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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다 / 눅 22:39-46
사람에게 있어서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에릭 케스트너라는 독일작가와 그 친구가 장거리 기차 여행 중입니다. 피곤에 지친 친구는 의자에 기대어 곤히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이런 깜빡했네, 하마터면 수면제 먹는 것을 잊을 뻔했구나.” 그리고 그 친구는 황급히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토머스 스탠리 교수가 ‘부의 세습’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성장 과정과 기업의 성장 내용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 것입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미국 재벌의 80%가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기업을 물려받거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재벌이 된 사람은 20%였다고 합니다. 스탠리 교수는 이런 결과에 대해서 자수성가하여 큰 재벌이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습관이 우리 인생에서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습관이 인생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습관의 산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인생을 거둔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이 계속 반복되면 습관이 되는데, 그것이 결국 그의 인격과 인생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인생이 되려면 좋은 습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나쁜 습관에 빠지면 반드시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인생은 좋은 습관의 보상이고, 불행한 인생은 나쁜 습관의 보복이다.” 인간은 아담 이후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 죄성으로 인해 나쁜 습관에 물들기 쉽습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습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나쁜 습관이 형성되면 고치기가 너무 힘듭니다.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부인이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남편 못된 버릇 있잖아. 이빨로 손톱 물어뜯는 것 말이야. 그거 내가 아주 싹 고쳐 놓았어.” 그러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니, 평생 못 고쳤는데 어떻게?” 그러자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응, 아주 간단하더군. 그 이의 이빨을 내가 숨겨놓았거든.” 남편의 틀니를 숨겨두니까 손톱을 물어뜯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습관을 고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제가 성경을 샆펴보니 습관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쁜 습관, 좋은 습관, 거룩한 습관’이 바로 그 세 가지입니다. ‘나쁜 습관’이란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나쁜 버릇입니다. ‘좋은 습관’이란 반대로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고 배워야 할 좋은 버릇입니다. ‘거룩한 습관’이란 이 ‘좋은 습관’을 넘어서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행해야 할 거룩한 버릇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좋은 습관’을 가지면 우리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인도해주고, ‘거룩한 습관’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영혼을 성공의 길로, 범사에 잘 되고 축복받은 인생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거룩한 습관’을 꼭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습관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행동 중 90% 이상이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가 그 습관을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우리는 대부분의 삶을 습관에 따라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작은 습관들의 연속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의 습관을 보면 그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복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고통스런 인생을 살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갖고 있으면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갖고 있으면 불행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갖고 있으면 성공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갖고 있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복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가져야 할 좋은 습관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영적인 습관일 겁니다. 대개 신앙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적 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태가 문제입니다. “게으른 자의 머리는 악마가 집을 짓기에 적당한 장소이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나태는 악마를 길동무 삼는 것과 같습니다. 해즐리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태는 온갖 불행의 근원이다.” 불행을 강력하게 소망한다면 나태하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러분, 나태를 깨뜨려버리세요. 자꾸 나태해지려고 하는 습관을 깨뜨려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세요. 그리고 부지런한 습관을 기르세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습관을 가지세요. 믿음 생활의 진보가 없는 사람에게 또 다른 습관이 있습니다. 그건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잔소리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당신 집안에 한 삽씩 한 삽씩 무덤 구멍을 파들어 간다.” 라이트의 말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의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불평을 멀리 보내버리세요. 다시는 데리고 들어오지 마세요. 불평하는 습관을 뿌리 뽑아버리세요. 다시는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갖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예수님은 좋은 영적 습관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건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기도하는 습관과 습관적인 기도가 다른 의미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습관은 좋은 것입니다. 권장할 만한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기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반복된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몸에 밸 때까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기도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기도가 됩니다. 어느 집사님이 밥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잊고 먹었습니다. 아들이 유치부에 다니는데 “아빠, 왜 기도 안 하고 먹어” 그럽니다. 아빠가 “응. 나 어제 기도했단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빠, 그럼 어제 밥 먹었으니까 오늘은 먹지마.”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기도의 습관이 들지 않아서 당한 망신입니다. 그럼 습관적인 기도는 무엇입니까? 웰즈가 쓴 단편소설 ‘대주교의 죽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한 대주교가 그날 저녁에도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늘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날도 늘 해오던 대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맙니다. 대주교는 평생을 기도해 왔지만 그 기도를 정말 하나님이 듣고 있다고는, 또 그 기도가 정말 응답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이 습관적인 기도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대답이 있자 그만 너무 놀라 심장이 멈추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습관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형식적인 기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습관적인 기도가 아닌 기도의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습관을 따라”라는 말에 대해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영어로 하면 “as usual”입니다. “as usual”을 직역하면 ‘평상시에 늘 하던 대로’입니다. 예수님께 있어 기도생활은 늘 하시던 일입니다. 평상시에는 하지 않던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기도가 예수님의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당연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평상시 해 오시던 대로 기도하셨습니다. 가장 특별한 상황일 때 평소의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 영적훈련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평소에 영적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자리로 나가게 됩니다. 평소에 말씀의 훈련이 되어 있으면 삶의 고비에서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세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차례의 반복이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요?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입니다. 습관으로 자리잡을 때까지입니다.
