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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시절
그날은 토요일 밤 나는 공부를 하다 말고 졸려워서 방바닥에 아무깔개도 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몇 시가 되었는지 비가 많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어서 잠결에 일어나 앉았는데 포소리가 들리자 아버지가 일어나시더니 밤중에 웬 포소리냐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싸리문 흔드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니 그것은 7연대에 복무하는 황 정도하사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 어무이요. 빨리 일어나시소. 지금 북한 괴뢰군이 공격을 해와서 우리는 일선으로 출동을 해야 합니더. 혹시 피란을 갈지도 모르니 얼른 준비를 하시소.”
“ 뭐야. 그럼 이북 놈들이 또 쳐들어 왔단 말이야 .”
“ 아무튼 지금 전 전선이 다 비상입니더. ”
“그럼 지금 일선으로 간단 말이지.”
어머니의 다그침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황 하사는 그대로 빗속으로 살아지는 것이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마당은 금방 물바다가 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신작로엘 나가보겠다 하고는 빗속에 우산을 바쳐들고 200m 떨어져 있는 신작로까지 달려 나갔다가 그 앞에 벌어져 있는 상태를 보고는 너무도 예상 밖에 벌어진 일이라 기겁을 해서 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 아버지 큰일 났어요. 지금 신작로에는 사람들이 비를 함빡맞으면서 피란 보따리를 이고지고 오는가 하면 마차에도 짐을 가득 싣고 오는데 우리도 얼른 피란을 가야 되겠어요.”
그렇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시고는 엄두가 나시지를 않는지 허둥대시기만 하셨다.
“ 어서 어서 우리도 피란을 나가야 돼요. 빨리요.”
당시에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신작로 생긴대로 하나 가득 몰려오던 사람들의행렬을 생각하면서 재촉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피란보따리를 쌀 사이도 없이 입음새 그대로 우산만 바쳐 들고는 집을 나서니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옷은 금방 젖는 가운데 동네를 벗어나 신작로엘 나가니 우마차며 피란민들이 비를 함빡 맞으면서 내려오는데 비는 여름장마비처럼 그치지를 않았다.
그 시간이 아마 10시는 넘었을 것이다. 그때에 국군의 트럭 여러 대가 일선으로 향하면서 방송을 하였는데 휴가 장병은 조속히 본대로 돌아가라는 방송이었으니 전날 각 부대에서는 토요일이기에 전 장병을 외박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소양초등학교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얼마나 붐비는지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였는데 얼마 있다가 피란민들로 하여금 시내로 나가라는 소개 령이 다시 내려져 피란민들은 이우성속에서 소양강 다리를 건넌 것이다.
피란민들이 소양강 다리를 건너 소양로를 지나 뿔뿔이 헤여져 제 각각 가는 것이었으니 안내를 해주는 사람도 없어 제각기 아는 집이나 홍천 쪽으로 기수를 잡아 갔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마침 춘천초등학교 뒤에 살고 있는 누님 댁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벌써 이웃사람들이 와서 이북놈들이 기어코 쳐들어 왔다면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밤새도록 포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봉의산 쪽을 바라보던 식구들이 모두는 깜짝 놀랐던 것이니 산 마루 여기저기로 포알이 떨어져서 먼지가 풀석하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북한은 6.25전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38선 부근의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민간인과 순경을 살해하였는가 하면 수시로 총격을 가하기 때문에 그날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 며칠동안 그러다가 말겠지 하였는데 그게 아니고 전면전이라고 하였으니 모두가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우리나라가 일본의 36년간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은 1945년 8월15일이고 그 후 국민들은 하나로 뭉쳐서 통일국가를 형성하려고 하였으나 외세에 의해 남북이 갈려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를 하였고 이미 그 전에 북한에는 소련을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이 진주하는 바람에 우리의 염원인 통일한국이 아닌 남북으로 갈리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유엔의 주도하에 5.10 선거를 치루고 1948년 8월15일 마침내 유엔이 승인한 단독 정부수립이 완성되어 세계만방에 대한독립국가임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민족은 다시는 외세에 의해 나라가 분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을 가졌으나 북한공산주의자들의 계산은 그것이 아니고 시초부터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로 정하였던 것이며 그것이 1950년 6월25일 새벽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봉의산에 포알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시내의 사람들은 모두가 기겁을 하고는 조반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피란 짐을 꾸려가지고 허둥지둥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는 누님 댁을 나선 것이다.
막상 집을 나서고 보니 어느 쪽으로 향해서가야 할지를 모르게 되자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을 트는 쪽으로 쫓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우리 식구가 여러 사람들의 뒤를 따르다 보니 춘천에 살았지만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고장을 지나게 되니 갈 길이 막막한 중에 팔미리라고 하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우리의 앞뒤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장마 물에 나무토막 떠내려가듯이 몰려가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휩쓸려서 가는 속에 어떤 이는 송아지를 끌고 가기도 하였는데 송아지는 몇 발자국을 가다가는 엄매 하고 어미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 그 쪽에 사는 사람들은 늦은 모를 내느라 한참 바삐 움직이고 있다가 피란민들이 함빡 마을을 지나게 되자 그 사람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서둘러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는 어떤 소식도 전해지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 봐도 그때는 농촌이고 도시고 간에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던 시대도 아니고 마을의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이 직접 가서 전달을 해야 할 정도로 정보가 어둡던 시대였다.
동네에서 잔치를 하거나 장사가 나도 일일이 청첩장이나 부고를 써서 가평이고 서울이고 간에 사람이 직접 전달을 해야 했으니 우편으로 연락을 하게 되면 워낙 늦게 배달이 되다 보니 이런 방법을 썼던 것이다.
우리가 지나던 팔미리는 춘천에서 보면 아주 시골로서 어디서 소식을 들을 수도 없게 되다 보니 그날 모를 심으려 하였던 것이며 피란민들이 함빡 마을을 지나게 되자 그제야 그들도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피란민들이 향하는 뒤를 쫓다 보니 어느 듯 해가 기울기 시작을 하는데 어디서 하루밤을 자야 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을 하였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을 하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을 하는 것이니 다급한 중에 길가에 허름한 초가집이 있어서 들어가니 거기에는 이미 춘천의 피란민들이 하나 가득 방을 차지하고 있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우리 식구가 방 한쪽에 낄 수가 있었으니 먼저 온 사람들이 서로 양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방 한구석에서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도 되고 더구나 인민군이 이 나라를 점령하게 되면 수많은 애국자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갈 것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저녁을 어떻게 해서 겨우 먹고 나서 나는 도저히 좁은 방안에서 잘 수가 없어서 지시랑물이 떨어지는 봉당 한쪽에다가 가마니를 깔고 누웠지만 좀처럼 빗소리에 잠이 오지를 않는 중에 집을 떠나올 때에 입은 옷 그대로 떠났으니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더구나 여름이라고 하지만 산골의 밤은 냉기가 돌아서 몸이 오그라질 정도로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춘천의 피란민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을 하여 우리 식구들도 조반을 얼른 먹고는 다시 그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피란을 나간다고 해도 멀리 갈 것이 아니라 전황을 살펴보면서 다른 방도를 취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얼마쯤을 가다보니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길을 택해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는 사람은 없고 우리만 그 길을 택하여 가다 보니 산이 점점 높아져 그 너머에 집이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가졌는데 산꼭대기에 올라보니 저 아래 십여호의 아담한 집들이 보여 반가웠다.
마을의 형태는 굴곡이 심하였지만 나름대로 이리저리 밭과 논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때가 보리타작을 하는 때라서 그런지 한 집에서는 바깟마당에서 도리깨로 보리를 털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타작하는 집을 향해서 가셔서 한참동안이나 계시다가 올라오셔서는 앞을 서시며 쫓아오라고 하셨다.
