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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인가? 여순항쟁인가? 진실을 말할 때
-우동식 시집 《여순 동백의 노래》중심
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
우동식 시인의 시적인 담론으로 편입한 시는 세 번째 시집 《여순 동백의 노래》에 수록된 것 임을 밝힌다. 금번 시집은 ‘여순항쟁’ 때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발생된 국가적 환란에 희생된 사실적인 자료를 통해 발화한 전편이 해당 작품이란 것을 주목했다.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 항쟁’의 비참한 역사적 실상을 알게 된다면 참혹하고 처참한 만행에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사실 ‘여순항쟁’에 관한 내용으로 시집 전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싶지 않은 일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의 게재 순서가 연대기 순으로 정리가 되어 대한민국의 해방 전과 이후를 통해 친일 경찰의 잔존 권력이 ‘여순항쟁’에 빌미를 삼았고 이후 초기 반군에 의해 참살당한 사람들 중 피해자가 발생하여 참상과도 관련이 있다. 거기다 당시 시대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내막이 역사적 서사로 전개되어 있다는 것도 이 시집을 솬심있게 볼 지점이다. ‘여순항쟁’시 피해 양상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촉발한 봉기군(반란군)과 일부 좌익 세력의 주도로 살상이 발생하였고, 둘째는 진압을 명분으로 여수와 순천 지역에 들어온 진압군(토벌군)에 의해 광포한 폭력과 살상을 들 수 있다. 피해가 더 큰 쪽은 진압군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양민들과 그의 친. 인척들과 관계된 유가족들이다. 그들은 한 순간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 찍혀 그 피해는 1980년대까지 연좌제로 인해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당시 국가에서 묵인한 사상(좌익)과 관련된 연좌제는 누명을 쓰고 죽은 당사자라면 두말 할 것도 없겠지만, 남은 유가족의 사회진출에 족쇄가 되어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았다. 그로 인한 피폐해진 유가족의 삶 말고도 치유되지 못한 피해의식은 뼛속까지 사무쳐 아직까지 진행중이다. 그 불행의 씨앗은 해방을 맞으면서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
그 전환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친일파는 친미가 되어
반공을 앞세운 애국자로 변신하였고
여순항쟁을 불량국민들로 매도하였다
-<해방> 부분
우동식 시인은 당시의 일반적인 시대 인식을 근거로 <해방>이란 시을 통해 당시 여수와 순천 지역에 대한 보편적인 지역 정서를 기술하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에 대한 발본과 척결이 이뤄지지 못했고 되레 국가 중요 조직에 친일 세력이 포진하게 된다. 이것 또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징후를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암운暗雲>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독립군을 잡아들인 친일 군인들은 정죄를 받기는커녕/ 남조선국방경비대의 간부로 둔갑하고/ 일부 정치범들의 도피처가 되었다”라며 대한민국의 태동이 잘못 꿰어진 단추 구멍처럼 그때부터 어긋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해방을 맞아 건국 후 민족 탄압에 앞장선 일제 주구들을 발본하고 깨끗한 국가를 바로 세웠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했고, 그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어 서로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일제 강점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던 밀정이나 다름없던 친일 경찰들이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시대가 바뀌면서 처벌을 받아야 할 “일제 주구였던 친일 순사들은 고스란히 그대로 복직하여/ 일제 강점기와 다름없이 시민들을 탄압하며 특권을 누렸다”라며 친일 경찰들이 중용되면서 그들은 권력을 이용 자신들의 비열한 과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 유력 인사들을 탄압하게 된다. 권력의 시간은 그들의 것으로 “경찰은 일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향해 빨갱이 소굴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일부 남조선국방경비대는 경찰을 향해 일본 앞잡이라면서 침을 뺕었다”는 것으로 봐서 권력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이전투구의 조짐이 잉태하고 있었다. 1947년 제주도에서 평화로운 시위 군중에 경찰의 발포가 발단이 되어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도민 학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거사를 일으켰다는 그들,
‘매국노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저의 바람을 이지 말아 주십시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부분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 충돌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 주도하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들과 군이 가세한 양민학살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제주 토벌대에 몸담고 있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제주 폭동 진압군 총 사령관을 피살하기까지/ 군인으로서 직속상관을 죽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라며 “도민 학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거사를 일으켰다는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국가 안위를 걱정하고 국민을 보호한다는 군인 정신을 사명감으로 보여주었다. “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저의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절규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제주 토벌군 총사령관 박진경 암살 사건과 제주 민중 무장봉기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여수에 주둔한 제 14연대 군 일부를 제주 토벌군으로 투입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결국 제주 4·3 항쟁으로 인한 여수 14연대 파병 과정이 ‘여순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저항하던 그들의 숨소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여수 신월리는 애써 무색한 듯 드나드는 조봇조붓한 파도만 하염없다.
