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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3]
장애 안고 떠나가신 어머니 그리며
이성칠
어머니는 뇌병변장애 5급과 요양등급 1급으로 요양병원에서 2년 전 향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그보다 22년 전인 뉴 밀레니엄을 1년 앞두고 향년 80세에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7년 전 치매 진단으로 요양원에 계신다. 올해 백수(白壽)인 99세로 6남매를 두고 쉰 연세에 홀로 되셨다. 진갑마저 지나고 보니 친구들 부모님께서도 많이 떠나가시고, 덩달아 자녀들의 혼사가 연이어진다. 눈감으면 아득한 소싯적 어머니의 하얀 젖무덤을 2년 터울 여동생과 넘나들던 때가 그리워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한 지붕 아래 부모님의 한없는 애정으로 9남매를 키워주셔서 내 인생의 참스승이었다. 40년 지방공무원으로서 지방부이사관으로 명퇴하고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주경야독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 인생삼락의 길을 걸으며 종중 묘제에도 참례하고 최근엔 시인으로 등단했다.
TV에서 등이 휘거나 관절염 치료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농어촌 어르신들을 위한 정형외과 의사와 탤런트가 출연, 농사일을 거들고 수술을 알선해주는 프로그램이 공감을 얻는다. 논밭이나 바다에서 쪼그리고 앉아 평생을 보냈으니 허리나 무릎관절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마다 신신파스, 안티푸라민 연고가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은 엄두를 못 내어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 시켰다. 잠들기 전에 부부끼리나 자녀들이 팔다리를 주물러 드려야 했다. 또한, 비단 홀치기를 하거나 양반 자세로 앉는 온돌방 생활 구조도 한몫했다. 초기에는 정형외과의 수술 비용이 만만찮았고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분도 있었다. 나중에는 고령으로 수술마저 어려워 보행기나 지팡이에 의지하며 지내야 했다. 당신께서도 그렇게 노후를 보내셨다.
유일한 유산인 국유림에 무허가로 지은 60년 된 낡은 고향 집은 아우네가 넘겨받아 살지만, 형제간의 따뜻한 정만큼은 어느 가정보다 넘치고 눈물겹다. 부엌 아궁이가 달린 고향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아내가 백화점에서 오후 3시까지 근무하니 세 남매는 부모님께서 돌봐주셨다. 정이 듬뿍 들어 돌아가실 때마다 손주들 셋이 울부짖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로 홀어머니를 모셨지만, 고향 집 인근 철도 시설녹지인 임대한 70여 평 텃밭을 자주 들락이셨다. 어머니는 관절염이 급속히 악화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킨슨병과 담석, 폐렴, 녹내장 등으로 종합병동이 되었다. 처음 담석증은 당시 지역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촬영으로 암으로 오진하기도 했다. 결국, 대도시 큰 병원에서 시술로 고통을 면할 수 있었다. 첫 5년, 2년, 1년, 6개월 단위로 지속으로 재발 되어 어머니를 무척 고통스럽게 했다. 손 떨림 증상은 풍이라 하여 한방병원에서 비싼 한약 처방을 받기도 했다. 바쁜 공무원 생활 중 휴가를 얻어 차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각각 증상별 진찰을 받았다. 젊은 여의사가 걸음걸이를 보고 풍이 아니라 파킨슨병이라는 놀라운 진단을 내렸다. 완치는 안 되고 흰 알약을 늘 복용하니 떨림이 완화되었다.
담석은 연세가 높아질수록 시술이 어려워, 담낭 제거 수술과 담관에 카테터 시술로 담즙을 뽑아내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면서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6개월마다 구급차에 실려 와 카테터 교체 시술을 했다.