우리가 들어간 집은 다섯간의 초가집으로 집을 지은지는 얼마 되지를 않아서 그런지 마루도 놓지 않은 봉당은 시뻘건 진흙을 바른 것이 덜 마른 상태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주인아저씨의 연세는 아버지와 비슷하였는데 그 아저씨는 우리 식구들을 보고는 집은 누추하지만 당분간은 함께 지나자고 하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때 우리 식구래야 부모님과 여동생이 함께 한 네 식구였는데 문제는 당장 며칠 후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누님댁에서 쌀 몇 되박을 가지고 오긴 하였지만 며칠만이면 떨어질 것을 생각하신 어머니는주인 아저씨에게 양식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자 주인댁에서는 아직 보리 타작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만 먹을 양식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곳의 지형은 앞뒤가 산으로 막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반 없다 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집에서 며칠이 지나자 양식이 대롱거리게 되자 어머니는 이웃에서 보리타작을 하게 되면 가서 일을 하시고는 보리쌀을 품삯으로 받아오시기도 하고 감자를 캐게 되면 감자를 푸대로 얻어 오시기도 하여 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하루하루를 지날수록 외부의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하루 지나기가 여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그 댁에서 한 열흘쯤을 있었는데 시내에서 한사람이 들어와서 춘천의 소식을알려 주었는데 시내에는 인민군이 곳곳에 보초를 서 있고 오가는 사람들의 검문을 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게 되자 아버지는 춘천의 집으로 가야할지를 걱정하시는 것이었으니 검문 검색에 잘못 걸릴까봐 그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서울을 빼앗긴지 오래고 인민군들은 날마다 남쪽으로 진격을 해 나간다는 것이었으니 그 소식을 알게 되신 아버지는 낙담을 하시면서도 마냥 남의 집에 있을 수도 없어서 집으로 들어가야 되겠다는 말씀을 하시었다.
피란을 나올 때 별로 가지고 온 물건도 없어서 우리는 홀가분하게 떠나게 되었는데 막상 떠나려 하자 주인댁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고생만 하다가 가신다면서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하자면서 섭섭해 하셨다.
아무 인연도 없던 집에 있다가 많은 신세를 지고 가는 것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어서 다음에 좋은 시절이 오개 되면 찾아보겠다고 하였지만 그 후에는 다시 만나지를 못하였으니 인간이란 한번 헤어지는 그 순간이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미처 개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피란을 나갈 때는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나갔지만 우리가 막상 집으로 돌아 갈 때에는 우리처럼 더 이상 있을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길을 나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피란을 나올 때에 하루저녁을 잤던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사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주 말리 피란을 나간 모양이었다.
우리와 같이 행보를 같이 하게 된 사람들을 대충 세어보니 30명이 넘었는데 그들은 지금까지는 말로만 듣던 인민군을 한사람도 만나지를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춘천시내엘 들어가려면 중간에 검문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자기네는 경찰가족이라서 겁이 난다고 하였다.
그분 네들이 경찰가족이라는 말에 아버지도 아들이 경찰학교에 입교한자 20일 만에 사변이 일어났다고 하자 상대방의 아주머니는 남편이 출장을 나간 사이에 인민군에게 쫓기다 보니 아직 남편의 소식을 통 모른다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분네들을 위로하면서 춘천시내엘 들어가게 되면 검문을 받을텐데 그때에는 아들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를 못하였다는 말만 하자고 하셨다.
여름의 땡볕이 내리쬐는 7월 중순이지만 맨땅을 터벅터벅 걷다 보니 온몸에 땀이 나고 물이 먹고 싶었지만 길가에는 물이 없으니 목이 마른 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논에 모를 내서 한창 뿌리가 붙어 퍼렇게 올라올 판이지만 모를 낸 논은 많지를 않았으며 모를 낸 논도 물이 바짝 말라 있었다.
아침 일찍 솔골을 떠나서 오후 팔미리를 지나 기찻길을 옆으로 걷다 보니 저 멀리 신남 초등학교 건물이 보이는 것이었다.
신작로 길에는 이따금씩 군용트럭들이 달렸는데 그것은 미군의 트럭과는 달리 앞이 뭉툭하고 진 국방색갈을 칠했으며 그 꼭대기에는 군용 물품을 많이 실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마차가 다니는 길로 길이 움푹 파이기도하고 어떤 곳은 장마에 길이 끈어진 곳을 그냥 방치하여 논물이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남학교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섬짓한 공포감을 갖게 된 것이니 거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춘천시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검문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것을 목격하시고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잠시 그 자리에 서셨는데 일행중의 경찰가족이라던 분네들도 얼굴이 하얘지는 것은 우리와 같은 감정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거기에서 통과할 길은 그 길 하나이기에 우리는 어절 수 없이 그대로 그 길을 지나가기로 한 것이다.
70m 50m 를 걸어 들어섰을 때에 우리는 인민군들이 입은 복장을 처음으로 보고는 가슴이 섬짓하였던 것이니 그들의 복장 색깔은 황토색갈에 어깨에는 시뻘건 견장을 찼으며 바지 가달 오른쪽엔 육상선수들의 달리기를 할 때에 입는 팬티모양으로 빨간 줄을 친 것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들이 그렇게도 무시무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복장을 보자마자 가슴이 떨리기 시작을 하는데 아마 그때에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 모두가 하나 같이 그랬을 것이다.
말만 듣던 인민군이 이 땅을 점령하였으니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던지 이 무리들을 싸워이겨야 하는데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전쟁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를 않았으니 무슨 수로 이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인가 !너무도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된 것이니 겁도 났지만 더구나 형님이 경찰로 입교한 것이 탄로가 날까봐서 그것이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거기에는 생전 처음으로 보는 장총을 어께에 멘 10여명의 인민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30m 20m를 걸어 마침내 그들의 앞을 지나려 하자 ‘잠깐 “하더니 우리들을 모두 제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중의 붉은 테의 모자를 쓴 장교인 듯한 인민군이 한마디를 하였던 것이다.
“ 여러 동무들 환영합니다 . 춘천이 해방이 되었으니께니 이제 인민들이 살판이 났시오.
어여 어여 집으로 돌아 가시라요.“
그들은 제법 웃음 띈 얼굴로 우리에게 호감을 사려 하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은 가슴을 녹이기 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기에 주춤거리면서 그 자리를 떠나 한참을 오고 나서야 길게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우리와 일행으로 오던 사람들도 우리 뒤를 바짝 이어서 따라왔는데 인민군의 앞을 지날 때에는 무슨 말을 붙일까 봐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그곳을 빠져 나오자 바로 신작로로 올라서게 되었는데 얼마쯤을 가다가 길옆 경사진 곳을 보다가 두 번째로 기겁을 한 것이니 거기에는 아래 위 흰 바지 저고리를 걸친 한 40대의 남자가 논두렁께로 머리를 젖힌 채로 죽어 있었는데 얼굴은 이미 새까맣게 변색이 된 채의 죽은 사람이었으니 죽은 사람을 처음으로 대하다 보니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
누구의 아버지인지 왜 거기서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만일 가족이 함께 동행을 하였다면 저렇게 죽은 사람을 방치하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를 않았다.
거기서부터 다시 공지천을 건너고 소양로 2가 (지금의 서부시장 쪽) 뽕나무 밭을 지나서 소양제1교 근처까지 가는 동안에는 신남에서처럼 시체를 보지 못하였는데 정자각에 다다르게 되자 또 한번 가슴이 후당당 뛰는 것이었으니 정자각 마당 넓은 곳에 국군복장의 열명 가량의 군인들이 여기저기 죽은 시체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팔을 옆으로 또는 위로 뻗었는가 하면 어떤 군인은 엎어진 채 동료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머리를 숙이기도 하였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격전을 벌리다가 필연코 그들의 총알에 희생이 되었을 생각을 하니 너무도 불쌍하고 너무도 가엽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불법남침을 감행한 날은 일요일이었으며 군인들은 외박을 나갔거나 아니면 각 부대별로 휴가를 주어서 부대에는 보초병들만 몇 명 있을 뿐 텅텅 비어 있는 부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전쟁이 발발한 초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데 인민군은 그 것을 이용하여 예상외이 전과를 걷우었을지는 모르나 우리 국군에게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강 건너 집을 향해서 가기 위해서 소양강 다리를 건너자니 다리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코를 막을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옷으로 코를 막아도 그 역한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다.
냄새의 원인을 다리를 건너고 나서 알 수가 있었으니 그 넓은 채소밭에 수백 필의 말들이 죽어서 다리를 하나같이 하늘로 뻗치고 있었으니 한 여름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판에 그 부패의 도가 심하여 그렇게 냄새가 지독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그 당시 38선을 넘을 때에 대포를 말마차로 운반을 하였는데 이 말들이 소양강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집결을 했을 때에 우리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말들이 죽어 넘어졌던 것이다.