영적 훈련은 금생과 내생에까지 유익합니다. 예를 들어 바른 예배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그러면 그 인생도 형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경시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30년 동안 꼬박 꼬박 교회에 나가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남는 게 없는 것 같아. 설교 제목조차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단 말이야.”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30년 동안 음식을 먹었소. 그 대부분은 내 아내가 챙겨준 식사였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메뉴조차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음식을 먹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오. 만약 그 음식을 먹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죽고 말았을 거요.” 무슨 말인가요? 예배에 꾸준히 참여하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예배의 습관에 관련해서 주일성수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주일성수는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의 표현입니다. 주일마다 꼬박꼬박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습관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니엘은 젊은 나이에 바벨론에 관리로 등용되었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뿐만 아니라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야(바사) 제국에서도 총리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권만 바뀌어도, 왕조만 바뀌어도, 요직에 있던 사람들은 다 물러나야 하는 게 정치판의 생리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정권이 바뀐 정도가 아닙니다. 왕조가 바뀐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요직에 등용되고 후엔 '총리'까지 오릅니다. 무엇이 다니엘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했을까요? 처세술에 능해서였습니까? 관운이 좋아서였습니까? 다니엘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건 그의 오랜 습관입니다. 그건 거룩한 습관으로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밥을 굶었으면 굶었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건너뛸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기도하기를 멈추라는 것은 숨쉬기를 멈추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어명을 받고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습관 중에 새벽기도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의 하루 일과는 무척이나 바쁘고 일이 많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은 그걸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던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지체 없이 회당을 찾아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고 두려워 떨며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꾸짖고 쫓아냈습니다. 그 일 후에 시몬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갈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일일이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체로 병을 낫게 하시거나 그룹으로 귀신을 쫓아내시지 않았습니다. 그 한 영혼, 한 영혼을 어루만지며 고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마저 고침 받고 돌아간 후에야 겨우 숨을 돌리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고단하고 피곤한 몸으로 잠을 청하신 겁니다. 그리고 다음날 10시가 넘도록 주무셨습니까? 아닙니다. 새벽을 깨우셨습니다. 새벽 중에서도 가장 이른 아직도 밝기 전에 깨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위해 달콤한 새벽잠을 포기하셨습니다. 새벽에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라고 새벽을 깨우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 역시 우리와 같은 체질을 가지셨습니다. 부족한 수면, 무거운 눈꺼풀, 피곤에 젖은 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단호하게 떨치고 새벽을 깨우신 겁니다. 누가복음 21:37-38절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성전에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도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셨다면,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붙들지 않고 하루를 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이른 새벽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좋은 시간이 있나요? 새벽보다 더 좋은 기도 시간대가 있나요?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첫째와 둘째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아침 일찍이 일어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기도의 사람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죠지 뮬러입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이런 습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엔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형제의 집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뮬러보다 더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뮬러가 하도 이상해서 주인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레위기 말씀을 보면 제단 위에 소와 양의 똥을 드릴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도 똥 같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뮬러는 평생 5시에 일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구역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기 바랍니다. 건강과 집안과 환경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미국의 유명한 치즈 제조업자 ‘크레포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치즈를 팔러 마을을 돌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마차에 치즈를 싣고 다니면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색다른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치즈를 꺼내러 창고에 들어가면 1시간 이상씩을 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매일 치즈를 팔러 나가기 전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의 사업이 점점 번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수많은 트럭으로 치즈를 보급하는 치즈 왕이 되었습니다. 큰 공장을 준공하는 어느 날, 기자들이 크레포드에게 성공한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는 무식쟁이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물건을 팔러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인자와 진리, 공평과 사랑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에 먼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우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갖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40절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유혹거리가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유혹거리로 충만해 있는 세상입니다. 대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해도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구 때문에 유혹에 빠졌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스스로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시험을 앞두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탁하신 것은 기도하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 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시기 전에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마태 26: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 14: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주님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고뇌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홀로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잠들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뭐라고 하십니까?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그런데 제자들은 가장 긴박한 순간에 잠을 잤습니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자느냐?” 하신 말씀의 ‘자느냐’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듀도’인데 이 뜻은 ‘영적인 나태에 빠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잠을 잤다는 것은 영적인 나태요, 정신적인 해이이며, 육체적인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6:40하-41상에는 보다 더 절박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심정이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동요가 없다면 비정상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잠들어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나태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정신적으로 해이해져 있고, 육체적으로 게으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소리내어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럼 무턱대고 기도만 하면 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함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그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자기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르는 기도를 하십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내 뜻을 포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내 뜻을 하나님 뜻대로 이뤄주옵소서.” 자기 뜻대로 이뤄달라는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달라는 기도입니까?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을 포기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어떤 남자가 어느 날 만원 버스를 타고 가는데 운전자가 그만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뒤에 있던 할머니가 중심을 잃고 이 남자에게 안겼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지라 기도했습니다.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차 시간이 급했던지 운전자가 급하게 출발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앞에 있던 예쁜 아가씨가 중심을 잃고 그 남자에게 안겼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기도했습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그 남자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아닌 자기중심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기도는 오히려 시험에 들게 합니다.
