목요일은 오늘의 번제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래 수요일 10시에 하던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이 목요일 10시로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일정을 따라서 오늘의 번제와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이 2시간가량 진행되기 때문에 영상으로 참가하시기 어려우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운로드를 받으셔서 부담 없이 들으실 수 있도록 음성파일도 함께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 홈페이지(http://www.everyday01.com)에 접속하셔서 “십자가온라인교회”로 들어오시면 유튜브 녹화 영상을 보시거나 음성 파일을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다만 제목에서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가 거지 나사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생활화 노래를 부르더니 기껏해야 목표로 거지 나사로라니 의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마음속에 늘 거지 나사로의 모습을 그리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사로의 모습 그리기는 십자가 생활화에 의해서 도달하게 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해주는 효과를 갖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이 직접 창작하신 이야기 속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나사로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 세상에서 내가 의식 안에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14장 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버려야 될 소유 중에는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비전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허락된 유일한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창작물인 거지 나사로입니다.
앞서 거지 나사로를 목표로 하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 상담하시는 분들 중에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어렵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고민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이 십자가 생활화를 원활하게 하실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이 제 사역의 정체성이라고 보아도 좋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당부를 드리자면 십자가 생활화는 거지 나사로의 상황에 나를 포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거지 나사로는 비전이고 목표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거지 나사로와 포개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거지 나사로는 구원의 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포개질 수 없다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나를 포개는 것은 자유로움이며 성공입니다. 아무리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운 상황에서도 거지 나사로를 떠올리며 십자가를 붙잡으면 당장 위로가 주어집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포개짐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되기에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최고봉이 거지 나사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는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비전이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지 나사로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조금도 맛볼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거지 나사로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으로 예비하신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나를 포개는 것은 절대자유와 절대위로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말해온 절대평강과 절대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거지 나사로의 자리에 여러분을 포개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두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창작물이기에 이들 또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부자에 대해서는 익명으로 두시고 이에 대비되는 거지에 대해서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죽게 되어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게 되고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 이야기 자체는 창작물이지만 음부와 낙원의 개념은 허구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옥에 가기 전에 음부라는 중간 단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천국에 대해서도 낙원이라는 중간 단계가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믿음을 그대로 수용하셔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중간단계로서의 음부나 낙원이 있든지 없든지 그 중간단계를 염두에 둔 믿음에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낙원으로 갔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선민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모두 선택받은 선민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선민이었음을 강조하신 것이고, 나사로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으로써 선민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부자 또한 선민이었기에 비록 음부에 갔으나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보좌 우편에 가고자 하는 것이 선민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으로서 부자도 선택하시고 거지 나사로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올바르게 응답한 사람은 거지 나사로뿐이었습니다. 선민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올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선민으로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선민들 중에서 허락받은 구원을 내 것으로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비유가 앞선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구원을 내 것으로 받아들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소유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거지 나사로에 나를 포갤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허구의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포갤 수 있는 두 가지 인물상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마음을 포갤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부자에게 마음이 포개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산해진미가 차려진 밥상을 제공받아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공받은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을 수도 있지만, 자장면 라면 떡볶이를 먹느라고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먹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쫄쫄 굶었다가 산해진미를 먹게 된 사람이 거지 나사로라면, 자장면 먹고 라면 먹고 떡볶이 먹고 순대 먹느라 산해진미를 포기한 사람이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산해진미를 먹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떡볶이나 순대에 대해서는 쫄쫄 굶는 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환경에 놓인 나사로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십니다. 거지 나사로는 절대 궁핍이 삶의 환경뿐만 아니라 몸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와있는 상태였습니다. 20절을 보면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 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라고 하였습니다. 버려졌다는 것은 던져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장애인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부자의 집 앞에서 구걸이라도 하라고 던져지듯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21절을 보면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욥이 그랬던 것처럼 몸에 헌데가 나서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단순히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온전치 못하여 절대 궁핍이 뼛속까지 스며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개들이 핥았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나사로의 존재감과 자존감이 제로였음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개들은 집에서 키우는 개들이 아닙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들개들이었습니다. 그 들개들이 상처를 핥아주고 그것을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부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19절에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자색 옷감이나 고운 베 옷감은 1kg를 구입하고자 한다면 금 2kg를 주어야 할 만큼 귀한 재료였습니다. 