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8. 19-28 |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1-4 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이 구절에서 1 세기 초반 이스라엘의 영적 쇄신 운동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위해 터를 닦았던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단어로 요한의 특성을 보여준다.
1) 하느님께서, ‘께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파라’는 1 절의 전치사 ‘프로스’, ‘함께’라는 단어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신,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견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분사형으로 70 인 역에서는 메시지나 임무를 위임받아 파견될 경우에 쓰였다. 이것은 주로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이사 6:8). 또한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활동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마태오 3:1; 마르코 6:14; 루카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그냥 ‘요한’이라고만 한다.
그 이유는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또 그의 증언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증언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증언’이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활동이 예수님의 활동처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자신을 비유한 데서도 드러난다. ‘빛을 증언하여’, 여기서 ‘빛’은 예수님이다. 7 절은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오로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뿐이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빛’은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빛에 대한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기 37:15)이나 불빛(시편 78:14)으로 인도하시는 분 2)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으로 길을 밝히시는 분(이사야 42:16) 3) 빛과 어둠의 주님(아모스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이사야 60:1-2)으로 묘사되고 잇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러 세상에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로, 즉 예수님의 활동을 미리 준비하는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만 하는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을 증언해서 사람들이 그분을 믿도록 하는 것의 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구원이 모든 사람, 전 인유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요한의 역할을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 |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6,7 절의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활동을 간략하게 요약한 이 구절은 요한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와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교와 교육에 집중했던 에페소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사도행전 19:2,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을 것이다.
즉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가 아니라 구세주를 증언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사도 요한은 마태오와 루카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신의 신자들에게 반복해서 육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서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활 직전의 상황을 세례자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 절). 이는 세례자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 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 일부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기도 했다(루카 3:15; 사도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회의인 최고 의회는 요한을 감시할 사람들을 파견했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인 ‘미쉬나’에 의하면 거짓 예언자에 대한 규정과 재판이 최고의 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층을 뜻한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최고 의회의 대사제에게 속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다. 그들은 최고 의회가 요한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요한에게 하는 질문은 공적인 심문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은 요한의 사명, 또는 그의 활동과 관련된 질문이다. 즉 당신은 무엇이길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가?라는 질문이다. |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서슴지 않고’라는 말의 원문은 ‘부인하지 않고’이다. 이 말은 요한이 자신의 활동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최고의 회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아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자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요한은 ‘나’라는 1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 예수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아’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언을 완성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아사상을 세속적인 왕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한 것은
1) 옛 계약의 완성이자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 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선동자가 아니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집회서 48:10; 말라기 3:23-24). 사람들 중에는 엘리야를 ‘메시아의 선구자’로 생각하고 기다린 사람도 있었지만, 엘리야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엘리야요’, 요한이 1) 낙타털 옷을 입고, 2) 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 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 헤로데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태 11:14; 17:12)과 비교해 보면 이 증언은 잘못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 ‘서슴지 않고’ 한 증언이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 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가 이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 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가이인들의 질문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 라는 것이었다.
이에 요한은 강하게 ‘아니다’라고 강하게 대답한다. 즉 그리스도도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엘리야도 아님을 드러낸다. 한편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님의 말씀도 정당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예언자 말라키가 예언한 엘리야적 예언적 활동 즉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그러면 그 예언자요?’ 여기서 언급되는 예언자는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예언자’ (신 18:15)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예언자 개념은 메시아와 직결되며 성령 강림 이후에 사도들은 그 예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사도 3:22; 7:37). |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이 말은 그들이 요한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에 의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심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메시아를 자칭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었고, 그들이 일으키는 폭동과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보내서 요한을 심문하게 한 것도 그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최고 의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세 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요한을 조사하러 온 사람들은 조급해서 자신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요한이 누구인지 말해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구한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라는 뜻으로 묻고 있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한 후에 자신은 이사야서 40 장 3 절을 인용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한다. 요한의 자기 증언은 공관 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태 3:3; 마르 1:2-4; 루카 3:3-6).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이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요약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의 성취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태 3:3; 마르 1”3; 루카 3:4).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에 하느님을 체험한 장소이다. 따라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는 뜻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예언한 것은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니 회개하고 귀향을 준비하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메시아가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회개하라는 뜻으로 인용되어 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말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라는 뜻으로 회개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말은 ‘나는 주님의 길을 준비시키는 자다.’ 즉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자다.라는 뜻이다. |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최고의회의 두 세력인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중에서 바리사이들이 보낸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고 의회 의장이 사두가이의 수장이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 19 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최고 의회 의원들이 아니거나 2) 19 절의 ‘사제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최고의 회의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후자가 맞다면 바리사이들이 파견한 다른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 절까지의 문맥의 흐름상 여기에서 ‘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최고 의회 조사단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가이의 수장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최고 의회와 바리사이들을 일치시키고 있을까?
그 이유는 당시 바리사이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기에 최고 의회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최고의회의 주도권은 바리사이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가이인들은 자신들의 뜻과 다를지라도 바리사이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람들 중에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왜 세례를 주는 것이오?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다음 두 가지 견해를 통해 요약될 수 있다.
1) 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즉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공적인 의식이었다.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야 할 세례를 유다인들에게 실시한 것에 대해서 질타를 하는 것이다.
2) 메시아의 활동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로 에스켈 36:25, 37; 37:23; 즈가리야 13:1 등에서 물로 씻음 즉 세례 의식이 메시아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은 모든 민족에 대한 죄를 씻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오로지 메시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왜 세례를 주냐고 묻는 것이다. |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라는 말씀은 세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이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에 염두를 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의 물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을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요한의 활동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즉 요한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1)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와 회개의 선포’를 준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 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 세례를 준비한 것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 보냈던 사람이다. 이러한 요한의 활동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 절). 즉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주는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외치는 일 즉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있다.’라는 말씀이다. 최고 의회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이 구절은 10 절에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8:44).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태 3:7; 루카 3:7).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로 그분을 알아보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계시가 없었고, 또 세상에 속한 사람들, 세상의 가치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기에 메시아를 볼 수 없었고, 오신 메시아는 그 사람들에게 낯선 분이었다. |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 구절은 마르코복음 1 장 7 절과 같은 구절이다. 구전 전승을 편집한 것일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높으신 분이고, 요한은 예수님보다 더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에서 ‘신발 끈’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착용했던 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 시켜 손님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어 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요한의 자기 진술 형식으로 보도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라고 물은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자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활동을 메시아의 활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어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아의 앞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 절을 보면 요한은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또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의 선포 말씀과 행적을 듣고 알았을 수도 있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장소를 언급한 것은 이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서 여기에 기록한 것일 것이다.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이 아니라(11:18) 요르단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이다. 지금 이 장소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3 세기 이전에 없어진 지명이라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