야고보서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자기 욕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시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기 욕망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에 붙들리면 하나님의 뜻이 가리어집니다. 말씀이 없이 기도만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할수록 더 위험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자기를 비우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았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는 것은 온 몸의 진액을 짜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결사적인 기도요 필사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마치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감수한 단장의 기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쉽게 내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말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기 바랍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기 바랍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우리가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고통 속에 몸부림을 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도우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홀로 부르짖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기도하는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기도를 우선하는 습관을 갖기를 바랍니다. 좋은 기도의 습관을 들여 평생을 하늘의 풍성한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자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라.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도우심을 경험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를 깊이 묵상하고 결단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하루의 첫 시작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좋은 습관, 거룩한 습관이 길러지게 하옵소서. 이 거룩한 습관으로 우리의 인생이 더 풍성해지고,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것까지 참으라 / 눅 22:47-53
예수님은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셨습니다. 최고의 시험을 만나신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평소의 습관을 따라 기도하신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시 깨어있다 잠들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같은 말씀으로 세 번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주님이 가자고 하시니까 그저 따라나섰습니다. 자다가 금방 깼기 때문에 다소 정신이 없었고 상황 판단도 잘 안 됐을 겁니다. 47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그런데 눈앞에 횃불이 보이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한 무리”는 칼과 몽치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군대였습니다. 군인들 맨 앞 쪽에는 낯익은 얼굴도 보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지냈던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매수되어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던 차에 오늘을 D-day로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몇 몇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대제사장의 군대를 모아 이렇게 급습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 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입을 맞추며 인사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반가움의 인사가 아닙니다. 정말 “샬롬”을 바라는 인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유다가 왜 입맞춤을 하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하십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예수님께서 유다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신 겁니다. 역시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대제사장의 군대와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의 입맞춤입니다. 또한 가장 추악한 탐욕의 입맞춤입니다. 유다는 재정을 맡아 관리하던 제자였습니다. 그 재정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적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겠지만, 돈을 관리하다 보니까 견물생심이라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탐욕이 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돈에 손을 댔습니다. 공금을 횡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과 그에 대한 가룟 유다의 반응이 나옵니다. 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의 말과 속내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론 구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돈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탐욕은 결국 자기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기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탐욕은 스승만 죽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영혼도 죽였습니다. 죄없는 스승을 죽게 만들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탐욕의 결과는 허망함입니다. 잠시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허탈과 허무함이 찾아옵니다. 탐욕과 입맞춘 유다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스승을 배신한 유다의 후예는 오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앞에 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6:24절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유다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가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자신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의 길을 걷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지만 유다가 훗날 겪게 될 영적이고 정신적인 충격을 생각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도 제자 걱정을 하신 겁니다. 그것도 자기를 팔아넘긴 배신자를 염려하고 계십니다. 요한 13: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정말 가슴 저민 사랑입니다. 그 엄청난 사랑 앞에 당황스러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사랑을 하실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런 사랑을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좀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처럼 원수까지도, 배신자까지도 사랑하라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새 계명이라며 특별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건 세리도 할 수 있습니다. 마태 5: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문제는 나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입니다.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꼭 배신까지는 아니라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다 지난 일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되살아나는 상처입니까? 지금도 순간순간 곱씹어지는 아픔입니까? 그럼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치료부터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예수님께 내보이기 바랍니다. 주님은 상처입은 치유자십니다. 배신의 아픔을 친히 겪어본 치유자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상처를 가슴에 품고 가슴앓이 하지 마세요. 주님께 꺼내놓으세요. 그분은 우리의 어떤 상처라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믿고 환부를 드러내세요. 치유자이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세요. 우리도 치유 받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사랑의 사도로 파송하셨습니다. 우리를 파송하신 분처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49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제자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둔 칼을 내보이며 예수님께 급히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게 전에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제자들은 아마 그 상황에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물었을 겁니다. 누구나 그렇게 오해할만했습니다. 50절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사고부터 났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혈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를 친 제자가 본문에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칼로 친 사람과 칼에 맞아 한쪽 귀가 잘린 사람이 누군지가 밝혀져 있습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은 베드로였고,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아서 한 쪽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였습니다. 언뜻 보면 베드로의 행동은 매우 용감하고 의리 있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누가 자기 선생을 잡아가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스승이 붙잡히려고 하는데 보고만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베드로가 재빠르게 칼을 뺐습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면 비겁한 짓입니다. 마땅히 누군가 나서서 막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베드로가 아주 용맹스럽게 행동한 것입니다. 평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수제자답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성급하게 행동한 것은 잘못입니다. 묻지나 않았으면 또 몰라도 분명히 묻기까지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예수님께 물었으면 답을 들어야 할 게 아닙니까? 아무리 급해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누구나 조급하게 굴면 실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상황이 아무리 급했어도,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다렸어야 합니다. 상황으로 볼 때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몇 초면 되었습니다. ‘3초의 여유’란 글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 버튼을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자. 정말 누군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발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크락숀을 누르지 말고 3초만 기다리자.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서서 기다리자. 그 사람 아내가 정말 아플지도 모른다.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보고 있어주자. 혹시 그 친구가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 줄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아니면 뉴스에서 불행을 맞은 사람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내가 화낼 일이 보잘 것 없지는 않는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한 아이와 눈이 마주 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그 아이가 크면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리할 것이다. 