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지난날 우리 농촌에서는 양잠업이 꽤 성황을 이루었었다. 깨알 같은 어린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서 넉잠을 자고 나면 집을 짓게 된다. 희고 투명한 머리를 내두르며 입에서 거미줄 같은 미세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고치는 돈에 군색한 당시의 농촌에서는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누에는 돈빌레인 셈이었다. 요즘 도시에서는' 내 집 마련' 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어 사람도 근본적으로는 누에의 생리를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파트는 그 건축양식으로 하여 닭장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칸칸이 내집을 마련한다는 관점에서는 누에고치가 더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누에치는 가정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뽕도 따고 임도 본다'는 낭만적인 속언을 이해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스럽다.
그건 그렇고 젊은 교사시절에 나는 한때 소설을 쓰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강의를 듣거나 작법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설권이나 읽은 것을 밑천 삼아서 원고지의 칸을 메꿔 나갔으니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런대로 틈틈이 습작을 한다고 주변에서 보고 느낀 소재를 가지고 알량한 글을 몇 편 엮어 보았다. 그것들을 신문의 '신춘문예' 나 잡지의'신인 추천 작품' 에 투고해 놓고 발표를 기다려 보기도 했다.
이미 오래 전 일이어서 이제는 이런 말 좀 흘린대서 크게 흉 될 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짓은 내가 유학 차 해외로 떠나게 되면서 중단이 되고 말았다.
'누에' 라는 작품(?)은 그때 써 본 글이었다. 나는 이린 시절 집안에서 누에를 흔하게 보고 자란 때문인지 명주실을 뽑아내는 이 신기한 돈벌레에 대해서 많은 매력을 느꼈다. '누에'는 나의 집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던 분을 소재로 한 글이었다. 만년에 그분이 어렵게 집을 한 채 지었는데 그 과정이 누에를 연상하게 했던 것이다.
해방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나의 집에는 마을사람의 소개로 한씨라는 분이 고용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에서 막 돌아온 초로의 귀환동포였는데 도쿄에서 다년간 공장생활을 하던 분이라고 한다. 지난날 우리 농촌에서는 다소 광적하게 경작하는 집에서는 대개 사람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이제는 머슴이니 사경이니 하는 낱말도 잊혀져 가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아직 농촌의 인력이 남아돌던 때였다. 그리하여 머슴을 골라가며 둘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사경은 대개 나이나 체력, 영농경력 등을 감안하여 쌀로 정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씨는 농촌의 고용원으로는 적합한 편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첫째 나이가 많은 편이고 한편으로는 농사일에서 손 뗀 지가 오래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어른은 사경을 그쪽에서 부르는 대로 쉽게 승낙하시는 것 같았다. 보시는 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씨는 상처한 뒤여서 어린 딸을 앞세우고 왔는데 그 일도 별다른 장애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집안에 손대기가 필요한 처지였고 또 그것이 도리어 주위의 동정을 샀는지도 모른다. 단출한 집안에 두 식구가 불었다. 차차 지나고 보니 한씨에 대한 불안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내 젊은 시절의 생일하던 가락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장정 못지않은 근력과 익숙한 영농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뒤만 받쳐주면 한 해의 농사일을 자신이 혼자서 책임을 질 속셈인 듯 싶었다. 주인 쪽에서 참견을 하면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시로 연장을 거칠게 다루면 집안 식구들은 한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을 했다. 다소 힘겨운 머슴님인 셈이었다. 그 대신 농사일은 때를 놓치지 않고 현철하게 추어나갔다. 눈썰미도 있는 편이어서 직심스럽다고나 할까. 집 안팎의 허술한 곳은 내집 일처럼 손을 보아 주었다. 어린 딸은 착하고 유순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일본여인이었는데 귀국 전에 사별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아이가 우리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성격이 아버지와 다른 것을 보면 어머니 쪽을 많이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부녀는 우리 집에서 몇 해를 함께 지냈다. 나는 객지생활을 하고 있어서 공휴일 아니면 방학 동안이나 가끔 고향에 들렀기 때문에 그들을 대하는 일은 잦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고향집에 머무는 동안은 틈이 있으면 낮에는 되도록 한씨의 일자리에 나가서 뒷일을 거들기도 하고 말 상대도 해주었다. 밤에는 가끔 장기판을 앞에 놓고 맞서기도 하면서 노소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분의 강골 기질과 성실한 인간성에 끌렸다고나 할까. 나도 해방 전에는 일본에서 수학한 일이 있다. 마침 한씨가 살던 곳과 같은 지역이어서 공통의 화제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해 방학에는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한씨 부녀는 우리 집을 떠난 뒤였다. 우리 뒷산의 중턱에 집을 지어 나앉았던 것이다. 다소간 밀린 사경을 밑천으로 자재를 마련하여 거의 자신의 손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일종의 통나무집이었다. 한씨는 노래(老來)에 그 집을 다시없는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딸을 거두며 소박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한씨가 평생의 소원인 양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여념없이 집을 짓고 있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모습에서 누에를 연상하게 되었다. 누에는 한평생(?) 뽕잎을 삭여 먹는다. 그리고 명주실을 뽑아서 고치를 하나 엮어놓고 한 대를 마무리 하는 것이리라.
서두에서 언급한 소생의 습작 '누에'는 위에서 인용한 내용들을 소재로 한 글이었다. 이 글의 끝부분에서 이 집은 모진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현실하고는 다른 내용이다. 주인공은 잠시 망연자실 하지만 이내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허물어진 흙더미를 헤치고 다시 역사(役事)를 시작하는 것이다. 모진 운명을 헤젓고 나가듯이. 드디어 이번에는 먼저보다 견고한 집을 지어 놓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땀을 씻는다.
이 글의 끝부분이다.
알량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지만 사람은 역경을 극복할 때 ‘삶’의 의미가 더욱 부각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지금은 남겨놓은 원고가 없어서 한번 다시 읽어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
한씨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착하고 유순하던 어린 딸은 지금은 5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운명의 신은 이 여인에게는 착한 마음씨만 주고 재복은 외면한 것일까. 어떤 기사식당에서 잡역을 하면서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따라 어찌 ‘누에’ 생각에 골몰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과 누에는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늘어난 백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생각을 다듬어서 누에처럼 내가 안주할' 마음의 집' 을 한 채지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해 본다.
(隨筆公范 19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