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의 최후
아차산을 오늘 오후에야 찾았다. 어제 산행 후에 노객지기들과 알콜농도를 제법 올리는 바람에 늦게나마 아차산 생태공원으로 내려간다. 인어공주가 지키는 인공 연못에는 살짝 어름이 덮혀 있구나. 차가운 눈바람이 공주를 움츠리게 하고 있다. 연못을 눈여겨 보며 데크에 올라선다. 눈을 부비고 다시 확인한다.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재차 보아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모습에 적이나 당혹스럽기 까지 하다. 40여년 전 70년대 후반으로 추억의 필름이 빠르게 돌아간다. 제약회사 생활을 마감하고 청계천 4가에 약국을 개설 했을 때이다. 약국 앞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바삐 갈길을 오가고 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 날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밟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시선을 빼았는다. 날지도 걷지도 못하고 푸득거리며 날개마저 축 처진 상태다. 약국 카운터를 뛰어 넘어 그 녀석을 품에 안는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항생제 연고를 바르고 아이스크림의 납작한 나무로 부목으로 감아준다. 동물보호협회에 구청에 전화로 문의하지만 대답은 시쿤둥이다. 국가의 큰 행사 때 마다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날려보내던 시절이기도 하다. 지금은 해조류(害鳥類)로 천덕구러기 신세로 전락한 상태다. 버스로 강동구 암사동집으로 데려올 수 밖에 방법이 없다. 2층 창 밖 베란다에서 열흘 정도 정성껏 모이를 주고 보호를 했다. 세살 다섯살 아이들이 더 열심히 보살핀다. 지금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으로 사회의 일원인 아들 딸이다. 어느 날 비둘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연으로 이제는 훨훨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반갑기도 섭섭키도 하다. 어느날 약국 앞에 쩔뚝이며 걷고 있는 비둘기를 발견한다. 바로 그 녀석이다. 감아준 부목 그대로 기웃거린다. 반가운 마음에 쫒아나가 보지만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야속키도 하지만 은혜에 대한 보답의 인사를 하러 찾아온 모양이다. 청계천 약국에서 암사동 집까지 버스로 갔었는데 만만치 않은 거리가 아닌가. 어떻게 날아서 찾아왔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연못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어름물에 코를 박고 널브러져 있는게 아닌가. 낙엽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아차산에서는 먹잇감 구하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연못 속에 물고기를 낚아챈 모양이다. 허겁지겁 삼키려다 그만 목에 걸려서 질식사 한 것이나 아닌지 멋대로 추측할 뿐이다. 인간이 이런 모습이면 어땠을까. 언제 왜 누가 무슨 이유로 죽였을까. 부검을 하고 주위 CCTV를 확인하고 용의자를 찾아 나설게다. 아니면 자살인가. 수사망을 좁혀 나가며 원인 규명을 할테다. 매스콤에서도 취재에 열을 올릴 게 아닌가. 부모형제 자매 자식 가리지 않고 몰살시키는 오늘의 세태가 아닌가. 은혜를 원수로 보답(?)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간들도 있지 않은가. 비둘기만도 못한 패륜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회상이 답답할 뿐이다. 그런데 한 마리의 비둘기의 죽음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거다. " 어, 비둘기가 물에 빠져 죽었네 " 그것으로 끝이고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 아닌가. 날으는 새가 물에서 헤여나지 못해 죽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도 않되는 거다. 노객에게는 이런 광경은 처음이 아닌가. 깃털 한 오라기 빠짐이 없는 온전한 모습이 더욱 납득키가 어렵다. 119에 전화를 하면 별 미친 노인네가 다 있네. 이런 볼멘 소리가 귓청을 울릴 게 뻔 하지 않은가. 괜한 통화료만 허공에 뜰테니까 말이다. 씁쓸한 마음을 연못에 남기도 발길을 돌릴 수 밖에 방법이 없지 아니한가. " 그래,비둘기야, 내가 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미안하다, 저 세상에서나마 날개를 활짝 펴고 마음껏 연못 위를 하늘을 날으거라," 천천히 산길 숲속으로 들어선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린다. 나무 잎사귀에도 노객의 어깨로도 소리없이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올 겨울에 들어서서 처음 내리는 눈송이가 신기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추운 겨울이면 으레 휘날리며 온 세상을 하얗게 수채화를 연출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어제의 주독(酒毒)이 여진으로 다가오나 보다. 속이 쓰리하고 몸이 무겁고 혈당이 모자라는 느낌이다. 아차산 휴게소 문을 당기고 들어선다. 컵라면으로라도 위를 달래야 할 모양이다. 주인도 안 보이고 한 사람의 산객도 없다. 썰렁하고 울씨년스럽기만 하다. 냉장고에서 식혜 한 캔을 꺼낸다. 우선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맛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흐른다. 그제야 주방 아주머니가 방에서 나온다. 라면을 매콤하게 한사발 주문한다. 짜기면 하니 괜히 주문한 것 같으다. 그래도 아깝기도 하고 뜨끈한 국물과 면발로 달래볼 수 밖에 어쩌겠는가. 라면 3,000원 식혜 1,000원 합이 4,000 원을 카드로 결재를 하고 일어선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다. 인사를 기대한 것은 아니나 손님에 대한 배려는 제로이다. 아니면 기대한 자신이 바보가 아닌가.김치도 없이 단무지 서너쪽만이 곁들인 라면이다. 그래도 조금은 위안을 삼아야지. 누구를 나무라고 무엇을 더 요구하겠는가. 4,000원이 아깝다는 마음을 꾹 누르면서 집으로 향한다. 다시 만나기가 미안한 연못을 비켜서 말이다. 인간과 비둘기의 죽음은 다름이 무엇일까를 되내여 본다. 걸으면서 어느 쪽이 더 소중하고 안타까운 죽음인가를 따져보면서. 비둘기는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며 누구를 원망하지는 아니 했을까. 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까. 비둘기는 자신을 살려준 은인에게 보답의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하찮은 새 한 마리 보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자화상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2017년 11월 20일(월) 무 무 최 정 남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은 비둘기의 모습이다. 영하의 날씨에 연못의 물이 얼어붙고 눈까지 내렸으니 녀석은 이제 완전히 어름으로 변했겠지. 꺼내어 따뜻한 불길로 감싸주면 좋으련만 그냥 바라볼 뿐이다.
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