죄 짓고 감옥 가는 사람을 볼 때 욕하기 전 3초만 생각하자. 내가 그 사람의 환경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울상을 하고 있을 때 3초만 말없이 웃어주자. 그 아이는 잘못을 뉘우치며 내 품으로 달려올지도 모른다. 그녀가 화가 나서 소나기처럼 퍼부어도 3초만 미소 짓고 들어주자. 그녀가 저녁엔 넉넉한 웃음으로 한잔의 와인을 부어줄지 모른다. 우리가 너무 급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정말 급해서라기보다 조급증 때문입니다. 급할수록 3초의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3초의 여유만 가져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삶의 풍성함은 의외로 많습니다. 베드로에게 3초의 여유가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겁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것은 예수님께도 시험이지만 베드로에게도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4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잠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닥칠 시험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라고 부탁하셨건만 제자들은 잠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이 닥치자 그들은 조급함에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성질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했더라면 여유를 잃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여유는 기도함에 있습니다. 특히 하루의 여유는 새벽기도에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면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루를 여유있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유성은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새벽인생에게 유익한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늦잠을 자는 일이 없어 하루를 여유 있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일찍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는 기분은 독특한 것이다. 셋째,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하면 하루의 일과를 거의 마칠 수 있다. 넷째,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된다. 다섯째, 여름철에 특히 능률을 내게 된다. 여섯째, 밤에 단잠을 잘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어진 삶을 쫓기듯 살지 않고 여유있게 경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걸 위해선 여러분이 꼭 새벽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51절상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조급하게 굴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베드로, 너 때문에 살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까지 참으라.”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라는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붙잡히려고 합니다. 그건 자기들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상황이라면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칼을 뽑아 들었을 겁니다. 그때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이것까지 참으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는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유가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 다 인정한다고 해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6. 25 한국 전쟁 때 황해도 봉산이라고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일곱 명의 장로님들이 계셨는데 네 분이 순교를 하셨습니다. 그 네 분 가운데 강덕기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나무에 묶여서 두 눈이 뽑혔습니다. 눈이 뽑힐 때 장로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두 눈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했더니, 이제 눈이 뽑히는 이 시간에 천국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는 폭도들에 의해 개머리판에 턱이 부서지고 이마가 깨지며 장렬한 순교를 당했습니다. 얼마 뒤에 국군이 북진을 했는데 마침 그를 죽인 폭도 가운데 우두머리가 잡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을 강 장로님이 순교하신 나무에 다시 묶었습니다. 죽이기 전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일 가장 합당한 사람이 강 장로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 장로님의 아들을 불러 왔습니다. 장로님의 아들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순교를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나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칼을 뽑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뽑아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에 대하여 베드로처럼 칼을 휘둘러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은 결단코 화해할 수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거기에서 멈추라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를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No more of this.” 직역하면 ‘더 이상 가지 말라. 거기에서 멈추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한쪽 귀를 잘랐을 때 가만히 내버려두면 틀림없이 왼쪽 귀까지 잘랐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양쪽 팔도 자르고 목까지 베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이 황급히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멈춰라. 더 이상 가지 마라.” 어린 남매가 있었습니다. 둘이 어느 날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고함을 질러가면서 상대방을 욕합니다. 오빠는 동생을, 동생은 오빠를 욕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애들아, 왜 그러냐?’ ‘아빠, 오빠가 먼저 나한테 싸움을 걸었어. 오빠가 미워죽겠어. 오빠가 분명히 잘못했어.’ 이번엔 오빠가 말합니다. ‘아버지, 얘가 말예요.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었어요. 난 친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얘가 먼저 그랬어요. 나쁜 계집애’ 아버지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는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알기를 원치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먼저 싸움을 멈추고 누가 먼저 화해하고 누가 먼저 용서하느냐 그것을 내가 알기를 원해.’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질그릇 같은 존재인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미워할 수도 있고 성급하게 칼을 뽑아 휘두를 수도 있음을 아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멈추라. 더 이상은 가지 말라.” 귀를 하나 떨어뜨렸으면 됐습니다.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더 이상 가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기서 멈추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들을 그냥 버려두라는 말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의 헬라어 ‘에아테 헤오스 투투’는 ‘여기까지 버려두라. 이들을 내버려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록 악하게 굴지만 그들 마음대로 하게 버려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악한 세력 앞에 굴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약한 자처럼 무릎을 꿇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또한 악에게 무관심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초연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잘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의 뺨을 치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으론 나를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을 붙여주시곤 합니다. 우리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생각이 있어서 우리에게 그들을 붙여주시는 겁니다. 그들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기분 나쁜 얼굴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더 겸손해지는 겁니다. 그들 때문에 내가 더 기도하게 됩니다. 더 기도의 자리에 자주 나가게 되고, 더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더 감사할 일은 내가 그런 악역을 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두시기 바랍니다. 51절하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주님은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낫게 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떨어진 귀를 집어 원래의 자리에 붙여주시며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말고의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능력을 어떤 곳에 써야하는지를 잘 보여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힘을 남을 살리는데 쓰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사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쓰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을 타인을 회복시키는데 사용하기 바랍니다. 52-53절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윽고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 때요.” 때가 이르렀다는 겁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때 어둠이 권세를 부리는 때가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그 때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둠의 권세가 없다면 우리는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우리 앞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 우리가 가져야할 무기는 물론 검과 몽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을 보세요. 디모데전서 1: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칼은 내려놔야 합니다. 마태 26:52절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을 휘둘렀던 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검 외에 어떤 칼도 도로 집에 꽂아야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자꾸 다른 칼에 손이 가려고 합니까? 이번 한 번만 그 칼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듭니까?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삼국지에 보면 도원결의이후 운명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동생 관우가 오나라의 흉계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촉한의 황제 유비는 즉시 백만대군을 몰아 오나라로 쳐들어 갔습니다. 한 개인을 위한 복수전으로 이보다 더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절재절명의 위기를 당한 오나라는 새파랗게 젊은 서생 육손이란 사나이를 발탁해서 방어의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대임을 맡은 육손은 사령관으로 취임하는 그날부터 촉군과 일체의 전투행위를 못하게 했습니다. 가장 혈기 방장한 사람들이 군인이요 무엇보다 용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또한 군인입니다. 이들에게 싸우지 말라는 것은 엄청난 형벌인 것입니다. 용사들은 즉시 적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는데, 육손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촉나라 군사들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들을 던져왔습니다. 그러나 육손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여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딥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입니다. 그가 계획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육손은 드디어 떨치고 일어나더니, 유비의 백만대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700여리에 걸친 촉군의 진지를 완전히 유린해버렸습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이처럼 무서운 힘을 그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참된 승리자는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대로 산 육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승리자가 되길 원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이것까지 참으라.”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참으시고, 인간의 심판을 미루시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것도 사랑 때문임을 알게 하옵소서. “이것까지 참으라.” 가르쳐 주셨기에 인내의 증표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눅 22:54-62