말이 죽은 곳에는 인민군의 시체도 쌓여 있었으니 전투로 인해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저마다의 빛깔과 그 물건이 지닌 향기 또는 냄새가 있게 마련이다. 꽃이 향기를 든다면 장미꽃의 향기야 말로 꽃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할만치 아무리 그 향기 속에 오래 잠겨 있다고 해도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지를 않은 것이다, 다양한 식물의 잎이며 꽃들이 우리 인간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제공하는 반면에 우리의 후각을 된통 자극하며 고개를 외로 돌리게 하는 향기가 있으니 그것은 동물의 시체가 썩는 냄새일 것이다.
수 백 마리의 말과 인민군의 시체가 뒤섞여 썩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반은 뛰다 싶이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벗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냄새는 하루종일 몸에 배고 옷에 배서 그런지 다 저녁 때가 되도록 가시지를 않았다.
그곳을 지나게 되면 바로 한때 전국의 처녀들이 몰려와서 일을 하던 제사공장에 이르게 되는데 그 때에 공장에 다니던 처녀들의 손은 고치를 손질하느라 퉁퉁 부은 상태였다.
공장을 지나 신작로 왼쪽 길가에는 7연대가 주둔했던 부대막사들이 죽 늘어서 있었지만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막사는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기상나팔 소리가 울리던 곳이며 군가를 부르면서 구보를 하던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새벽하늘에 울려 퍼졌는데 지금 그 군인들은 인민군에게 쫓겨서 남으로 후퇴를 하고 있었으니 우리가 미리미리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이런 불행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집 은 이 부대를 지나 춘천농고 앞마을 강가에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집에 도착을 하니 불과 보름 사이에 마당에는 풀이 웃자라 있었으니 집이 비어 있다면 폐허가 되는것도 삽시간의 일일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일곱 간의 초가집으로 울타리를 해서 싸리문을 열어야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집 안팎을 돌아보니 안방이며 윗방의 세간이 다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우리 집의 샅림샅이를 모조리 뒤져서 가져간 모양이었다.
하기야 전쟁이 난다면 식구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 외에 무엇이 중요하랴!.
그런데 집안을 돌아보다가 울타리 밖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란 것이니 울타리 바로 옆에다가 1m 간격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가서 숨어 있을 만큼의 호를 수도 없이 파 놓았는데 그것이 비단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니고 동네 집집의 울타리가 마다 다 똑같이 호를 파놓고 있었던 것이다.
울타리를 방패삼아 총을 쏘기 위해서 집집마다를 방패막이로 하였으니 그들은 하루아침에 전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울타리에서 벗어난 밭 가운데 곳곳에는 흙색갈의 기다란 전대들이 널려 있었는데 전대에 날쌀을 넣은 비상식량의 준비는 그들이 언제 어디서 싸울지라도 굶지 않으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줌이다.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이 될 때에 장기전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보급이 잘 되어야 하지만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대용 식량이 필요할 텐데 인민군들은 그런 작전을 짜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말살하던 스탈린 정책의 일환으로 써먹던 작전으로 6.25때도 똑같이 짜여졌으니 어쩌면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이미 이 전쟁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장기전에 돌입할 각오를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장기전 까지 예측하고 덤벼든 그들에 비해서 우리 국군들은 나라를 항시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채 일요일만 되면 부대마다 외박이나 외출을 자유롭게 하게 한 것이니 이야말로 가비상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대비를 전혀 고려치 않은 지휘본부의 무방비책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뒤늦게 알게 된 육군의 지휘부에서는 그제야 거리의 방송을 통해서 휴가 장병의 귀대를 재촉하였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군대의 규율이었던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자 피란길에서 우리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이웃 사람들에게서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으니 그것은 인척이 되는 김 호식 형님과 그의 조카되는 김기왜이 두 아재비조카가 소양강 전투에서 전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김 호식 형님은 키도 크지만 축구 선수로 활약을 하였고 열 아홉 살에 샘밭 부자댁의 맏딸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하나를 두었는데 전사를 하였다는 소식에 그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시고 누워 계신다고 하였다.
아들이 입대하고 이따금 우리 집엘 오시게 되면 아들의 자랑을 그렇게도 잘 하시던 아주머니였는데 그런 자식을 애석하게도 전쟁 초기에 잃는 아픔을 겪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슬프고 가슴이 아픈 일이란 말인가. 아들은 일요일마다 외출을 나와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고 정차 간부후보생으로 갈 계획으로 있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조카인 기왜이는 집안이 어려워서 일찌감치 군대에 지원을 하여 휴가만 나오면 번쩍이는 계급장을 자랑하면서 다녔는데 엄마가 일찍 장가를 들라고 해서 홍천 색씨와 약혼까지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6.25기 나고 바로 전사를 한 것이니 색시의 팔자가 사나워서 그랬던 것인가. 가족 중에서도 가장 슬퍼하시고 만날 눈물을 흘리신 분은 그의 할머니였다.
작달막하신 할머니는 마을에서도 가장 부지런하시고 인정이 많으셔서 동네의 아이들을 만나기만 하면 “ 그래 너를 어제도 보았는데 오늘 또 만나게 되었구나. 잘 자라거라.”하셨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손자가 전사를 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니 그 얼마나 애통스런 일이었으랴. 할머니는 한동안은 문 밖 출입도 하시지를 않았는데 오랜 후에 동네에 나서시긴 하셨지만 옛날의 다정하시던 모습과는 다르게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손자가 죽고 난 다음 휴전상태로 전쟁의 포 소리는 멎었지만 전쟁으로 인해서 가족을 잃은 집의 가족들은 한동안 멍하니 세월만 원망하며 사는 것이었지만 얼마 못가서 아들 또한 어머니를 뒤로 하고 홀연히 병이 나서 돌아가시니 할머니는 손자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슬피
우시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아들 손자를 앞세우시고도 만날 죽고 싶다 하시면서도 일백 다섯 살까지 사셔서 강원일보에 까지 이름을 올리시기도 하였으니 할머니의 일생이야말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오래도록 하신 분으로서의 본보기라고도 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도 짧은 피란 생활이지만 집을 떠나고 난 후에 이루 말할수 없는 불편함과 아무것도 몸에 지닌 것이 없이 남의 집에 얹혀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껴서인지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았다.
그런데 인민군이 이 나라를 점령한 뒤에 사뭇 달라진 그들의 정책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입장에 놓이다 보니 매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맨 처음에 그들과 부닥친 일은 치안대라고 하면서 동네에 잠입한 낯선 이북사람들이었는데 우리들은 암암리에 그들의 통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당장 우리가 집으로 돌아 온 그날 저녁 부터 가족 모두에게 회의에 참석을 하라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고 청년과 소년 소녀들 모두가 따로 따로 모임을 한다며 장소를 지정해주는 것이었다.
남한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런 일련의 회의에 며칠 참석하고 난 뒤에 느낀 것은 이런 방법이야말로 그들 공산주의 이론을 주입시키고 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통제의 방법은 그 후 인민군이 패전하기 직전까지도 지속되었으니 그들이야말로 한쪽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전쟁은 전쟁대로 끌고 가는 것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한은 변함없이 이러한 방법으로 주민을 통제하고 있을 것이며 이것이 체제 유지를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북한의 선량한 사람들도 거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일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말로는 자유와 번영 인민을 위핸 정책을 쓴다지만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일 뿐 그들은 결코 인민에게 자유를 주자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민군이 남침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반공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전격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피란을 한 이틀 미루다가 미처 나가지 못한 반공청년들은 무엇을 믿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그들은 산속으로 혹은 마루 밑이나 윗방고래를 뜯고는 그속에 숨어서 3개월을 벋히며 숨어 지난 것이니 하늘에 운명을 맡기지 않았다면 도저히 그렇게 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점령을 한 후에 조직한 치안대가 맨 먼저 활동을 개시한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살던 사람들의 지위를 높여 주는 일이었다.
그들의 이론은 인민의 평등을 부르짖고 모든 인민이 공평하게 살아야하는데 당신들은 지금까지 잘 사는 집에서 머슴을 살면서 갖은 박해와 착취를 당하였으니 이제는 당신들을 우리가 우대해 줌으로서 노동자 농민의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은 인민의 적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 당신들은 인민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하면서 붉은 완장을 채워 주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그때에 유일하게 서우지 집의 머슴으로 개똥쇠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치안대에서는 그를 바로 민청위원으로 임명을 하고는 그들의 심부름을 시키는데 이용을 하였다.