그 와중에 통증이 유발되어 응급실 내 음압 병동에 입원하는 등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겪었지만 잘 이겨내셨다. 코로나-19의 암울한 시기에도 철저한 관리로 감염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수그러든 2021년 중순 밤늦은 시각, 요양병원으로부터 급히 여러 병원의 음압 병동을 찾아보라 하였으나 코로나 환자들로 여분이 없는 상황이었다. 93세 되도록 치매는 없었으나 합병증 등으로 뇌병변장애 5급 진단을 받았으며, 담석으로 폐렴이 심해져 산소호흡기를 시술하게 되어 요양등급 1급 진단까지 받았다. 고향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 와서도 늘 세 남매 손주들도 함께 지냈고, 아내가 요양보호사 자격까지 따가면서 간호하고 보살펴 행복한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거동은 불편했으나 여동생이 운영하는 주간 보호시설에 2년을 다녔다. 시술 이후부터는 간호사의 집으로 입소해서 보낸 3년까지, 지난 5년간은 집안의 축하할 일이며, 당신의 생신날 형제들이 모두 찾아뵙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따뜻한 봄날이나 코스모스 필적엔 휠체어에 모시고 인근 공원을 찾아, 어머니께서 호롱불 밑에서 부르던 애창곡인 앵두나무 우물가에, 오동추야 달이 밝아 등을 스마트폰에서 찾아 손뼉을 치며 따라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나온 세월의 찰나에 불과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몇 개월 되지 않아 코로나-19로 면회는 주 단위로 바뀌거나 일시적으로 2주씩 중단되곤 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6개월마다 담관과 연결된 카테터 교체 시술 때는 인근의 동생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수면 중이 아니면 간단한 대화도 했지만, 피곤하여 숙면 중엔 얼굴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더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던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장애를 안고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20여 년 전 미리 장만해둔 공원묘지에 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몸서리 처지는 경험으로, 빈소를 지키며 비몽사몽 중 평생토록 나를 감싸온 어머니의 기운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듯 허허한 느낌, 탈상 후 혼자 있을 때 엄습한 한없는 고독감, 수면 중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어 우주의 미아가 된 불길함에서 벗어난 지 두 해를 맞았다. 언젠가 5월 8일 어버이날 아내가 받아야 할 상을 부모님을 모시는 모범 가장이라며 경상북도지사로부터 효행상을 받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장애를 안고 떠나게 한 불효자로서 한없이 후회스럽다. 내 패스포트엔 15년 전인 2008.10.27.자 구미시장이 처음 발행한, 뇌병변장애 5급 복지카드 속엔 꾸미지 않은 담담한 모습이 담긴 어머니의 사진이, 아내보다도 더 젊은 수수한 얼굴로 나를 늘 지켜준다. 아울러 백수를 맞은 사랑하는 장모님! 이번 생신날만이라도 치매가 호전되어 당신의 자식들과 이 사위와 손주들을 환하게 반겨주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이 세상의 모든 장애인과 그 가족들께 축복이 내리길 빕니다. 끝으로 목놓아 불러봅니다. 아버지! 어머니! 눈물겹도록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퇴고 2]
장애 안고 떠나가신 어머니 그리며
이성칠
어머니는 뇌병변장애 5급과 요양등급 1급으로 요양병원에서 2년 전 향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보다 22년 전인 뉴 밀레니엄을 1년 앞두고 향년 80세에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7년 전 치매 진단으로 요양원에 계신다. 올해 백수(白壽)인 99세로 6남매를 두고 쉰 연세에 홀로 되셨다. 진갑마저 지나고 보니 친구들의 부모님께서 많이 떠나가시고, 덩달아 자녀들의 혼사가 이어진다. 눈감으면 아득한 소싯적 어머니의 하얀 젖무덤을 2년 터울 여동생과 넘나들던 때가 그리워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극심했던 가난 속에서도 한 지붕 아래 부모님의 한없는 애정으로 9남매를 키워주셔서 내 인생의 참스승이 되었다. 40년 지방공무원으로서 지방부이사관으로 명퇴하고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주경야독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인생삼락의 길을 걸으며 종중의 묘제에도 참례하고 최근엔 시인으로 등단했다.
TV에서 등이 굽거나 관절염 치료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농어촌 어르신들을 위한 정형외과 의사와 탤런트가 출연하여 농사일을 거들고 수술을 알선해주는 프로그램이 공감을 얻는다. 논밭이나 바다에서 쪼그리고 앉아 평생을 보냈으니 허리나 무릎관절로 고생하는 일은 당연하다. 집집마다 신신파스, 안티푸라민 연고가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은 엄두도 못 내고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 시켰다. 잠들기 전에 부부끼리나 자녀들이 팔다리를 주물러드려야 했다. 또한, 홀치기를 하거나 양반 자세로 앉는 온돌방 생활구조도 한몫했다. 초기 정형외과에서 수술 비용이 만만찮았고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분도 있었다. 나중에는 고령으로 수술마저 어려워 보행기나 지팡이에 의지하며 지내야 했다. 당신께서도 그렇게 노후를 보내셨다.