한 평범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일찍 부름 받았기 때문인지, 열정적인 성격 때문인지, 다른 제자들을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아 핵심제자 3인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자신만만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남자답고 의리있는 사람입니다. 한번 한다고 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펄쩍 뛰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섭니다. 큰소리 쳤습니다. 예수님을 나무랐습니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시던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그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 그는 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는 자기를 몰라주는 주님이 조금은 야속했습니다. 자신을 가룟 유다 취급하는 것 같아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더 굳게 다짐했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마침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검과 몽치로 무장한 대제사장의 군대가 스승을 체포하러 온 것입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머뭇거렸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았습니다. 휘둘렀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의 그런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호언장담했던 그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마가복음은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4: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쇠사슬에 묶여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제자들을 보며 그는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간 자기도 붙잡힐 것 같아 ‘걸음아, 날 살려라’ 했습니다. 한참을 도망치고 있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주님께 뭐라 그랬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너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어?’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망하는 다른 제자들을 뒤로 하고 예수님이 체포되셨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저만치 끌려가시는 예수님께로 발걸음을 천천히 떼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흑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흑 역사’란 소위 자기 삶의 흔적 중에서 ‘없었으면’ 하는 순간들을 말합니다. 왠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행여 누가 알세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일생에서 어찌 보면 가장 굴욕적인 순간입니다. 곧 베드로의 ‘흑 역사’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가장 부끄러운, 그래서 누가 알까 심히 꺼려지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감 없이 그것을 성경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 개인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주님은 이 성경을 통해 구원 받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전해주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주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교훈 받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책망도 하십니다. 또한 바르고 의로운 길을 우리가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주셨습니다.
54절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님을 체포한 군인들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했을 겁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자신이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실망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졌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나도 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된 건가?’ 그는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던 사람입니다. 그분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실 때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후에도 그는 변화산 꼭대기에서 황홀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주님이 모세나 엘리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란 말씀을 듣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뭡니까? 그처럼 대단하신 분이 어쩜 저렇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끌려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내가 잘못 봤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속아왔단 말입니까? 베드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대제사장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는 눈치를 살피며 군중들 속에 섞여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점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칼까지 휘두른 사람입니다. 붙잡혔다 하면 적어도 중형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자기 귀도 잘려야 합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는 돌아왔습니다. 멀찍이긴 하지만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찍이 따르는 믿음은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형편에 따라서 언제라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뒷전으로 미룰 수 있습니다. 좀 불리하다 싶으면 신앙에서 발을 슬그머니 뺄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이면, 믿어봤자 별 것 없다며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개 신앙을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교회 나오든지, 아니면 신앙을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신앙인으로 사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고, 신앙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혹 거기에 해당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 이왕 믿으려면 예수님 가까이서 믿으세요. 이왕 따르려면 예수님 바로 곁에서 따르세요.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할 각오로 따르세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적어도 룻이 시어머니를 따를 때의 각오는 갖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룻 1:16하-17상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이런 각오로 따른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베드로는 보통 때 예수님의 최측근이었음에도 한 순간 멀찍이 따르다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면, 교회 나온 후 늘 뒷자리를 고집하고 구경꾼의 자세를 견지해왔다면,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이 시간문제가 아닐까요?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르는 분들에게 이 시간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제2의 베드로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전철을 밟지 말기 바랍니다. 55절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그 날 저녁 날씨가 매우 쌀쌀했습니다. 그 시간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심문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기온이 점점 떨어지자, 구경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가야바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무리들 속에 숨긴 베드로의 정체가 노출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습니다. 약간의 불안을 느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자리를 뜰 수도 없습니다. 특히 주님이 눈앞에서 고초를 겪고 계시는데 차마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야바의 뜰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자 누군가 뜰 가운데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던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베드로도 군중들 속에 섞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모닥불 주위로 갔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감추려고 해도 그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눈은 타오르는 불빛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또 한 번 예수님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자기도 모른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 쪽으로 고개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시 모닥불을 응시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란 걸 압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적으로 참 좋은 분입니다. 그분이 체포당할 이유가 없고 심문을 받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으면서도 속은 떨고 있습니다. 자기 정체가 들어날까 봐서 떨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자들이 분해서 떨고,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괴로워서 떱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주님을 구해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베드로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베드로와는 달리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적어도 베드로처럼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주님의 신음소리를 뒤로하고, 무리들의 틈바구니에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수제자이긴 했지만 겨우 주님을 3년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은지 3년 이하인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는 3년이 아니라 30년 이상된 분들도 있습니다. 