그는 원래 심성이 착한 사람이고 남을 이용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남에게 해로운 일이라는 것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도 않은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완장을 채워 주었으니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우쭐대거나 남을 깔보기라도 하였겠지만 그는 그럴 위인이 되지 못하다 보니 오직 그들이 시키는 심부름이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영화관의 입 출입을 책임지게 하는 업무였고 날마다 저녁이면 영화관에서 영화 한편씩을 돌릴 때마다 문턱에서 아이들을 줄을 세우고 입실을 도왔으니 쇠고삐만 잡던 손으로 아이들을 줄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였으랴 만은 그는 그래도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 동네에는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급생 7명이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반공 소년들이었으며 저녁마다 모이게 되면 벽보에 붙여진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는 떼어버리자는 모의를 여러 번 하였지만 쉽사리 행동에는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그날 우리 일곱 명은 영화를 한다고 해서 모이라는 장소엘 가서 보니 그곳은 춘천농고 앞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으로 공산주의자들은 무종교이기 때문에 이 예배당을 접수해서 영화관과 선전장으로 활용하였다.
해는 지고 막 어두워질 무렵에 영화관이라고 하는 예배당엘 들어가려니 동원된 인원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지 혼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인파 속으로 들어가다가 “이런 때에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네.” 하는 말을 뱉는 순간 누가 내 손목을 꽉 잡는데 놀라서 기겁을 해서 돌아다보니 거기에는 낯익은 개똥세가 내 손목을 잡았던 것이다.
순간 나의 얼굴은 황닥 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끈거렸는데 손을 잡고 보니 아는 얼굴임을 감지한 그는 아무 소리도 없이 잡은 손을 슬그머니 놓아 주는 것이었다.
“ 아저씨 꼴 베러 가요.”
“ 나 지금 바빠서 저녁때나 가야 되는데.”
“ 그럼 내가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참외나 하나 따오세요.”
“ 그래. 알았어.”
나는 개똥쇠 아저씨와 나이 차이는 엄청 많아도 꼴을 베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갈 때면 같이 가는 때가 많았으며 타작을 할 때에는 우리 집에 와서 자기네 일처럼 품앗이를 잘 해 주기도 하였다.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난 그에게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고 오로지 농사일에만 열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에 그가 붙잡은 아이는 낯모르는 아이가 아니고 나였다는데 대해서 그도 놀라고 나도 놀랐지만 순간 그는 나를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감히 내가 잘못을 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빨강 물이 덜 들은 그였기에 나를 붙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키는 비록 작지만 마차를 끌 때에는 소리를 잘 하였으며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밤낮없이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잘 하던 개똥쇠는 그렇게 한동안 인민군의 심부름을 하면서 팔자를 고칠만한 좋은 세상을 만났다고 혼자는 생각을 하였겠으나 석 달이 지난 후 국군이 입성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주인 아주머니에게 살려달라는 청을 하였지만 아무도 그의 운명을 담보할 수가 없었으니 그는 패잔병의 일원으로 북한으로 넘어 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6.25로 인해서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용을 당한 채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북으로 넘어가야 했으니 이것이 인간이 지닌 비극 중에 가장 잔인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개똥쇠야말로 그 댁에서 머슴으로 여러 해를 있으면서 이른 봄이면 밭에 두엄을 내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집안의 농사일은 다 자기가 도맡아서 하였으니 여름 장마 질 때에 비가 너무 와서 쉬는 날 이외에는 밭에서 논에서 일생을 일만 하던 사람이었다. 추운 겨울이라고 해서 쉴 수가 없었으니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보텡이 벼루에서 마차로 장작을 실어다가 시장에 가서 팔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그의 인생은 일만 하다가 죽으라는 팔자려니 하였는데 그에게 행운인지 불운인지 공사주의자들이 남침을 강행함으로서 그에게는 뜻밖에도 붉은 완장의 감투가 일시적이나마 주어진 것이니 하루아침에 그는 천상으로 올라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완장을 찬 후에도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할 뿐이라 쓸모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것이 하나의 선전 효과를 거두는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은 누구 앞에서나 그를 치켜 올려 준 것이다.
이렇게 남의 머슴들에게는 우대를 하였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떨어진 옥산포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없는 피비린 내나는 살육판을 벌리기도 하였다.
옥산포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은 북한이 남침하고 얼마 있다가 바로 우리 동네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지방 빨갱이들이 부자집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일이었다.
사변전만 해도 옥산포는 평화스런 마을이었고 그 마을의 부자로 살던 배씨는 이장을 여러 해를 보아서 부락의 어려운 일은 솔선해서 해결을 하는데 앞장을 선 분이었다.
그런데 6.25 이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적색분자가 나타나 배 이장을 성토하고는 그를 해치기 위해서 마을 한가운데 공지에다가 구덩이를 파게 한 후에 그들 가족들을 모조리 그 구덩이 앞에다가 세운 것이다.
“ 너는 그동안 호의호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부자로 살았으니 인민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려 한다 .”
그러자 즉시 환호가 쏟아지는 동시에 여러 젊은이들이 “와 ”소리를 지르면서 구덩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배씨네 가족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죽창으로 닥치는 대로 찔러 구덩이로 떨구고는 계속해서 찔러댔으니 피가 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나중에는 맥없이 죽어간 것이니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의 혹독한 만행 중에 하나였다.
이 밖에도 춘천에서는 서면 수정마을에서도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데 어찌 이 두 마을에서 만의 일이었으랴.
그 당시에 날마다 인민군이 발행하는 신문을 돌려 보게 하였는데 수원을 빼앗고 청주를 함락하였으며 대전도 곧 함락이 될 것이라면서 인민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날이 새기가 바쁘게 치안대에서는 한 집에서 한사람씩 부역을 나오라고 하였는데 거기를 나가게 되면 동네에 널려 있는 어지러운 환경을 정비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인민군들은 말마차를 이용해서 전쟁물자며 대포를 운반하였는데 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들은 얼마나 많은지 매일같이 동원된 인원이 치워도 제대로 자리가 나지를 않는 것이었으니 우선 탄약상자가 산더미처럼 사여 있어 마을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탄알과 포탄이 들어 있는 상자가 많아서 이를 한쪽에다가 쌓아 놓기도 하였지만 워낙 많다 보니 이를 땅에다가 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여기에 동원되었던 일부 어른들은 수류탄을 수거하다가 몇 개 씩 숲속에다가 감추어 놓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나중에 고기 잡을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서 일이 끝나게 되면 어른들은 슬슬 감추어 두었던 수류탄을 가지고는 강물로 나가서 웅덩이에 던져서 물고기를 삼태기로 건져서는 집으로 가겨가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고기를 잡자 아이들은 카빈이나 또는 따쿵총 탄알을 실험한다고 책상 틈에다가 탄알을 세워놓고는 탄두에다 못을 조준해서 망치로 못을 치게 되면 탄알이 뻥하고 흙속을 뚫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계속하였으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장난이란 것을 그들은 개념치 않았다.
그들은 주로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무성영화를 돌리면서 변사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영화에 대한 해설을 늘어놓았는데 주로 소련의 영화내용은 아이들이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를모르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간 아이들은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고 얼른 시간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원래 우리 마을은 우리가 사는 아랫마을과 춘농고가 있는 윗마을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윗마을에는 사상이 좌익에 가까운 청년들이 몇 명 있다는 소리를 6.25가 나기 이전부터 들었는데 막상 인민군이 춘천을 점령하게 되자 그중의 일부는 모든 동네의 간부직을 맡아서 활동을 하였다. 반면에 아랫마을에는 그 또레로 우리 형님이 유일하였는데 6.25가 나기 20일 전에 형님은 경찰학교에 입교를 하였으니 윗마을 청년과 친한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마을의 청년들 중에 민청위원장으로 윗마을의 형님의 친구인 서 석기가 되고 그 밖에 선전부장은 동네에서 껄렁껄렁하면서 거리를 누비고 다니던 춘농고 출신 김해수가 되었던 것이다.