가막만 해무는
구봉산 허리의 주둔지와 바다의 경계를 허물고
어둠처럼 스멀스멀 엄습하여
눈을 멀도록 하거나 숨을 멎게 한 뒤
방향마저 잃게 만든다
세상은 잠들어 아직 깨어나지 않고
바다의 수신호도
굽이치는 역사의 속내를 짚어낼 수 없다
-<신월리 농무濃霧> 부분
여수 신월리 해안가는 바다 안개가 수시로 밀려와 아침과 저녁의 해안선을 바꿔놓길 반복한다. 그 신월리 바닷가에 주둔한 제14연대 군 일부가 동조해 일으킨 ‘여순항쟁’은 이후 여수를 비롯한 동부 6군에 엄청난 불행을 불러왔다. 아픈 역사의 시발지인 여수 신월리는 과거를 침묵으로 일관한다. 지금도 아픈 역사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날의 현장을 들러 보며 한참을 머물다 간다. 두런두런 이명처럼 들려 오는 “소용돌이치는 밤/ 갯벌에 빠진 희망은 절망으로 질척거리고/ 달라질 시그널 없이 오리무중”인 형형한 눈빛들과 교신한 총칼과 군홧발에 맞춰 난무하는 군호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다 썰물처럼 가막만을 빠져나갔다. 10월인 가을 무렵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짭쪼롬한 갯내를 더해 비릿한 내음이 번져온다. 달빛 밝아 환해질 바닷가는 그윽해지는 데, 긴장이 팽배해져 이내 터질 것만 같던 그날 만은 사나워졌다.
<신월리의 통증>은 아픈 과거 역사를 다시 상기시켜준다. 신월리(넘너리)는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을 위한 비행장 활주로와 갱도가 있던 군사기지 였던 곳이다. 그 ‘신월리(넘너리)’도 해방을 맞으면서 현대사 비극을 잉태한 14연대가 일제 강점기의 군 시설에 주둔하게 된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출병을 앞둔 병영의 분위기는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비밀스럽게 군막을 서성이던 군핫발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막만 넘너리 해안 막사 앞
미루나무가 뿌리를 길게 뻩어 암중모색을 하는 동안
구절초 향은 철조망을 뚫고
가멸차게 해안선 길을 따라 시내로 향했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전우들
한 생을 걸고 갈 데까지 간 그들의 눈엔
촛농 같은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교 스물한 명이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
포도주처럼 쏟아진 핏물은
땅 깊숙이 스며들었고
해마다 독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거두는 자도
겨눔을 당하는 자도
눕는 자도
일어서는 자도
아프지 않는 아픔은 없는 법
이 경악할 세상은
아픔을 낳고 또 다른 아픔을 키웠다
너와 내가 달라 함께 할 수 없고
다른 한쪽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좌우지간 연병장 귀퉁이,
짓밟힌 목백일홍 꽃물인 듯 낭자한 피,
가막만 넘너리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책 제목에서 인용, 주철희 지음.