산술적으로만 따진다면 30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다면, 베드로보다 10배는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처해진 환경이 신앙생활하는 데 역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처해진 환경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혹 불이익을 받을 순 있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혹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신앙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난 없이 영광을 기대하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No Cross, No Crown' 그건 우리의 바람일 뿐 성경은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자신이 믿는 것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고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겪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집안의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단체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광신자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 크고 작은 어려움들은 주님을 위한 고난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광으로 보상받게 될 고난인줄 믿습니다. 56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는 모닥불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베드로를 향해 불쑥 던져오는 한 여자 애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아마 심장이 멎는 것 같았을 겁니다. 그 여자 애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문을 지키는 여종입니다. 문을 지키려고 하면 눈썰미가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유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그 여자 애는 베드로가 가야바의 집에 들어올 때부터 베드로를 유심히 관찰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의 원뜻은 '뚫어지게 쳐다보다'는 뜻입니다. 비록 예수를 멀찍이서 따라오긴 했지만, 그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불안해하고,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한 눈에 띠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무척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목하여 봅니다.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애써 무관심해 합니다. 보지 않는 척합니다. 그런데 비판하면서도 봅니다. 욕하면서도 지켜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 사람은 진짜 예수쟁이야.” 아니면 “그 사람은 엉터리야.” 여러분은 주위의 불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안 믿으려면 몰라도, 믿으려면 저 사람같이 믿어야지.” 57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갑작스런 질문 앞에 베드로는 무의식적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군가 예수를 아느냐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고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예수를 부인하고서라도 자신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군중들 속에 숨어서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여자 애가 갑작스럽게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하자, 순간적으로 생존본능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일단 부인하고 봤습니다. 요한복음 18:17, 25절에 보면 여자 애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곧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됨을 부인한 것으로 봅니다. 단순히 겁이 나서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숨기는 것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각하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0:32-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시인 아니면 부인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숨기는 것은 어디에 해당하겠습니까? 분명히 시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부인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이란, 십자가 목걸이 걸고 다니고, 십자가 뺏지 붙이고 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삶을 사는 걸 말합니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그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디도서 1:16절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입으로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사람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가증한 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 이제 베드로에게서 눈을 떼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다. 저나 여러분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또한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합니다. 그럼 행위로는요? 행위로도 예수님을 시인하십니까? 행위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시인하느냐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구원 받는 자들, 곧 믿는 자들에게 뿐만 아닙니다. 망하는 자들, 곧 불신자들에게까지입니다. 향기는 숨길 수 없습니다. 또한 억지로 낼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풍기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억지가 아닙니다.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몸에 배여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됨을 드러내며 사십니까? 마음으로 입술로뿐 아니라, 행위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사십니까? 58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위기의 순간을 넘겼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닙니다. 조금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너도 그 도당이라.” 그 때 베드로는 사람 잘못 봤다면서 소리쳤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여기서 “그 도당”이란 ‘그에게 속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사실상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은 분명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인과 제자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선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제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제자,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우리가 자기들과 다르면 이렇게 물어오곤 합니다.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자신있게 “그렇다”고 하십니까? “으응 아니 그게 아니고”라고 얼버무립니까? 왜 그렇다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떳떳하지 못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해 자신 없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에 대해 부끄러운 겁니까? 여러분이 정말 그렇다면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고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크게 다를 바가 뭐겠습니까?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 앞에서, 두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누가 와서 아는 체 할까봐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괜찮나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려고 할 때였습니다. 59절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 그리고 베드로를 유심히 관찰하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으로 그때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여기서 “장담하여”의 원어 ‘디이스퀴리제토’는 ‘확실하게 주장하다. 자신있게 주장하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말투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무심결에 갈릴리 사투리를 썼던 모양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며 자신을 압박해 오자, 이 때 베드로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다 강한 어조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60절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할 때는,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이 꿈틀거렸습니다. 사실 생존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럼에도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생존이 사명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사명을 위한 생존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사명을 위해 삽니다. 사명보다 생존을 앞세울 때 베드로처럼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생존본능이 아닌 사명이 꿈틀거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명에 무관심하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그건 죄입니다. 연세드신 분들도 사명에 대해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아니 연세드신 분들일수록 흘려들어선 안됩니다. 주님 앞에 서실 날이 더 가까우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안에서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남은 생을 사명을 위해 살기 바랍니다. 가진 물질을 사명을 위해 투자하기 바랍니다. 주신 건강을 사명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막다른 골목을 겨우 빠져나온 베드로에게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평소에도 닭은 새벽마다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그 울음소리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61-62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심문을 받고 있는 예수님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시선이 베드로를 향하셨습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자기가 한 게 있으니까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너무나 강렬한 주님의 눈길에 사로잡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바로 어제 저녁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 자신이 뭐라고 큰소리 쳤습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비겁한 자신이 부끄러워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문받으시는 주님 앞에 머무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감싸쥐고는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예상하시고,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도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러나 자신만만하여 큰소리치고, 기도해야 할 때 졸며 기도하지 않더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때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전에 기도했으면 훨씬 좋을 뻔 했습니다. 잘 아시지요? 