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 그 기대감의 맛
제3회 작품상
윤병화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술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나라에 술이 존재하고 그것은 지방을 넘어 때로 가문으로까지 세분되기도 한다. 따라서 세상의 술맛 또한 그 수효만큼이나 많은 다양함이 존재한다. 이 같은 술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생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삶을 위로하고 또 축복해 왔다.
아주 오래전 미국에 잠시 가 있을 때였다. 기숙하고 있던 집주인이 리쿼 스토어(liquor store)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적잖게 놀랐다. 숲 속에 위치한 그 대형 마트에서는 주류만 별도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세계의 온갖 술이 그곳에 다 모인 것 같았다. 진열장은 대륙별 나라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우리나라 술도 웬만한 것은 거기에 다 있었다. 미국이 잘 사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 많은 선택권을 가진 것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위스키를 처음 만든 나라는 아일랜드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발렌타인이나 조니 워커, 시바스 리갈 이런 것들은 스카치 위스키들이다. 스카치 위스키란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혼합된(blended) 위스키를 말한다. ― 맥아麥芽로 만든 몰트 위스키에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가 배합되고, 거기에 아로마 바닐라 정향丁香 과일 벌꿀 감초 외 각종 향신료가 첨가된 술이다. 물론 양주 특유의 탄내는 이탄泥炭으로 맥아를 말리는 과정에서 스며들며, 오크통에서 오래간 숙성되는 기간에 또 다른 향과 빛깔이 추가되어 나온다. 따라서 아주 미묘하면서도 복합적인 맛과 향이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평소엔 막걸리나 맥주를 즐겨 마시지만, 회膾를 먹을 때는 화이트 와인이나 정종을 선호한다. 그런가 하면 생각에 잠기거나 인생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 보고 싶어질 땐 양주인 발렌타인도 애호한다. 그때의 주량은 별 안주 없이 원액으로 두어 잔 정도다. 그러니 물론 술꾼도 아니고 스카치 위스키 전문가도 아니다. 얼음을 섞지 않고 원액으로 마시는 것은, 단지 나를 단번에 제압해 오는 그 힘과 진한 향의 여운을 즐겨해서다.
우리나라의 술 문화를 보면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양주의 나라에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싶었다. 지난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그들 술 문화의 일면을 보게 되었다. 바(bar)에 앉아 있는데 정장을 한 한 초로初老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책가방을 든 것으로 보아 대학교수일 성싶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탁자 위에 가방을 놓고 외투를 벗어 걸더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잔술을 시켜 음미하듯 천천히 술을 마셨다. 그가 마신 술은 딱 두 잔이었다. 그것도 작은 잔으로 생각하면서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넘긴 후에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조금은 외롭게도 보였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꼿꼿한 자세로 문을 나섰다. 우리의 술 마시는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게는 무척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가끔 자식들이 외국 출장이나 여행 끝에 사다 주는 것이 양주다. 또한 살아오면서 제자나 지인들이 선물로 준 것들을 이것저것 꽤 마셔보기는 했다. 크게 많이 마셔본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 내가 제일 즐겨하는 것은 발렌타인 21년산이다. 이렇게 내가 발렌타인을 운운하지만, 사실은 40년산은 아직 마셔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내가 그 21년산 발렌타인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내 입맛과 취향과 수준에 맞는 술이라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더 좋은 술도 얼마든지 있다. 발렌타인 종류의 30년산만 해도 더없이 부드럽고 향기롭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의 기대되는 맛이 없다. 여지의 맛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맛이긴 해도 기대감이 사라진 슬픈 맛이다. 다함이 아닌 기대감이 남아 있는 그래서 서글프지 않은 그
런 맛이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발렌타인 21년산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완성을 앞에 둔 여지의 맛이 아닐까 싶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그 알싸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은 30년산에 비해 미완의 맛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잔향殘香만으로도 나를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풍미를 즐기고 삶을 음미하는 정도를 넘어 그것은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녹아 있는 한 편의 시다.
서재에 홀로 앉은 나는 오늘도 그 호박색 액체 한 잔을 앞에 두고 있다. 불을 끄고 촛불로 방을 밝히고 그와 마주했다. 이럴 때의 그것은 언제나 나를 매혹한다. 향기로운 꽃내를 느끼며 한 모금 꼴깍 넘겨본다. 목 안으로 흘러들면서 나를 일시에 제압해 오는 것은, 칼칼함을 비단결로 휘감는 아로마틱한 풍미의 긴 여운이다. 30년산이 달콤하면서도 깊은 풍미로 우아한 여운을 남기는 절정의 맛이라면, 21년산은 품위와 기품이 살아 있는 세련된 직선미와 곡선미가 함께하는 맛이다. 부드럽지만 아직은 야성적인 맛이 남아 있는 그 절묘함에 나는 매번 굴복하고 만다.
이 세상의 모든 발효주는 숙성의 단계를 거친다. 짧건 길건 간에 그것은 술이 겪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것이 길다고만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재료와 제조 방법에 맞는 적정한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밑술로 증류주인 양주를 만든다. 기체로 승화된 물방울들의 모임이다. 물론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과정 과정에서 늘 최고의 맛은 탄생한다. 하지만 나는 그 다함의 끝보다는 얼마간의 여지가 남아 있는 기다림의 시간이 좋다. 거기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기대감의 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노년인 지금의 내 평안은 값비싼 내 청춘의 시간을 주고 바꾼 것이다. 시간이 만든 집, 시간이 만든 정원, 시간이 만든 친구, 시간이 만든 술, 시간이 만든 글 그래서 정다운 것들은 언제나 애중하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그리고 인생의 맛, 삶의 에너지에 대해 다시 조용한 상념의 시간을 가져 본다.
너무 지나가지 않은 시간, 아직은 퇴락을 걱정하지 않는, 조금은 더 꿈꿀 수도 있는, 그래서 아직은 슬픔에 이르지 않은 그 남아 있는 시간의 맛이 소중하다. 부드러움과 짜릿함과 긴 여운이 감도는 21년산 발렌타인처럼, 아직 끝맛을 염려하지 않는 이 사유의 시간이 나는 좋다.
일생이라는 긴 시간에 내가 어디쯤 와 있을까를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첫댓글 그는 서두르지 않고 탁자 위에 가방을 놓고 외투를 벗어 걸더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잔술을 시켜 음미하듯 천천히 술을 마셨다. 그가 마신 술은 딱 두 잔이었다. 그것도 작은 잔으로 생각하면서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넘긴 후에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조금은 외롭게도 보였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꼿꼿한 자세로 문을 나섰다...서재에 홀로 앉은 나는 오늘도 그 호박색 액체 한 잔을 앞에 두고 있다. 불을 끄고 촛불로 방을 밝히고 그와 마주했다. 이럴 때의 그것은 언제나 나를 매혹한다..너무 지나가지 않은 시간, 아직은 퇴락을 걱정하지 않는, 조금은 더 꿈꿀 수도 있는, 그래서 아직은 슬픔에 이르지 않은 그 남아 있는 시간의 맛이 소중하다...아직 끝맛을 염려하지 않는 이 사유의 시간이 나는 좋다. (본문 부분 발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딱 두 잔의 술을 천천히 마시는 장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합니다. 술도 커피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음미하는 것. 깊은 밤 .호박색 액체 한 잔을 앞에 두고 사유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는 일도 생에 감사한 일이겠지요.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