-<봉기_14연대> 전문
어차피 역사의 무대는 사람으로 시작된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군인의 사명에 상당수 병력이 동조하여 “장교 스물한 명이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를 박차고 봉기한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가막만 넘너리 해안 막사 앞”) 군부대 철조망을 들춘 인영人影들이 바깥을 향해 뛰쳐나와 여수 시내로 진출한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지만 제주 4.3에 대한 출정을 거부한 뜨거운 동포애적인 의기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여수 시내로 향했고 그 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긴 밤이 되었다.
<여수 경찰서를 점령하다>를 보면 “봉기군은 충무지서를 거쳐/ 새벽녘 미명에 여수역을 향하면서/ 오포대와 고소대 아래에 있는/ 여수 경찰서와 교전”을 하게 된다. “일본 순사들에 대한 보복이자 응징”이라는 감정적인 이유다. 하지만, 당시 여수 경찰서의 경찰관들 대부분이 친일 조력자인가에 대한 여부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꼭두각시가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백성을 탄압하며/ 온갖 횡포를 자행했던/ 경찰서장 형사계, 그 시대 경찰에 대한 분노였다”라며 “다음 날 인민위원회에서는/ 타도의 대상인 듯 순사 10명을 처형”을 자행한다. 이후 봉기군은 여수역을 향해 진출, 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진출 장악에 성공한 붕기군은 여세를 몰아 구례 남원 곡성, 고흥 방향 그리고 광양 하동 진주 쪽으로 전선을 확대해 간다.
그런 사실을 <서면 학구리 전투일지>에서 있었던 과정을 말해준다. 전투가 발발한 곳은 새로운 도로가 확장되면서 터널이 뚫리면 옛 도로는 한갓진 폐도로만 남은 ‘송치재’로 순천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길목으로 국도 17호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정규군에게 밀리게 된다.
<장대다리>에서 우동식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순천 시내를 빗겨 흐르는 ‘동천’을 건널 수 있는 ‘장대다리’를 두고 “봉기군은 순천 중심부로 진출하기 위해, 진압군은 순천을 완전 점령한 뒤 여수로 진입하기 위해 이 다리를 놓고 악전고투였다”라며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 “천변 제방 밑 개뚝배미엔 시체들이 무장 쌓여가고 동천의 핏물”이 순천만으로 흘러들어 붉게 물들이고 만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대다리’ 제방가에는 여순 항쟁시 처참했던 역사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당시 상황을 새겨놓은 비碑가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여순 항쟁의 아픔은 쉽게 잊어서는 안 될 현대사의 질곡이었음이 분명하다.
<호모사케르>에서 그 당시 진압군이 양민을 대하는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순천과 여수 시내를 장악한 국방경비대의 대대적인 검속이 벌어지면서 “가담자 색출 시 머리가 짧고 군용 팬티를 입었다는 이유로, 평소 경찰에 밉보이고 백색 찌까다비를 신었거나 미군 샤쓰를 입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는 것이다. 한번 찍히면 힘없는 양민은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아감벤’이 말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 그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국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저주의 대상이 된 ‘호모사케르’가 바로 철저히 배척당한 여순의 양민들이었다. 그 불행을 당하고서 암담한 세월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친, 인척들은 유가족이란 연좌제에 묶여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며 그야말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여수와 순천에서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돌거나 그도 아니라면 죽은 듯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지아비거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삼촌이거나 친척 아저씨들이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어떻게 죽임 당했는가를 알고 있는 유가족들은 억울함이 사무쳐 한이 맺힌 것이다.