서 석기는 살기가 어려워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당분간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그전부터 북쪽 사상이라고 해서 동네에서는 늘 쉬쉬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서 석기는 형님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로 그 형은 우리 집엘 자주 놀러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가로 다니면서 고기도 잡고 천렵도 하며 가끔 우리집에서 자고 가는 때가 많았다.
그런 형이 민청위원장이 되었다니 동네 아르신들은 사상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라면서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그 형은 한 번도 그 후에 우리집엘 오거나 형님에 대해서 물어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일은 그 다음부터 벌어지기 시작을 한 것이니 어느 날 초저녁에 우리 식구들이 저녁을 먹으려는 시간에 낯선 사람들 대 여섯명이 우리집 앞에 와서는 아무 소리도 없이 대문을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으려던 우리 식구들은 그들이 나타남에 따라서 놀라서 수저를 놓자 그 중에 한사람이 내무서(우리네 경찰서)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복장은 인민군과 달리 흰 정복에 모자는 둥근 모자에 번쩍이는 별을 단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형님이 쓰던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우리 집의 집 구조며 형님이 쓰던 방까지 다 알고 온 사람들로서 형님이 경찰학교에 입교한 정보를 훤하게 알고 온 사람들 이었다.
그것은 묻지를 않아도 형님과 가장 친한 친구가 민청위원장이 되었으니 그를 통해서도 잘 알았겠지만 그들 내무서에서도 각 경찰의 인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을 것이다.
사랑방으로 들어간 내무서원은 장롱의 서랍을 모조리 열어보고는 그 안에 내용물을 다 꺼집어 내는 것이었다.
장롱 안이야 말로 형수가 쓰던 여러 가지 옷가지며 비밀스런 물건들까지도 다 보관되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무슨 권력으로 남의 집 장롱안의 물건들을 다 뒤진단 말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이 방에 들어갈 때에 한마디 말씀도 하시지를 않았지만 아들이 쓰는 방안을 샅샅이 뒤지는 꼴을 보시고 있자니 그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방안에 들어갔던 자는 서랍 안에서 태극기 한 점과 경찰학교 입교 합격증이며 경찰의 복무지침까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하여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 아들이 언제 경찰에 들어갔소.”
그러자 잽싸게 어머니가 대답을 하신다 .
“우리 큰 애는 무슨 학교를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난리가 난 후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남의 집을 막 뒤지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이요.”
“ 어머이 동무 . 말을 함부로 하는 기 아이요. 조심하시라요.”
“ 내가 무슨 틀린 말을 했나요. 학교를 간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더 있어요.”
어머니가 싸늘하게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는 이번에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같은 방법으로 온 방안을 뒤졌지만 방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안을 다 뒤지고 나서 그 중의 한사람이 어머니를 향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 혹시 말이에다. 아들이 밤중에라도 집에 오게 되면은 신고를 하도록 하시라요. 공화국에서는 아무리 반동이라 할지라도 자수하고 들어오면 우리는 쌍수를 들어서 환영할 것이요.”
그들이 살아지자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니 한숨만 후하고 내쉬시는 것이었다.
내무서원들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3.4일에 한 번씩은 우리집에 와서는 가택수색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밤중에 우리 식구들이 막 잠을 자려고 할 때에 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어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이 초창기에 올 때에는 네모진 등불( 호롱불)을 들고 왔는데 그때 그들에게는 미군들이 지참하던 전지가 보급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미군 비행기가 아직 뜨지 않을 때였기에 그런 등불을 들고 다녔지만 비행기가 야간에도 뜨게 되자 그들은 그 후에는 불이라는것을 일체 사용하지를 못하였다.
야간에 비행기로 해서 사람들은 저녁을 일찍 먹고는 암흑의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생이 춘천 가라메기가 고향으로 시골 농촌이다 보니 자랄 때부터 소 키우고 닭을 키우는 집에서 자랐다. 내 또레는 아래 윗동네를 합쳐서 모두 8명으로 초등학교는 신동초등학교에 한 학년으로 다닌 것이니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기도 하였으니 우리 밑으로는 공교롭게도 동생들이 있긴 하였지만 터울이가 늦어서 동생들이 있는지 없는지 였다.
그런데 아이 8명중에서 한명만 윗동네에 살고 나머지는 모두가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이 7명 모두가 반공에 충실한 집안 아이들이고 윗동네의 박영철 하나만 부모의 사상이 저쪽이기 때문에 암암리에 우리 7명은 박 영철을 경계하였다.
저녁 회의가 끝나면 우리는 따로 모여서 나름대로의 작전을 짰지만 실행을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처음으로 시도를 한 것이 삐라를 찢는 일이었다.
그 작전은 정 만록이 하고 다른 아이들은 보초를 서서 감시를 하였는데 그 당시에 동네의 바람벽마다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스탈린의 사진을 나란히 붙여 놓았으며 그 사진들의 모양은 일주일이면 새로 같아 붙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첫 시도로 동네에 붙여진 삐라에다가 오물칠을 하는가 하면 으슥한 곳에 붙여진 삐라는 반 이상을 찢어서 없앴던 것이다.
삐라를 찢고 나서 그 다음날 동네의 반응을 보았지만 그때야말로 매일같이 비행기가 떠서는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이니 민청위원회에서인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저희들 살기가 급박한 편이었으니 그런데에 손을 쓸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다 보니 어느 날 어른들 회의 때에 그런 내용이 지적이 되고 이는 아이들의 장난일수도 있으니 아이들 감시를 철저히 해야 된다는 내용의 회의가 여러 번 있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다.
이 무렵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등교하라는 통지가 나왔지만 우리들은 한명도 학교에 가지를않았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사범학교의 교장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어떻게 해서 그 선생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신분이 온전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런데 3개 월만에 서울이 수복이 되고 춘천 또한 그 무렵에 수복이 되었으니 일시적으로 감투를 썼던 사람들은 그 불행의 운명 앞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북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니 점잖으시던 그 수학선생님의 안쓰러운 얼굴이 한동안 눈에 어리는 것이었다.
사상이라는 것이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북한이 남침을 하였을 때에 그들에게 동조해서 부역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할 수없이 피란을 나가지 못하다가 그들에게 이용당해 부역자가 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부락마다 사상이 불순한 동네도 많지만 요행이 우리 아랫 마을에는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우리 마을은 다른 동네와 비교해서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만해도 옥산포 마을모양으로 마을사람 끼리 죽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7월이 되자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줄 알았는데 머리위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이었으니 그 비행기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소리가 요란한 비행기는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비행기를 쌕쌕이라고 하였는데 그 비행기만 나타났다 하면 길 가던 인민군이고 트럭이고 간에 모두가 나무 밑이나 숲속으로 숨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렇게 미군의 전투비행기가 전선을 향해서 출격을 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북한의 기습남침이 있자 바로 미국 투르만 대통령이 미국의 육. 해. 공군의 작전승인을 바로 하였기 때문이며 7월 들어서면서부터는 미군의 B29 전폭기편대가 평양을 비롯하여 고성 흥남 간 군사시설과 원산 해군기지 흥남 질소공장등을 맹폭격을 가하기 시작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라디오도 없던 그 시절이었지만 어른들은 어디서 들으셨는지 미군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 원조를 하고 있어 인민군은 꼼짝도 할 수가 없다는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의 일이었다.
부락의 청년들은 빠짐없이 구 예배당으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고 빠지게 되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엄포에 집안에 있던 젊은이들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을 하였는데 이날 모인 부락청년 (거기에는 아직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2학년생도 포함) 은 모두가 학교를 등교하거나 집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런데 이날 출석 점검이 끝나자 바로 출입문이 폐쇄됨과 동시에 군용트럭이 나타나더니 이날 모인 청년들이고 학생들을 모조리 트럭에 싣고는 어디론가 살아진 것이니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의용군 지원이라는 허울 좋은 선전으로 청년들을 일시에 끌어다가 부족한 인민군의 전력을 보충하는데 앞장서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 집안의 형들이 세 명이나 붙들려 갔는데 23살의 사촌형님인 김 대영과 그의 바로 아래 동생 16살의 형 김 계영 그리고 18살의 6촌 형 김 남영이 그들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너무도 허무하게 끌려간 형들의 소식은 끌려간 이후 전혀 생사를 모르고 있었는데 1976년에 일본에서 계영 형의 편지가 한통 배달된 것이니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당시야말로 일본에는 조총련의 후원으로 일본인 처들이 북송을 할 때였는데 계영 형이 일본에 나오게 된 것은 어떤 이유인지 언급이 되지를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지만 바로 답장을 보내면서 남한이 살기가 좋으니 이쪽으로 귀순을 하라고 하였는데 다시 생각을 해보니 그것이 형에게는 전혀 이롭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러 후회막급이었다. 그 후 혹시나 하고 형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그의 어떤 소식도 듣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극인 것이다.
