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프러블럼!"
문제없다는 말에 웨이터는 돈을 집어들었지만, 쓴웃음을 지었다. 오천 루피아라고 해 봐야 한
국 돈으로 겨우 오백 원일 뿐이다. 나는 식욕이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2층 난간에 기
대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에 흩어져 있던 원주민 여자들이 몰려와서 소리를 질러댔다.
"텐 달러!"
티셔츠 여러 장을 쥐고 흔들었다. 그 때, 손바닥만한 검은 나비가 나풀나풀 내 주위를 맴돌며 춤
을 추었다.
"약 올리지 말고 꺼져!"
모자를 벗어서 나비를 쫓는데, 갑자기 여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
렸지만, 투덜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프시케는 무슨 프시케. 그저 나비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
려고 해도, 채련의 목소리는 자꾸 나를 세뇌시켰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수디는 집집마다 있는 신전에 대해 설명했다.
"탑이 여러 개 있는데, 하나는 가족신, 나머지는 바람신, 아궁산신, 대지의 신 등 많은 신을 모시
지요."
채련이 또 질문을 했다.
"여긴 사람이 죽으면 화장해서 그 유골을 탑에 넣어두는 건가요?"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힌두교식으로 화장을 합니다. 제단이 십오 미터나 되는데, 그 위에 시
체를 얹어요. 시신을 담는 관은 가족의 동물 상에 따라서 호랑이, 사자, 바다고기, 소의 모형에다
등을 푹 파서 시신을 넣습니다."
나는 수디의 말을 상상으로 눈 앞에 그려보았다.
"앞에는 악기가,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따라 갑니다. 제단을 메고 가다가 사거리가 나오면, 사거
리를 세 번 돌아요."
채련이 중간에 말을 끊는다.
"아니 그렇게 높고, 무거운 걸 메고서 왜 힘들게 도는 걸까요?"
수디가 싱긋이 웃었다.
"영혼을 어지럽게 해서 집을 못 찾아오게 하는 겁니다."
채련과 어머니, 아내가 소리내어 웃었다. 영혼이란 뭘까? 나비를 타고 내게 날아든 '마음'이라
는 건 또 무얼까? 나라는 존재는 가족에게 있어 뭘까. 나도 죽으면 곁에 나타날까 두려운 존재일
까?
"힌두교의 악습 중에 사띠라는 게 있는데, 네덜란드 식민지 때 폐지 됐어요. 남편이 죽으면 남편
의 시체와 살아있는 부인을 함께 화장하는 풍습이었죠."
아내를 쳐다보았다. 내가 죽으면 아내는 어떻게 하려나. 신혼 초에는 따라 죽을 거라며 내 목을
껴안던 아내였는데......
3
해질 녘의 절벽을 보러 가기 위해 승합차에 올랐다. 울루와뚜 사원은 75미터 절벽 위에 세워
져 있었다.
"원숭이들이 귀고리나 모자를 낚아채니까, 전부 빼서 가방에 넣으세요."
사원이 있는 꼭대기까지 가는 동안 원숭이들이 많았다. 먹이를 주며 사진을 함께 찍는 관광객
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절벽 밑으로 밀려오는 파도가 자그마하게 보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한 자연 앞에 서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조그마한
일로 아등바등 다투며 살 필요가 없다. 사는 동안 열심히, 그리고 사랑하며 살자. 나는 아내의 어
깨를 꼬옥 끌어안았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귀고리가 원숭이의 입으로 들어갔
다. 원주민 여자가 먹을 걸 주자, 원숭이가 입에서 귀고리를 빼내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가 어머
니에게 귀고리를 돌려주며 1 달러를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새로 산 귀고리를 찾아서 다행이라
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때 어느 관광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거 원숭이랑 사람이 짜고 치는 거잖아. 원숭이가 물건을 빼앗아갔으면 당연히 배상을 해야
지. 되레 돈을 달라니......"
"맞아, 이거 상술이 너무 치사하잖아."
어머니의 말에 수디가 깜짝 놀라서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아닙니다. 원숭이들이 습격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저 사람들도 생겨난 거지요. 아무래
도 먹이를 준비해야 하니까, 돈이 필요해진 겁니다."