치유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예방기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예방기도를 가르쳐주신 겁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어려운 일이 닥치기를 기다렸다가 기도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미리미리 예방기도를 하시는 편입니까? 위기가 닥쳐야 부랴부랴 긴급기도하는 스타일입니까? 평소에 예방기도하는 스타일입니까? 만약 긴급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예방기도하는 습관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생활이 피곤합니다. 똑같이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과 대화는 없고 부르짖음만 있습니다. 기도했다 하면 울부짖습니다. 부르짖음도 기도이고, 울부짖음도 기도이긴 합니다. 그러나 친밀한 사귐의 기도는 아닙니다. 그게 행복한 기도일리도 없고요. 행복한 기도는 사귐의 기도입니다. 존 웨슬리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귐이란 마음을 열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귐은 함께함을 전제로 합니다. 함께 하다보면 서로 닮습니다. 이 사귐의 기도를 지속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점점 깊이 참여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사귐을 통해 자신이 변하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 조율된 다음에,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받습니다. 명심하세요. 간구 이전에 사귐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능력있는 기도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아내는 기도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구하는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인 줄 믿습니다. 예방기도 또는 사귐의 기도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주님은 새벽 시간을 잘 활용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와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하루 사역에 대해 의논하셨습니다. 하루 일과에 대해 상의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능력있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무릎 꿇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으려거든 하나님께 무릎 꿇으세요. 예수님처럼 예방기도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시험이 찾아와도 능히 물리치기 바랍니다. 제2의 베드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우는 인생이 아니라, 닭을 깨우는 새벽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혹 멀찍이서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뭔가 손해볼 것 같아 모닥불 앞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위험한 신앙입니다. 주님께 다가가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항상 주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자신의 약함을 내놓고 주님께 기도하게 하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를, 약하여 넘어지지 않기를, 주님을 부인하고 말씀을 버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로 준비하여 베드로처럼 넘어질 위기를 이겨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혹시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할지라도, 그때그때마다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와 치료받고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 눅 22:63-71
래리 크렙이라는 유명한 기독교 상담학자이자 저술가가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일입니다. 담임선생님 이름이 얼브였는데 이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 안에는 귀한 보화가 숨겨져 있음을 믿는 분입니다. 새학기가 시작된지 한 달후 쯤 되었는데, 어느날 수업시간이 끝날 때 얼브 선생님이 래리 크렙을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래리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야단 맞을까 걱정하면서 선생님께 갔습니다. 선생님은 "래리야, 이리 와서 앉아"라고 하시면서 계속 말씀합니다. "내가 그동안 보아 왔는데, 너는 글쓰는 것을 좋아해. 나는 여러번 너를 생각했어. 래리, 너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거야. 이제부터 이렇게 하기로 하자. 수업이 끝나기 전 15분씩은 매일 이 사전을 가지고 네가 모르는 단어를 찾아서 그 단어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어봐. 그리고 그 문장을 가지고 나와 함께 이야기하자. 어때?" 이것이 래리 크랩이 훌륭한 작가가 되는 첫순간입니다. 그후 래리의 귀 속에는 늘 얼브 선생님의 말이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너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거야." 래리 크렙은 ‘Connecting,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이와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선생님이 자신 안에 있는 귀한 보화를 발견해 준 것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신 안에 있는 보화를 발굴하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는데, 왜 다른 분들의 말은 효력이 없었고, 이 분의 말은 내 삶을 뒤바꾸어 놓았는지'가 궁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래리는 그 해답을 모르는지 왜 얼브 선생님의 충고가 다른 분의 충고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내게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얼브 선생님의 충고에는 다른 분들의 충고와는 다른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요?
본문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은 '왜 얼브 선생님의 충고가 다른 분들의 충고와는 달랐었나'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얼브 선생님의 충고가 래리 크렙을 그토록 훌륭한 저술가로 만든 이유는, 얼브 선생님은 래리의 좋은 점, 장점을 보기전에 먼저 래리의 어두운 면, 단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면을 사랑했습니다. 얼브 선생님이 래리의 어두운 면을 사랑했을 때, 래리의 단점을 사랑했을 때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Connecting'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얼브 선생님의 충고는 래리의 심장을 찌른 것입니다. 래리는 그 누구의 충고보다 얼브 선생님의 충고를 깊게 받아드리게 되었고, 이에 훌륭한 저술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과의 문제가 있습니까? 그의 어두운 면을 먼저 사랑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 번째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모두 여섯 번에 걸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처음 세 번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심문을 받으셨고, 뒤에 세 번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으며,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서 물으며, 예수님에게서 마땅한 죄목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만 할 뿐,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안나스는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결박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그동안 가야바는 자기 집에 공회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신 16:18∼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이와 같이 율법은 재판할 때의 원리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판의 원리는 한 마디로 공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은 반드시 공의로 백성을 재판해야 했습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가 지켜져야 했습니다. 첫째, 모든 재판은 공개되어져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재판은 반드시 낮에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두 번째 심문은 모두 밤중에 행하여 졌습니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완전히 불법이었습니다. 둘째, 모든 피의자는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시고 재판을 받으셨을 때는, 예수님이 변호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변호를 받을 기회가 무시된 것도 불법입니다. 셋째, 만일 피의자에게 불리한 증거가 제시될 때에는 반드시 둘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율법은 재판할 때 뇌물을 받지 말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회는 성전 창고에서 은 30을 끄집어내, 가룟 유다에게 뇌물을 주어 그를 매수했습니다. 또 그들은 그곳에 있는 돈으로 거짓 증인들을 많이 매수했습니다. 뒤에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에게도 뇌물을 주어서 거짓말을 하게 했습니다. 가장 공의롭게 재판해야할 공회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두 번째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불법적인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예수님을 칠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물론 돈으로 매수된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지만,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결국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유도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때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정죄하지만, 이후로는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말하면서, 공회원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거룩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이들은 주먹으로 치고, 또 어떤 이들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와 함께 그들은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온갖 말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1: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만물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불을 명하여 그들을 멸해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또는 땅을 갈라지게 해서 땅이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시면서, 묵묵히 그 모든 수모와 고통을 참고 끝까지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가 얻는 교훈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가 겪는 고난은 점점 작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욕을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가 당하는 수모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세상 근심, 걱정, 고통을 다 이기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날마다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3-65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원수들 앞에서 심문 받으면서도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당당히 증거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때립니다. 눈을 가리고 알아 맞춰보라고 툭툭 칩니다. 이리 떠다밀고 저리 떠다밉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열한 제자 모두 다 달아난 이때,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장 악랄한 인간의 모습을 몸소 체험하십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주님을 희롱하고 때립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며 놀려댑니다. 이 밖에도 많은 욕을 퍼 붓습니다. 밤새도록 이렇게 시달리십니다. 밤새도록 매맞고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약한 자를 놀리고 침뱉는 악랄한, 비열한 인간들 앞에서 꼬박 밤을 새우신 것입니다.