만성리 형제묘 학살, 오동도 학살, 오림동 야산, 서초등학교, 종산초등학교, 호명동고개, 둔덕 민드레미재, 봉계동 장개골, 율촌지서, 율촌취적리, 소라면지서, 화양면, 군내리 선착장, 남면 학살, 삼부도 검등매 학살, 애기섬 수장, 까막섬, 남면 우학리, 안도 선창, 거문도 변촌마을, 덕충동 마을 앞, 삼일동 화치마을 앞 ······,
-<학살의 기억, 여수> 부분
구랑실재, 접치재, 송곡재, 송치재, 둑실마을 안골, 수박등 공동묘지, 서자골, 보장골, 보름터널, 양지맷골, 큰박골, 대구실재, 월치재, 용계산 안골, 구상리 안골, 앵기산골자기, 용골, 주암면 접치재,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대나물골, 돌고개재, 도룡마을,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벌교읍 소하다리, 광양 우산리 쇠머리재, 광양 반송재, 광양 어치리 느재마을, 광양 가모리재, 산동면 꽃쟁이재. 이평 운씨 선산 횟골, 외산리 한천마을 참새미, 가장골, 간전천변, 간문찬변, 서시천변 ······,
-<학살의 기억, 순천 인근> 부분
위에 열거된 지명을 보면 가혹한 폭력과 학살이 얼마나 쉽게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아무런 절차도 없이 고문과 폭행 그리고 학살을 한 뒤 그런 행위를 숨기려고 암매장을 한 곳이니 여수와 순천 지역민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학살과 암매장이 자행된 장소가 어찌 여기 거론된 곳만 있겠는가?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는 곳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죽임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한 양민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도살장이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순박한 사람들도 쥐대기로 끌려왔다
k-30기관총으로 둘러싸인 운동장,
총대와 곤봉,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헬멧으로 얼굴 박아대며
무릎 꿇은 그들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여자와 아이, 남자로 분리된 무리 중에서
남자들은 좌·우익으로 나뉘고
좌익은 다시 군인, 가담자, 협력자로 분리되었다
이 모든 작업은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총칼과 무력의 공포 속에서
알몸으로 무릎 꿇고 두 손을 든 채
벌벌 떨며 색출된 사람들은
운동장 후미진 호 속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고,
칼마이던스 기자는 기록했다
이름도 죄명도 없이
누가 심문하고 사형을 집행했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총알 자국이 별처럼 박힌 콘크리트 벽,
그 앞에 널브러진 시체 더미에서
가족을 찾느라
유족들의 온몸은 피굿이었다
젊은 여성 등엔 눈을 둥그랗게 뜬 아이가 업혀 있고
흰 천으로 남편의 시신을 감싸는
그 여자 곁엔
아버지를 잃은 두 딸이 오열을 했다
그날, 그들은
사람을 잡는 도살자였다
-<순천농림학교> 전문
현재 순천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가 예전에는 ‘순천농림학교’였다. 미래 농업을 책임질 청년들을 양성하는 신성한 학교가 그야말로 지옥같은 아비규환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먼저 이곳은 1948년 10월 국방 경비대가 순천 시내에 들어오면서 진압을 위한 주둔지가 된다. ‘순천농림학교’ 내에서 자행된 모든 만행은 진압군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우동식 시인은 말해준다. ‘순천농림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은 시적인 비유보다 사실성에 근거한 진술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당시 얼마나 즉흥적으로 유죄가 판정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군인들은 순천 시내 인근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토끼몰이하듯 ‘순천농림학교’ 운동장으로 끌어왔을 것이다. 그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해 “k-30기관총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을 감시하며 통제했다. 그러고서 무자비하게 “총대와 곤봉,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헬멧으로 얼굴 박아대며/ 무릎 꿇은 그들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고, 혹시 모를 집단적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갔을 것이다. 그런 뒤 “여자와 아이, 남자로 분리된 무리 중에서/ 남자들은 좌·우익으로 나뉘고/ 좌익은 다시 군인, 가담자, 협력자로 분리되었다/ 이 모든 작업은 즉석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만큼 신속하게 군사작전 하듯 이뤄졌기 때문에 보호되어야 할 아이와 여성 그리고 양민들의 인권은 처음부터 고려된 것이 없었고 마치 짐승 다루듯 한 것이다. 그런 비이성적인 분위기에 편승한 광기로 “운동장 후미진 호 속으로 끌려가 총살”을 감행한다. 당시 폭력적인 상황을 칼마이던스 기자가 목격하고 남긴 기록이 있어 훗날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여순항쟁’으로 촉발된 무차별적인 양민학살이 진압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유가족인 아들과 딸 그리고 지아비를 잃은 아내의 한많은 세월은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채 암흑같은 세상을 살아왔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여론몰이는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재갈과 같은 것이었다. ‘반공’ 앞에는 어떤 만행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살벌한 시대의 광기는 유행병처럼 번져 인근 벌교까지 치닫게 된다.