그 형은 나이는 나와 같고 생일이 앞서긴 하였지만 사정에 의해서 사범학교는 나보다 한 학년 아래로 운동은 무엇이나 잘 하여 학교에서도 육상선수로 활약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등교를 하다가 그렇게 많이 다니지도 않던 트럭에 부딪치는 바람에 대퇴부의 골절로 2개월 동안이나 입원을 하여 그렇데 좋아하던 운동도 하지를 못하고 있던 중에 사변이 나고 의용군에 끌려간 것이니 나에게는 두고두고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명절이 되어 큰댁엘 가서 형을 만나게 되면 무엇이건 간에 나에게 줄려고 애를 쓴 형이었다. 어느 겨울에 한번 갔을 때에는 참새를 잡이 먹자면서 밤중에 사다리를 초가지붕에다 걸쳐 놓고는 팔을 뻗어서 참새를 잡아냈는데 그날 저녁 아마 열 마리도 넘게 집어냈을 것이다. 그 비결을 물으니 낮에 참새들이 들락거리는 곳을 알아 두었다가 밤중에 손을 넣게 되면 꼼짝 없이 잘 잡힌다고 하여 나도 집에 와서 그런 방법을 써보니 참새는 내 손안에서 도망을 가지 못하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 중에 한 가지는 아마 그때가 아마 여섯 살이거나 일곱 살 때 였을 것이다. 어느날 형이 우리 집엘 놀러왔다가 저녁때가 되어 전깃불을 켜자 그때까지 전깃불이 없던 집에 살던 형은 그것이 신기한지 전깃불을 끈다고 입으로 후후 불고 있어서 전깃불은 아무리 불어도 꺼지지를 않는다고 하자 형은 그것이 신기한지 한동안 그것을 아래위로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옛날의 학창시절을 회상해 보면 형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뇌리를 스치는데 그럴 때 마다 지금이라도 한번 만난다면 실컷 울면서 그의 볼을 보듬어주고 싶은 것이다.
큰댁의 대영 형님은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고 우리 친형님보다 한 살이 더 많아서 큰 형님이 되는데 그분은 얼마나 노랫가락을 잘 부르는지 마을의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뽑혀서 다닐 정도로 이름이 난 형님이었는데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개성지방으로 끌려갔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소식이어서 그것으로 절망을 하고 말았다.
의용군으로 끌려가기 1년 전에 형님은 장가를 들었는데 형수의 인물이 고와서 그런지 동네를 벗어나 논둑길이라도 혼자 걷게 되면 그렇게 지나가는 총각들의 야유를 받았다고 하였다. 남편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자 형수는 날마다 울면서 지났다고 하였는데 전쟁이 길어지자 어느 날 가슴이 답답하다며 친정이라도 다녀온다고 하여 간 후 다시 피란을 나가는 바람에 만나지를 못하였는데 수복해서 들어오긴 하였지만 그 형수는 다시는 형님과 마찬가지로 집에 나타나지를 않았으니 6.25는 이들 부부의 알뜰한 사랑까지도 허무하게 갈라놓고 만 것이다.
형들에 대한 애절함도 크지만 6.25때 계영형의 막내 동생 여덟 살짜리 근영이가 어느 날 두통이 심하다고 하더니 발병한지 단 열흘 만에 갑자기 사망을 한 것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연이다.
내가 큰댁엘 가기만 하면 동생은 붙임성이 많아서 그런지 나의 조끼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무엇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냐면서 만날 물었는데 그는 그만큼 주머니 속 안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때야 말로 동생에게 무엇 하나 사주고 싶어도 사주지를 못하였는데 그가 죽고 나서 생각을 하니 그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형들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의용군에 함께 끌려간 나보다 두 살 위의 육촌형 김 남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때 당숙은 우두에서 잠종장 일을 보고 계실 때였는데 어느 날 그러니까 우리 동네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끌어가던 날과 같은 날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에 당숙모가 오시더니 형이 의용군에 붙들려 갔다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다.
남영 형과는 거리가 멀어서 1년에 너덧 번씩 제사 때나 만나곤 하였는데 남영 형의 꿈은 장차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할 만큼 학교 성적이 남다르게 우수하였다. 당숙모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남영 형과 바로 두 살 아래인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 동생 동영이가 여섯 살 때에 밖에 나가서 놀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것이었으니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동생이 보고 싶어서 울었던 것이다.
나중에 좀 커서 그 원인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 당숙이 다니시던 잠종장에는 나무를 운반하는 목탄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 차에 차여서 동생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길을 가다가 하루에 한번 정도나 그런 목탄차를 볼까 말까할 정도로 차가 없던 시대였는데 동생인 동영이가 차 사고로 죽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자동차가 없던 그 시절이었음에도 그렇게 귀하던 단 한 대의 자동차가 있는 회사에 아버지가 다니시게 되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동생은 마침 뒷바퀴 사이에서 놀고 있을 때에 차가 뒤로 물러 섰으니 이 동생이 살아날 길아 없었던 것이다. 나와 그 동생은 한 살 차이로 그가 우리 집엘 오기만 하면 나와 짚가리에서 씨름을 많이 하였는데 내가 번번이 지게 되면 그렇게 좋아하던 동생이었다.
지금도 이따금씩 그와 같이 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깃을 단 단추의 옷을 입고 당숙모의 손을 잡고 대문 안으로 웃으면서 들어오던 동생의 모습이 안개 속처럼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의용군에 끌려간 이야기 중에 우리 동네의 빼어놓을 수 없는 집의 이야기가 있으니 나의 동기인 김 연태네 형제 이야기이다.
연태는 4형제 중 막내로 나와 초등학교 동기인데 그의 맏형님은 6.25 남침이 되고 얼마 후에 기존에 있던 방곡구덩이를 손질하다가 받침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사망을 하고 그의 셋째 형님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갔는가 하면 둘째형님과 연태는 의용군에 끌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연태는 황해도까지 끌려갔다가 용하게도 도망을 쳐서 나왔지만 둘째 형님의 소식은 다시 들을 수가 없었으니 4형제 중에 막내만 집에 외아들로 남게 된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신작로엘 나가보면 마차에다가 무기를 실어 나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인민군 하나가 총을 메고 따라가고 나머지 2명 중의 한명은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전쟁에 나오는 군인이 총도 없어서 메지를 못하고 나오는 모양이라면서 웃었다.
나는 매일같이 아버지를 따라서 참외밭에 가서 김을 매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큰댁의 일을 가시고 나 혼자 참외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그때 밭모퉁이로 내무서원 두 사람이 오는데 얼핏 보니 머리에 쓴 녹색판 모자에는 별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나는 왜 이 사람들이 우리 밭께로 오나 하고 있는데 이들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나를 보고는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 아버지 동무는 어딜 가셨냐.”
나는 그들이 왜 아버지를 모시러 왔는지 겁이 나면서도 거짓말을 했다가 어떤 해꼬지를 할지도 몰라서 아버지가 김을 매시다가 큰댁엘 가셨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나는 이럴 때에는 아버지가 오래 있다가 오셨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니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밭에 까지 아버지를 찾아 온 것이라면 어떤 중대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를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더니 나를 돌려다 보면서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들이 혹시 나를 의용군에 끌고 가기 위해서 온 것 같아서 열 다 섯 살이라고 말을 하자 그중의 한 사람이 내가 듣지 못하게 귓속말로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아버지가 오셨기에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 아무 대답도 하시지를 않더니 아무래도 너의 형 때문에 그럴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그들의 호출이 있어서 내무서를 찾아가니 아들에게서 어떤 연락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바른대로 말하지 않거나 앞으로 저쪽과 접촉하는 기미가 보인다면 가족들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을 당하시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던 7월 어느 날 밤에 그날도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아버지는 개울로 목욕을 가시고 나는 마루에 누워서 있는데 대문 소리가 나서 일어나서 보니 호롱불을 밝히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섯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주인을 찾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형님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언젠가 한번 왔던 방식으로 온 집안을 뒤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집안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헌 책 몇 권이 전부였는데 한 사람이 먼저와 같이 나에게 질문을 하는데 나이가 몇 살이냐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키가 작은 편이라서 동기들과는 구분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먼저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리고 나서 한 참후에 들어오셨는데 그때까지 이들은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아들의 소식을 알고 있을테니 바른대로 대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무슨 학교엘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아무 소식이 없으니 답답하다면서 그쪽에서 아들을 찾아주면 안되겠느냐고 오히려 그들에게 알아달라고 한 것이다.
