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대부분 학문이 깊고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리들로서 조선왕정을 이끌어가던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관리들 중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16세의 어린나이에 소과시험인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소과는 유교경전 지식을 알아보는 생원시,시(詩)와 부(賦)의 창작능력을 시험하는 진사시가 있었다.
바로 황사영 알렉시오이다.
총명함과 뛰어남으로 정조임금은 그의 손목을 꼭 잡고 다닐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황사영은 임금의 성은을 입었으니 임금이 잡았던 손목에 명주 천을 감고 다녔다고 한다.
황사영은 그 천을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단다.
그의 뛰어남은 이미 유전자가 그렇게 형성되었던 것 같다.
황사영은 당시 뛰어난 실학자 가정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정약용 맏형 정약현으로 그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였다.
정약현은 당시 대학자 이벽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처럼 황사영은 당대 내노라 하는 명문가와 혼인을 맺었던 거다.
그의 세속의 출세 길은 천주교를 만나면서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바로 위의 형 정약종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복음선포를 위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입교직후 신해박해가 일어났으나 세속과 결별하고 신앙을 굳게 지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배론으로 은거하여
북경주교에게 보낼 조선의 천주교박해사실을 기록하였다.
신자 30여명의 박해사실과 당쟁으로 인하여 천주교 박해가 발생한 원인,
그 치유책등을 13,311자를 깨알같이 기록한 밀서를 보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체포되어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다시 여섯 토막으로 잘리는 육시를 당하였다.
그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대정읍의 관노로 보내졌으며
어린 아들 황경헌은 추자도에 내려져 황씨가 추자도에 최초로 발을 딛게 되었던 거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홍복산 선영에서 발견되었으며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함께 발견되어 황사영의 시신으로 확인되었다.
흥복산 자락에 황사영의 묘가 비석과 함께 보존되고 있다.
황사영 묘를 찾아서 전구 기도를 받치고 돌아왔지만
총명했던 황사영이 믿었던 하느님은 내가 믿는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황사영보다 우둔한 사람이다.
하지만 총명했던 황사영이 믿었던 하느님이 같은 분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 분만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황사영 근처에도 못 간다.
이게 오늘날 슬픈 나의 자화상이다. <2018. 10. 21. 흥복산 자락에서>
첫댓글 11월5일 월요일
황사영알렉시오님의 기일 미사 안내
ㆍ11시까지 송추성당
ㆍ1시간 추억의 기찻길 도보순례
ㆍ중식 후 성 남종삼요한님 묘지 순례 후
ㆍ1시간 산자와 죽은자 공존 공원 묘지를
지나
ㆍ15시 묘전 야외미사 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