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4. 21.
수년 전 면역 관련 책을 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화학치료를 받는 암환자들은 항암제를 맞기 전에 혈액검사를 해서 백혈구 수치를 확인한다. 항암제를 투여하면 부작용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는데,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으면 감염의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보는 백혈구가 호중구라는 것이다.
백혈구는 10여 가지 면역세포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이 가운데 대식세포와 자연살해세포, T세포, B세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필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호중구는 호산구, 호염구와 함께 이름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각 세포의 핵을 염색하는 시약의 산성도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알고 보니 호중구는 혈액의 전체 백혈구의 50~70%를 차지하는 선천 면역계의 주력부대로 세균이나 곰팡이 감염에 대응하는데 필수적인 백혈구다. 병원체가 침투했다는 신호를 감지하면 감염 부위로 곧바로 이동해 병원체를 잡아먹거나 항미생물 활성을 지닌 물질을 분비한다. 병원체와 싸움에서 불가피하게 조직이 손상되기 때문에 적을 소탕한 뒤에는 조직을 재건하라는 신호물질을 내보내기도 한다. 온갖 세균과 곰팡이가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우리가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건 ‘호중구와 동료들’ 덕분이라는 말이다.
▲ 혈액 백혈구의 50~70%를 차지하는 호중구(보라색)는 혈관을 순환하다 병원체가 침투한 조직으로 이동해 이들을 잡아먹거나 파괴하는 물질을 내보낸다. 호중구가 조직에서 이동하기 위해 길을 내고 병원체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조직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호중구의 반응이 과도하거나 장기화되면 조직의 심각한 손상과 함께 때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나이 들수록 부정적인 면 두드러져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 3월 6일 호중구의 어두운 면을 다룬 심층기사를 실었다. 든든한 보디가드인 줄만 알았던 호중구가 여러 난치성 질병의 배후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상동맥질환은 혈관(동맥) 내벽에 지방 침착물(플라크)이 쌓여 혈관이 좁아지면서 심장 근육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일어나는 심근경색 같은 질환을 일컫는다. 그런데 실제로 플라크가 두꺼워져 혈관이 좁아지면 다른 혈관이 생성돼 피가 우회를 하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이 생기는 일은 드물다. 대신 플라크 조각이 떨어져 나와 혈관을 따라 흐르다 구멍을 막을 때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호중구가 플라크를 공격해 조각을 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흡연이나 미세먼지가 주요 원인이라고 알고 있는 만성폐쇄성폐질환도 ‘길 잃은’ 호중구가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혈관을 돌다가 병원체가 감염된 부위에서 보내는 신호를 감지해 달려가는 호중구가 오작동을 일으켜 폐조직으로 침투해 항미생물 물질과 염증유발 물질을 뿌리면서 염증이 만성화돼 폐가 망가지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중증 천식도 절반은 호중구가 증상을 악화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호중구가 분비하는 효소인 ‘호중구 엘라스타아제’가 말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호중구 엘라스타아제는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할 뿐 아니라 조직을 이루는 세포 사이에 존재하며 구조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세포외 기질’도 해체한다. 밀림을 헤쳐나갈 때 낫을 휘둘러 길을 내듯이 감염 부위로 이동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다. 그런데 호중구가 병원체의 존재와 무관하게 계속 머물며 효소를 분비하니 폐나 기관지 조직이 성할 날이 없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김효수 교수팀은 사망률이 30%에 이르는 패혈증도 호중구의 헛발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균이 내보내는 독소가 호중구를 교란시켜 호중구가 세균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사이토카인을 대량 분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균은 소탕되지 않고 생체 조직 곳곳에서 염증반응만 과도하게 일어나(‘사이토카인 폭풍’이라고 부른다)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호중구가 오작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진다. 침입한 병원체를 쫓아가 무찌르는 본래의 역할은 제대로 못 하면서 엉뚱한 곳에서 염증반응을 촉발하고 지속하는 짓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몸에 유해한 호중구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호중구 표면에 있는 CXCR2 단백질은 손상된 조직에서 나오는 신호물질을 감지하는 수용체로, 이를 방해하는 약물에 대한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 약물로 CXCR2를 막으면 호중구가 염증 부위로 이동하지 못해 염증이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호중구는 수명이 5~6일에 불과해 골수에서 매일 수천억 개가 만들어져 혈관으로 공급된다.
