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우정
누구나 살아가면서 맺은 사연들을 고이 간직하고 지낸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아니더라도 불현 듯이 스치는 인연을 기억할 것이다. 그야말로 순수하고 꾸밈없는 동심의 세계를 곱게 간직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성장한다. 그런 마음이 점차 외연을 확대하고 우정을 쌓으며 평생을 함께하는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
이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죽마고우(竹馬故友), 관포지교(管鮑之交), 백아절현(伯牙絶絃), 지음(知音), 금란지교(金蘭之交)와 같은 말들은 듣기만 해도 가슴을 설레는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인다. 사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런 주인공처럼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만남을 갈구하게 된다.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친구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친구들에 대해 빨리 싫증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지나친 호의를 표시하는 일도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네가 운명적으로 함께 살아가야만 할 사람들을 사랑하라. 진실로 성실하게 사랑하라”고 하였다. 담담하게 평생을 마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에 「박철상」이 쓴 『세한도』를 읽다가 새로운 내용을 접했는데 바로 「김유근」의 문집인 『황산유고』(黃山遺稿)에 실린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글이었다.
“나와 이재(彛齋) 와 추사(秋史) 는 사람들이 말하는 석교(石交)이다. 서로 만나면 정치적 득실과 인물의 시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영리(榮利)와 재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고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화를 품평할 뿐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슬퍼하며 실성한 듯하였다.” ~중략~ “도장은 그 사람의 성명과 자호가 모두 그곳에 있으니 마치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옛 그림 하나를 구하면 좌우 여백에 두 사람의 도장을 찍어 얼굴을 대신하는 자료로 여겼다. 그러면 만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
이들 세 사람의 석교지교(石交之交)는 매우 감동적이고 이 땅의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 역시 대단하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1783∼1859), 그리고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1785∼1840)의 우정과 예술이다.
이들 세 친구는 유별난 우정을 나눴다. 나이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며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었다. 모두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권돈인」은 후에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김유근」은 세도정치가인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친아들로서 당시 정계의 중심인물이었다.
정치적 이해를 떠나 세 사람은 학문과 예술의 동반자였다. 당시 최고의 지성인답게 고금의 역사와 학문에 정통하였고, 만나면 시문(詩文)을 주고받고 서화를 품평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각자가 빼어난 예술가였던 세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감상평이나 글씨를 써주었다. 상대의 작품이라도 날마다 대하면서 서로를 잊지 않고 지낸 것이다. 그런 생생한 우정의 산물이 지금까지도 다수가 전해진다.
「이재」가 그린 그림에 「추사」와 「황산」이 함께 감상평을 쓰기도 했고, 「황산」이 그린 그림에 「추사」와 「이재」가 함께 감상평을 쓰기도 했다. 작품의 진위를 감정할 때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이들은 시· 서· 화에 뛰어난 예술적 취향이 비슷한데다가 수석과 골동 취미까지 공유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진정한 우정을 나누어 가히 석교지교(石交之交)라 부를만한 교유를 나누었다.
특히, '괴석도’(怪石圖)는 「황산(黃山) 김유근」이 그려서 친구인 「추사 김정희」에게 준 것이다. 「김유근」과 「김정희」는 애석(愛石) 동호인이었다. 「김유근」의 화제(畵題)는 이렇다.
“귀한 바는 정신의 빼어남에 있는 것이니 어찌 꼭 닮게 그리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돌을 같이 좋아하는 이에게 드리니 벼루 갑 옆에 두십시오. 「황산」이 스스로 화제를 쓰다. 겨울밤 「추사인형」을 위해 그리다. 「황산」”
「김유근」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돌을 그려주는 내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집안끼리는 대립했지만 이들은 "정치적 득실과 인물의 시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고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화를 품평"했다. 「황산」과 「추사」의 석교(石交)를 그린 그림인 것이다. 훗날 아쉽게도 「황산」이 병들어 병상에 있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추사」의 유배를 막지 못했다.
유배지에서 「황산」의 부음을 들은 「추사」는 「이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절이 슬픔을 표하고, 애타는 그리움과 함께 대신하여 술 한 잔을 올리고 통곡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또한 친구가 죽은 다음 그들의 처자식을 돌봐준 두 가지의 고사(古事)를 언급했는데 모두 이들의 돈독한 사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 밖에도 「이재」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나 「이재」와 「추사」가 함께 그린 산수에 「추사」가 감상평을 쓰기도 했고, 「추사」가 그린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에 「황산」이 감상평을 달기도 했다. 「황산」이 그린 그림에 「추사」와 「이재」가 감상평을 남긴 실물도 남아 있다. 이렇게 서로의 작품에 번갈아 평을 남긴 것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다.
「추사」는 「이재」(彛齋)에게 자신의 집안일까지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제주 유배지의 추사에게 인삼 등을 보내 유배 전에 곤장을 맞아 생긴 장독(杖毒)에서 벗어나 원기를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연이어 담배와 부채, 붓과 벼루 등의 선물을 보내 서화를 가까이 하도록 성원하였다. 「추사」 역시 친구의 벼슬이 높아지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이재」가 안동 김씨에 밀리면서 「추사」마저 66세의 고령에 북청(北靑)으로 다시 유배되었으나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장경」(張庚,1685~1760)은 청나라의 화가로 산수화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국조화징록』(國朝畫徵錄)은 청나라 초기부터 건륭 연간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450명의 화가들에 대한 전기이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미술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쓴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화가 · 조각가 · 건축가의 생애』와 비견되는 명작인데 추사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중국화단에 대한 정보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사」는 「장경」의 화첩인 『장포산첩』(張浦山帖)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장경의 그림이 10면에 걸쳐 실려 있었다. 「추사」는 이 화첩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것은 원나라 「예찬」과 「황공망」 이후의 참된 실체이자 진수이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그리고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팔지 말라. ~중략~ 비록 천만인이 와도 보여줘서는 안 되지만, 「이재」에게만은 한 번 보여줘도 괜찮다. 내 동생들과 아들들은 기억하라.”
이처럼 친구에 대한 추사의 한없는 존경과 신뢰가 묻어나는 글에서 둘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알 수가 있다.
「이재」는 「추사」가 죽은 후에도 그 뒤를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게 하고 복권이 되게 하였다. 예산의 추사고택 안에 「추사」의 초상을 모신 제각을 세울 때 영정을 그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고 현판을 썼다. 친구를 추모하는 글은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예로부터 진실한 우정과 사랑을 맺은 친구관계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인품의 상징이다. 역사에 명멸한 위인들도 사실 친구 관계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사례가 많다. 누구나 친구를 보면 당사자의 인품과 인격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스스로가 석교지교의 관계를 나누고 있는 친구가 과연 존재하는지 자문(自問)할 일이다. 오랜 우정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이를 내팽개치는 일도 허다하다.
어린 손자와 손녀들에게 이런 산교육을 시키는 것이 할아버지의 역할이다. 아무쪼록 대를 이어 선대의 교유가 후대에도 이어지길 바라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가늠하기 어렵다. 이는 핵가족 시대의 커다란 단점중의 하나이다.
(2024.7.21.작성/8.29.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