마가 14:65절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그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고 때렸습니다. 그러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조롱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선지자 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지자 노릇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프로페튜오’는 ‘말씀을 전하다, 예언하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을 때리면서 ‘어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봐. 예언해 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치 진단 결과를 설명하려는 의사를 때리면서 ‘어디 말해 봐. 내가 죽어? 어이 의사 양반, 다시 말해 봐!’ 이러는 것과 같았습니다.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발악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선지자 노릇하라고 말은 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아드님을 죽이는 것이었고,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66절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드디어 날이 샜습니다. 새벽닭이 울 무렵인 새벽 세 시경에 공회원들은 가야바의 집에서 2차 심문을 끝냈습니다. 그때부터 날이 새는 새벽 다섯 시까지 두 시간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또 손바닥으로 치며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날이 새자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끌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법정으로 몰려갔습니다. 합법적인 재판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면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재판은 공개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누구라도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 27:3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지난 삼년간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도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도 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하심과 예수님의 예언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회에서 예수님이 정죄되고 사형판결을 받게 됨을 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은 삼십을 공회원들에게 도로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공회원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또한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네가 당하라.” 이것이 세상의 답변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졌습니다. 원래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치 제사장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그는 성소에 은 삼십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을 맨 끈이 풀렸든지, 아니면 목을 맨 나뭇가지가 꺾였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배가 갈라지고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아무튼 행 1:25절을 보면, 가룟 유다는 제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지 못하고, 마귀가 가야할 곳, 곧 지옥에 떨어져 영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찬 150장 3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모두를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온전히 덮어주심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7-68절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미 2차 심문 때에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사실 그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그리스도에 대해 하신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때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하시며,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두 메시야의 칭호였습니다. 그렇지만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백성을 선동하고 미혹한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깨우쳐 주시려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셨습니다. 눅 20:3-4절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눅 20:41절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4절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물으셨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질문하신들, 그들은 대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치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완악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도 돌같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호렙산 바위 덩어리같이 굳어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단단한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69절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 계시던 곳, 곧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죽일 것이니라.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서 하늘에 오르겠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런 뜻입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히 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오늘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넘치는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그러나 이제부터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함을 받을 줄 믿기 바랍니다. 지금은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들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누릴 것입니다.
70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앞 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공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 “네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냐?” 이러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아무튼 그곳은 더 이상 공의로 재판하는 법정이 아닙니다. 도살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것을 아셨고, 그래서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조그마한 여종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와, 권세자들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평범한 인간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셨고,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도를 통해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이 시험을 이기고 십자가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고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면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인데 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제자들이 한 것은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실 때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사탄의 덧에 걸리고 말았던 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4: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은 힘이 있다고 그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주가 있고 지식이 있고 세상 적인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고전 2:10절 이하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이라야 분별한다고 했는데, 신령한 일을 하면서 육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부디 우리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멸시 당하심이 나의 죄, 나의 허물 때문임을 기억하시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에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날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숙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피에 굶주린 이리와 같은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피를 요구하며 아우성치는 곳입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차분하면서도 분명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이런 말씀입니다. 막 1: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감동이 사람의 말이 주는 감동보다도 소중합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늘 명심하며 바른 신앙 위에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1절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더 이상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매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직접 다 들었으니,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레 24:16절을 보면,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회는 서둘러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 길로 예수님을 끌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시는 그 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산들과 바위에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한 그들은 영벌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당하신 여섯 번의 심문 가운데, 전반부 세 차례의 심문이 끝났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한 심문이 끝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또 다시 세 차례의 심문을 더 당하실 것입니다. 그런 뒤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심문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문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함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수모와 고통을 깊이 묵상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당하고 있는 수모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거닐 때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시간이 흘러간 것 같지만 잠시잠깐에 불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도 잠시잠깐 후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당하셨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마치 천 년을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모두 예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또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권능자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심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그 약속과 함께 지금도 소망 중에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살아 있는 신앙,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갖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