봉기군이 들어오기도 전
인민위원회가 먼저 이 지역을 장악했고
친일 우익 인사와 청년단원 백여 명이
이 다리에서 처형되었다
다시, 역사는 바뀌고
진압군이 들어서면서 쥐 잡듯 좌익 가담자를 찾아내
또 이 다리에서 살해를 했다
솨화다리 밑 갯바닥과 갯고랑엔
허방과 함정의 비명이 질펀했다
-<소화다리> 부분
소화다리는 벌교천이 흐르고 있는 전남 보성군 별교읍에 위치하고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고비마다 역사의 산증인처럼 우여곡절을 죄다 기억하고 있는 ‘소화다리’는 지금도 아픈 기억을 내려 놓지 못한 채 쇠락을 거듭하고 있다. 여순 항쟁 시에도 그 다리는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만다. 그 갈등의 태동은 “지주와 소작인 간/ 감정의 깊은 골엔 벌교천이 흐른다”며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편과 저편을 갈라놓듯/ 소작인들의 투쟁과 농지개혁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여순항쟁으로 곪아터진 것이다. 농민들의 적敵은 논을 많이 가진 지주가 될 수밖에 없다. “봉기군이 들어오기도 전/ 인민위원회가 먼저 이 지역을 장악했고/ 친일 우익 인사와 청년단원 백여 명이/ 이 다리에서 처형되었다”라며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농지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리는 좌익이거나 우익이거나를 가리지 않았고 소작농과 지주를 가리지 않았다. 단지 누가 권력의 편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밀리고 밀리는 여순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역사는 바뀌고/ 진압군이 들어서면서 쥐 잡듯 좌익 가담자를 찾아내” 소화다리로 내몰려죽임을 당했다. 기구한 소화다리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6· 25 전쟁이 터지면서 더 격한 피비린내를 풍기고 만다. 그런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곳에서 당한 사람 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양지맷골 큰박골>도 그와 같이 “마을 청년이거나 그의 친구라는 이유로/ 조사도 없이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입고/ 철사줄에 손발 묶여 질질 끌려간” 사람들을 향해 총성이 울렸고,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묵사발>의 “지서주임 순사 별명은 황 몽둥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와/ 일단 몽둥이로 패서 자백부터 받았다”라며 그야말로 포악한 경찰의 전형을 확인시켜준다. 주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관이 본연의 의무는 팽개치고 애먼 주민들을 끌고 와 몽둥이로 법을 행사한 것이다. 경찰관의 법 집행시 중요한 판가름은 “빨치산 가족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끄나풀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경찰관의 치안 집행이었다. 그렇게 포악하기만 한 시절에 어느 한쪽만의 폭력과 만행은 아니었다. 여순 항쟁 발발 후 붕기군이 순천에 들이닥치쳐서는 “긍께 인과응보인 듯/ 순천이 봉기군에 점령을 당하자/ 함께한 경찰서장도 두 눈이 뽑히고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차 꽁무니에 끌려 다니다가/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만다. 만행은 더 가혹한 보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누가 더 유리한 권력편에 서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느냐의 결과는 참혹하리만치 악랄하게 이어진다. 당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은 인정머리로 아픈 사람을 보살펴준 죄밖에 없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빨치산 14세 소년 문××를 치료해 줬다는 죄목으로 1949년 음력 8월 17일 죄 없는 주민 스물두 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중략---
‘약을 준 아버지, 올벼쌀을 준 어머니, 누룽지를 준 딸, 홍시를 준 아들, 일가족이 처형을 당하고 고모는 빨래를 해줬다는 이유로, 삼촌은 잠 잘 방을 내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엄마 품에 젖을 빨던 홍×× 세 살 아이, 엄마 등에 없힌 이×× 네 살 아이’
-<신전薪田 마을> 부분