부자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식솔들도 그렇게 살았을 테니 최고의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살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들이 죽은 뒤에도 거지 나사로는 쓰레기를 치우듯이 시체가 버려졌을 것이고, 부자는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고 웅대한 장례식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고 나서 보니 나사로는 아름다운 낙원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음부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 속의 상황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닥칠 현실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 비유에서 주석가들이 해석하기에 무척 애를 먹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간 이유와 부자가 구원받지 못하여 음부에 떨어진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거의 모든 성경연구가들이 공통적으로 해석의 난해함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난해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구원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제시하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해석도 온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동소이하고 천편일률적으로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아서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가 막히고 통탄할만한 오해입니다. 성경학자들조차 구원의 기준을 알지 못했기에 이러한 해석을 읽는 일반 성도들은 더욱 구원의 기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 이후로는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준을 절대 놓치지 말자는 의도에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한 주석을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석을 보면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자는 특별히 죄가 없이 음부에 간 반면, 거지 나사로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고통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낙원에 갔다는 점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과연 부자가 특별한 죄 없이 음부에 들어갔고, 나사로가 세상에서 고통당했다는 이유에서 낙원에 들어간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학 박사라는 분들이 이러한 해석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심지어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누가는 9장 51절 이후로부터 19장까지 예수님께서 별세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심을 명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도적인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 또한 별세의 과정 중에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주석을 계속 읽어보면 “따라서 본 비유는 기독교의 구원관과 다소 거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비유란 언제나 진리의 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그것 자체로 모든 진리를 종합적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용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지 구원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학자들의 주석을 참고로 하여 만든 그랜드종합주석의 내용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대부분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구원의 기준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지 나사로가 낙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고’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의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입니다. 여기서 ‘파라’는 ‘곁으로’라는 뜻이고 ‘칼레오’는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당신 옆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기에 그러므로 음부로 가게 되었고, 나사로는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아서 그러므로 낙원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도 성경학자들이 부자가 음부에 갈만한 죄가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고 누린 것이 지옥에 가야될 이유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오신 여러분들은 하나님 대신에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한 것이 왜 죄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한편 나사로는 그 이름부터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만을 좋아한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도 마음의 공백은 무엇으로라도 채워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에게는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나사로가 낙원에 들어간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마음 채움 거리로 붙잡고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낙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자는 궁핍한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아서 음부에 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것을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기준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두 인물의 상황을 대비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코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돕네 마네를 문제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부자는 살아서 좋은 것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이란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져서 기쁘고 만족하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좋아함이란 곧 그것을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지리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곧 좋아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살아서 돈이 많고 풍족하였기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가치를 누렸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절대 궁핍의 상황에서 심지어 장애인이었고 피부병까지 나서 개들이 핥는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의미대로 나사로는 돈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조금이라도 나를 도와준다면 좋겠다, 내가 조금만 건강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돈이 없지만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다. 내가 장애인이지만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건강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다. 내 몸에 헌데가 나서 개들이 핥고 있지만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하나님뿐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가 하나님 곁으로 부름을 받아 위로를 얻게 된 이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누가는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별세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에 나타나는 일을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될 자리가 바로 거지 나사로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편 24절 이후를 보면 부자의 간청이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26절을 보면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부자는 나사로를 세상으로 보내서 다섯 형제들이 음부로 오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그 또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2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생기는 것이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어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 기적을 떠올리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는 예수님의 모든 사건이 말씀을 통해 전달이 되었을 뿐인데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순교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허락하셨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모임을 인도한지 두세 달이 되도록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 같아서 시작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확신이 듭니다. 제가 머뭇거리며 주저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삶의 사건들을 통해서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이셨습니다.
이제 깨닫기는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통해 진짜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하였듯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무엇이고, 십자가 생활화가 무엇이고, 천국이 무엇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고, 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르게 많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현재 기독교에서는 세상을 소유하는 상태가 문제시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배우자나 자녀를 담은 상태를 미워하지 못하고 문제시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온라인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모습이 당연시되고 있는 상태를 문제시하면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는 거지 나사로에 나를 포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전으로 제시하신 거지 나사로에게 나를 온전히 포갤 수 있을 때 어떤 자유와 행복과 평강이 주어지는지 꼭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창작물인 거지 나사로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사로가 십자가를 붙잡고 도달하고 싶은 강렬한 열정과 열망의 대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 할 것이나, 미친 자로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절대자유와 절대위로와 절대기쁨을 나사로가 되어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