"둘러치나 메치나지. 그리고 이거 수디가 책임져야 되는 거 아냐?"
갑자기 분위기는 침울해졌고, 승합차에 타서도 내내 침묵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머니의 속
상함도 수디의 당황스럼움도 다 느껴졌다. 채련의 말처럼 사람의 마음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하늘은 황금빛 아이섀도우를 한 여인처럼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다. 환상의 문으로 들어
가는 길목인 듯 하다. 수디는 말이 없다.
"짐바란 해변에서 식사를 하겠습니다."
간단한 말 만 하고 침묵을 지키니까, 차안의 분위기가 영 침울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노을 속으
로 빠져들 듯이 모두들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내어놓은 식탁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빈자리 없이 사람들이 다 차 있다. 그
런데도 사람들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파도소리만 들려온다. 해가 저물어 캄캄한 해변에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해변이 마치 진주목걸이를 한 것처럼 아름답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내게 아름
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돌아온 것 같다.
4
아침 햇살이 따갑다. 벌써 넷째 날이다. 오늘은 바다에 나가 퀵실버를 타기로 했다. 도로를 달리
는 승합차 양옆으로 청년들이 함께 뛰었다. 일본신문을 들이댔다가, 한국신문을 들이댄다.
"다 본 신문이야. 임마. 한국에서 다 보고 왔는데, 며칠 지난 신문을 팔면 누가 사 보겠냐?"
어머니는 창문에 대고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창문에 코를 박고 따라오던 청년들도 웃었다.
수디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수디는 경직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다. 거지 떼처럼 매달려 아우
성 치는 동족들의 모습이 창피한 모양이었다. 채련이 수디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 사람들은 왜 맨발로 다녀요?"
채련의 질문에 수디는 길게 설명을 했다.
"물자가 귀해요. 대부분 가난하게 살지요. 인도네시아는 만칠천오백팔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자원은 무궁무진해서 나라는 부자인데, 사람들은 가난해요. 여러나라의 지배를 받아서
그래요. 인구는 2억5천만 명으로 세계에서 네 번째 갑니다. 포르투갈, 일본, 영국 의 지배를 받았
는데, 네덜란드에게 삼백오십 년 동안 식민지로 있을 때, 모든 걸 다 빼앗겼습니다. 이백 년전만
하더라도 우리 조상을 노예로 매매했으니까요. 신문을 파는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지
요. 대부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수디는 가이드를 하기 위해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다. 채련이 질문할 때마다 술술 설명을
잘 한다. 무슨 일이건 전문가가 된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한국에 돌아가면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가야겠다.
퀵실버를 탔다. 배는 천천히 움직였다.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니까, 멀미가 나시면 구조요원을 부르세요. 멀미마사지 받으면 시원해요."
수디의 말에 어머니가 너스레를 떤다.
"그럼 일부러라도 멀미타임을 가지면 되겠네."
갑판으로, 2층으로 오르내리며 사진을 찍던 아내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구조요원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멀미?"
"약간이요.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잘 알아듣지 못한 구조요원이 아내의 손목을 잡았다. 약을 발라가며 마사지를 하는 요원에게
아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요원의 간단한 한국어에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십여 분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마사지가 끝
나자, 아내는 고마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웃었다. 구조요원은 아내의 의자 뒤에 기대섰다.
"팁을 줘야지."
어머니의 말에 아내는 깜짝 놀랐다. 남이 볼세라 요원의 손에 슬그머니 1달러를 쥐어주었다.
요원은 '땡큐'라고 대답한 후, 쏜살같이 아래층 계단을 밟고 사라졌다.
"어쩐지 네 뒤에 서서 가만히 있더라, 너는 빨리 팁을 주지 않고 꾸물대면 어쩌니?"
어머니는 나를 책망했다.
"저는 응급처치 차원에서 그냥 해 주는 건 줄 알았지요."
"여기 사람들은 팁에 길들어져 있다고 그렇게 말해도 모르니?"
어머니의 말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나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5
산호섬에 배가 도착했다. 모두 수영복으로 갈아 입었다.
