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Date 2018. 8. 12
Text Eph 2,14-18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았습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만발하였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늘 불화하여 웃음꽃은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웃음꽃이 만발한 가정을 찾아가서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웃집 시아버지가 말하기를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의아해 하는 젊은 부부에게 이웃집 며느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서두르다가 물을 엎질러서 출근하려던 남편의 옷을 적시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여보, 어떡해 미안해’라고 했는데, 남편은 ‘아침부터 밥하느라고 고생한 당신인데 일만 더 만들어 정말 미안해.’라고 제게 말했지요. 곁에 계시던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조금만 거들었어도 며늘아이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을 텐데 다 내 탓이다’ 그러셨지요. 이렇게 우리는 각자가 다 모자라고 실수만 하는 바보인 걸 알아서 싸울 수 없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이 잠들 무렵에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서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이릅니다. “얘야. 기도했다니 잘 했다. 하지만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그들과 같이 자는 것이 훨씬 더 잘하는 것이란다.” 랍비의 가정은 오래오래 화목과 사랑의 공동체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얘기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소년들이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며 몰두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집중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만 화가 나서 붓을 집어던지며 소년을 심하게 꾸짖으며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애를 써도 영감에 붙들리지 못했습니다. 다빈치는 밖에 쫓겨나 울고 있는 소년에게 가서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지나쳤다.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어 내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를 용서해 다오. 나와 함께 화실로 들어가자꾸나.” 그런 후에야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계속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화평할 수 있다면 똑똑한 것보다 차라리 바보가 되는 것이 낫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불화를 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비뚤어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영감은 마음에 가득한 미움과 원망을 쏟아내고 화평을 가득하게 채울 때 자연스럽게 공급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화평은 그럴 정도로 가치가 아주 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바로 ‘화평’ 혹은 ‘평화’의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쓴 사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우리의 화평”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화평이 얼마나 귀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얻게 할 정도입니다.
마5,23-24에서 예수님께서는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롬12,18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잠17,1은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지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6,7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한결같이 화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화평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의 대표적인 특징이 화평이지요. 부흥되는 교회의 대표적 특징도 ‘화평’입니다. 우리나라가 화평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예배하는 여러분의 심령에도 화평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이 ‘화평’이라는 선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님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화평은 주님이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고(14절) 자기 안에서 둘을 한 새사람으로 만들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15절) 16절에서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고도 하였습니다.
모든 성공은 노력 없이 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반드시 인내, 참고 견디는 것을 동반합니다. 어쩌면 모든 성공은 성공에의 확신과 시간과 싸움을 벌이는 인내에 의해 결정된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얻으려 하는 것이 옳은 것, 바른 것, 좋은 것이라면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결과보다도 얻기 위해 참고 견디는 노력한 과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훌륭한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던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중에 냇가에서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 “"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갈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노파의 “끊임없이 쉬지 않고”라는 말이 소년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길로 다시 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힘쓰면서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노파가 말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란 말을 떠올리며 정진한 결과 큰 성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소년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선(詩仙)이라 일컬어지는 당나라의 시인 이백(白:자는 태백(太白), 701∼762)입니다.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마부작침’이어야 합니다. 평화통일의 길로 가는 과정이나 통일 이후에 생길 여러 가지 난제들에 대하여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에 대하여 모든 국민들이 열렬히 지지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만 맡겨놓고 잘 하나 못 하나 평가만 할 일이 아니라 힘을 다해 함께 수고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희생해야 할 일이 있다면 희생할 것을 각오하고 불편한 것이 있다면 기꺼이 그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남북평화통일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18,19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것이 화목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얻으려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여러분, 남북평화통일 꼭 이루십시다.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겠다는 각오를 하십시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 재산을 들여 광복운동,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은 제2의 독립운동과 같은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소임을 알고 충성하십시다.
3. 한 가지 말씀이 더 이어집니다. 17절과 18절에 나와 있는 “전하고” “전하셨으니”라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여러분이여. 우리들도 이 화평의 메신저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사도께서는 다른 성경 고후5,18-1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평의 메신저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본받아 또한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어디에 보니까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일 뿐이라고 하였더라고요. 맞습니다. 티끌은 백날 모아봐야 티끌더미는 될지 몰라도 태산은 안 됩니다. 하지만 태산 밑에서 흘러내리는 태산의 조각들은 모으고 모으면 태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동네 야산에서 티끌을 모은다면 기껏해야 동네 야산이 되겠지만 태산을 찾아 태산의 티끌을 모은다면 태산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너도나도 평화일꾼이 되고 평화메신저가 되어 나라에는 남북평화통일이라는 태산을 이루고 가정에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태산을 이루며, 교회에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서 부흥이라는 태산을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