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소리
유혜자
'꿈이 현실이 되는 이곳 아바 드림호 이륙합니다'라는 MC두 사람의 구호에 맞춰 아바드림호가 이륙, 우주비행을 떠나는 것으로 <아바 드림(AVA DREAM)>의 첫 방송(TV조선 10월 3일)이 시작되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가상 세계에서 가상의 아바타가 등장해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한국 최초의 메타버스 AI 음악 쇼 <아바 드림>.
첫 출연자 '기록희' 은가은과 '음악깡패' 신인선의 개성 넘치는 무대에 이어서 1시대의 트렌드 리더였던 故김성재의 헌정 무대가 펼쳐졌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수 아바타가 우주공간에서 등장했다. 27년 전 노래하던 때의 복장과 놀라운 가창에 드림 캡처들이 '똑같애' '멋있어'를 연발했다. 스튜디오에 드리머로 나온 동생 성욱 씨는 형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형과 <말하자면>의 듀엣 무대를 보여줬다. 고인의 모습을 완벽히 복원한 AI 기술과 그의 생전 인터뷰, 그리고 노래에서 추출한 음성으로 만든 김성재의 목소리가 놀라웠다. 둘의 듀엣 무대가 끝나고 사라졌던 김성재 아바타가 나와서 동생 성욱에게 ‘나와줘서 고맙고 멀리서라도 응원할게’라 했는데 이 말을 듣고 '형이 진짜였으면 더 좋았겠구나'라고 말하는 동생의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릴까 생각하며 내 가슴이 뭉클하였다.
나는 30년 전 라디오 PD 시절, 제34회(199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3관왕(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을 받은 냇 킹 콜(Nat KingCole: 1919~1965)과 나탈리 콜(Natalie Cole; 1950~2015)이 부른 〈언포게터블(Unforgettable)〉을 들을 때도 가슴이 뭉클했었다. 그때는 유튜브가 없어서 그래미상 시상식 실황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시상식 무대에서 나탈리는 아버지가 1951년에 부른 언포게터블을 디지털로 복원해 자기 목소리를 입힌 듀엣 곡을 틀고, 생전 아버지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재생한 무대가 화제였다는 소식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 시상식에선 돌아간 아버지 냇 킹 콜과 살아 있는 딸 나탈리가 나누는 대화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김성재 AVA는, 동생이 군대에서 형에게 보냈으나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형이 숨져 못 받았던 편지를 낭독한 동생에게 엄마와 가족의 안부까지 묻는다. 기쁨과 함께 아쉬움을 표현한 동생은 진짜로 형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던 평소의 염원을 조금은 푼셈일까.
66년 전 뜻밖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나는 한동안 믿기지 않았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 같아 당황하고 어디선가 내가 가는 길을 말없이 바라보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오래 따라다녔다. 살아계실 때는 심신이 유약한 딸 걱정으로 통제와 금기사항이 많았기에 순종보다 불평이 많았었는데.
나탈리 콜은 수상소감에서 "나에게 이렇게 훌륭한 유산을 남겨준 아버지께 감사한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런 그녀도 아버지를 원망하던 때가 생각났을까, 나탈리 콜은 8살 때부터 아버지의 무대에 섰지만 쉽게 성공하지 못했고, 그녀가 15살 때 냇 킹 콜은 폐암으로 사망했다. 분명히 좋은 가수가 될 거야.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가수가 되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며 성인이 된 나탈리 콜은 가수가 되려고 뉴욕으로 갔다. 아버지가 설립한 음반사에 들어가지 않은 나탈리는 밤마다 뉴욕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드디어 나탈리는 싱글 <디스 윌 비 (This will be)>를 발표해 빌보드 차트에 올랐고, 25세(1975년)에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을 받으며 단숨에 최고의 가수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전설적인 가수인 냇 킹 콜의 명성을 넘어설 수 없어 괴로워했다고 한다. 언론은 나탈리 콜이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인기를 얻었다고 주장하여 그를 스트레스에 빠지게 했다. 결국 아버지를 원망도 하다가 마약에 손을 댔다. 소속됐던 음반사는 마약 물의를 일으킨 그녀와 재계약을 거부했다. 긴 공백기로 사람들에게 잊혀져갈 때 그녀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을까.
아버지 냇 킹 콜은 1950년대 최고의 가수로, 깊고 풍부한 음색으로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며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6·25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설 때 그의 노래로 위안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나탈리 콜은 공백기 10년을 보내면서 아버지가 걱정하는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었을 것 같다.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찾아보던 나탈리는 아버지의 목소리 아닌 편지를 발견했다. '나탈리 오늘도 아빠는 네 노래에 용기를 얻는다. 훌륭한 가수가 돼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네 모습을 보고 싶구나'라는 편지, 이때 나탈리콜은 다시 노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목소리와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 <언포게터블-위드러브>를발표, 그래미 어워드에서 딸과 아버지 영상의 감동스러운 합동무대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고의 가수 냇 킹 콜의 딸이라는 꼬리표로 힘들어했던 나탈리 콜은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고, 돌아가신 뒤에도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 이어졌음을 깨달아 비로소 최고의 디바가 될 수 있었다.
성재의 동생 성욱도 우월한 형에 대해 위축되었을지 모르지만 "형은 나에게 있어 영웅이자 이상형이다. 언제나 형이 자랑스럽다"라고 고백하며 형을 따라 노래를 전공한다고 했다.
페타버스 환상적인 AI쇼를 보면서 최신 기술에 감탄하기보다 나를 북돋아주던 아버지의 응원어린 어떤 목소리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첫댓글 『월간문학』646호
202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