스노쿨링을 하기 위해서 수경을 쓰고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었다. 어머니와 채련은 바나나보트
를 타겠다고 갔다. 아내와 나는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여러 번 스노쿨링을 즐겼었다. 아내는 열대
어와 수초 사이를 유유히 미끄러졌다. 나는 아내 뒤를 따라갔다. 아내는 인어처럼 유연했다. 마
음 속에서 보글보글 사랑의 기포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내와 둘이서 에덴동산에
사는 듯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배 위로 올라와 샤워기 앞에 아내를 세워놓고 씻겨주었다. 아내는 나를 향해 웃었다. 아내도 내
몸을 씻겨주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몸이 나른해졌다. 수영복 차림으로 선상에 차려놓은
뷔페식사를 했다.
잠수정을 타고 누사 베니다로 향했다. 잠수정 안에서 내다보는 바닷속은 황홀했다. 참치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각종 열대어들이 색색으로 물결쳐 지나갈 때마다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에메랄드빛 바닷속에 햇빛이 스며들어 너울거리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바닷속
을 보면서 내내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아내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채련은 수디와 소곤소
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첩에다 빠르게 기록을 하는 걸로 봐서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채련은
가끔씩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보이곤 한다. 어머니도 가끔 우리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백사장이 깔려있는 베니다섬에 내리자, 서너 살 혹은 일고여덟 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
여앉아 있다. 산호와 조개껍데기를 한 무더기씩 앞에 놓고 앉아 있던 아이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
했다.
"대~한민국, 짜작짝 짝짝!"
"오! 필승 코리아~"
일행은 아이들을 따라 박수를 쳤다. 다 함께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건, 해외에 나와서 이렇게 대접을 받는 거였다. 나는 나라를 위해
서 뭔가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머니는 감격한 듯 아이들에게 1달러씩 쥐어주었다.
"여기서는 주로 우뭇가사리를 양식해요. 이건 화장품 재료로 쓰이기 때문에 수입이 좋아요. 쌀
농사는 없고, 옥수수, 고구마를 수확하고, 소, 돼지도 키웁니다. 아이들은 발리로 유학갑니다. 옛
날에는 발리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여기로 보냈어요. 감옥섬이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구십 퍼
센트는 착해요. 많은 신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한 일에 대한 업보를 현재에 받을 수도 있
고, 미래에 받을 수도 있고, 죽어서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
합니다."
어머니는 코코넛에 빨대를 꽂아 빨아 마시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다 미신이야. 그렇게 많은 신을 믿던 로마도 결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잖아. 하나님을 믿어야
발리도 발전할 수 있을 텐데......."
수디는 어머니를 향해 싱긋이 웃었다.
"하지만, 그런 문화적인 개성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발리를 찾아 오는 겁니다. 전부 기독교를 믿
으면 다른 나라에서 왜 구경옵니까?"
아이들이 다가와 채련에게 조개껍데기를 자꾸 쥐어준다. 채련은 어쩔 줄 몰라 수디를 돌아보았
다.
"그냥 주는 거니까 받으세요. 큰 아이에게 1불을 주면서 나눠가지라고 하세요."
그러자 채련은 붉은 색 산호를 집어들었다. 어머니가 채련에게서 산호를 빼앗아 아이에게 도
로 주었다.
"그 산호 갖고 가다가 공항에서 들키면 얼마나 망신인데요. 이런 애기들 까지 외화벌이에 이용
하다니, 어이가 없네요."
잠시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수디는 입을 벌린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다른 팀의 가이드들도 말
을 잊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나는 고통스럽게 침묵하는 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들 위로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만 무심하게 들렸다.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어머니는
가이드가 한국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걸 깜빡 잊은 걸까. 아니면 후진국 사람들이라고 무시했던
걸까. 나는 부끄러워서 땅만 내려다보았다. 채련은 머쓱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1불을 주고는
그 자리를 떴다. 아이도 별 고마운 기색 없이 멀뚱하니 쳐다보았다. 모든 재미가 사라졌다. 모두
들 아이들이 반복해서 부르는 '오 필승코리아'를 외면했다. 수디의 큰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카페 게시글
♣늘푸른 문단♣
발리에서 만난 프시케 2
김성금
추천 0
조회 49
04.11.10 18:5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