신전마을 사람 대다수가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웠으나 법 없이도 살만큼 평화롭던 마을”이었는데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빨치산 14세 소년 문××를 치료해 줬다는 죄목으로 1949년 음력 8월 17일 죄 없는 주민 스물두 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대명천지에 사람들을 모아 떼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 원통하고 억울한 죄란 것이 “약을 준 아버지, 올벼쌀을 준 어머니, 누룽지를 준 딸, 홍시를 준 아들, 일가족이 처형을 당하고 고모는 빨래를 해줬다는 이유로, 삼촌은 잠 잘 방을 내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엄마 품에 젖을 빨던 홍×× 세 살 아이, 엄마 등에 없힌 이×× 네 살 아이”를 가차없이 학살해버린 것이다. 이후 민족 명절이라는 팔월 한가위 “추석이 없는 마을/ 같은 날 같은 시 제사를 지내는 마을/ 빨갱이로 낙인 찍혀 연좌제의 멍에 속에 한으로 응어리진 마을”이 되어버렸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 떼죽음 당했으니 당연하다. 이후 그 마을에서는 명절이고 뭐고 도무지 세상 사는 것에 즐거워할 만한 일이이라곤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연좌제란 것도 보안법 버금가는 사람 잡는 일이어서 ‘반공’이 국시인 세상에서 자녀가 성장해도 취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나 해먹고 살만한 일을 못하게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온통 ‘빨갱이’ 가족이라며 기피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당한 사람들 사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구랑실 송장골>은 ‘송장골’이라는 말부터 모골이 송연해진다. 전남 동부지역을 가리킬 때 편의상 “전남 동부 6군/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을 뭉뚱그려 말한다. 그중 순천 구랑실 송장골에서 집단 학살이 이뤄진 곳의 사연은 얼마나 간악하게 이뤄졌는가를 증언하고 있다. 여순 항쟁이 터지자 “봉기군으로 가장한 토벌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시험하고/ 봉기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참히 살상”한 사건이다. 요즘으로 치면 함정 단속인데 파리 목숨처럼 내몰린 선량한 양민들이 살기 위해 협조했을 최소한의 행위를 죄로 몰아간 것이다. 그것도 진압군으로 투입된 토벌군의 간교한 계략을 활용해 벌인 의도적인 학살인 셈이다. 여기에서 연이어 집단학살이 발생하는 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순천 교도소에 감금된 보도연맹원들을 끌고가 무참히 처형해버린다. 원한이 사무칠 수밖에 없는 ’순천 구랑실 송장골‘은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다.
1948년 10월, 14연대 봉기군의 기습으로 진출 저지 경찰 3-4명이 희생되고 광양경찰서 좌익 혐의 수감자 27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1949년 9월 빨치산 대규모 공격으로 광양시 경찰 9명과 국군 20명이 사망하고 1951년 1월, 군경 진압 작전으로 좌익 혐의자 40여 명이 학살되었다
백운산 아래 지리적 접근성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맴돌던 곳
경찰의 이름으로
군인의 이름으로
봉기군의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들은 경찰에게 죽고 군인에게 죽고 봉기군에게 죽고 좌익이어서, 우익이어서, 영문도 모르게 끌려가 죽고
-<반송쟁이> 부분
시 <반송쟁이>는 암울한 역사의 진실을 시의 형식을 빌어 구체적으로 알리고 있다. ‘반송쟁이’는 현재 순천 성가를로 병원 앞을 지나 광양읍 과 경계를 가르는 계곡을 가리킨다. 현재는 그곳을 메워 6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도로변에 참상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여순 항쟁으로 비롯된 이 지역의 피바람은 진영에 따라 무자비하게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서로에 대한 얼키고설킨 원한은 깊을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그런 불행한 학살 장소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순항쟁’으로 인해 토벌이 이뤄지면서 여수 순천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여수 지역의 <잉구부 전투>는 진압군과 봉기군의 첫 전투가 벌어지면서 또 다른 유형의 학살이 발생한다. “왼쪽으로 굽은 길/ 뒤편은 종고산이 방패 되고/ 앞쪽 절벽 밑으론 연등천이 흘렀다/ 천변 부근엔/ 천일 기업인 천일 고무공장”이 있던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진압군이 ‘잉구부 전투’에서 봉기군에게 패하고 만다. 그곳에서 패한 진압군은 후퇴를 하며 “민간인과 부역 혐의자 등 47명을 잡아/ 미평 굴다리 부근에서 즉결 사살했다”라며 구체적인 사실을 남기고 있다. 문제는 이때 장갑차를 앞세웠다는 데 과연 그것이 진압군의 역할로 볼 때 합당한 것인가도 생각해볼 문제다. 남북 간의 전쟁도 아닌 기껏해야 소총 정도 들고 나온 봉기군 진압을 위해 장갑차를 앞세웠다는 것은 여수 시민에 대한 안전은 철저히 무시했다고 볼 수 있다.
