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운촌마을
달성 서씨(達城徐氏) 판서공 해운대 후손
운촌, 청사포 새터, 미포마을 세거
운촌(雲村) 마을은 우1동, 해운로 운촌 삼거리에서 동백섬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왼쪽에 형성된 자연마을이다. 이곳은 해운대의 발상지이며, 최치원 선생이 대(臺)를 쌓고 머물렀다는 동백섬과 춘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이라 원래 해운대라고 불려 왔다.
당산은 1700년경에 건립하였고 제의 날짜는 음력 1월 14일, 10월 5일 자정이며 거릿대 장군제, 산신제, 당산제 순으로 제를 모신다. 이 마을 골매기 할매는 기촌 때 과부로써 홀로 살면서 마을을 일으킨 류 씨 할매를 골매기 할매로 좌정시켰다고 한다. 이 마을은 춘천 하구에 자리 잡아 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을 주업으로 살아왔던 어민이었다. 동백교에서 운촌 삼거리인 솔리방(운촌마을 어귀에 40그루 소나무가 있는 솔잎 바위, 상여집이 있었음)까지 모래 해안이었고 고깃배들이 정박하였다.
1910년에 간행된 <한국수산지> 제2집에 의하면, 운촌은 수영만의 해안에 위치한 동하면 내의 주요한 어촌의 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 앞바다인 오륙도 수영만은 춘천과 수영강의 담수와 바다의 해수가 어울린 곳이라 어류 중 많은 멸치가 서식하는 황금 어장이었다.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영남의 거족으로서 고려 멸망 후에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크게 나누어졌다. 경파는 서한을 시조로 하고 조선조에 벼슬에 나아가 중앙 조정에 출사한 계통을 말하는 바 뒤에 보통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부르게 되었고, 향파는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며 절의를 지켜 출사하지 않고 영남 일원에서 세거한 계통이다.
달성 서씨의 시조 서진은 고려 시대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에 오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게 되었다. 서진뿐만 아니라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潁)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달성으로 하였다.
달성 서씨의 분파는 크게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석령진사공파,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개 파로 대별된다.
해운대 우동 운촌마을에 입향하여 세거한 달성 서씨는 판서공 서섭의 후손이다. 이 마을에 언제부터 기촌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운대 입향조 서성득(徐聖得, 1715~1772) 선조가 1700년경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에서 해운대 운촌으로 이거 하였다. 나사마을 입향조 서모득의 아들 서입산 선조의 선영이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71-5 호적등 기슭에 있다.
남은(南誾) 서섭(徐涉)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단종에 이르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920년에 단종에게 올린 상소문과 유문이 발견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은 그가 남긴 몇 편의 글밖에 없었다. 이 몇 편의 글 역시 “이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 열어보면 큰 우환을 미칠 것이다”라는 선생의 당부 때문에 의문 속에 있다가 400년이 지난 후 1924년 후손 서의곤이 집 수리 공사 중에 시렁 위에 묶여 있던 상자가 떨어져 선생의 단종에 대한 충절로 가득한 유고임이 확인되었다 한다. 세상에 알려지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그는 네 아들(진원, 감원, 관원, 서원)을 두었다.
끝으로 필자가 인터뷰한 문중 총무 서영호 선생(해초 28회, 68세)은 애향심과 봉사정신으로 지역 발전과 자손들이 지역을 지키고 주민들의 복지와 어려움, 민원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 왔고 관변 단체에 참여하여 마을 회장(8년), 주민자치위원장 등 역임하면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나사 문중 총무 서영호 (68세, 해초 28회) 인터뷰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