“ 지금 전투가 한창 벌어져서 우리도 죽을 판인데 어찌 우리가 댁의 아들의 행방을 안단 말이요.”
그들은 지금 비행기폭격에 신경을 써야 하고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태도는 그 전과는 사뭇 다르게 위압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사상은 이 세상을 금방 지배할 것처럼 느꼈겠지만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에 그들은 두 손을 번쩍 들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소집은 매일같이 종전과 같이 영화관이었는데 아이들은 그들이 틀어주는 무성영화를 지루하게 보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를 알지 못하기는 먼저와 같고 시간만 때웠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도 아버지를 따라서 콩밭에 들어가서 김을 매고 있는데 비행기소리가 나기에 하늘을 쳐다보니 엄청나게 큰 비행기가 춘천 시내를 향하여 오는데 비행기에서 새까만 것이 한 무더기 떨어지는데 지상으로 내려올수록 항아리처럼 커지더니 소양강 다리 쪽으로 떨어지는데 천지가 우르 꽝꽝 울리면서 불이 번쩍 나고 땅이 흔들리는데 그 광폭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
천지가 들썩하면서 산의 메아리가 얼마나 진동을 하는지 폭탄은 몇 분 후에 다시 같은 지점을 향해서 떨어졌지만 그날의 목표인 소양강다리를 끊지는 못하고 B29는 살아졌는데 다음날 정오에 다시 나타나더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폭탄을 떨어트렸지만 또 다시 실패를 한 것이다. 지금은 유도탄으로 목표지점까지 타격하는 기술이 발달을 하였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런 기술은 개발이 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수차례에 걸쳐 폭탄을 떨어트렸을 것이다.
나중에서야 안일이지만 몇 차례의 걸쳐서 B29는 기어코 다리난간을 파괴한 후에는 출동을 하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수차례씩 쌕쌕이는 쉬지 않고 출격을 하는 바람에 그 시각이 되면 마을이고 도로건 간에 다니는 행인은 물론 인민군이고 내무서원이고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전투기들이 출격을 하게 되면 봉의 산에서 비행기를 향하여 딱쿵총( 그 총은 총길이가 길고 총을 쏘면 이쪽에서 “딱” 소리가 나면 잠시 후에 저쪽에서 “쿵” 소리가 들려 그 총을 따콩총이라고 하였다)이나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이었지만 비행기는 한 대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미군 비행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격을 하게 되니 가정집에서는 불을 얼씬도 하지 못한 채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할 만큼 밤에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깜깜한 그믐밤에서 지나는 것처럼 집안에서 움직이려면 더듬거리면서 살 수 밖에 없었기에 해가 지기 전에 저녁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우리 집에는 수도 없이 초저녁이고 밤중 또는 새벽을 가리지 않고 내무서원 두세 명이 급습을 하였으니 그럴 때마다 식구들이 놀라 어떤 때는 어머니가 항의까지 하셨지만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집안을 한바탕 뒤지고는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오는 것은 경찰에 입교한 형님이 혹시 집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우리 가족을 미행을 하였지만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자 사흘 도리로 하던 가택수색을 일주일 이상으로 늦추기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어쩌면 전황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면서 둘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전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빼놓지 않았는데 멀지 않아 국군이 북진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아마 7월로 접어드는 날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집집이 한사람씩 역전으로 부역을 나오라고 하여 우리 집에서는 내가 나갔는데 가서 보니 너무도 뜻밖에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역전에 쌓여 있는 쌀을 홍천까지 운반을 하는데 동원이 되었던 것이다.
본인이 지고 갈 만큼의 양을 지고가라고 하여 쌀 4말 정도를 지고 보니 무거워서 반 말 가량을 덜어놓고는 사람들의 행렬을 따르기로 하였다.
춘천시의 집집에서 한사람씩 동원이 되어서 그런지 그 행렬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대낮의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렸고 물병 하나 준비 없이 출발을 하다 보니 얼마 못가서 목이 말라도 물 한 모금을 먹을 수가 없었다.
원창고개에 올라서서 저 아래 학곡 리를 내려다보니 한 줄로 늘어선 행렬은 끝없이 이어져있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홍천 길은 언제나 닿을지 몰랐다.
그때의 길은 지금 모양으로 포장을 한 길이 아니기에 가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잔돌맹이가 고무신바닥으로 튀어 들어가기도 하여 길을 가다가 몇 번이나 돌을 털어냈는지 모른다.
목이 마르고 배는 고파 할 수없이 생쌀을 한 옴큼 입에 넣고 오물거려 보았지만 고픈 배가 채워질 리가 없었다.
춘천시민을 총동원해서 쌀을 홍천까지 운반한다는 소식은 바로 유엔군 공군에게 전파가 되었는지 우리가 일렬로 홍천을 향하여 가자 쌕쌕이는 쌀을 지고 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이니 간이 콩알만 해졌으나 비행기는 민간인에게는 해꼬지를 하지 않았다.
원창고개를 넘어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서 모래 재를 넘으려다 말고 쌀을 지고 가던 사람들의 눈은 모두가 도로 커브길의 골짜기로 쏠린 것이니 거기에는 인민군의 군용차들이 수도 없이 곤두박질친 채 몇 대가 굴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도로로 연결된 숲속이나 민가에도 코를 박고 부서져 있었으니 그것은 비행기의 눈에 띄기만 하면 공격을 하였으니 인민군들은 비행기소리만 들려도 달려가다가 민가 속으로 돌진하여 폭격을 모면해 보려했던 것이지만 전투기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어 그 많은 트럭들이 길가의 집이나 구렁텅이로 넘어져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군인들이 전투를 제대로 하려면 먹을 것이 해결이 되어야 하고 각종 보급품이 제때에 공급이 되어야 하지만 당시의 인민군의 형편을 개관해보니 그들은 초창기에는 남한물밀듯이 쳐 내려오긴 하였지만 전투에서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제공권을 연합군에게 내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산면 부락을 지나 다시 부사원고개를 넘어서 조양 리로 내려가니 하루해가 저무는데 일행들이 쌀자루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진맥진한 가운데서도 어른들은 밥을 해먹기 위해 양재기며 냄비를 가져온 분이 있어 나도 그분들에게 겨우 밥 한술을 얻어먹고는 길 언저리 풀밭에서 아무렇게나 쓸어지니 고단한 김에 잠은 금방 와서 정신없이 잤던 것이다.
다음 날 날이 훤히 새자 잠에서 깬 사람들은 다시 쌀자루를 지고는 홍천으로 향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이 쌀이 인민군의 군량미라고 하면서 다 갔다 줄 필요가 없이 어디다가 버리고 가자는 분도 있었지만 잘못 걸리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잠자코 있자는 어른들에 따라서 그냥 다시 쌀을 짊어지고 간 것이다.
조양 리를 출발하여 다시 얼마만큼을 걷다 보니 앞이 훤히 넓어진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가 북방면 화계리라는 마을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가는 앞뒤에는 어제 출발해서 오는 사람과 쌀을 목적지에다가 부리고 오는 사람들로 해서 장마당처럼 붐볐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도착한 곳은 커다랗게 분상을 한 묘잔 등으로
거기에는 붉은 완장을 찬 치안대들이 쌀을 받아서 한 가마니씩 묶어서 놓는 것이었다.