봉기군은 이미 신덕 상암 묘도를 지나 백운산으로 피했는데,
2, 3, 12연대 각각 2개 대대씩 상륙용 장갑차 부대, 경찰 지원대, ㅣ-5 항공기 6대, 해군 충무공호, 경비정 6척 ······이 정도와 병력과 전투력과 장비라면 여수라는 도시가 온전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초의 전투가 시민을 위협하는 작전이라니
무장한 군인이 이런 작전을 전개해도 되는지 대체 누가 이런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서 협공하여
완전 궤멸 시키려 했던
작은 도시,
-<무자비한 작전> 부분
우동식 시인은 군 장교로 복무를 마치고 현재 여수에서 예비군 교육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군 편제와 살상용 무기에 대한 위력을 잘 알고 있다. “2, 3, 12연대 각각 2개 대대씩 상륙용 장갑차 부대, 경찰 지원대, ㅣ-5 항공기 6대, 해군 충무공호, 경비정 6척 ······이 정도와 병력과 전투력과 장비라면 여수라는 도시가 온전할 수 있을까?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초의 전투가 시민을 위협하는 작전이라니”라는 화자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그 모든 피해는 선량한 양민을 향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최적화한 시적 발언은 왜곡된 여순항쟁에 대한 인식을 바로 알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또한, 우동식 시인의 《여순 동백의 노래》는 ‘여순항쟁’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발생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하여 누구라도 이 시집을 읽는다면 전체적인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데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여순항쟁’이 발발하기 전 국내외 제반 환경을 말해주고 있는 <노란 풍선꽃>, <해방>, <암운>, <화산>은 좋은 사례로 1945년 해방 이후까지를 언급하고 있다. 단순히 ‘여순항쟁’은 여수와 순천 인근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친일세력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민감한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 현실에 더해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인한 정정政情 불안 속에서 발생한 ‘제주 4·3 항쟁’에 대한 군 내부의 당시 분위기를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를 통해 말해준다. 결국 제주 상황이 악화되면서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군 병력의 제주 파병이 구체화되었고 ‘동족살상 거부’라는 명분에 찬 군인들의 봉기였다는 것이다. ‘여순항쟁’을 일으킨 ‘봉기군’에 의해 여수와 순천 인근 지역의 친일 경찰 및 우익 인사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학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순반란사건’으로 규정해 버린 그 자체로 엄청난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후 군경으로 증원된 병력을 진압군(토벌군)으로 투입하여 좌익 척결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적법하지 않은 절차로 자행된 양민에 대한 집단 학살은 참혹하기 그지없어서 국가 폭력의 광포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러한 전체적인 사실들을 세심하게 고뇌하면서 시적으로 재현한 금번 우동식 시인의 《여순 동백의 노래》는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여순항쟁’에 대한 역사적 왜곡과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료임이 분명하다. 시집에 실려있는 많은 실화들을 통해 ‘여순항쟁’에 관하여 잘못 알려진 역사적인 진실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