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2017 베를린영화제에서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은곰상을 탄 홍상수 감독의 1996년 데뷔작이다. 발표 당시, “놀라운 한국영화가 나타났다”는 평가와 함께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상찬받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러나 돼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돼지처럼 어디로 달려갈지 가늠할 수 없는 네 명의 주인공이 네 개의 독립적이지만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끌고 간다. 당시 유행했던 옴니버스적 구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치가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은 우연으로 가득차 있고 사람들은 논리와 목적이 아니라 무의식적 충동에 의해 생을 살아간다는 감독의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주인공들은 세상은 타락했지만 자신만은 순수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그저 보통사람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효섭은 나름대로 글쓰기의 고결함에 괴로워하는 괜찮은 지성을 지닌 소설가이지만 그의 사생활은 불륜으로 뒤죽박죽인 상태다. 유부녀 보경도 청춘의 어느날까지는 꿈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지금은 만원이 더 비싼 장급여관의 시설에 만족하면서 효섭과 몸을 섞는다. 극장 매표소 직원 민재는 효섭과 결혼해 소설가 부인이 되겠다는 허영 아닌 허영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돈벌이를 감수한다. 여기에 지나친 결벽증과 의처증으로 번민하는 보경의 남편 동우가 추가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네 토막의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영화의 끝에 하나의 지점으로 합류한다. 바로 이때 별스럽던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들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 바로 일상의 공포를 가리키면서 관객들의 정수리에 일격을 가한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고 목표를 가진 캐릭터의 주인공이 겪는 기승전결의 이야기는 드라마적 사실주의의 기본이지만 '젊은' 감독 홍상수(당시 만 36세)는 그것과 현실의 리얼리티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적 소재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던 통속의 소재들을 가지고 현대 도시와 문명인들의 허상에 대한 섬뜩한 보고서를 완성해낸 것이다.
효섭 역을 맡아 냉정하고 허무적인 문성근과는 또다른 복합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의성의 연기가 돋보이며 자연광 위주의 조명과 기록영화 같은 객관적 화면 구성,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연기의 전통적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일상의 몸짓과 대사가 관객을 색다른 영화경험 속으로 몰입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