▲ 호중구가 분비한 소낭(노란색) 안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들어있어 인체 결합조직에 있는 콜라겐 섬유(청록색)를 파괴할 수 있다. 호중구의 활동 역시 ‘과유불급’의 한 예다. / Tomasz Szul & Derek W. Russell 제공
코로나19 중증 환자, 호중구 수치 높아
학술지 ‘네이처 리뷰 면역학’ 4월 6일자 온라인판에는 중국 난카이대 차오슈에타오 교수가 기고한 ‘코로나19의 면역병리학과 치료’라는 제목의 논평이 실렸다. 차오 교수는 “코로나19 환자의 15% 내외가 중증 폐렴으로 진행하고 5%가 급성호흡곤란증후군, 패혈성 쇼크,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이어진다”며 이때 일어나는 면역계의 상황을 덧붙였다.
이에 따르면 중증 환자 대다수는 림프구감소증을 보인다. 백혈구는 기원에 따라 크게 골수계와 림프계로 나뉘는데, 림프계의 주요 구성원인 T세포, B세포, 자연살해세포 모두 수가 크게 감소했다. 아울러 골수계인 단핵구와 호산구, 호염구의 수도 줄었다. 그런데 유독 늘어난 세포가 있으니 바로 호중구다. 차오 교수는 ‘호중구 대 림프구의 비율(NLR)’이 코로나19 중증도와 예후를 알려줄 유용한 지표라고 주장하는 중국 우한대 인민병원 연구자들의 논문을 인용했다.
지난 3월 12일 의학 분야 학술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medRxiv)에 올라온 논문에 따르면 코로나19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병의 중증도와 예후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수치가 NLR이고 다음이 면역글로불린G(lgG) 수치다. 이번 주제인 호중구에 맞춰 NLR만 변수로 해 필자가 데이터를 재가공해 소개한다.
입원환자 148명을 NLR 값 3.04(호중구 수가 림프구 수의 3.04배라는 뜻이다)를 기준으로 나눈 결과 고NRL 그룹이 80명(평균 6.0), 저NLR 그룹이 68명(평균 1.8)이었다. 중증 환자의 비율은 고NRL 그룹이 50명으로 63%인 반면 저NLR 그룹은 17명으로 25%에 머물렀다. 고NLR 그룹을 중증과 비중증(nonsevere)으로 나눠 NLR 수치를 보면, 중증 그룹이 7.1로 비중증 그룹 4.1의 두 배 가까이 됐다. NLR 수치가 높을수록 증세가 심각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평균 나이를 보면 고NLR 그룹이 66세로 저NLR 그룹의 55세보다 11년이나 더 많았다. 고NLR 그룹에서도 중증이 68세로 비중증의 64세보다 4년 더 많았다. 고령자일수록 NLR 수치가 높고 따라서 증상이 심각한 비율도 올라갔다는 말이다.
논문의 데이터 수집이 끝난 3월 12일 현재 입원환자 가운데 20명이 퇴원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고NLR 그룹이 19명이고 저NLR 그룹은 1명에 불과했다. 사망자 5명은 모두 고NLR 그룹에서 나왔다.
항바이러스제만으로는 부족
지난주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는 항바이러스제 후보물질인 렘데시비르의 효과가 탁월하다는 임상 결과를 보고한 논문이 나오면서 제조사인 길리어드의 주가뿐 아니라 미국 증시까지 상승세를 보여 화제가 됐다. 별문제가 없어 조만간 치료제 승인이 나면 코로나19 사태도 한숨 돌리는 것 아닐까.
그러나 차오 교수는 논평에서 항바이러스제만으로는 부족하고 효과적인 항염증제를 함께 써야 중증 환자와 사망자 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항염증제 쪽은 아직 렘데시비르만큼 뚜렷한 효과를 내는 후보물질이 없는 상태다. 차오 교수는 논평 말미에 각종 약재로 만든 중의학 조제약물인 ‘연화청온’이 항바이러스 및 항염증 효과가 있다는 최근 연구결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이언스’ 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면역학자들에게 호중구는 ‘금단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 몸이 병원체의 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호중구가 많은 심각한 질환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전체적인 면역력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호중구의 이상 행동을 억제하는 약물을 개발하는 연구가 시작됐고 현재 10여 건의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과학자들이 ‘호중구는 우리의 충실한 보디가드’라는 고정관념에서 좀 더 일찍 벗어나 이들의 일탈을 통제하는 약물을 만들어놨다면 코로나19로 인한 희생이 지금보다는 훨씬 적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