쌀을 쏟아놓고 나오니 어깨는 홀가분하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지만 춘천을 향해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은 기뻤지만 이틀 동안이나 지쳐있었기 때문에 걸음걸이는 늘일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침 조반도 먹지를 않은 체 돌아선 것이니 그럴줄 알았다면 생쌀이라도 한 옹큼 주머니에다가 넣고 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 쫄쫄 굶어서 걸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집에 얼른 갈 생각에 마음은 바쁘기만 하였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란 모든 보급품이 우선적으로 병사들에게 원활하게 지급이 되어야 하고 모든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아야 함에도 인민군들은 낮에는 비행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다가 최전방에 보급물자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이 전쟁수행이 제대로 작동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길에서 자던 조양 리를 지나 부사원 고개를 올라서서 한식경이나 쉬어서 다시 산길을 돌아 내려오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앞뒤에는 쌀을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는 중간에서 뜻밖에도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니 아버지는 내가 출발한 다음 날 다시 동원령에 따라서 오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일생동안을 농사만 지으시기도 하셨지만 평소에도 늘 허리가 아프셔서 지게를 잘 못 지시는 분인데 그 무거운 쌀 지게를 지고 오셨으니 너무도 마음이 편치를 않았지만 아버지는 밥이나 먹었느냐면서 집에 가거든 집에 있지 말고 밭에 가서 하루 종일 콩밭에 가있으라고 하셨으니 언제 내무서원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겠기 때문에 그것이 염려스러우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오르시는 것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리자니 얼마나 발이 무거운지 몰랐다.
다음날 저녁에야 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아버지가 쌀을 부리신 곳은 우리가 갔다 온 지점보다도 먼 삼마치고개 밑이라고 하셨는데 그곳까지는 우리가 갔던 지점에서 4km가 더 먼 곳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날 홍천을 다녀오신 후로 몸살이 나셨으니 쌀 닷말을 지고 가신 것이 무리였던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한나절이 되었는데 동네의 한가운데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었으니 동네 사람들은 그 총소리가 왜 났는지 몰라서 몇 분이 나와 보니 인민군들이 동네에서 좀 떨어진 조밭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문복아버지 종성씨는 조밭으로 나가서 밭을 매려고 준비를 하던 중인데 저만치 인민군들이 나타나자 평소에도 겁이 많던 이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조밭 고랑으로 살살 기어서 내빼는 모습을 인민군들이 놓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수상하게 여기고는 그 자리에 서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종성씨는 계속 기어가는 것이었으니 인민군은 그대로 따쿵 총을 조준하여 총을 쏘니 그는 그 자리에 픽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에게는 문복이가 유일한 딸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말이 없고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 참으로 정직한 청년으로 동네에서는 샌님으로 통하던 분이었는데 총 한방에 아까운 사람이 가고 말았으니 이것이 인민을 위한다고 말로는 떠들면서도 인민을 파리 목숨만치도 대접하지 않는 공산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문복 엄마가 자기 남편이 인민군의 총을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허겁지겁 남편이 쓸어진 조밭 고랑으로 가서 남편을 끌어안으니 가슴팍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고 눈을 똑바로 뜬 채 사망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도 얌전하던 문복 엄마는 남편의 너무도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보고는 기절을 했다가 겨우 일어나서는 통곡을 하는 것이었으니 동리네 사람들도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시체 수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우리 아이들은 다른 때와는 달리 강으로 멱을 감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총소리가 동네에서 나기에 우리는 겁이 나는 바람에 얼른 강물에서 나와서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미루나무 밑으로 뛰어가서는 가만히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우리가 멱을 감던 곳으로 한 떼의 인민군들이 오더니 옷을 훌훌 벗고는 강물로 뛰어 들어가는데 그 수가 무려 50명은 넘을 듯 싶었다.
그때까지 인민군들이 단체로 멱을 감는 것을 보지 못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이 강물로 뛰어 들어간지 불과 몇 분 되지를 않았는데 호르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서둘러서 강물에서 나와서는 콩밭이나 수수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민군이 멱을 감다가 얼른 나왔는지 의아하게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삼악산쪽에서 구라망이라는 푸로펠러 달린 전투기 소리가 들리더니 춘천 시내를 폭격을 하는 것이었다.
방금 강물에서 멱을 감던 인민군들이 콩밭으로 숨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인민군들의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전투기에 대한 말이 나왔지만 6.25 초기에는 인민군의 전투기들이 서울상공에 나타나서 여러 곳을 폭격을 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한 번도 적기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당시에 제 공권은 이미 연합군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비행기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게 되니 인민군들의 이동이나 보급품의 운반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라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적에게 진지의 노출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들의 동태를 하늘과 땅에서 거의 파악을 하면서 폭격을 가하는 것이니 인민군들은 대 낮에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후일 6.25 전사에 나타난 7월말의 전황을 보게 되면 인민군은 국군의 낙동강방어선을 제외한 남한의 90%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아이들을 소집한다고 해서 갔더니 거기에는 당시에 농대에 다니던 옥산포의 축구선수로서 내가 신동초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사범학교에 진학을 할 때에 우리에게 축구를 지도해 주었는데 그 선배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급이 좀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 우리에게 하는 말이 이 마을에서 홍보 비라를 벽에다가 붙여 놓으면 찢어지고 없어진다고 하니 너희들이 철저하게 지키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우리들 아이들의 소행이었는데 그의 말로는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니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
내가 그날 그에 대해서 느낀 것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다정하던 그였는데 그날의 그는 다른사람이 감히 접근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처신을 하고 있었다.
6.25전만 해도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를 않았는데 나중에 국군이 진격을 할 때에는 선두로 이북으로 도망을 가더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는 바람에 아침밥만 먹으면 매알같이 밭으로 나가서 일을하는 척 하였지만 사실은 그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다른 일로 시내를 나가시고 나 혼자 밭에서 꼴을 베고 있는데 웬 인민군이 우리 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어 겁이 덜컹 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무서원이라고 하였다.
그는 내 앞으로 오더니 말을 걸기 시작을 하였다.
“ 동무 아버지는 어딜 갔음메.”
“ 예 읍내에 무엇을 사시러 가셨는데요.”
“ 그래.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 . 너네 형님이 경찰에 간 것이 맞지비.”
나는 그때 사범 병설중학교를 졸업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형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 우리 형님은 무슨 학교를 간다고는 하였는데 그 내막은 잘 모르는데요.”
“ 야 너 거짓말 함은 이 권총으로 갈겨버리니 께니 바른대로 말을 하라오.”
그는 위협을 가하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 너래 너의 형이 집으로 오게 되면 즉시 신고를 해야 한다 알갔지.”
그들은 우리 형님이 언젠가는 집으로 올 것이니까 그때에 어김없이 신고를 하라고 하더니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 형님은 구룡포에서 인민군과 교전을 하였다는 말을 후일 들었는데 내무서원들은 만약에 집에 오게 되면 하는 단서를 붙이고 동향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에도 그들은 사흘도리로 우리 집에 밤중아고 한낮이고를 가리지 않고 오곤하였는데 그때마다 철저하게 방안이나 부엌구석 또는 방공구덩이 파놓은 곳을 일일히 점검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뜻밖에 일이 벌어졌으니 윗마을 (춘농고가 있는 곳)에 사는 여맹위원장이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30대 중반으로서 오빠는 그럭저럭 노동 품을 팔아서 근근이 먹고 살 정도였는데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 여자의 동태를 미리 알기나 한 것처럼 여성동맹 위원장의 감투를 씌워준 것이다.
사실 해방이 되면서 공산주의 사상이 민간에게 침투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란 노동자 농민이 주인 행새를 하고 사는 좋은 사회를 말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재산을 골고루 분배를 해서 잘 살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광복 이후 하도 살
기가 어렵게 되자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 처음에는 많이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어쨌거나 여맹위원장이 우리 집엘 오더니 다짜고짜 어머니를 보고 하는 말이 이 나라가 고대하던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는 나라 위해서 일을 하셔야 한다면서 여맹사무실로 나와서 애국적인 일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말끝에 집안의 살림은 누가 하고 밤낮으로 그곳엘 나가라고 하느냐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오시게 되면 다 뒤의 일은 봐 줄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여맹위원장은 그 뒤에도 두어번을 밤중에 찾아와서는 전황까지 얘기를 하였는데 이미 대전과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을 하여 한달 내에 부산까지 점령을 하게 되면 이 나라는 완전히 인민이 바라는 공화국이 된다고도 하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그의 사무실을 가시지 않았으니 국군이 지금은 아랫역까지 후퇴를 하였지만 반듯이 수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을 해도 그 당시의 전황으로 보거나 그들의 선전에 따른다면 국군이 수복을 과연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해서는 뚜렷하게 답변을 하지 못할 때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