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어떤 일이 불합리하다는 것이 그것을 폐기해버리는 최우선적인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합리하기에 오히려 그 같은 일을 필요로 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어떤 일이 불합리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대체로 추진하지 않고 폐기한다. 그런데 폐기해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불합리’여서는 안 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한술 더 떠 니체는 ‘불합리’야말로 일을 추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왜 그럴까?
불합리하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치란 많은 경험을 통해서 반복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러할 뿐 아니라 마땅한 것으로 간주되는 원리나 규칙을 뜻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가지의 앎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새로움도 있고 모름은 훨씬 더 많다. 새로움이 익숙함의 눈에는 불합리로 보일 수도 있다. 모름이 앎의 틀에서 불합리로 보이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불합리를 이유로 이를 폐기한다면 우리는 안타깝게도 새로움을 만날 기회를 져버리게 된다. 확실하게 모르는 바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지만, 단순히 지금까지의 앎만으로 우리 미래까지 재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다. 모름을 쉽게 외면하면 어리석게 된다. 모름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실로 불합리가 앎에 담기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앎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넓이와 크기, 높이와 깊이를 지닌 삶에서는 불합리가 넘실거린다. 아니, 합리적인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삶을 솔직하게 돌이켜보자. 우리가 얼마나 이성적으로 추리고 판단하면서 살고 있는가? 조금만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합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합리의 힘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우리가 파악하는 ‘이치’에 부합하기만 하지 않는다는 통찰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 초대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일찍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자.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아니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니? 이렇게 ‘불합리하고’ 황당한 말이 있을까? 이렇게 설명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하고 개탄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이 명제를 합리적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로 바꾸어야 한다. 생각할 수 있다. 자고로 믿음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이니 불합리도 불사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합리적인 것은 당연히 믿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떤 것이 합리적이라면 믿고 말고 할 이유가 있을까? 믿지 않아도 합리적인 것은 여전히 합리적이다. 굳이 믿을 필요가 없다. 이는 믿음을 이성에 복속시키는 것이어서 믿음이 지닌 마땅한 고유성과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오류일 뿐이다.
삶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훨씬 작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믿음이 훨씬 더 크게 역할하고 작용한다. 그것이 ‘신념’이든 ‘독단’이든 우리는 ‘무의식적인 믿음의 방향’이 더 크게 작용하는 삶을 살고 있다. 불합리를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청림출판,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