유일한 유산인 국유림에 무허가로 60년 된 낡은 고향 집은 아우네가 넘겨받아 살지만, 형제간의 따뜻한 정만큼은 어느 가정보다 넘치고 눈물겹다. 부엌 아궁이가 달린 고향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아내가 백화점에서 오후 3시까지 근무하니 세 남매는 부모님께서 돌봐주셨다. 정이 듬뿍 들어 돌아가실 때마다 손주들 셋이 울부짖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로 홀어머니를 모셨지만, 고향 집 인근 철길 옆 시설녹지의 임대한 70여 평 텃밭을 들락거렸다. 어머니는 관절염이 급속히 악화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킨슨병과 담석, 폐렴, 녹내장 등으로 종합병동이 되셨다. 처음 담석증은 당시 구미의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촬영으로 암으로 오진하기도 했다. 결국, 영남대병원에서 시술로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첫 5년, 2년, 1년, 6개월 단위로 지속으로 재발 되어 어머니를 무척 고통스럽게 했다. 손 떨림 증상은 풍이라 하여 한방병원에서 비싼 한약 처방을 받기도 했다. 바쁜 공무원 생활 중 휴가를 얻어 차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각각 증상별 진찰을 받았다. 젊은 여의사가 걸음걸이를 보고 풍이 아니라 파킨슨병이라는 놀라운 진단을 내렸다. 완치가 안 되니 흰 알약을 복용하면 떨림이 완화되었다.
담석은 연세가 높아질수록 시술이 어려워 담낭 제거 수술과 담관에 카테터 시술로 담즙을 담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면서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6개월마다 구급차에 실려 와서 카테터 교체 시술을 했다.
그 와중에 통증이 유발되어 응급실 내 음압 병동에 입원하는 등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겪었지만 잘 이겨내셨다. 코로나-19의 암울한 시기에도 철저한 관리로 감염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수그러든 2021년 중순 밤늦은 시각에 요양병원으로부터 급히 여러 병원의 음압 병동을 찾아보라 하였으나 코로나 환자들로 여분이 없는 상황이었다. 93세 되도록 치매는 없었으나 합병증 등으로 뇌병변장애 5급 진단을 받았으며, 담석으로 폐렴이 심해져 산소호흡기를 시술하게 되어 요양등급 1급 진단까지 받았다. 고향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늘 세 남매 손주들과 함께 살면서 아내가 요양보호사 자격까지 따가면서 간호하고 보살펴 행복한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거동은 불편했으나 여동생이 운영하는 주간 보호시설에 2년을 다녔다. 시술 이후부터 간호사의 집에 입원해서 보낸 3년까지 지난 5년은 집안의 축하할 일이며, 당신의 생신날 형제들이 모두 찾아뵙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따뜻한 봄날과 코스모스가 필적엔 휠체어에 모시고 인근 공원을 찾아, 어머니께서 호롱불 밑에서 부르던 18곡인 앵두나무 우물가에, 오동추야 달이 밝아 등을 스마트폰에서 찾아서 틀어놓고 박수와 합창을 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나온 세월의 찰나에 불과했고, 요양병원에 입원한 몇 달 되지 않아 코로나-19로 면회도 주 단위로 바뀌거나 일시적으로 2주씩 중단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6개월마다 담관과 연결된 카테터 교체 시술 때는 인근의 동생들과도 만나곤 했다. 수면 중이 아니면 간단한 대화도 했지만, 지쳐서 숙면 중에는 얼굴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더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던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장애를 안고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20여 년 전 미리 장만해둔 공원묘지에 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몸서리 처지는 경험으로, 빈소를 지키며 비몽사몽 중에 평생토록 내 몸을 감싸온 어머니의 기운이 갑자기 빠져나가던 일, 탈상 후 혼자 있을 때 엄습한 한없는 고독감, 수면 중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어 우주의 미아가 된 불길함을 벗고 두 해를 맞았다. 언젠가 5월 8일 어버이날에 아내가 받아야 할 상을 부모님을 모시는 모범 가장이라며 경상북도지사로부터 효행상을 받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장애를 안고 떠나게 한 불효자로서 한없이 후회스럽다. 나의 패스포트엔 15년 전인 2008.10.27.자 구미시장이 처음 발행한 뇌병변장애 5급 복지카드 속엔 꾸미지 않은 어머니의 담담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내보다도 더 젊은 수수한 얼굴로 나를 늘 지켜주신다. 아울러 백수를 맞은 사랑하는 장모님! 이번 생신날만이라도 치매가 호전되어 당신의 자식들과 이 사위와 손주들을 환하게 반겨주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이 세상의 모든 장애인과 그 가족들께 축복이 내리길 빕니다. 끝으로 목놓아 불러봅니다. 아버지! 어머니! 눈물겹도록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